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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15화

#5 종말은 새로운 세상을 말하지 않는다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모자

by 연희관 공일오비

“너도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지? 빨리 결혼하고 애 낳아서 부모님께 효도해라.”


2022년 2월 1일 오전 8시경, 구정 차례상을 치우던 나는 친척 어르신께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야 말았다. 결혼이라니? 아이라니! 이제 막 24살이 된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압박이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은 없다며 소심한 반항을 해 보았으나, 자칭 애국자인 친척 어르신께서 아이를 낳아 나라에 이바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시는 바람에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는 주방으로 피신했다.


결혼과 출산은 인생의 중대사라는 이름 아래 가정에서는 효도의 탈을 쓰고 은근슬쩍 강요되고, 국가 차원에서는 나라의 존망을 운운하며 대놓고 국민들을 압박하는 데에 이용된다. 뉴스에서는 연일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최저출생률을 기록했다느니, 전세계적으로 0명대 출생률은 극히 드물다느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주입하는 중이다.1) 이러다간 국가가 소멸한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그들의 말은,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출생률 하락세가 가속화된다면 한반도가 쌓아온 5천만 년의 역사와, 전통과, 그에 필적하는 무언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런 말.


정부와 각 지자체는 기혼인구와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서 신혼부부에게 온갖 혜택을 몰아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신혼부부 전용 전세자금 대출, 주택구입자금 대출, 임차보증금 지원, 신혼 희망타운 입주 등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면서 나와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집을 가지려면 위장결혼밖에 답이 없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정책을 만드는 높으신 분들의 머릿속에는 ‘젊은이들에게 집만 쥐여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알아서 잘 낳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만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단순한 진단이라니! 결혼이 당연한 사회도, 이성애만 인정하는 결혼제도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라는 사회적 압박도,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비난도, 유독 ‘엄마’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문화도 모조리 거부하는 우리에게 이런 일차원적인 진단이 통할 리 없다. 실제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수행한 한국의 출생률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한국이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사회복지서비스, 양육지원, 사회규범을 지니지 않는 한 출산율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하기도 했다.2)


처음 문제의식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구는 걸까? 1960-70년대에는 제발 좀 그만 낳으라고, 더 낳으면 망한다고 성화였었는데. 과거에는 너무 많은 인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었지만, 이제는 생산가능인구를 늘려야 경제성장이 가능하니까? 그러나 아이를 낳으라는 이유가 미래의 일꾼을 만들기 위해서일 뿐이라면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다문화가정을 꺼리는 태도를 설명하기 어렵다.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는 당장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데도. 뭐,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순혈주의니 성장주의니 하는 겉멋 가득한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난 사실은 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저 지금까지의 관습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영원히 자기들이 살아왔던 대로 세상을 멈춰 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명절마다 손주들에게 좋은 (이성/고학력/고연봉)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안겨달라고 부탁하는 그 광경에서.


그러나 세상은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고학력 여성들은 더 이상 임신과 출산을 본인들의 의무로 여기지 않고, 국가가 계획한 거대한 인구기획의 장기 말이 되기를 거부한다. 심사숙고 끝에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국가에 육아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를 요구하고, 미혼모∙부들은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우며 사랑과 책임감으로 아이를 기르고 있다. ‘출생률이 더 낮아지면 한국은 끝장이다’라는 말은, 출생률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성평등 정책엔 관심없는 게으름뱅이의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이다. 이성애 결혼과 출산 외에 다른 길은 상상해본 적도 없으니 지금까지 사회를 유지해왔던 시스템 그대로 살아가자는 억지주장을 펼치는 그들에게 저출생은 당연히 종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종말을 두려워하면서 다음 세상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말이다. 그러니 변화하는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맞을 준비를 하자! 게이/레즈비언 부부가 아이를 기르고,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키우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회. 국가가 양육보조를 착실하게 해 주고, 양육이 개인(특히 여성)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회.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를 낳아도 어떠한 압박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편집위원 모자(dyj06128@yonsei.ac.kr)


1) 한겨레, “‘0.84명’ 출산율 세계최저 한국, 또 역대최저”, 2021.02.24.

2) PIIE, “The Pandemic’s Long Reach: South Korea’s Fiscal and Fertility Outlook”, Ju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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