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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16화

#6 종말은 다음을 말하지 않는다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퓨

by 연희관 공일오비

종말을 쓰고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의 진짜 관심사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지는 좀 됐다. 왜 하필 종말이죠? 극한의 배경에서 인간 본성이 극대화되는 모습을 탐구하려고요 멸망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고 싶었어요 폐허 한가운데 선 연인들이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어쩌고저쩌고. 어차피 나올 만한 레퍼토리는 몇 개 없으니 전부 대신 대답해줄 수 있다. “우리가 종말의 전후를 그려온 것은 누구보다 간절히 그 세계가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프롤로그의 문장은 내가 적은 것이지만 솔직히 그거 다 뻥이다. 한때의 종말 서사들이 그랬던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책임감 있게 종말을 노래하는 드문 수작 몇 개가 그럴지는 몰라도 거기선 그냥 멋져 보이려고 쓴 거다. 그리고 내 생각에 왜 하필 종말이죠? 같은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도 바로 이것이다. 멋지고 재밌으니까요. 진정성과 간절함은 최대한 뺄 것. 모두가 종말에 열광하는 이유는 정말 그게 전부다.


물론 진정성 있어 보일수록 팔리기는 좋다. 다들 그게 멋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미지에 좌우되는 시대라고나 할까. 프레드릭 제임슨은 상황주의자들과 기 드보르의 상품화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상품 물신주의의 최종 형식은 이미지다.” 그리고 종말은 사치품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소비를 부추기는 과도한 욕망과 무한 소비의 대상이 되는 사치품은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요컨대 이미지로 먹고사는 종말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데 공모한다. 종말 영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종말 소설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차지하는 모양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나도 자본주의 미워하는 주제에 돈 쓰고 물건 사 모으고 비싼 디저트 먹고 인스타그램에 꼬박꼬박 자랑하는 거 즐기는 사람이다. 방금까지 종말을 소비하는 우리의 행태가 얼마나 우스운지 잔뜩 떠벌렸지만, 실은 나도 당연히 멋진 종말이 좋다.


공동기획 원고를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저께에는 무척이나 생생한 종말 꿈을 꿨다. 며칠 뒤면 세상이 끝난다는 확실한 소식에도 꿈속의 광경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생각보다 자기 일상을 쉽게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종말이 온다는데 언제나처럼 도로에는 버스와 택시가 다녔고 나는 가족들과 식당에서 외식을 했고 길거리에선 시끌시끌한 버스킹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인지 꿈속의 나는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만큼은 평온하고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서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집에 틀어박혔다. 같은 건물 사는 친구들과 무덤덤한 인사를 나누며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드디어 모두에게 공평한 종말이 오는 거야. 남김없이 함께 떠나는 거야. 확실한 끝. 이래 놓고 종말이 안 오면 그냥 거대한 전지구적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문제는 정작 어떤 종말이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꿈속의 나는 내심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비슷한 멋들어진 소행성 충돌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를 섞어 한 마디 덧붙였더니 꿈이 끝났다. 종말 많이 아플까?


분명 종말도 무지 비싸던 시절이 있었다. 종말 한 번 말하려면 종교를 동원하고 거대한 세계관을 구상하고 몇백 년 전의 예언가를 내세우고 고대 문명이 제작한 달력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선동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종말을 말하는 데 신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종말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치품이지만 그게 비싸든 싸든 소비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다들 밤새워 줄 서서 명품 브랜드 신상 사듯이 줄 서서 종말을 산다. 생각 없이 일회용 컵이나 빨대 쓰고 버리듯이 종말을 반나절쯤 쓰다 버린다. 한 시간씩 웨이팅해가며 핫하다는 카페 들어가듯이 종말에 들어가려고 한참을 기다린다. 냉장고에 넣어둔 레토르트 식품 데워 먹듯이 종말도 필요할 때 가져다 그냥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다. 세상에 종말 아닌 게 없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불현듯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이 모든 게 정말로 종말의 징후가 아닐까? 과잉 종말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 진짜 종말의 징조 아닐까? 종말이 쌓이고 쌓여서 스스로 종말을 가려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끔찍하다는 말 빼곤 할 말이 없다. 하나도 안 멋져. 그토록 고대하던 종말이 고작 지구가 거대 쇼핑몰이 되어버리는 거라니.


요란한 종말을 묘사하고 썩어버린 현실을 향해 엄청난 일침을 가한 듯 의기양양하게 구는 어떤 종말 서사들이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멋진 미래의 종말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몰두하느라 ‘썩어버린 현실’에는 요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이해는 간다. 썩어버린 멋없는 현실에 종말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주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지금을 종말로 호명하는 사람들도 비슷하긴 마찬가지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너도나도 세상이 망했다고 말한다. 혹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잘 안다고 믿어서 쳐다볼 생각도 없이 세상이 망할 거라고들 한다. 근데 종말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고 나면 이 모든 게 종말이라고 말하기가 싫어진다. 나는 진짜 이런 안일하고 못생긴 세상의 종말을 종말로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멋지게 종말을 말하고 종말을 쓰는 사람은 번쩍번쩍한 미래의 종말이 아니라 신중한 종말의 미래를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다. 궁색맞기 이를 데 없는 현재에서 벗어날 방법과 그렇게 꾸려낼 더 좋은 다음을 찾는 사람이다. 종말로부터 현실의 오명을 벗겨내는 사람이다.


오후 내내 골머리를 썩이며 원고의 끝에 가까워진 지금, 나는 온종일 쉼 없이 나와 내 랩탑을 괴롭힌 프로모션 메일과 문자와 알림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있다. 모두가 말하는 종말이 온 이후에도 조악한 스팸과 정크는 쌓이고 쌓여 하늘 끝까지 닿겠지. 내가 기다리는 건 다음이 없는 종말이다. 납작한 현실의 파편에 붙인 짜증나는 명칭 말고, 끝과 함께 끝나는 진짜 끝. 꿈처럼 말이다. 꿈의 입장에서 종말은 꿈이 끝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꿈에서 깨어날 때 그의 꿈속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저께 내가 꿈속에서 기대하고 또 두려워했던 종말은 내가 일어나는 순간 일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입장에서 완전한 종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에서 깨어나기, 이어지는 다음도 허황된 미래도 없이 완벽한 마지막을 환영하는 나. 그런 종말은 많이 아플까? 아무리 말해도 좀처럼 현실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편집위원 퓨(rachopin329@naver.com)




참고자료

렘 콜하스·프레드릭 제임슨, 『정크스페이스/미래 도시』,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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