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7호 16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어느 등대지기의 기록

[부서지다] 편집위원 오월

새카만 바다의 밤이 깊어갔다. 고요한 까만 바다 끝자락,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섬 하나에 커다란 등대가 우뚝 서 있었다.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섬의 등대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한 등대지기만이 고른 숨소리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밤새도록 볼 풍경이라곤 광활한 바다밖에 없던 등대지기는 어떤 밤, 바다를 좀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다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등대지기는 매일 질리도록 바다를 보고 사는 직업이었지만 바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고작 바다의 표면만을 볼 수 있던 탓이었다. 바다를 아무리 보아도 해수면의 색을 통해서 깊이를 가늠할 수만 있을 뿐, 등대지기는 바다에 대해 그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었다. 바다가 새까만 해수면 아래에서 수많은 것들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대지기는 새까만 해수면이 말해주는 몇 가지 정보들부터 기록해보면서 바다에 관해 공부해보기로 했다. 매일매일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등대지기는 자신이 써놓은 바다에 대한 기록을 보다가 이것이 사람에 대한 기록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등대지기는 자신이 써놓은 문장들 속 ‘바다’를 ‘사람’으로 바꾸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바다는 사람은 배타적이다.


나는 이미 바다의 배타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 기록 자체가 바다의 배타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바다를 보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바다 밑의 세상을 명확히 본 적이 없다. 해수면은 마치 거대한 이불 같아서 그 밑에 있는 것들을 꼭꼭 숨겨놓기만 할 뿐, 나에게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낮의 바다에 그득한 윤슬, 밤의 바다에 비치는 달빛만이 나를 놀리듯이 반짝일 뿐이다. 


일전에 동료와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수영을 퍽 잘하는데도 발이 땅에 닿지 않자 덜컥 겁이 나 숨이 가빠졌다. 내 턱 밑에서 찰랑거리는 물이 나를 와락 삼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해변 근처에서 수영했기에 위급상황이 발생했더라도 금방 해결되었을 것임이 분명했는데도 그랬다. 바다는 나에게 그만큼 배타적이었다. 아마 지금 당장 내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면 바다는 나를 온화하게 품기보다는 파도 속으로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며칠 뒤 나와 교대할 또 다른 등대지기가 오기까지 아무도 내 생사를 모른 채, 난 그냥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간은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약간의 바다만이 허용되어왔고, 그마저도 파도가 심한 날이면 허용되지 않기 일쑤다. 그래서 나의 직업은 단지 바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인간이 인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돕는 것뿐이다. 인간에게는 그 이상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바다는 자신의 배타성 덕분에 인간으로부터 바다 가족들의 비밀을 굳건히 지켜왔다. 그 덕에 인간은 아직도 바다의 극히 일부만을 안 채로 살아가고 있다. 지구 생물의 80%는 바다 살이 생물이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그중 1%에 불과하다[1]는 어느 물고기 박사의 말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바다에 대해 무지한지 알 수 있다. 바다가 아직 인간의 직접적 개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유는 배타성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등대지기는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며 사람의 배타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의 배타성도 바다의 배타성처럼 양면적일까? 사람의 배타성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아마 그의 인생에서 사람의 배타성이 가장 잘 느껴졌던 때는 학창 시절이었을 것이다. 친한 무리, 단짝 친구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했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가 홀로 도서관에 가고, 홀로 음악을 듣고 홀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던 그에게는 퍽 어려웠더랬다. 친구 사이에 으레 흐르곤 하던 애매하고도 복잡한 감정선도 수학 문제만큼이나 복잡했다. 친구 사이에 자주 그어지던 미묘한 선들을 목도하는 것도, 그 선 위에서 줄타기하는 것도, 자신이 들어갈 만한 자신만의 무리를 찾는 것도 그에겐 쉽지 않았다. 


일련의 애매하고도 분명한 선들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무리를 만들고 그 안에 소속되었을 때, 그는 일전엔 느끼지 못하던 안정감을 느꼈다. 선은 그 밖에서는 높은 담처럼 보였으나 선 안에 속한 이들에겐 따뜻하고 편안한 울타리와도 같았다. 등대지기는 학창 시절 동안 선 밖으로 밀려나 다시 차가운 담 앞에 서야 하기도 했고, 금방 또 다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안정감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한 줄타기는 피곤하기도 했지만, 무리 안에 있을 때 그가 느꼈던 편안함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는 드디어 선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외줄 타기를 끝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은근한 섭섭함을 느꼈다. 


학창 시절을 추억하던 등대지기는 금세 자신이 사회에서도 여전히 외줄 타기를 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사회란, 좀 더 확장된 범위의 ‘무리’에 속하기 위해 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사회는 배타성의 양면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었다. 확장된 범위의 무리 안에서 그는 대체로 편안하게 돌아다녔다. 그는 매일 밥 먹듯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서도 무수한 군중 사이에 안정적으로 섞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에서 벗어난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특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사회 속의 배타성을 목발 하나로 깨달을 수 있었다. 


발목이 약해 자주 다치곤 했던 그는 대학 시절 자주 목발을 들고 도시를 누벼야만 했다. 그러다 그는 곧 목발을 잘 짚고 다녀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는 자신이 절대 따를 수 없는 권유임을 깨달았다. 목발을 짚고 다닌다는 것은 기꺼이 사회가 만든 거대한 무리에 속하기를 거부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목발을 짚고서 버스를 탈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고, 목발을 짚고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크나큰 다짐이 필요했다. 친구와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를 나갈 때도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받는 약간의 시선도 그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비싼 값을 내고 택시를 탈 수는 없었던 대학생 등대지기는 결국 방에만 틀어박혀 있기로 했고, 한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잠시 무리 밖으로 나간 등대지기는 사회의 무리를 담에 비유하기보다는 성에 비유하는 게 더 나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리 안 사람과 무리 밖 사람의 삶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장애를 겪을 뿐이었기에 잠시 무리에서 벗어날 뿐이었지만, 늘 휠체어나 목발과 함께해야 하는 장애인들은 대중교통 이용객이라는 거대한 무리에서 언제나 배제되고 있었다. 


깁스를 풀고, 다시 무리에 섞여 들게 된 뒤에도 그는 계속 무리 밖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동이 어려운 사람들, 누군가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수고로운 역일 뿐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하와 지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역들. 목적지까지 도달하기 위한 가교에 불과한 역이 목적지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들. 그는 그런 순간을 목도할 때도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런 순간을 보지 못할 때도 불편함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이동할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배타성은 그에게 안정감을 줄 때도 있었고, 그 안에서 그는 많은 추억을 만든 채 살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배타성은 한없이 잔인한 속성이기도 했다. 배타의 성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성 밖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배타성은 한 인간을 보듬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인간을 내칠 수도 있다는 것을 등대지기는 느꼈다.


바다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포용할 수 있다.


밖에서 고래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린다. 나는 낮에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하곤 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이따금 고래의 울음소리를 듣는 특혜를 누리곤 한다. 고래, 나는 고래를 좋아한다. 고래를 생각하다 보면 고래가 바다의 포용성의 상징 같은 존재라고 느끼곤 한다. 고래는 바다에 살지만, 물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생물이다. 바다에 살면서도 바다 밖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특이한 생물. 그 생물을 바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바다는 고래를 품고 길러왔다. 그렇게 육지에서 온 동물 고래는 바다의 조용한 강자가 되어 지금까지도 넓은 바다를 누비고 있다. 


바다는 때때로 인간의 실수도 포용한다. 인간은 이따금 바다에 엄청난 양의 기름을 유출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데, 바다는 인간이 바다에 흘린 기름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했겠지만, 바닷속 박테리아는 알았던 것 같다. 해양 유전에서 심해로 원유가 유출된 대형 사고가 터졌는데 놀라우리만큼 빨리 정화작업이 이루어졌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인간들은 인간이 가진 온갖 기술을 이용해 기름을 없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곧 사람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겨우 제거한 원유만큼, 아니 그 이상의 원유가 심해에 서식하던 ‘기름 먹는 박테리아’에 의해 사라졌다.[2] 바다는 인간의 실수를 포용해 자기 자신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바다는 지구 건너편에서 흘러온 해류도 자신의 해류로 받아들여 거대한 하나의 해류를 형성한다. 적도에서 올라온 따뜻한 바닷물도, 북극에서 내려온 차가운 바닷물도 자신의 바닷물로 받아들여서 자신만의 해류를 만들 줄 아는 포용력이 있다. 바다의 균형이 유지되는 데에는 바다의 포용성의 역할이 크다.


두 번째 항목까지 읽은 등대지기는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니터에는 지금까지 등대지기의 노트북에서 수십 번은 더 상영되었을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한 번 더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 동아리에서 죽치고 있던 대학 시절의 습관 때문에 등대지기는 지금도 일할 때 항상 한쪽에 배경음 삼아 영화를 틀어두곤 했다. 주로 닳도록 봐서 트랙 리스트고 스토리고 전부 다 외워버린 영화가 그 대상이 되었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런 조건의 적격이었다. 등대지기는 이 영화 속 일순과 영군의 이야기를 너무도 사랑했고, 일순과 영군이 보여주는 공감과 사랑을 동경하고 아껴왔다.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믿는 탓에 밥을 먹지 않는 영군을 위해 일순은 ‘라이스 메가트론’을 선물한다. 기계도 밥을 소화하게 해주는 ‘라이스 메가트론’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기계는 아니지만, 영군이 밥을 먹게 해주는 일을 충실히 해내는 아주 괜찮은 기계였다. 일순은 영군이 왜 자기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순은 영군의 걱정-밥을 먹었다가 자신이 고장 날 수 있다는 걱정-을 이해하기보다는 공감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고, 자기 세계 안에 영군의 사이보그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사이보그 세계에 필요한 ‘라이스 메가트론’을 선물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달라도 공존할 줄 아는 것. 인간의 공존과 바다의 포용성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등대지기는 생각했다. 


등대지기는 이제 자신을 일순에 비유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일순이라면 바다는 영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애당초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 둥둥 떠 있는 배들을 지켜보고 그 안의 사람들과 빛으로 소통하는 것이 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바다보다는 바다 위 사람들을 바라봐왔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이 없었고, 바다를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의 특징을 기록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바다에 혼자 남겨진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함께 지내는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공감하고 사랑하는 영군과 일순처럼, 그와 바다도 서로를 품지는 못하더라도 함께하고 있다고 느꼈다. 


바다는 사람은 결국 공통의 세계를 공유한다. 


나는 바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바다는 육지와 달리 그 경계가 너무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디까지가 이 바다이고, 어디부터가 저 바다일까? 바다와 바다 사이는 선을 그어 명확히 정해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중해, 홍해, 동해... 바다마다 이름도 다 다르고 바다마다 특색도 있기 마련이지만, 결국 바다는 순환하는 과정에서 해수(海水)라는 공통의 세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다는 각각의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각 바다를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바다는 결국 해수라는 공통의 세계 아래에서만 개별적 바다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 바다의 본질은 모두 해수이고, 공통으로 공유하는 ‘해수’라는 세계 때문에 바다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바다의 모든 특성은 공유되는 세계에서 시작된다. 다른 온도의 해류를 받아들여서 자신만의 해류를 만드는 일도, 바다에 살아가는 생물들을 거대한 해수면이라는 이불 아래 숨기는 것도 전부 공통의 세계가 있기에 가능하다. 여기저기서 만들어진 해수라는 거대한 세계는 어떤 지역에서는 따뜻할 수도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울 수도 있지만 공통의 세계로서 바다가 바다로 존재할 수 있게 돕는다. 


등대지기는 자신이 써둔 글을 찬찬히 다시 읽으며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세계는 무엇일지 고민했다. 바다와 달리 인간이 공유하는 세계는 해수처럼 눈에 보이는 명확한 무언가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한동안 골몰해야만 했다. 배려? 사랑? 공감? 생각이 뻗다 못해 믿음소망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 구절에까지 닿았을 때 그는 이 모든 가치를 포괄할 하나의 단어를 찾고 노트에 몇 개의 문장을 추가했다.


사람들은 ‘인간다움’이라는 세계를 공유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세계는 말하자면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이다. 사람의 본질적 가치는 인간다운 것이다. 사람의 핵심 가치는 각자 생각하기에 따라 사랑일 수도 있고 배려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가치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도록 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의자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어둠 속에서 골똘히 생각하다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책상 위 모니터에서 여전히 상영되고 있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영군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일순이 ‘라이스 메가트론 이식 수술’ 연극을 선보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일순이 라이스 메가트론 이식 수술을 위해서는 피부를 절개해야 한다며 영군의 등에 펜으로 문을 그리고는 상자를 여닫는 소리를 내며 영군의 몸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척한다. 영군의 몸속 기계의 먼지를 털고 기계를 삽입하는 시늉까지 해내는 일순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던 등대지기는 인간다움을 ‘공감’으로 정의하기로 했다. 배타성의 양면성을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도 공감이 필요하고, 누군가와 공존하기 위해서도 공감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인간의 배타성과 공존을 인간다움, 그중에서도 공감이라는 세계 아래에 두고 다시 바라봤다. 


인간의 무리는 배타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무리는 공감대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그 공감대는 단순한 취향일 때도 있었고, 성격일 때도 있었고, 더 큰 무리 안에서는 타인의 권리를 외면한 채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의 경우 무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타인을 냉혹하게 내치기도 했으며 공통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무리 밖 사람에 대한 공감을 놓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목발과 휠체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을 내심 느리다고 답답해하거나, 자신과 자신의 무리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이 피곤하고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서 무리 밖으로 내몰린 사람을 땅끝까지 몰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배타성이 원활히 작동했을 경우 역설적으로, 무리 밖에 있는 사람도, 무리 안의 사람도 완전히 서로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배타성은 자신의 무리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작동되고, 때로는 이 무리 안에 속한 사람이 저 무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기도 하다. 배타성을 띤 무리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둥지를 틀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무리에 들어가고 나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리 밖의 사람들과도 옅은 선 안에서 공감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배타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다. 고로 인간답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공존하기 위해서는 배타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공감할 줄 아는 태도를 지닌 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등대지기는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등대지기는 다시 몇 줄 더 적었다. 


인간다운 것은 공감하는 것. 그리고 공감하기 때문에 나에게 매몰되지 않는 것. 울타리 안에 속한 채 살아가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며 무리 밖 타인과도 함께 살아갈 줄 아는 것.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해야만 하는 장애인에게는 이동이 하나의 큰 도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체험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무리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는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감은 배타성의 부정적인 면을 채워준다. 결국 공감이라는 큰 세계 안에서 인간은 공존과 배타를 반복하며 조화를 이루고 살아간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공감한다’는 공통의 세계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크고 작은 세계로서의 무리는 존재할 수 없다. 고로, 사람은 공통의 세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매몰되지 않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세계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유성 매직으로 지워지지 않을 굵은 선을 직직 긋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워질 수도 있게 옅은 색의 연필로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 것.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공간을 벌려놓기보다는 교집합이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것. 인간의 세계는 외따로 있기보다 얽히고설켜 하나의 세계를 만들 때 더 아름답고 인간답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등대지기는 마지막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고로 우리는 공유하는 공통의 세계를 잊지 말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의 세계를 만들고 살아갈 것. 


펜을 내려놓은 등대지기가 지금까지의 기록이 담긴 노트를 덮고 창밖을 다시금 바라봤다. 바다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세계까지 여행을 마친 등대지기를 맞이하는 건 그날따라 유난히 밝게 빛나는 달과 그 달빛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바다였다.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던 등대지기는 내일 아침엔 오랜만에 바다 수영을 해야겠다 다짐하며 밤바다를 누비는 배들의 움직임을 다시 점검했다. 이제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편집위원 오월(choisunny0702@gmail.com)



 1) 김슬기. “생물 80%가 바다살이...우리가 아는건 고작 1%”. 매일경제

 2)  이은희. “박테리아가 유출된 기름을 분해한다?”. 한겨레.


이전 15화 언어가 칼날이 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