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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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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언어가 칼날이 될 때

[굽이치다] 편집위원 느루

온라인에 흘러 다니는 글들을 읽다 보면 망령이 떠다니는 것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둥실둥실 떠다니는 망령의 흐릿한 형상과는 달리 온라인의 언어에는 어떤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각자의 뚜렷한 성향과 목적의식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 진영, 혹은 ‘적’으로 규정되는 이들을 타게팅하고 포화를 쏟아내곤 한다. 그런데, 포화를 쏟아내는 방법이 정해지기라도 한 양 이들은 매우 정형화된 패턴을 보인다. 선민의식, 꼰대, 선택적 공감, 떼법, 감성팔이,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등등 그 방법은 언뜻 매우 다양한 것처럼 느껴지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꽤 정형화된 레토릭임을 알 수 있다.


레토릭은 누구 하나에게만 주어진 칼이 아니다. 상대를 겨눴던 레토릭의 칼끝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을 겨누고 있을 때도 있다. 그렇기에 온라인의 레토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나조차도 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함정 또한 존재한다. 후술하겠지만, 나는 내가 감히 ‘레토릭’을 비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모두를 겨누고 있는 레토릭의 칼날을 되짚어보고 분석해보지 않는 한, 시간이 갈수록 극단화되며 폭주하는 온라인 공간에 돋보기를 대 볼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택적이라는 레토릭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의 용례는 언뜻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식 저변에 깔린 논리적 방어기제임을 알 수 있다. 선택적 레토릭이라는 비판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내려면, 특정 주장을 펼침에 있어 그 주장과 관련된 모든 근거와 사례를 샅샅이 긁어와 발언하여 ‘선택적 주장’의 비판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수밖에 없다. 굳이 어려운 사례를 들고 오지 말고, A와 B가 토론하는 상황을 가정하자. A가 X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a1, a2, a3라는 유리한 근거와 b1, b2, b3라는 불리한 근거를 찾아냈을 때, 토론에서 유리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a1, a2, a3라는 주장만을 펼치는 것이 타당한 판단일 것이다. 굳이 b1, b2, b3 근거까지 모조리 끌어와 자신의 주장 자체를 부실하게 만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때 토론의 상대인 B는 A에게 ‘선택적으로 논거 선택을 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례만을 긁어와서 ‘그럴듯한 것’처럼 포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다간 모든 사람의 주장과 논거가 ‘선택적’이라는 비판하에 부정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적’이라는 비판을 수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적’인 레토릭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전제해야 할 조건들이 몇 가지 있다. 이 조건들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함으로써 남을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섣부른 시도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의 가장 큰 전제조건이자 문제점은 바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상대방이 논거를 선택적으로 도입한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조차 ‘선택적’으로 논거를 도입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의 대상이 행하고 있는 ‘선택적 사고’를 비판하기 위해 그 자신조차 ‘선택적 사고’를 하고 있다면, 과연 이 논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을 지적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논지의 전개를 위해 발화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더 잘 뒷받침하는 논거를 채택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굳이 자신의 주장과 큰 상관이 없거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논거를 들 필요는 없다. 따라서 주장의 강화를 위한 논거 선택은 필연적으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55~56쪽)

따라서 우리의 모든 판단은 대상 그 자체의 것이 아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판단이다. 이미 칸트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사물에 미리 넣어 놓은 것만을 다시금 찾아내어 바라볼 뿐이다. 유한한 어떤 인간도 전지전능하고 무한한 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모든 사실 판단은 실제로는 이미 우리의 관심과 관점이 반영된 한도 내에서 선택된 사실 판단이다. 모든 사실은 특정 관점 아래 선택된 사실이다.

-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다> 중


니체는 우리의 인식론이 애초에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조화’라고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론을 ‘부조화’가 아닌 ‘조화’로운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인식은 항상 완벽하지만은 않다. 수리적 증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뇌는 컴퓨터도 아니다. 불완전한 인식론에 기반한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을 비판하는 그 자체가 ‘불완전한 시도’에 그칠 수 있는 이유이다. 논리와 사고가 우리의 인식에 기반하여 성립한다면, 인식 자체가 불완전함을 전제한 이후 우리의 논리와 사고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상정하는 것이 오히려 조화로운 사고를 가능케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기에 ‘선택적’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함으로써 남을 비판하는 것이 때로는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르치려 들지 마라’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네가 뭔데 날 가르치려 드느냐?’ 혹은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누구누구가 역겹다.’ 정도의 레토릭이 자주 관찰된다. 얼마 전 워터밤 콘서트를 비판한 배우 이엘의 트윗에 대한 논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 300톤을 사용하는 워터밤 행사를 두고 차라리 그 물을 소양강 댐에 뿌려주면 좋겠다고 말한 이엘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사람들과, 그런 내용의 트윗을 남긴 이엘이 PC 주의자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강요하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중구난방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보면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은 단지 받아들이는 이는 기분이 나쁘겠지만, 여기서 어떤 논리적 흠결이 눈에 띄는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가 나를 온라인 공간에서 가르치려 들 때’ 드는 반감이 ‘선민의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으며, 누구든지 ‘지적질’을 당했을 때 불쾌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존재한다. 첫째,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에서 발화자가 생략할 수밖에 없는 ‘발화의 맥락’이다. 가령 여러분의 친구와 여러분이 어떤 이슈를 가지고 토론할 때, 서로는 어렴풋이 왜 ‘상대방이 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상대방의 생각 혹은 성향을 짐작할 수 있고, 그에 기반해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우리는 대략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펼칠지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여러분의 친구가 당신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펼치면, 이에 대해 당신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아니면 논리적 반박을 펼칠 수 있겠다. 이는 친구의 배경과 성향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인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초한 발화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온라인에서 담론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같은 견해 혹은 성향을 가진 이들끼리 모인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의견과 일치하는 주장만 끊임없이 수용함으로써 이뤄진다. 특정 커뮤니티의 주류 담론에 반기를 드는 의견이 제시되면, 집단 린치를 가하듯이 ‘반기를 든 의견’을 억압하고 몰아냄으로써 결속을 강화한다. 이때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은 ‘자신 혹은 우리 집단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을 ‘PC 주의자’ 혹은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반기를 든 의견’을 몰아내기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론을 제기한 이의 ‘발화의 맥락과 의미’는 생략한 채, ‘우리를 가르치려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선민의식을 가진 못된 사람으로 프레이밍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류 담론은 재생산된다.


둘째, 선민의식이라는 레토릭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자 취약점은 미러링 전략에 있다. ‘내게 무언갈 강요하지 마라’, 혹은 ‘정의로움에 취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발화자를 비판하지만, 발화자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PC 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맥락을 보지 않고 일침을 가하여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에 빠져 있으며’, 동시에 ‘이런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은 틀렸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말 이 세상에는 자신이 PC 주의자임을 엄숙히 선언하여 정치적 올바름의 수호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PC 주의자에 대한 비판에는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어떻게든 인신공격의 대상으로 교묘히 포장하고자 여러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발화자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저 발화자는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PC 주의자는 누군가에게 지적질을 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는 비판’은 ‘발화자의 의도’를 함부로 재단하고 프레이밍을 시도함으로써 메신저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셋째, 어떤 발화자에 대하여 ‘선민의식을 가지고 지적질을 한다’고 비판할 때, 비판하고 있는 사람 또한 ‘지적질을 하고 있는 존재’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가? 달리 말하자면, ‘저 사람은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남에게 지적질이나 하고 앉아 있다’고 비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질’을 비판하기 위해서 ‘지적질’이라는 화법을 동원하는 것인데, 그러면 논의에서 진전을 기대하리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감성적이라는 레토릭


피터 싱어의 책은 대체로 시니컬하면서도 직관적인 서술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피터 싱어가 비거니즘에 대해 다룬 책들은 유독 더 건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설하고,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피터 싱어가 저서 ‘동물해방’에서 ‘지나치게 감정적인 서술을 해서 독자로 하여금 냉정함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속으로 ‘그래. 싱어가 글을 좀 과격하게 쓰긴 했지’ 싶었는데, 되짚어보면 ‘동물해방’에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구절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해방’을 읽다가 소름이 끼치지 않거나 슬픔 혹은 분노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서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아, 이런 경고가 있긴 하다. “경고. 일부 독자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음.”


 “드디어 상자에서 벗어날 차례가 오면, 그들의 발은 도살실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달린 쇠고랑에 끼워진다. (중략) 다른 선진국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법적으로 닭을 도살하기 전에 의식을 잃게 만들 의무가 없다. 새가 여전히 거꾸로 매달린 채로 도살 줄을 따라 움직일 때, 그들의 머리는 업계에서 ‘기절탕’이라 부르는, 전기가 흐르는 중탕냄비에 담가진다.”

- <왜 비건인가?> 중


이 구절을 읽은 후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누군가는 많고 많은 글 중에 굳이 이 글을 인용한 나에게 굉장한 원망을 보내면서 분노할 것이다. 그렇게 충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치킨을 먹을 때는 그 감정을 싹 지우고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동물해방’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비건을 선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행동의 양상이 ‘치킨을 먹는다’가 됐든, ‘닭고기 소비를 줄인다’가 됐든,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가 됐든 상관없다. 그 누구도 마음을 거쳐 나온 ‘감정’에서 기인한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사람마다 다른 ‘마음’이라는 프리즘은 같은 실제, 즉 같은 상(像)을 보고도 완전히 다른 감정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참 다양하다. ‘같이 밥약도 못해서 남들에게 피해주는 사람’이니 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동물해방에 대한 공감에 기초한 윤리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어느 구절에서도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글쓴이는 그저 현실을 가감 없이 이성적으로 표현했음에도 글에서 ‘감정의 요동침’을 느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감성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는 양립 가능하며, 감성과 이성의 경계선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적 사고가 이성적 사고의 영역을 어느 정도 침범해서 잠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감정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는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람마다 다른 감정과 이성의 경계에서, 누군가의 ‘이성적 스탠다드’를 들이대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강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한편으로, ‘감성적’임을 지적하는 행위 자체는 ‘그렇게 느끼지 말라’는 의도 내지 요구를 지칭하고 있다. 또한 ‘감성’의 안티테제로 ‘이성’을 수용하는 발화자는 ‘감성’ 그 자체를 우습게 여기고 더 나아가 비웃는다. 


“다시금 묻고 싶은 것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 불쾌하다는 것의 의미다. 우리는 내면에 자신의 불쾌함을 관찰하는 중립적 제3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감정’의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타인의 ‘감정’을 모두가 함께 비웃는 감정의 소비가 한편에서 비대화되고 있다.”

- <감정화하는 사회> 중


감정을 관찰하는 내면의 중립적 제3자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음을 상정하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서야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아이디어다. 따라서 남이 ‘감성적’임을 비판하는 사실 자체가 ‘감정’의 수준에서 이뤄지게 되고, 이 때문에 ‘감성적’이라는 레토릭에 동원되는 비판이 ‘감정적 비아냥’에 그치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 또한, ‘감성적 레토릭’의 도입이 ‘이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해서 ‘이성의 안티테제로써의 감성’을 상정하다 보니 일어나는 촌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눈높이를 맞춰보겠다는 알량한 말 따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우물 밖이 존재한다. 역지사지하겠다고,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겠다고 말한다고 달라지는 현실은 없다. 그 사람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상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감정적인 근거’를 이용해 주장을 펼치는 이에게 ‘감정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이 ‘감정적인 근거’를 끌고 왔는지, 그 사람의 세계는 무엇일지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라는 아주 유명한 짤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합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주장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성적’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것이 때로는 불합리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공감하지 않을 것’, ‘감성적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가 날리는 ‘비판과 레토릭’이라는 화살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곳으로 날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누구에게 그렇게 느끼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말인가! 이 당연한 권리, 나의 느낌이 존중되고 경청될 권리는 이제까지 존중받지 못했다. 아니, 나의 느낌과 의도와 주장은 왜곡당했다. (중략) 경청될 권리는 이제 민주주의적 인권의 기초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 목소리가 경청되지 않으며 나의 정당한 요구가 반영되지 않으며 나아가 왜곡될 경우, 시민 각자는 그것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다> 중


논리적, 이성적 완벽함을 주창하고 감성을 배격하는 논리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이유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이성적/논리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이성과 감성은 안티테제가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이성과 감성이 양립함으로써 더 조화로운 논리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감성적이란 레토릭’을 도입함으로써 ‘감정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단순한 힐난의 수준에 머물게 되고, 더 나아가 이를 ‘집단 린치’와 ‘강요’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발화자와 비판 대상 사이에 진전은 없고 비아냥만 난무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격이라는 레토릭


자격 담론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남의 무언가를 비판하려면, 발화자가 그 비판의 대상이 하지 못하고 있던 행동 혹은 발언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자격 요건' 말이다. 내가 기부를 하지 않는데 남에게 기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언뜻 보면 타당한 주장이다. 아마도 이러한 논리는 내가 하기 싫어하는 행동을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른바 ‘내로남불’과 자격 담론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일까. 다른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 내가 갖춰야 할 자격 말이다. 


대체로 우리는 ‘자격’을 갖추지 않은 채 남을 비판하는 이를 비판하곤 한다. 많은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하자’고 말하면 많은 이들은 코웃음 치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 자체는 꽤 윤리적이며 참이기도 하며 유효하기도 한 주장이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누구로부터 발화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처럼 명제의 참 거짓을 따지고 난 이후에, 그 명제가 ‘호소력’을 가지지 위해서는 명제의 발화자의 ‘자격 요건’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가난한 이를 위해 기부하자’라는 명제의 자격 요건은 ‘발화자가 이미 기부하고 있어야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자격 요건을 갖추지 않고 남들에게 기부하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콧방귀를 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 ‘자격 요건’에 대한 담론이 고도화되고 까다로워진다는 느낌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선뜻 남에게 기부하자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도 이미 기부하고 있지 않은데 남들에게 기부하라고 권함으로써 굳이 불필요한 충돌을 만들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 아닐까 싶다. ‘자격 요건’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것은 ‘사회의 파편화 정도’와 어느 정도 상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남들에게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보다는 자유로이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고, 또한 동시에 타인의 신념을 존중하고자 하는 시대적 흐름이 담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흐름을 통해 연대는 희미해지고 이른바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사라져간다. 아마 연대를 부활시킬 결속은 다시 나타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 결속을 다질 사람이 되려면 그 엄격한 ‘자격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하니까. 즉, ‘자격 요건’이 엄청나게 복잡해진 사회에서 그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니까 말이다. 누구보다도 도덕적이고, 한 점 부끄러운 것이 없으며, 집안도 깨끗하고, 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 이외에도 조건은 많을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서,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자격 요건’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기부하자’, ‘쓰레기를 적게 버리자’와 같은 거슬리는 소리를 내게 해주는 사람은 그 ‘자격 요건’들을 모두 충족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선한 잔소리를 하기 위한 자격 요건’과 ‘남들을 까 내리는 비판을 하기 위한 자격 요건’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자격 요건이 ‘내겐 매우 느슨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험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자신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음에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마구 비판하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판의 대상이 된 이들’이 자신의 과거 발언에 발목 잡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는가. ‘잔소리를 하기 위한 자격 요건’과 ‘남을 까 내리는 비판을 위한 자격 요건’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남들을 ‘선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의 기준이 그 무엇보다도 ‘선택적’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인가. 객관화된 타자로 당신과 나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과연,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언어가 칼날이 될 때


모든 이들의 언어가 부드러울 수만은 없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조, 억양, 목소리 높낮이 등에 따라서 어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레토릭’만으로 모든 사람의 언어를 퉁치고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온라인을 떠도는 말(이라고 부르고 칼날이라 쓰고 싶은 것)들에는 분명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한편, 온라인의 레토릭에 올라타서 ‘남들이 하는 비판’이니까, ‘많은 사람들의 주류 담론’인 것 같으니까 레토릭이 담고 있는 메시지들이 모두 옳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굳이 애를 써서 온라인 공론장을 지배하고 있는 레토릭의 파도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레토릭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즐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레토릭은 칼날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니까 여기에 편승해서 잃을 것은 없으니 레토릭이라는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것이다. 그 칼날 끝이 누구를 겨누고 있는지는 칼을 휘두르는 자신도 모른 채로 말이다.      





참고문헌

오쓰카 에이지 (2020). <감정화하는 사회>. 서울: 리시올. 선정우 옮김

피터 싱어 (2021). <왜 비건인가?: 비거니즘 철학 입문서>. 서울: 두루미. 전범선, 홍성환 옮김

허경 (2016).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통치자 담론에서 피통치자 담론으로>. 서울: 길밖의길

허경 (2022).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서울: 세창출판사     




편집위원 느루(hushpond@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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