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다] 편집위원 심술, 그림 이슬아
말 言들의 세계, 말들의 각축
말이 먼저일까? 세계가 먼저일까? 혹자는 이 물음을 두고 당연히 세계가 먼저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존재와 발화 사이의 위계는, 전자가 없이는 후자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견 분명하다. 그러나 말 없는 세계, 이름 없는 존재들, 말로 얼기설기 엮인 은혜와 원한 없는 세계를 상상해보라. 당신은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말에 기대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는 발화가 존재를 앞선다. 말은 눈앞에 있는 것을 감출 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을 구현할 수도 있다. 말은 세계를 자아내는 실이다.
말은 만물에 붙어 세계를 자아낸다. 말이 붙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무언가는 불릴 수 없고, 누군가에게 속할 수 없고, 어떤 원한도, 은혜도 되지 못한다. 말이 붙어 호명되는 존재만이 관계 맺을 수 있고, 원한과 은혜가 얽힌 이야기도 가질 터, 세계는 말을 덧입은 것들의 집합이다. 말은 세계를 파괴한다. 말은, 어떤 존재, 어떤 고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말은 시시때때로 자기 밖의 무언가를 배제한다. 말은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를 알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무지하면서도, 무지를 핑계 삼아 어떤 것을 배제하더라도 말로 자아낸 세계 안에서는 결코 그의 무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힘이 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흔히 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정말로 그러한가? 말은 곧 삶이요, 침묵은 곧 죽음인가? 더운 숨을 뿜어내며 살아있는 자들은 누구나 말의 세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숨을 거둔 이는, 마지막 날숨과 함께 말의 세계에서 말소되는가? 살아있음에도 말을 갖지 못한 자들이 있다. 죽어서 육신을 잃어도 여전히 말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자들보다도 큰 목소리로 힘을 발휘하는 자들도 있다.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말을 불러내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죽음은, “명령”이자 “기원”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복수비극 『햄릿』은 덴마크 국왕 아버지-햄릿의 죽음으로 막을 연다. 동생 클로어디스의 계략으로 뱀독에 당해 목숨을 잃은 뒤에도 아버지-햄릿은, 아들-햄릿의 앞에 망령으로 나타나 그의 복수를 추동한다. 아버지-햄릿의 죽음은 복수의 “시작”이고, 복수를 “명령”한다. 아버지-햄릿의 망령을 본 순간부터 아들-햄릿은 침묵할 수 없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 클로어디스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가며 햄릿은 말한다. “The rest is silence. 남은 것은 침묵뿐이다.” 이제 침묵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아버지의 죽음이 햄릿을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부정의라면, 햄릿의 복수는 이에 대한 “말하기”였음을 시사한다.
말하지 않는 삶, 이름을 남기지 않는 죽음
“미친년이 어떵 미안한 걸 알어. 네 어멍은 미친년이라. 미치지 않고서야 저는 바당 들어가기 무서워하며 딸년을 물질을 시켜 쳐 죽이고. 그래도 살 거랜 아무하고나 붙어먹고. 그저 자식이 세 끼 밥만 먹으면 사는 줄 알고, 좋은 집에 학교만 가면 되는 줄 알고. 멍충이츄륵. 바보츄륵. 자식이 쳐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개가 물어뜯을 년. 너 나 죽으면 장례도 치르지 말라. 울지도 말라. 그냥 너 누나, 아방 이신 바당에 던져불라.”[1]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하는 옥동의 말이다. 죽을 날이 머지않은 옥동은 고향 마당리로 향한다. 옥동은 아들 동석과 함께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배에 오른다. 옥동과 동석을 기다리는 것은 저수지가 생기면서 마당리가 수몰됐다는 소식뿐이다. 옥동은 말이 없다. 자신의 이름 석 자도 쓸 수 없는 옥동은, 목포에서 여동생이 암으로 죽고 마당리가 물에 잠길 동안 늘 마당리를 그리워했지만 마당리를 찾아보고, 여동생을 만나러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들 동석은 옥동의 삶이 목에 걸린 가시 같다. 배 타고 나간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고, 물질하던 누나도 바다에서 죽었을 때, 동석에게는 엄마 옥동밖에 없던 바로 그때, 옥동은 동석 친구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제 동석에게 자신을 “작은 어멍”이라 부르고, 친구의 어머니를 “어멍”이라 부르랬다. 싫다고 우는 동석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때부터 “어멍”이라는 말은 동석의 목에 박혀 시시때때로 아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옥동은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늦으면 영영 기회를 놓칠세라 동석은 묻는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왜 나한테 사과하지 않느냐고. 작품이 막을 연 이래 마지막 화에 이르기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옥동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연다. 남편도, 딸도 앗아간 바다가 무서워 더는 물질을 할 수 없었다고, 그래도 하나 남은 아들 학교 보내고 밥만 먹이면 되는 줄 알아 그렇게 살았다고 말한다. 옥동은 변명하지 않는다. 옥동은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고 나면 울지도 말고, 장례도 치르지 말라는 옥동의 말은, 평생 “말하지 않는 삶”을 지나온 옥동이 이제 “이름을 남기지 않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제는 이름조차 없어진 마당리처럼, 옥동의 삶은 저물어간다.
말 言과 법 法의 경합
말은 자아내고 파괴한다. 말은 기억을, 노래를, 이야기를 자아낸다. 입에서 귀로, 혹은 손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말은 누군가의 기억이, 누군가의 노래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 한번 기억되고, 노래로 불리고, 이야기로 들린 말은 이전보다 조금 더 중요한 것이 된다. 말은 힘이 세다. 말은 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법이 되어, 무언가를 지키는 대가로 무언가를 파괴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파괴할지가 전적으로 법 法이라는 말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법은 힘이 세다. 지키는 것은 선한 것이고, 파괴하는 것은 악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키거나 파괴한다는 행위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법이 그 행위를 승인하는지 단죄하는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나뉜다는 점에서 법은 힘이 세다.
철거된 을지OB베어, 삭제된 주소
나는 7월의 어느 금요일 을지로3가역으로 향했다. 임대차 분쟁으로 가게를 빼앗긴 을지OB베어의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을지OB베어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지도에 을지OB베어를 검색했다. 그러나 강제집행 바로 다음 날 건물주 측에서 포털 사이트 주소를 삭제하는 바람에 을지OB베어의 터전을 빼앗은 건물주의 가게, 만선호프 주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을지OB베어의 공간을 빼앗은 건물주 만선호프는, 발 빠르게 을지OB베어의 이름을 지도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다.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 공간에 덧붙은 말을 빼앗았다.
3호선을 타고 을지로3가역에 내려 4번 출구로 나왔다. 모퉁이를 돌면 바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일대다. 나보다 앞서 현장에 도착한 친구는 내게, “징그럽게”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나는 집회 현장에 사람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접어드니 친구의 징그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징그럽게” 많은 만선호프 간판과 직원들의 앞치마, 그리고 “징그럽게” 많은 손님이 만선호프를 찾아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을지OB베어에 도착한 나는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라고 적힌 손팻말을 받았다. 신승은, 정우, 이주영, 황푸하, 최고은의 포크 공연이 진행되는 사이 사이에 우리는 외쳤다.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 OB베어와 대화하라!”
을지로 노가리 골목, 말, 기억, 이야기
을지OB베어가 법의 힘으로 바스러지기 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어떤 공간이었나. 이곳에선 해마다 5월이 되면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다양한 호프집들에서 축제가 벌어졌다고 한다. “겉으로 빨간 벽돌과 간판, 안에는 39년 전 낡은 나무 테이블이 그대로”인, “생맥주 한 잔에 3,500원을 내면, 연탄불 노가리 하나에 1천 원, 번데기 4천 원, 땅콩, 멸치 안주를 2천 원에 먹을 수” 있었던[2] 을지OB베어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으로서 40년 넘는 세월 동안 3대에 걸쳐 호프집을 운영했다.
“연탄불에 구워낸 노가리에 비법 고추장 양념을 찍어 맥주와 곁들여 먹는, 지금은 동네 호프집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짝꿍을 처음 고안해낸 것이 을지OB베어다. 을지OB베어를 시작으로 근처에 맥주와 노가리집이 생겨나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라 불리게 되었다. 무슨 골목이라 이름 붙이면 해묵은 원조 논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인데, 이 동네는 누가 뭐라 해도 ‘을지OB베어’가 원조라고 입을 모은다. (중략) 을지OB베어를 시작으로 숱한 후발주자들이 생기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으로 여러 가게가 어울려 자리를 잡으니 서울시에서도 ‘서울 미래유산’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지원했다. 원조 가게에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정하는 ‘백년가게’ 마크가 당당히 붙어 있다. 누가 뭐래도 ‘노가리 골목’을 일군 일등 공신이다”[3]
을지OB베어를 기억하는 이종건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국장의 글은, 을지OB베어라는 가게에 덧붙은 말과 기억을 되살린다.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에 비법 양념장을 찍어 먹는 조합을 만들어 낸 을지OB베어를 시작으로 호프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며 골목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라 불리게 되었다. 2015년 서울시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서울미래유산’[4]으로 지정했고, 2017년 서울시 중구청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야장 영업[5]을 허가했으며 2018년 중소기업벤처부는 원조집인 을지OB베어를 ‘백년가게’[6]로 지정했다.
을지OB베어를 파괴한 “서명”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가능케 한 것 무엇이었나
그러나 백년이나 미래와 같은 말이 무색하게도 을지OB베어는 지난한 임대차분쟁 과정 끝에 백년가게 지정 3년 만에 공간을 잃게 된다. 2018년 건물주가 계약해지를 통보하며 시작된 임대차 분쟁은 2020년 10월, 우리 대법원이 건물주와 임차인 을지OB베어 사이의 명도소송에서 건물주의 손을 들어주며 심화되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강제집행이라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승인했고, 2020년 11월에서 2021년 5월까지 5회에 걸친 강제집행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강제집행이 거듭되는 와중에 골목에서 점포를 하나둘 늘려가고 있던 ‘만선호프’가 건물 지분의 70%를 인수하면서 사실상 건물주가 되었다. 끝내 다섯 번째 강제 집행으로 을지OB베어의 모든 집기와 간판, 가구는 철거되었다. 우리 대법원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일구어낸 을지OB베어를 파괴하는 한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프랜차이즈 호프집으로 하나둘 채워나가고 있는 자본의 탐욕을 수호했다.
중증 장애인도 이동하고 노동하고 교육받으며 지역사회 살고 싶다
시민의 발 묶는 불법 행위, 지구 끝까지 쫓아갈 것
말은, 어떤 존재, 어떤 고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2021년 11월부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출퇴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에 대한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전장연은 여의도에서 집회를 열고 저상버스 적극 도입 등을 통해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그러나 출퇴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들의 말보다, 이들의 지하철 탑승 시위로 불편을 겪는 시민의 말이 더 크게 발화되었다. 말의 세계는 지하철 탑승 시위에 발 묶인 시민들의 대변자로 가득했다. 서울지하철 교통공사는 지하철 출퇴근 시위를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혜화역으로 진입하는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폐쇄하기도 했다. 전장연은 대선 토론회에 앞서 장애인 이동권과 예산에 관련한 대선 후보들의 답변을 기다린다며 지난 2월 출근길 시위를 잠시 중단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에게 이동의 권리는 노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와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6월 20일 김광호 신임 서울경찰청장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두고 “불법행위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라고 말했다. 김 청장의 이 같은 말은 장애인의 권리가, 우리가 시시때때로 호명하는 “법”에는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장애인의 삶은 법이라는 “말” 바깥에 있는 것이다. 이 시위가 있기 전까지 비장애 시민들이, 언제나 그들의 편이었던 “법”이, 덜 중요한 것 혹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제했던 장애인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바로잡겠다는 사람이 없다. 전장연 시위가 시민에게 주는 불편에는, 법질서를 수호하는 경찰이 “지구 끝까지 찾아가겠다”라는 엄포를 놓았다. 법에 기대어 이들을 단죄하겠다는 말만이 넘쳐나는 것이다. 말 중에 무지하면서도 힘 세기로는 법이 으뜸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 법 앞으로 안내하다
말은 이다지도 긴밀하게 삶과 죽음에 얽힌 것이다. 그중에 법은 힘세고 무지하기로 으뜸이다. 발화의 순간부터 자신이 품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는 말의 속성을 말 중의 말인 법 또한 그대로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요, 법은 강제력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폭력이다.
법 앞에 서는 순간, 단절의 전략[7]
“한편으로 정초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좀더 쉬워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미리 현존하는 어떤 법 체계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야만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이러한 반전이 이 반성의 요점 전체다—동일한 정초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좀더 어려우며 좀더 비적법한데, 왜냐하면 선행하는 어떤 법 제도 앞으로 그것을 소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법을 정초하는 순간 그것은 현존하는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두 항 사이에는 포착 불가능한 혁명적 순간이라는 문제, 곧 어떤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연속성에도 속하지 않지만, 새로운 법의 정초가 선행하는 법에 속하는 어떤 것에 작용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문제, 그 예외적 결정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8]
법은 법으로서 정초 되는 순간부터 법 밖의 무언가에 의해, 혹은 법이 품고 있지 않은 어떤 것에 의해 비판받을 기회를 잃는다. 그것이 우리가 법 앞에 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법 앞에 서는 경험이란, 법이 비판받지 않는 폭력으로서 권위를 가지기 전, 법 정초적 맥락으로 가봄으로써 법 정초 이후의 판단, 즉 법에 기반한 판단에 구속되지 않은 채 법 자체가 몸 바쳐 수호하고 있는 이해관계에 윤리적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어 보는 것이다.
『오레스테이아』와 함께, 법 앞의 순간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탄탈로스-펠롭스-아트레우스-아가멤논으로 이어지는 탄탈로스 가문에 얽힌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탄탈로스 가문의 계보는 첩첩이 쌓인 원한의 가계이다. 왕위에 오른 아트레우스는 추방된 아우 튀에스테스를 다시 불러들여 잔혹한 잔치를 베푼다. 튀에스테스에게 제공된 음식은 다름 아닌 그의 자식들의 살점이었다. 형의 초대에 응한 튀에스테스는 이를 꿈에도 모른채 상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사실을 알게된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 가문 사람들을 저주하고 그의 열세 번째 아들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다시 추방된다. 시간이 흐르고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왕이 된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와,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 헬레네는 사랑에 빠지고, 함께 트로이로 도주한다. 이는 트로이 전쟁의 구실이 된다.
전쟁 중에 아가멤논은 강풍을 만나 발이 묶이는데, 딸을 제물로 바치면 강풍이 잦아들 것이라는 예언자의 조언에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로 한다. 그는 “기도를 드린 뒤 시종들에게, 자기 딸이 졸도하거든 그녀가 입고 있는 겉옷으로 사정없이 휘감아 새끼 양처럼 그녀를 제단에 올려놓되 가문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도록 그녀의 아름다운 입을 틀어막으라고”[9] 명령했다. 여기서 자식을 잃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원한과 아이기스토스가 짊어지고 있던 튀에스테스의 원한이 만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욕조에서 최후를 맞는다. 원한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가멤논과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때아닌,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분노하며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대한 복수의 자리로 향하게 된다. 오레스테스는 제우스의 이름으로 아폴론의 지지와 도움을 받는다.
*가계의 비극을 자아낸 관계를 사과모양으로 표시하였다. 탄탈로스 가계는 그 시작부터 첩첩이 쌓인 비극의 씨앗을 안고 있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이 가계도는 튀에스테스와 아트레우스 사이의 불화를 중심으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서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로 한정하여 그렸다.
아테나의 캐스팅보트가 수호한 가치
어머니의 ‘복수’인가 아들의 ‘정의’인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은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원한으로 복수의 여신들을 깨운다.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며 아테나이에 다다른다. 이윽고 복수의 여신들과 오레스테스는 정의의 여신 아테나가 꾸린 법정에서 11명의 배심원이 지켜보는 앞에 재판받게 된다. 혈족 살해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는 복수의 여신들의 주장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마땅한 단죄를 했을 뿐이라는 오레스테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아폴론으로부터 전달되는 제우스의 승인은 오레스테스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결국 배심원들의 투표석이 유무죄 동수를 이루는 가운데 아테나가 캐스팅 보트를 행사해 오레스테스의 무죄로 재판이 마무리 된다. 아테나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주며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마지막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내 소임이니라.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지노라.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니라.
나는 결혼하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니라.
투표가 가부 동수라도 오레스테스가 이긴 것이니라.[10]
아테나가 주재한 재판을 통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분노는 단죄해야 할 복수의 불쏘시개로 치부되고, 오레스테스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마땅한 정의의 땔감으로 인정받았다. 나아가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은 침묵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사건이 되었고, 아가멤논의 죽음은, 살인이라는 적극적 발화로써 바로잡아 마땅한 부정의가 된 것이다. 아테나의 결정과 함께 『오레스테이아』의 서사 공간은 죽음의 두 계보가 경합하는 장으로 조직된다. 복수의 여신들과 오레스테스의 갈등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시작된 재판의 결과는, 탄탈로스 가문에 첩첩이 쌓인 고통과 죽음에 따른 원한의 계보를 조직하고, 대답 대신 새로운 문제를 내놓았다. 아테나의 법치주의가 보호하고 있는 정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테나의 판결을 통해 규명된 고통의 계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테나의 판결이 있기 전 복수의 여신과 아폴론 사이에 오간 변론은 아이스킬로스 비극을 가로지르는 두 계보를 찾는 데 실마리가 된다.
그대는 어떻게 여기 이자를 막아주고 변호해 줄 것인지
잘 살펴보시오. 자신의 피와 똑같은 어머니의 피를 땅에 쏟고도
그가 아르고스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살 수 있을까요?
어떤 공공의 제단들에 그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부족의 성수(聖水)가 그를 맞아줄까요? (복수의 여신들)[11]
그에 대해서도 답변하겠소.
그대는 내 말이 얼마나 옳은지
들어보시오. 이른바 어머니는 제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새로 뿌려진 태아의 양육자에 불과하오. 수태시키는 자가
진정한 생산자이고, 어머니는 마치 주인이 손님에게 하듯
그의 씨를, 신이 막지 않는 한 지켜주는 것이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증거를 대겠소이다.
어머니 없이도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오.
여기 이 올림포스 주신(主神)의 따님이 우리의 증인이오.
그녀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양육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일찍이 어떤 여신도 저런 아이는 낳지 못했소이다. (아폴론)[12]
죽음과 죽임이 얽히고설킨 일련의 과정을 삐져나오는 질문들이 있다.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도 분명 이유가 있는데,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뱃속에서 태어난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어째서 아버지의 죽음만을 슬퍼할까? 심지어 엘렉트라는 어째서 제물로 바쳐진 언니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사악하고 뻔뻔스러운 여인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속한 고통의 계보와,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가 속한 고통의 계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 계보를 나누는 기준은 부계혈통주의이다. 나아가 아이스킬로스가 자아낸 서사의 세계에서 두 계보는 결코 대등한 의미로 경합하지 않는다. 이들 계보는 오레스테스와 복수의 여신들이 아테나의 법정에 당도하기 전부터, 부계혈통주의에 기반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보에 속하는지 여부에 따라 빚어진 위계를 가지고 작동했다. 이 위계를 만들어내고 승인하는 것은 제우스에서 아테나로 이어지는 법, 즉 권위이다.
고통의 계보와 위계를 가르는 법의 힘
애도, 복수, 망각
제우스에서 시작하여,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의 뜻에 맞게 예언한다는 아폴론 혹은 제우스의 전갈 헤르메스를 거쳐, 제우스에 따라 왕으로 낙점된 아트레우스와 그의 두 아들 아가멤논/메넬라오스, 그리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로 이어지는 계보가 가장 상위의 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엘렉트라는 아가멤논의 무덤에 제주 祭酒를 바칠 때 잠시 등장할 뿐, 복수 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모습은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계보에 포함되지만 주변화된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에서 절대적 권위를 점하는 제우스의 인정이라는 정통성으로 결속된 이 계보를 공적 애도의 계보라고 부르고자 한다.
프리아모스의 강력한 소송 상대자,
메넬라오스 왕과 아가멤논,
두 개의 왕좌와 두 개의 왕홀(王笏)의 영광을
제우스 신에게서 함께 물려받은
아트레우스의 늠름한 두 아들, (중략)
꼭 그처럼 가정의 보호자이신 통치자 제우스께서도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을 보내 알렉산드로스를
치게 하셨으니,
여러 남편을 섬기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혼례를 위한 첫 제물로서
다나오스 백성들과 트로이아인들에게
다 같이 무릎을 먼지에 처박고 창 자루를 부러뜨리는
힘겨운 씨름을 쉴 새 없이 시키고자 함이네.[13]
이 계보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에 따른 원한은 공적인 애도의 대상이 된다. 트로이 왕의 아들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분노는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된다. 이는 극의 서사 공간에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정통성이 언급되고, 프리아모스에 대한 소송행위로서 트로이 전쟁을 의미화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 중에 제물로 희생된 이피게네이아의 죽음과 왕들의 전쟁 결정으로 인해 가족과 뼛가루로 재회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다루어지는지를 상기한다면 공적 애도의 지위를 점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 수 있다.
아가멤논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오레스테스의 복수와 엘렉트라의 분노를 추동한다. 그리고 오레스테스의 분노는 아폴론을 통해 제우스의 승인을 받는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추동하는 것은 신의 명령, 아버지에 대한 애도, 그리고 자신의 몫(재산)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오레스테스는 아가멤논의 무덤 앞에서 누나 엘렉트라를 만나 “내게 이런 모험을 하도록 명령하신 록시아스(아폴론)의 강력한 신탁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만일 아버지의 살해자들을 뒤쫓지 않는다면 이 뜨거운 가슴속에 차디찬 불행의 겨울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그분께서 내게 분명히 경고하셨어요.”[14]라며 자신이 아폴론의 신탁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결국 시비를 가리는 재판에서 제우스의 딸 아테나의 지지까지 얻으며,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는 정당한 애도 행위로 거듭난다.
지금 그대는 내게 도시로부터의 추방과 시민들의 증오와
백성들의 원성과 저주라는 판결을 내리는구려.
하지만 그대는 여기 이 사람이 트라케의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내 산고(産苦)의 소중한 결실인
그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을 때는 잠자코 있었소.
탐스런 털을 가진 수많은 양 떼 중 한 마리가 죽는 양
그는 제 자식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소.[15]
무자비한 잔치를 베푼
아트레우스의 악행을
복수하는 해묵은 악령이
여기 죽어 있는 자의 아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어린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물로서 이 성숙한 어른을 죽인 것이라오.[16]
두 번째 지위에 있는 고통의 계보는 사적 복수의 계보다. 이는 왕국의 후계자로 선택받지 못한—정통성 밖에 있는—튀에스테스의 원한과 아버지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네이아,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로 대표된다. 이들의 복수는 혈족 간의 살해에 응분의 보복을 가한다는 복수의 여신들의 원칙에 따라 지지받는다. 아가멤논을 살해한 것은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는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기른 이피게네이아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말하기”였다. 더불어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는 아트레우스—아가멤논의 아버지—가 초대한 잔치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식들의 살점을 먹어야 했던 아버지 튀에스테스의 피맺힌 원한에 대한 아이기스토스의 “말하기”였다. 그러나 이들의 “말하기”는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아테나의 지지와 인정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채, 정의를 추동하는 땔감으로서의 분노가 아니라 단죄해야 할 사적 복수를 부추기는 불쏘시개로 치부된다. 엘렉트라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무덤가에 앉아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기도예요. 하지만 우리의 적에게는 부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이 나타나, 이번에는 거꾸로 살인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아 죽게 해주소서. 이와 같이 나는 선의의 기도에 저주의 기도를 보태지만 저주의 기도는 그자들을 위한 기도예요.”[17] 엘렉트라의 기도는 선의의 기도와 저주의 기도가 마구 얽혀, 전자는 공적 애도의 계보에 속한 이들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사적 복수의 계보에 속한 이들을 향한 것임을 구분해야 하는 필요 속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두 계보에 속한 이들의 열망과 행위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의한 죽음에 대한 “말하기”라는 점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명분 또한 오레스테스의 명분에 비견될 만하다. 다시 말해, 오레스테스가 속한 계보나 이들의 계보나, 피로 맺어진 관계에 있는 누군가의 죽음/고통에 분노하여 되갚아주려 한다는 점에서 사적 복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의 캐스팅보트는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바로 여기서, 어째서 오레스테스의 복수만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스킬로스가 자아낸 『오레스테이아』의 서사 공간은 죽음과 고통에 뚜렷한 위계가 있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은 정의를 담보하지 않는다
비로소 극을 읽어 내려가며 가졌던 여러 죽음과 고통 사이의 형평성에 관한 질문들을, 죽음/고통의 계보 사이의 위계로써 정리할 수 있었다. 얽히고설킨 죽음/고통(들) 사이에서 위계를 만들고 나아가 이 죽음에 대한 말하기를 애도, 복수, 망각으로 결론짓는 것이 바로 말 중의 말로서 법이 발휘하는 폭력의 본질임을 목도했다. 아테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한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아이스킬로스 서사 공간의 지형을 확인시켜주었고, 아테나의 캐스팅보트가 수호한 것은 제우스의 권위와 부계혈통주의라는 정의였다.
다음 질문을 꺼낼 차례다. 아테나의 판결은 정의로운가? 우리는 혹자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아테나의 판결에서 ‘법적 정의의 확립’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읽어내야 하는가? 『오레스테이아』에서 법적 정의 확립이라는 성과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절차적으로 확립된 법적 정의가 ‘정의’를 담보하는지, 법적 정의가 보호하고 있는 정의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공적 애도의 계보에 속하는 죽음과 고통에만 공감하며 아이스킬로스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아테나의 캐스팅보트로 오레스테스가 승리하게 되고, 복수의 여신이 이에 대해 보복하는 대신 판결에 승복하고, 나아가 자비로운 여신들로 거듭나는 결말이 법의 절차적 정의를 경유하여 실질적 정의까지 담보하는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의 서사 전개에서 한발 빠져나와, 이 이야기 속에는 아가멤논의 죽음 외에도 수많은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가멤논이 살해되는 맥락에는 아가멤논이 살해한 자들, 아가멤논의 아버지가 형제에게 준 끔찍한 고통이 있다.
따라서 오레스테스와 복수의 여신 사이에 벌어진 법적 분쟁을, 오레스테스가 가진 정당성이 법의 승인으로 마땅한 인정을 받는 과정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들 간의 법적 분쟁은 공적 계보와 그 계보에 속하지 못한 자들의 죽음들이 공적 애도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벌이는 경합이다. 이들이 호소하는 죽음/고통 사이에 어느 쪽은 확실히 옳고 어느 쪽은 확실히 그르다고 할 만한 차이가 없다. 아테나가 선발한 배심원들 사이에서 유무죄 평결이 동수였던 것은 법정에 선 양측의 분노와 “말하기”가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방증한다. 결국, 법적으로 옳다고 승인된 자와 법적으로 잘못했다고 거부당한 자의 행위와 동기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거나 거부당한 자의 분노가 더 정의로울 수도 있는데, 법이 선택한 한 쪽만 보호받고, 다른 한쪽은 파괴되는 것이다.
양측의 말하기가 마주한 너무도 다른 운명은, 아테나의—합법적인—판결과 옳고 그름 사이에 간극을 열어젖히고, 아테나의 판결이 사적 복수의 고리를 끊고 절차적 법적 정의를 확립했다는 상찬(賞讚)을 유예한다. 기실 오레스테스의 “말하기”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말하기”에 누군가는 옳고 누군가는 그르다고 할 만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혹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말하기”에 공감하는 순간, 법이라는 힘과 그로써 보호되고 있는 정의의 내용을 따로 떼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법이 보호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법과 정의 사이의 자동 회로를 끊어내어 보자.
법이 보호하고 있는 무언가가 보호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혹은 법으로 파괴되고 있는 무언가가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법은 그것이 차단하고자 하는 폭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테나로 대표되는 법적 정의의 내용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복수의 여신이 퇴장하는 극의 결말은 언제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법의 힘을 견제할 분노의 힘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결코 환영하지 못할 결말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법적 정의로 보호되고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끊임없는 확인 없이 힘을 발휘하는 법적 정의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유예된 채 춤을 추는 칼과 다를 바 없다. 아테나의 법적 정의가, ‘정의’를 담보하지 못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면 복수의 여신들은 어디에선가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위해 표를 던지며 한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아테나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없고, 자신은 아버지 편이고,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가장을 살해했다고 말한다. 아테나의 말은 스스로 결코 외연을 확장할 수 없는 법의 성질을 잘 드러낸다. 아테나가 아는 한,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것은 제우스뿐이다. 아테나에게 여인의 죽음보다는 남자, 가장의 죽음이 더 중요하고, 죽은 자는 제우스의 인정을 받아 왕이 된 자이기 때문에 아테나는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아니라 아가멤논의 죽음에 공감하고,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정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테나의 “법적” 판단은, 복수의 여신들마저 승복했다는 점에서 법적 판단의 근거나 그 판단으로 보호되고 있는 정의가 과연 정당한지와는 별개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따라서 이 비극을 통해 법이 정초되고 법적 정의가 응보적 정의에 맞서 승리했다는 데 집중하는 독해는, 응보적 정의라는 부당한 폭력을 물리친 또 다른 폭력—권력—이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중지함으로써, 법적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의 바깥에 있는 ‘정의’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을 묵살할 수 있다.
“이로부터 법의 이해관계가 도출되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데, 또는 그것이 정확하게 대표하는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데 법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중략) 법이 게발트의 의미에서, 곧 권위로서의 폭력이라는 의미에서 폭력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다.(중략) 그러나 동어반복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폭력적—이 경우는 탈법적이라는 의미에서—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초하는 어떤 법적 폭력의 현상적 구조가 아닌가? 곧 이는 모든 법의 토대를 구조화하는 수행적 동어 반복 또는 선험적 종합이며, 이로부터 출발하여 수행문—이것 덕분에, 그리고 그 후부터 우리는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 사이에서 결정할 수 있는 수단들을 얻게된다—의 타당성을 보증하는 관습들(또는 우리가 앞서 말했던 ‘신용’)이 수행적으로 생산된다.”[18]
자크 데리다는,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화를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하기 때문에 “정당한 목적들과 정당화된 수단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이율배반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는다”[19]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스킬로스 비극 3부작의 결말을 법적 정의의 확립으로만 읽어내는 것은 수단의 정당성이 목적의 정당성 또한 보증한다는 전제를 채택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테나로 대표되는 법적 정의로써 지켜진 것이 다름 아닌 제우스의 권위로 대표되는 부계혈통주의라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아테나로 대표되는 법적 정의는 제우스 그 자체이고, 부계혈통주의는 제우스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이며, 클뤼타이메스트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축복한 가장이다. 아테나는 곧 법적 정의이고, 법적 정의는 곧 제우스이다. 법이 법을 수호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제우스의 권위가 제우스로부터 이어지는 부계혈통의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말은 동어반복적 진술이다. 아테나가 정립한 법은 애초에 제우스를 대표하는 데 그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응보적 폭력을 몰아내낸 자리에서 권위를 갖게 된 법이 인정하지 않는 폭력—사적 복수의 계보와 계보에 속하지 못한 죽음/고통에 대한 “말하기”—은 불법적 폭력이 된다. 지금까지 아이스킬로스의 서사 공간에 기대어 법 앞에 서보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법은 결코 정의를 담보할 수 없고, 법이 보호하는 것은 정의의 일부 혹은 그 일부마저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그럼 무얼 (말)하지
『오레스테이아』를 읽는 내내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오레스테스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분노가 법 안에서 싸우는 중에, 법 밖에서 그저 한마디 말로 남은, 그리하여 계보가 되지 못한 고통/죽음이다.
일리온으로부터 사람 대신 유골 든
단지만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니,
불에 타고 남은 재,
들기에는 가벼우나
애통의 눈물 참기에는 너무 무겁구나.
그리하여 가족들은 그들 각자를 찬양하며
말했다네. “이 사람은 전투에 능했고,
저 사람은 사람 잡는 싸움터에서
영광스럽게 전사했지,
남의 아내를 위해서”
이런 불평을 속삭이는 백성들
소송의 주역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형제에게
원한에 찬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네. [20]
계보에 속하지 못한 고통과 죽음에 주어지는 운명은 오로지 망각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죽음은 서사 내에서 가장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지지만, 나는 이들의 죽음에서 말 중의 말인 법의 무지를 읽어내고자 한다. 법으로 보호되는 정의 바깥의 고통과 죽음은, 법이 보호하지 않는 고통과 죽음에 관한 질문을 가능케 하고 나아가,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은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왕가의 원한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들의 원한과 증오는 왕가를 향한다. 그러나 이들의 분노는 왕의 집 담벼락조차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애통함과 원한은 잠시 코로스의 말로 살아났다가 잊힌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겸손
합법적 파괴와 불온한 수호를 다시 생각하는 용기
말에서 시작하여, 말 중의 말인 법의 심장부를 뚫고, 법 앞의 순간까지 달려가 보았다. 무지함에도 힘이 센 말의 세계에서, 더욱 무지하고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 있다. 법과 법 밖의 말을 오가며 우리는, 세계를 자아내고 파괴하며 존재를 드러내고 감추는 말의 세계를 만났다. 이제는 말의 세계 밖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할 때다. 여태껏 말의 세계를 누비고 다닌 것은, 우리가 이다지도 믿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 또 말 중의 말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겸손, 합법적 파괴와 불온한 수호를 다시 생각하는 용기일 것이다. 언제나 말 밖에 무언가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말의 세계를 삐져나오는 수많은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 말은 언제나 한 발 뒤에서 세계를 쫓아갈 수밖에 없다. 더욱더 부지런히 말 밖의 삶을 불러내어야 한다. 말 밖의 삶을 불러내고 연결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러니 함께, 말 밖의 삶을 불러내자.
[각주 1] 노희경 극본, 김규태 연출, 『우리들의 블루스』, 김혜자, 이병헌 등 출연, tvN방영, 2022.04.09. ~ 2022.06.12., 20회 중에서
[각주 2] 홍석재 기자, “공정위와 ‘마른안주’ 규제, 그리고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슬픔”, 한겨레 신문, 2020.08.16., 2022.06.24.
열람 https://www.hani.co.kr/arti/economy/marketing/957983.html
[각주 3] 이종건 지음, 곰리 그림, 『연대의 밥상: 한없이 기꺼운 참견에 대하여』, 롤러코스터, 2022; 234-236P
[각주 4] 서울미래유산: 문화유산 가운데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 전할 100년 후의 보물
[각주 5] 야장 영업: 영업장 이외의 장소에서 하는 영업
[각주 6] 백년가게: 30년 넘게 장사한 소상공인이 100년 이상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
[각주 7]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단절의 전략’이라 부르는 것을 실행하면서 가장 변론하기 어려운 사건을 맡는 자크 베르제 같은 변호사가 프랑스에서 불러일으키는 매혹을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채택하는 단절의 전략이란 기성 법질서 및 사법적 권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피변호인들을 법 앞에 출두하게 만드는 국가의 적법한 권위에 대한 근원적 저항의 전략이다.” (자크 데리다, 위의 책,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80p.)
[각주 8] 자크 데리다, 위의 책,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93p.
[각주 9]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38p 232-237행
[각주 10] 아이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181p 734-743행
[각주 11] 아이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178p 652-656행
[각주 12] 아이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178p 657-666행
[각주 13]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30p 40-66행
[각주 14] 아이스킬로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112p 269-273행
[각주 15]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83p 1412-1418행
[각주 16]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46p 1400-1504행
[각주 17]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107p 142-146행
[각주 18]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79-80p.
[각주 19] 자크 데리다, 위의 책,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78p.
[각주 20]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위의 책, 천병희 옮김, 숲, 2008; 46p 440-451행
참고자료
단행본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J. Derrida, Eric Prenowitz,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 Diacritics, Vol 25, No. 2(Summer, 1996), pp9-63,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이종건 지음, 곰리 그림, 『연대의 밥상: 한없이 기꺼운 참견에 대하여』, 롤러코스터, 2022
마사C.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적개심, 아량, 정의』, 강동혁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16
신문기사
신민정 기자, “이것이 경찰의 지상과제입니까”, 한겨레, 2022.06.23.
정희완 기자, “내몰릴 위기에 놓인 ‘백년가게’ 을지OB베어”, 경향신문, 2022.04.17.
손고운 기자, “을지로 ‘노가리 골목’ 시초 ‘을지오비베어’, 결국 강제집행 철거”, 한겨레, 2022.04.21.
이종건, “을지로 ‘노가리골목’에 오시라”, 경향신문, 2022.05,01
김민준 기자, “쇠사슬 몸에 감고…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시위 재개”, SBS 뉴스, 2022.08.01.
홍석재 기자, “공정위와 ‘마른안주’ 규제, 그리고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슬픔”, 한겨레 신문, 2020.08.16.
드라마
노희경 극본, 김규태 연출, 『우리들의 블루스』, 김혜자, 이병헌 등 출연, tvN방영, 2022.04.09. ~ 2022.06.12.
글 심술(seosi1230@naver.com)
그림 이슬아(경덕여자고등학교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