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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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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8 ㄷㅈㄱㅌ

[넘실대다] 편집위원 오월, 온 

다양한 탈것들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을 때 우리는 각자 버스와 지하철을 떠올렸다. 버스와 지하철은 사람들을 나르고 실으며 목적지로 데려가고 사람들의 일상 한 편에 자리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거쳐 가는 것들을 따로 멈추어 놓고 이야기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버스와 지하철을 통해 이동하며 우리가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이라는 멈춘 매체 안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이동하며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하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울의 새로운 교통환경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모두 지방에서 살다 올해 서울로(정확히는 인천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둘의 이야기가 출발하기 전, 독자들의 원활한 탑승을 위하여 둘의 배경을 살짝 소개한다. 


오월은 대전 사람이다. 대전은 지하철이 1호선밖에 없고, 그마저도 역이 오월의 집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오월은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대전의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긴 편인데다 버스 노선도 뱅뱅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자동차로는 15분이 걸릴 거리도 버스로는 40분씩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대전에서의 오월은 이동 시간을 넉넉히 잡아, 일찍 외출하거나 택시를 타곤 했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갔다. 그렇지만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좁은 생활 반경과 단출한 대전의 버스 노선으로 인해 이동 수단으로 크게 애먹은 적은 없었다. 지하철을 멀리하고 버스를 가까이 한 오월에게 무려 9개의 노선을 거느린 서울의 지하철도는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다. 


온은 거제 사람이다. 거제엔 시내/시외버스가 있지만 지하철은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 근처에서 학교와 독서실을 다니기 때문에 학교 셔틀버스가 아니면 시내버스마저도 탈 일이 잘 없는 데다가 가끔 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짧은 것이 2~30분 정도에 속한다. 한 달 전에 잃어버린 교통 카드를 다시 구매하지 않아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곳에서 살던 온에게 서울에서 매일 같이 교통 카드를 들고 다니는 일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놓쳐도 계속해서 달려오는 지하철 시간표 앞에서 자주 당황하고, 자주 머뭇거리고, 자주 헤매고 있다.   


둘의 이야기는 다른 듯 닮았다. 둘 다 생경한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둘의 이야기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오늘도 버스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이 글을 읽어보려는 이들에게, 우리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의 감상은 누구와 닮았는지, 당신은 어떤 경험과 감상을 했는지… 이 글을 다 읽었을 때쯤엔 이동에 대한 당신만의 답을 마음에 품을 수 있길 바라며, 자 그럼, 삑, 이야기에 탑승하셨습니다!


-오월의 이야기: [퀘스트] 지도 보고 길 찾기 [보상] ‘대중’교통


귀에 꽂은 에어팟을 뺀다. 에어팟이 나간 귀에 들어오는 수많은 소음 중 지하철 안내 방송을 찾아 귀 기울인다. 이번 역이 어디지? 안내 방송에 집중하며 모바일 지도 앱을 연다. 출발 전 미리 찾아둔 노선을 확인한다. 


이번 역은, 부평, 부평역입니다.


확인해보니 이번 역에서는 내려야 한다. 많은 인파를 헤치고 내려 다음 행선지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게이트가 무려 네 개다. 이 중 어느 게 맞지? 저 네 게이트는 각각 어떻게 다른 거지? 내가 타야 하는 열차는 언제 오는 거지? 발걸음을 멈추고 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동안 열차는 떠나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분주히 움직인다. 모두 제 갈 길을 안다, 나만 빼고.


서울,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광화문? 남산? 많은 인프라? 한강?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각자의 답변이 있기 마련일 테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소위 말하는 ‘인서울 대학’이 생각날 것이고, 꿈에 그리던 콘서트를 앞둔 팬이라면 서울의 모 공연장에서 열릴 콘서트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일전에 서울에 살다 지방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그리운 지난 인연들을 생각할 것이고, 주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병원을 떠올릴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인천에서 한 해를 보내야만 하며, 이를 위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온 나 같은 지방 사람은 서울 하면 지하철이 먼저 생각난다. 대전에 내려갔다가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 인천에서 서울에 오갈 때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의 인생에 불쑥 들어온 지하철은 급속도로 일상 속 지분을 넓혔고, 넓어진 지분에 맞추어 나는 이제 지하철을 퍽 잘 이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했으니… 그 험난한 과정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나의 고향 대전의 지하철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 대전은 지하철 노선이 하나밖에 없다. 그마저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내가 지하철을 이용할 일은 적었다. 내 친구 중엔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친구도 더러 있었지만, 그 친구들도 대전의 중심지나 번화가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에서 내린 뒤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즉 대전인에게 지하철은 부수적인 교통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간 지하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접해왔다. 


그런 내게 서울의 지하철은 친절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불친절했다. 먼저 친절하다고 느낀 부분은 이러했다. 어딜 가든 지하철역이 근방에 있었다. 또 지하철 노선이 엄청나게 많아서 대부분의 지역을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하철은 철도를 이용했기 때문에 대체로 교통 상황과 관계없이 정확하게 도착하고 정확하게 출발했고, 그래서 나는 이변이 있지 않은 이상 모바일 지도 앱의 예상 시간에 맞추어 안정적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전의 버스는 빙빙 도느라 대중교통이 자가용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경우가 잦았다. 반면 서울에서는 도로가 자주 막히기 때문에 택시보다 지하철이 빠른 기현상(?)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지하철은 어려운 과제였다. 모바일 지도를 계속 켜두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지하에서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게다가 지도 앱 속 정보들을 온전하게 독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마저도 내게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일을 해내려 분투하던 시간 속에는 3호선으로 갈아타려다 이미 열차가 끊겨 어둑해진 역사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던 날도 있었고,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려고 택시를 탔다가 돈만 날리고 오히려 지각하고 만 날도 있었고, 보기 드물게 빈자리가 많은 열차를 신나서 탔다가 다음 역에서 종점이라는 말을 듣고 내려야 했던 날도 있었다. 


‘몇 호선을 타서 어느 방향으로 가되 종점이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내리고 나서 다른 호선으로 갈아탄 뒤 방향과 종점을 또 확인하는’ 간단하고도 복잡한 과정을 지도에서 독해해내고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전에서부터 꾸준히 모바일 지도 앱을 사용해 지도 앱이 익숙했는데도 그랬다. 익숙한 UI 속 낯선 정보 위에서 분투하던 나는 깨달았다. ‘지하철의 친절함’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유저에게 주어지는 기본템이 아니라는 것을. ‘지하철의 친절함’은 지하철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그러니까 일정 기간 주기적으로 ‘지도 보고 길 찾기’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유저에게만 부여되는 아이템이었다. 이 슬프고도 잔인한 사실을 몇 번의 어질어질한 성공과 몇 번의 예상치 못한 실패를 경험한 뒤 깨달은 나는 약간의 허탈함과 성취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지하철의 친절함’ 아이템에 가까워지는 하루하루가 뿌듯하면서도 ‘친절함’을 얻으려 용을 쓰는 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버스를 탈 때도 이런 어지럽고 복잡한 과정은 계속되었다. 대전과 서울의 버스는 같은 듯 달랐다. 이번엔 ‘버스의 친절함’ 아이템을 위해 퀘스트를 수행해야 했다. 이번 퀘스트도 절대 쉽지 않아서 나는 또 생경한 경험을 여러 번 해야만 했다. 같은 이름의 버스 정류장이 너덧씩 있는 곳에서 정류장의 일련번호와 지도 앱 속 일련번호를 대조해가며 정류장을 배회하기도 했고, 경기 버스도 시내버스랑 요금이 똑같은 줄 알고 신나게 타고 다녔다가 월말에 처음 보는 금액의 교통비를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 환승센터처럼 거대한 정류장 안에서는 내가 탈 버스의 정차 위치를 몰라 암묵적인 승차 원칙을 혼자 분석하기도 했다. 


이쯤 되었을 때 나는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이해하는 대신 모바일 지도를 맹신하고 다니기를 택한다. 나의 기억력과 분석력을 불신하고 모든 이동마다 모바일 지도 앱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행선지를 입력하고 최적의 루트를 선택하여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나의 생활필수품이었던 핸드폰은 단순한 필수품을 넘어 나의 유일한 길잡이이자 도우미가 되어주었다. 바꿔 말하면, 모바일 지도가 없이 서울을 돌아다니는 것은 지방에서 갓 상경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사실 나는 모바일 지도를 비교적 잘 읽는 편인데다 길치도 아닌지라 어느 정도 적응한 뒤에는 적어도 길을 잃어버리거나 환승을 잘못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여전히 버스 정류장의 일련번호를 대조해야 했고, 열차 환승을 위해 계단을 내려가기 전 노선도를 다시 확인하며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확인해야 했으며, 내가 지금 타는 열차의 종점지가 나의 행선지보다 앞에 있진 않은지를 체크해야 했다. 그렇지만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한 학기가 지났을 때쯤 나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이 모든 정보를 체크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해서 때때로 나는 대전보다 더 교통이 단순한 지역에서 온 동기들을 위해 안내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동기와 ‘모바일 지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고 안도할 때 한편으로는 지도가 없는 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모바일 지도 앱을 사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과연 이 어려운 퀘스트를 전부 소화하며 지내는 걸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몇 주 뒤였다. 그날도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며 모바일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던 나의 곁에 다가온 사람은 곤란한 표정의 4~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셨다. 그분은 나에게 버스 노선도를 좀 봐달라고 하며 이 버스가 가구 단지에 가는 게 맞느냐고 물어보셨다. 이 버스를 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알고 계셨는데 노선도를 보니 그게 아니셨던 것이다. 여성분께서 노선도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계실 때 나는 서둘러 모바일 지도를 켜 그분의 행선지를 입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예 다른 노선이 나왔다. 해당 버스가 완전한 왕복 노선을 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빠지는 노선을 타는 버스여서 생긴 문제인 듯했다. 나는 여성분께 검색한 결과를 알려드렸다. 그런데 문장이 갈수록 중언부언 길어졌다. 다른 정류장은 이쪽이고 버스는 이 번호고 이 버스를 타고 여기서 내려 저기로 환승하셔야 해요. 그 뒤엔 여기서 내리셔서 이 방향으로… 모바일 지도에서는 단출하게 표현되었던 길이 말로 설명하니 한없이 장황해졌다. 다시 길을 잃지는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 번 강조하여 알려드린 뒤 여성분은 버스를 타러 떠나셨지만, 걱정이 남았다. 길이 너무 어려운데... 잘 가실 수 있을까? 그러다 깨달았다. 대중교통이 ‘대중’교통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비단 지방에서 막 올라와 서울 대중교통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뿐 아니라, 모바일 지도를 원활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대중교통은 너무 불친절했다.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정류장과 지하철역에서 바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지하철 노선도나 버스 노선도를 빠삭하게 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서울에서의 이동은 항상 도전과도 같을 것이었다. 대중교통의 ‘대중’은 점점 ‘(모바일 환경에 잘 적응한) 대중’으로 바뀌고 있는 듯했다. 


대중에 조건부가 붙는 시대라니. 대중교통의 친절함이 기본템이 아니라, 퀘스트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라니! 나는 ‘대중’ 교통이라는 이름과 달리 ‘도전’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대중교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앞으로 나에게 ‘ㄷㅈㄱㅌ’ 이라는 초성은 ‘대중교통’이 아니라 ‘도전교통’을 의미한다. 서울의 대중교통이 낯선 이들에게 이동은 하나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나의 투정에 공감하는 당신에게, 오늘도 목적지를 향해 하나의 도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오늘도 도전 교통!


-온의 이야기: 계속해서 다음 역으로 환승!


그 도전 교통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 나였다! 오월의 응원을 받으며 입 속으로 도전 교통을 외치는 순간, 그간의 도전들로부터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거리에서 헤매고 당황했던 시간이 사실은 도전이었다는 점이, 그리고 그 도전을 함께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 혼자 발 묶인 듯 만들었던 기억을 날려버렸다. 도전 교통, 정말 근사한 단어잖아!


나에게도 대중교통의 첫인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올해 4월, 개강한 지 두 달째, 호기롭게 선배들과 서울에서 밥 약속을 잡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내친김에 서울로 대학을 간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늦은 저녁에도 약속을 잡아, 서울에서 만났다. 만남이 좋은 나머지, 1학년 기숙사가 인천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약속이 밤늦게 끝나더라도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서 말이다. 그런데 이 겁 없는 사람은 밤늦게까지 약속 장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순전히 자의로 가득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서울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늦은 밤에 나를 아주 호되게 혼냈던 날이 있었다.


그날, 나는 이제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에 밤 11시 10분쯤 신촌의 한 약속 장소에서 나와 홍대입구역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매번 지하철로만 기숙사에 갔던 내게, 늦은 밤의 버스는 첫 도전이었음에도 열심히 모바일 지도 앱을 보며 따라가니 정류장이 나왔다. 마지막 정류장이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인 M6724 버스가 약 1n 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하, 친구들이랑 더 있고 싶어서 욕심을 부린 것 치고는 나 제법 능숙하게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잖아? 게다가 시간도 적당하게 남았잖아? 여기서 버스만 잘 타면 되겠다! 그런 자신만만한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M6724가 내가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쳤다. 응? 왜 여기 안 서지? 지금 내가 아니라 서울 버스가 실수한 거야? 생각하고 있을 때, 3분쯤 뒤 반대편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 새로운 M6724가 섰다. 시간대를 보니, 저 버스가 바로 내가 기다린 M6724였다. 이게 뭐지? 아까 여길 통과한 M버스는 뭐고, 지금 반대편에 선 저 M버스는 뭐지? 반대편의 M6724까지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 큰 도시에선 정류장 이름은 같은데 번호가 다른 경우가 많아 번호를 확인하지 않으면 반대편의 정류장과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것을. 50분 뒤 도착하는 버스를 내내 서서 기다리며 다음 버스는 반대편이 아니라 여기에 서는 거 맞겠지, 그렇겠지,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을 겨우 눌렀다. 


그런데 막상 버스가 왔을 땐 여기가 맞는지 걱정했던 건 잊은 채 버스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바빴다. 정류장 한 곳이 얼마나 긴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차한 버스를 놓칠세라 뛰어가야 간신히 버스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각자의 2차전이 시작된 정류장을 벗어나 버스에 올라탔을 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 나 드디어 기숙사 가는구나. 정말,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쫓긴 것처럼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어라? 왠지 모르게 내게 이런 삶이 나쁘지가 않았다. 이상했다. 


정말 버스와 지하철은 내게 도통 적응이 된 기분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촘촘하게 쌓여 있는 노선 시간표는 무계획으로, 느긋하게 될 대로 되어라 외치면서 살던 내게 채찍질을 했다. 더 빨리 움직여! 지금은 걸으면 안 돼! 뛰어야 이번 걸 탈 수 있지! 아니 매일 이렇게 긴박하게 뛸 거면 그냥 방에서 일찍 나오면 되잖아!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아 그러게,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하고 늘 후회했다. 그렇게 느긋하게 좁은 반경의 삶을 살던 내게 지하철은 늘 뛰고 조급하게 만드는데도, 머릿속으로 자꾸만 이동 시간을 계산하게 되어 힘이 잔뜩 빠진 채로 집에 도착하는데도 바뀐 삶이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좋아. 재밌다! 계속해서 다음 역으로 환승하고 또 이동하며 서울 곳곳을 다니고 싶다! 


그렇다고 서울의 빽빽한 노선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모르는 길을 찾아가야 할 때 집을 나서기 전부터 오늘의 고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도전 교통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바뀐 삶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시간표에 맞춰 교통 카드를 찍고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 동안, 나는 마냥 좋기만 한 순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도전 교통을 해내고 있는 당신들에게, 서울이 가끔 무서울 만큼 빠르고 막막한 기분이 들 만큼 넓은 도시지만 그래도 그 속에 서울의 기분 좋은 다양함도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왜냐면 나는 서울에 오고 싶었던 한 지방의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서울은 확실히 뭐가 많았다. 거제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수능이 끝난 후 거제에서는 내내 누워만 있던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서는 잘 돌아다니는 모습을 신기해했다. 


“지하철이 안 어렵더나? 안 헤매고 잘 돌아다니는 우리 딸이 기특하네. 역시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하나 보다. 빠릿빠릿 잘 움직이네!”


보통 서울로 대학을 가라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게다가 길도 계속 헤매지만 확실한 건 뭐가 많은 곳으로 오니 다양한 곳을 가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하철만 타면 이름만 들어봤던 서울의 동네들을 알차게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까.


여기서 나의 덕질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가 고민했지만 어쨌든 백현을 지금보다 더 열렬히 좋아하던 고등학교 시절, 그가 한남동의 유엔빌리지를 제목으로 따와 노래를 발매한 적이 있다. 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재미난 챌린지들이 유행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차를 가진 팬들이 밤에 드라이브하며 차 안에서 유엔빌리지 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노래 가사였던 ‘Navigation 독서당어린이공원으로 누르고 엑셀을 밟아’ 부분에 맞게 해당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유엔빌리지로 달리며 노래를 찾아 듣는 팬들도 생겼다. 학생과는 다른 어른들의 삶이 부러웠던 건지, 정말 유엔빌리지가 가보고 싶었던 건지 그때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방에 살던 내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에 들어있는 지명과 가까이 사는 것은 부러운 경험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 중 한 작품에서 주인공인 덕선이와 이웃들이 살던 쌍문동이 나왔을 때도 어린 마음이었지만 마냥 쌍문동이 가보고 싶었다. 몇 년 전,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갔을 때도 사람들이 이 동네가 한국의 명동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할 때면 ‘명동은 어떻게 생겼는데?’ ‘요즘은 명동이 아니라 다른 동네가 유명하다고?’ ‘그럼 다른 동네는 어떤데?’라는 질문들이 생겼다. 그래서 중, 고등학생 때 대학을 인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함께 상상하게 되었다. 그 상상과 비슷한 경험을 지금에 와서 지하철을 통해 할 수 있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빽빽한 건물과 빠르게 이동하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서울에서 내가 한때 좋아했던 템포와 기억이 들어있는 꿈들을 이루는 것이 재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하철로 마냥 이동하는 삶이 괜찮았던 건 이렇게 힘들게 지하철을 타고 만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거제에서 함께 서울로 올라 온 좋아하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좋아하는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갈 때, 새로 사귄 동기와 서울에 함께 놀러 갈 장소를 정했을 때, 가고 싶은 장소를 점 찍어 혼자 떠나볼 때. 그런 날은 발길이 가볍다. 기다리는 사람과 장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우여곡절과 복잡하고 긴 이동시간이 도착하고 나면 선명하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좋은 상대가 있어서 이 교통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껴버렸다.  


처음에는 경기도민이 인생의 3분의 1을 지하철에서 보낸다는 말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다. 정말일까 싶었는데, 송도에서 서울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하더라도 기본으로 편도 1시간 40분이 지도 앱에 찍힌다는 것을 체감하자 그 위대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길을 헤맨다면 이 편도의 이동 시간은 무한정으로 늘어나는데 정말 좋아하는 상대와 장소가 있다는 것은 위대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경기도민과 인천시민들은 매번 약속 상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셈이다. 좋아하고 만나고 싶은 상대와 장소가 있으니까 아직도 버거운 서울의 지하철과 버스 노선을 이겨내고 간다. 그래서 가는 길에 나 스스로 가지게 된 재미들이 많았다.


지하철에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면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낭만도 있었다. 하루는 2호선 신도림역에서 신촌역으로 향하는 길에 휴대폰 배터리가 부족했다. 학교 중앙도서관에 가서 휴대폰을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의 창 너머로 한강이 펼쳐졌다. 풍경을 가로막는 건물 없이 탁 트인 한강이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당산에서 합정까지의 구간이었다. 목적지만 생각하며 지도 앱만 쳐다봤다면 놓쳤을 아까운 풍경이었다. 한창 송도캠퍼스에서 신촌캠퍼스까지 지하철로 가는 방법이 익숙하지 않았던 학기 초에, 지금보다 더 지도 앱에만 매달렸던 그때에도 그 기분 좋은 구간을 알게 된 후로는 당산, 당산역입니다 라는 멘트가 들리면 늘 눈을 창으로 돌렸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것만 같던 서울의 대중교통에도 반복해서 타다 보면 구간 사이사이 새롭게 알게 되는 좋은 점들이 있었다. 버스를 타면 지상의 시민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지하철에선 지상으로 올라가는 때에 푸른 하늘과 한강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하철을 타면 내 하루가 어떻게 굴러갈지 가늠이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생겼다. 지하철을 타면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으니까. 거제를 벗어나 서울과 인천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지도 앱 속에 있었는데, 그 지도 앱 속에서 열심히 길을 찾아 나가는 일들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만날 상대가 기대되고, 도착할 장소가 기대되고, 가끔 만나는 풍경과, 어릴 때 상상했던 경험을 해본다는 것이 서울의 혼란한 대중교통을 이겼다. 


그냥 걸어가면 목적지가 나왔던, 교통을 모르던 거제의 뚜벅이는! 서울로 오게 되어 겪는 교통에서의 우여곡절마저도 사랑한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미래의 언젠가, 이 모든 긴 시간의 이동이 귀찮아져 가까운 근교로만 자신을 데리고 갈 나에게 말하고 싶어 글을 썼다. 잘 지내니? 나는 아직 이 교통에 때 묻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어. 그리고 1학년의 나는 이런 걸 사랑했다!


-우리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온과 오월은 매일 도전 교통을 해내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낄 때도 있었고, 설렘이 피곤함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둘은 매일 도전했고, 대체로 성공했다. 한 학기 동안의 퀘스트를 거친 오월과 온은 이제 기본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아이템도 장착하게 되었고, 그래서 가끔은 다른 도전 교통인들에게 평범한 대중교통 이용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약간의 요령이 생겼을 뿐 둘은 여전히 도전 교통 중이다. 


두 사람이 도전 교통을 통해 얻게 된 몇 가지 아이템 중에는 지도를 볼 줄 아는 독해력, 지하철과 버스의 친절함, 당산-합정 구간의 지하철 밖 풍경 등도 있지만, 더 커진 세계관도 있다. 너무 익숙해서 외워둔 몇 개의 버스 번호와 노선,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 난생처음 보는 풍경과 많은 인파를 헤치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의 세계는 조금씩 커져 어느새 제법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어쩌면, 세계가 커지는 과정에서 얻는 성장통은 우리의 또 다른 성장통을 덜 아프게 해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도 무사히 이동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익숙해지고 무뎌질 수도 있고, 그러면서 당신의 눈에 ‘도전 교통인’이 아닌 ‘대중교통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겉보기에 불과할 뿐, 우리는 계속 도전 교통인으로서의 감각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복잡한 노선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은 어질한 감각, 나만 빼고 모두가 길을 찾은 것 같다는 막막한 감정은 우리를 단순히 지나쳐가는 행인이 아닌, 같은 도전 교통인으로서 당신과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도전교통인인 당신이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갈 때, 노래 가사 속 장소를 찾아갈 때, 혹은 몇 번 전해들은 서울의 유명한 동네를 찾아 떠날 때 우리의 글이 당신에게 지도처럼 안도를 주는 존재가 되길 감히 바라본다. 오늘의 당신의 이동을 응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도전 교통인들이여, 우리의 연대를 믿고 전진하라악! 


편집위원 오월(choisunny0702@gmail.com), 온(eunyeongj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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