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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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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7 택시에서 주워 담은 말

[넘실대다] 편집위원 심술 

  할아버지는 4년 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갑상샘암 수술받으신 후로 1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위해 서울에 오신다. 할아버지의 정기검진 날은, 나에게 익숙했던 신촌 일대와 서울 여기저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다. 매일 지나가는 길이고, 본가에 갔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늘상 타는 택시인데도, 할아버지와 함께 걷고, 할아버지와 함께 타면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평소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린다. 할아버지가 서울에 오시는 날은 택시를 여러 번 타게 된다. 서울역과 병원을 오가는 것은 물론이고, 진료 시간까지 비는 시간에 어디 구경이라도 갈라치면 택시를 세 번 이상은 타게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서울행에는 늘 삼촌이 함께한다. 병원에서는 동행하는 삼촌과 내가 할아버지의 “보호자”로 불리지만, 아들과 손녀딸을 데리고 다니시는 건 언제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택시에 탈 때마다 늘 앞자리에 앉으시고, 택시비도 밥값도 모두 할아버지의 두꺼운 돈뭉치에서 나온다.

  혼자 타는 택시는 매끄럽고 편안해서 내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간다.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듣기 시작한 그날의 음악 정도다. 나갈 채비를 마치면 카카오택시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출발 위치를 조정해 택시를 부른다. 택시가 잡히고 결제가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곧 도착한다는 신호가 뜰 때쯤 집을 나선다. 택시기사님께 인사를 하며 택시에 올라타면, 내 몫은 거기서 끝이다. 이제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혹은 창밖의 간판들과 사람들을 구경한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면 나는 으레 그래왔다. 그런데 이날은 서울역에서부터 당황스러웠다. 서울역 뒤편 택시 승강장에는 택시는 온데간데없고,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한참을 기다려 우리 차례가 왔는데, ‘이럴 수가!’ 검은 차체에 노란 모자를 단 모범택시였다. 사람들은 선뜻 모범택시를 타고 떠나지 않는 우리에게 눈총을 보냈고, 할아버지는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모범택시를 타자고 하셨다. 삼촌과 나는 망설였고 다행히 실랑이 끝에 초록 모자를 쓴 개인택시가 우리 앞에 나타나 주었다.

  택시를 잡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우리는 차에 몸을 실었고, 이윽고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해 혈액검사를 받았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친구와 수업을 마치고 왔던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열 시 반 타임 청와대 관람을 예약해 두었는데, 이를 닦으러 간 삼촌이 30분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삼촌을 기다리며 암병원 7층에 마련된 테라스에서 할아버지와 우리 학교 쪽을 바라보았다. 테라스로 나온 환자들과 동행인들의 모습이 가깝게 느껴지고, 매일 걷던 그곳은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 목이 빠질 때쯤 삼촌이 세브란스 병원 정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부랴부랴 다시 두 번째 택시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면 할아버지는 기사님들과 인생 얘기를 나누려 하신다. 평생의 대부분을 청도에서 보내셨지만, 서울에서 차를 타고 다니시다 보면 젊었을 때 서울 근교에서 군 생활하던 시절,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가셨을 때가 새록새록 생각이 나시는지 불쑥불쑥 그 얘기를 꺼내시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은 대체로 툭툭 던져지다가 잦아들기 일쑤였다. 할아버지의 말은 택시기사님들께 잘 닿지 않았다. 누구에게 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또 종종 오래 남는 불쾌감을 선사하는 대화도 있었다. 이날 탄 두 번째 택시가 그랬다. 그러구로 할아버지는 만 원짜리를 통째로 건네셨고,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번 더 택시를 탔다. 한번은 병원으로 돌아가느라고 탔고, 또 한번은 서울역으로 가며 탔다. 서울역을 가는 길에 뜻밖에 고향이 진영이시라는 택시 기사님을 만나 할아버지는 신나게 말을 풀어내셨다. 할아버지의 말이 구불구불 줄줄줄 쏟아져 나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은 여전히 거칠고, 아름답지 않았으나, 나는 한 마디를 놓칠세라 열심히 주워 담았다.


니 통새 갔다왔나?


  여 서울에 국민학교 다닐 때 친구들 열 다섯 명이 있다. [심술: 와 할아버지 서울에도 친구가 있어요?] 그래—! 내 서울에 입원해가 있을 때도 돈 모아가— 이십만원 해줬다아이가. 내 초등학교 때 급장했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꺼정 내가 다 급장했다. [택시 기사님: 급장이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급장이라는 말을 요즘 안 쓰지요? 뒤에 앉으신 분들은(삼촌과 심술을 가리키며) 급장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심술: 반장이요!]

[택시기사님: 혹시 통시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뒤엣 분들은 모르시죠?] [심술: 통시는 진짜 잘 모르겠네요.] “니 통새 갔다왔나?” 이래 한다 아입니까. [택시 기사님: 예, 그렇게도 하고, 저희는 “통싯간에 갔다왔나?” 이렇게도 많이 했습니더. “통시”가 화장실입니다. 화장실. 하하하.]


논 한 마지기


  옛날에는 하도 못 살아가 밥 숟가락이라도 얻어먹은 놈들은 지금 다 걸뱅이라예. [택시기사님: 옛날에는 다 그랬지요, 뭐.] 그게 아이고. 내 말을 좀 들어보이소. 내는 엄마 아부지가 돈 깨나 있어가 집에 쌀가마니를 쌓아놓고 살았다카이. 집에 먹을 게 있으이 딴 데 나갈 생각을 못 했는기라. 그때 집에 먹을 게 없어가 집밖에 나가가 서울 올라와가지고 짜장면 배달이라도 한 아—들은 지금 전부 다 사장됐다카이. [택시 기사님: 보리밥이라도 집에 먹을 게 있었던 사람들은 나갈 생각을 못 했지요, 그때.] 그래가— 지금 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점부 다 걸뱅이라예. [창밖에 간판들 가리키며] 그때 집 떠난 아—들은 저런 작은 통닭집 사장이라도 다 하고 있어예. 집에 계속 있었던 아—들은 바보라예. 바보. [택시 기사님: 그래도 동네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진실된 분들이지요.] 하기사 저런 데[작은 통닭집] 사장해도 지금 청도에 논 한 마지기도 못 사이 뭐.


내가 돈을 어구야 벌었다카이


  내도 젊었을 때는 돈 어구야 벌었어예. 그때 논 한 마지기 100만원쓱 할 때 사 놨으마… 내가 여물게 하이 청도 시장에서도 하루에 삼십만원쓱 이래 벌었는데. 7000만원이면 논이 70마지기고, 1억이면 논이 백 마지긴데. 영수가, 양품점 하는 영수 말이다. [영수는 할아버지의 동생이다.] [심술: 아! 그 머리 벗겨진 할아버지!] 그래! 가—가 지금 부자라 카지만은 (내보다) 돈을 많이 못 벌이도 돈을 300만원을 벌면 전부 다 논을 사고, 그래 하이끼네 돈을 많이 모았다카이. 내는 아—들 공부시킬라꼬, 공부만 잘 시켜놓으면 된다 싶어가—. 지금 여— 뒤에 앉은 야가 내 손녀딸인데, 야 아부지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구를 갔는데, 내가 그때 대구를 한번 안 가보고 방 얻으라고 전세금 3000만원을 줬어예. 아들을 믿으니께네 그래 했지요. 그라고도 주말마다 집에 내려오면, 7만원쓱, 8만원쓱 그래 줬어예. [택시 기사님: 그 당시에는 큰 돈인데요.] 그때 순사 월급이 한달에 3만원이었어예. 근데 야 아부지가 교대를 보내놨디만, 대학을 두 학기 남겨두고 모하겠다 카는기라. 그래가—또 의과대학을 보내고, 인턴할 때도 [심술: 여기저기서 그만두고 나오고] 그래가— 많이 들었어예.

야[삼촌 가리키며]도 내가 카센타 차린다 칼 때 7000만원 주고, 그 다음에 수리 뭐 해야된다 캐가 또 100만원 주고, 집 보증금 800만원 해 주고. [목소리가 작아지시며] 또 내 술값도 많이 쓰고. 내가 돈을 어구야 벌었다카이.


서울역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심술을 보며] 느그 막내이 삼촌도 공부 잘했다. 공부 잘했는데, [심술: 엄마한테 살짝 들었는데 여자친구랑 그때 한참 사귀었다고...] 그래, 대학에 떨어졌다아이가. 그래가 돈도 있었는데 대학을 못 보냈다. 떨어져뿟다카이. 야(막내삼촌)도, 딸아—도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가 멋 지기고[부리고] 다니고, 자가용 타고 댕기고... [다시 심술을 향해] 한불에 겉만 번지르르해 보인다고 일찍이 사귀고, 짜장면 사준다고 따라가고 그라믄 안 돼.


서울역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고, 우리는 대합실에 접어들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누가 짜장면 사준다 그래도 따라가서 같이 놀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었다. 짜장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막내 삼촌이었구나, 나는 마음 속으로 웃었다.


  [앞서가는 삼촌을 가리키며] 저것도 내가 공부시킬라 했지, 했는데 저기— 중학교 졸업하드만 눈 한쪽이 그래되가—눈 한쪽이 그래가—공무원 될 수 있나? [심술: 될 수 있지요. 공부 시키지 그러셨어요.] 안 된다, 안 된다. 그래가— 내가 자동차 정비 기술 배우라 한 거지. 미나 저거(작은 삼촌)는 내 돈 준 거 없다. 저거는 지대로 했다. 그래도 큰돈은 안 줬지마는 작게작게 줬다. 느그 아바이는 늘 착실하게 하이 [심술: 여기저기 아빠가 방황을 좀 많이 했죠.] 그래, 그래가 고생한다. 내 다 알고 있다.


  젊었을 적 야무지게 돈을 벌어 아빠에게 용돈을 듬뿍 주었다는 말도, 아빠가 여기저기 헤맸던 이야기도 모두 아빠에 대한 믿음과 염려로 모아지고 있었다. 이날 세브란스 병원에서 서울역까지 우리를 실어나른 택시는, 할아버지의 삶을, 사랑을 실어날랐다. 나는 이날 살아 숨쉬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편집위원 심술(seosi12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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