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다] 편집위원 곤지
나는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시험과 과제에 쫓기면서도 부지런히 만나 활동을 기획했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에 지구적 문제들을 공부했다. 그렇게 축적된 목소리는 각종 세미나와 포럼, 크고 작은 퍼포먼스로 꾸려졌다. 활동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했지만, 무엇보다 언젠가는 이 투쟁에서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필요로 했다. 그래, 희망. 나를 평화활동으로 이끈 바로 그것이, 어느 순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비폭력을 외치고,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역설하는 일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이었다. 공들여 준비한 포럼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더디고, 유약하며, 요원했다. 세계가 파괴되는 속도에 비해 우리는 너무 더딘 것 같아서, 폭력의 구체성에 비해 우리의 목표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아 혼란스러웠다. 우린 도대체 누굴 지키고 누굴 바꾸고 있나. 우리가 투신하는 이 일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면 어쩌지. 동료들에겐 희망을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절망에 내어준 채로 활동을 이어갔다.
해가 바뀌고 침공이 시작됐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극이 전해졌다. 사상자의 수는 물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거나 강간당했는지, 그 죽음이 어떻게 유린당하고 방치되었는지 들었다. 아, 폭력은 이토록 구체적이구나. 비폭력을 말할 땐 좀처럼 보이지 않던 세계가 폭력에 의해 분명하고 실체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비폭력 운동은 단 하나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에도 온 힘을 쏟았는데, 그렇게 지켜진 생명은 어떤 곳에서 너무 쉽게 삶을 박탈당했다. 그렇다면 폭력 앞에서 비폭력을 관철하는 것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닐까. 계속 지기만 하다가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면 투쟁을 지속할 힘은 어디서 구해야 할까.
그래서 한동안 이기는 법보다 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생명의 존엄은 이토록 쉽게 진창에 처박힐 수 있다고 비웃는 전쟁 앞에서, 약자를 조롱하는 정치 앞에서, 연대와 포용의 가치를 오염시킨 소모적인 논쟁 앞에서, 어쩌면 평생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지속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우리 잘 싸웠지? 나 지금 행복해”
다르덴 형제의 영화 「Two days, One night」는 한국에서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고군분투로 점철된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을 통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두 제목은 서로를 절묘하게 품고 있다.
주인공 산드라는 우울증으로 휴직하고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복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회사는 그 없이도 팀을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회사는 산드라가 복직하지 않는 대신 동료들이 보너스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그의 복직 여부를 동료들의 투표에 부친다. 그는 투표가 있는 월요일이 오기 전, 주말 동안 동료들에게 보너스 대신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줄 것을 설득해야 한다. 그는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난) 아무것도 아냐”고 좌절하고, “피곤하다”며 상황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남편은 “피곤한 게 아니야. 포기하는 거지” 며 그를 설득한다. 한명 한명 찾아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산드라는 무력한 몸을 이끌고 동료들의 집으로 향한다.
초인종을 누르는 일은 힘겹고 투표를 부탁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생계가 녹록지 않은 동료들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보너스 급여가 간절하다. 그들은 대문을 두드리는 산드라를 두고 기척을 숨기기도 하고, 면전에 대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기도 한다. 마음 편히 보너스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산드라에게 원망과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질한다. 그 냉담한 반응에 그는 나아갈 힘을 잃는다. 남아있던 신경안정제를 모두 삼키고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찾아온 동료의 말 한마디에 약들을 토해내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문밖을 나서는 그의 곁에는 그를 격려하는 남편과 동료, 용기를 전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산드라는 동료들을 만나길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희망이 고여있는 눈으로 월요일을 맞이한다.
월요일 아침, 예정대로 투표는 진행되고 16명 중 8명만이 그의 복직에 찬성한다. 약속했던 절반을 넘지 못해 산드라의 복직은 취소된다. 그러나 회사는 그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계약직 직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복직을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복직을 빌미로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제안을 뒤로한 채 유유히 회사를 나온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여보, 우리 잘 싸웠지? 나 지금 행복해.”
나는 이 문장이 좋아 자주 발음해본다. 잘 싸웠다, 행복하다, 잘 싸워서 행복하다. 대개 투쟁은 비일상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 존재를 위협하는 위기는 늘 발생하고, 어쩌면 모든 존재는 매 순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투쟁을 지속 중이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코 같지 않은 무기와 마음을 품고 고군분투 중이다. 이러한 투쟁은 곧잘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로 평가되지만 사실 우리가 짊어진 일상적인 투쟁에는 지지 않음의 미덕이 존재한다.
영화는 성공과 실패 그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승리와 패배 사이를 대담하게 횡단하는 ‘지지 않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싸움의 끝에서 그녀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것은 끝까지 살아 숨 쉬는 것, 맥동하는 것, 마주하는 것, 말하는 것, 부르짖는 것, 사랑하는 것, 감싸주는 것, 지켜내는 것, 연대하는 것. 그의 투쟁은 이 모든 것들을 껴안고 있었다. 투쟁의 끝에서 산드라는 복직에 실패했을지언정 타인을 밟고 쟁취하라는 구조적 폭력에 응답하지 않았다. 자본의 부도덕한 고리를 자신 앞에서 끊어냄으로써 포섭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켜냈다.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으로 이뤄냈던 자신의 투쟁을 긍정하고, 내일로 나아갈 용기를 쟁취한다. 영화의 끝자락, 그의 눈에 맺힌 눈물에서는 연약함 대신 내일에 대한 결연함과 삶에 대한 충만함이 엿보인다. 산드라는 결코 지지 않았고, 실로 잘 싸웠다.
누군가는 ‘졌잘싸’를 외치고
그리고 어떤 이들도 스스로 ‘잘 싸웠다’고 평가했다. 모두 알다시피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치른 제1야당의 총평이었다. 그 목소리엔 당황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 깃들어 있어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선거가 지나온 자리마다 찝찝하고 불쾌한 찌꺼기들이 남아 있었고, 주요 길목에 쌓인 혐오와 갈등의 흔적들은 또렷했다. 3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나를 괴롭히던 ‘부끄러운’ 정치적 감정들은 그 자평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들은, 아니 유권자 모두는 정말 ‘잘’ 싸웠을까?
정치에 대해서라면 이 문장이 마음을 맴돈다. “정치는 상상의 예술이다.” 정치와 예술의 낯선 병렬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승리와 패배, 권력의 쟁취와 박탈, 제로섬게임으로 설명돼 온 비정하고 건조한 정치의 세계를 예술에 비유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해보면 정치는 각자가 상상하는 보다 나은 세계가 얽히고, 교차하고, 공명하는 속에 만들어진다. 각자가 품은 이상적인 세계관을 다채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끈질기게 타인을 설득하고, 이해받고, 긴밀하게 연대하는 속에 정치가 있다. 새로운 타인과 조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창발 되면서 새로운 정치가 생겨난다. 그 과정은 단순히 승리와 패배만으로 기억될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러니 정치는 그 어떤 예술보다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창조 행위인지도 모른다.
제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당선 가능성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당신의 출마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민주정치에서의 선거는 당선자를 확정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다양한 유권자들의 이해와 요구가 뒤섞이고, 큰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당선자는 결국 선거 과정에서 제시된 여러 요구와 이해관계의 합성물입니다.” 심상정 의원이 말했듯, 민주정치에서 선거는 ‘인물’을 선정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담지해야 할 ‘가치’와 ‘올바른 미래’를 정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락만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미래, 공존의 방식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한다. 때로는 타협하고 연대한다. 5년의 방향성은 치열한 투쟁과 유연한 연대의식이 교차되는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 선거가 폭로한 한국 정치의 민낯은 어떠했나. 혐오 정서를 자극하는 포퓰리즘 정책과 열광으로 응답한 (‘일부’라고 쓰고 ‘다수’라고 읽는) 유권자들, 배우자 검증에 열을 올린 언론들, 정작 한 번도 다뤄지지 못한 이 시대의 책임들, 공정과 정의를 남발한 여의도와 역설적으로 한층 더 흐릿해진 실체적 공정과 정의, 그 위를 유령처럼 떠다니는 정치적 극단화…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민주정치의 장을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오염시켰다. 지켜내고 관철한 것보다 버리고 잃은 것이 많다. 선거 결과는 있었지만, 승자는 없었다. 이 대선에서 우리는 모두 철저하게 졌다. 선거는 본래 당선보다 낙선이 많다. 어차피 져야 했다면 더 멋지게 싸울 수 있었다. 더 가치 있게 질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대한민국은, 혹은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관철했나? 무엇을 위해 싸웠나? 오직 실패와 승리만 있었다. 나는 우리들의 “졌잘싸”를 박탈하고 싶다.
누군가는 ‘끝까지 투쟁’을 외쳤다.
우리네 정치가 실패의 길을 걷고 있던 이 봄의 끝, 누군가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4월 11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국회 앞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함께 싸우겠다고 용기를 낸 이들이 모여 알록달록한 텐트와 현수막, 깃발을 만들어냈다. 밤에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차별금지에 대한 열망을 쏟아냈다. ‘저녁 문화제’로 불리던 이 자리에는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노래를 타고 흘렀다, 각기 다른 성별, 장애, 지역, 성정체성, 직업과 학력을 가진 다채로운 손님들도 찾아들었다. 활동가 미류와 종걸은 텐트 안에서 물과 소금, 효소만으로 버티면서도 텐트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밥을 굶는 이들의 마음을 품고 더 간절하게 텐트 밖에서 차별금지를 외쳤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선 평등의 봄을 쟁취하겠다는 동료시민 900명이 동조단식에 참여했다. 단식농성이 막을 내린 5월 26일까지 총 24회의 기자회견이 열렸고 35회의 문화제가 진행됐다. 712개의 단체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문에 마음을 보탰고, 5,735명이 함께 했다.
숫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기록들도 있다. 2007년 처음 법안이 발의된 이후, 어김없이 소외되고 미끄러지고 미뤄지는 차별금지법을 붙들어 온 15년의 간절함이 있다. 때로는 분노하고, 울부짖고, 좌절했지만, 이들은 기어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 암담하고 지난한 싸움을 지속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차별 없는 세상에 마음을 보내는 존재들, 목소리를 보태는 연대의 손길, 서로를 돌보고 격려하며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료, 15년간의 좌절에 매몰되지 않는 커다란 소망, 저열한 정치 앞에서도 그들을 냉소하거나 혐오하지 않는 태도, 세계와 마주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용기, 더 좋은 세계에 대한 다채롭고 아름다운 상상력.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무기로 싸웠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지지 않는, 아니 질 수 없는 투쟁을 하는 이들이라 말하고 싶다.
같은 계절, 같은 날들에 국회는 이른바 ‘검수완박’을 둘러싼 알력 다툼을 벌이는데 여념이 없었다. 누군가 차별과 위협없이 안전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검찰의 수사권만큼이나 중요해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모두의 삶이 평등하게 존엄해지는 일이 경찰국 부활만큼이나 긴급해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46일간의 농성을 갈무리하던 그들은 이 희망을 결코 놓지 않겠다고, 끝까지 지지 않고 투쟁하겠노라 말했다.
“단식투쟁은 중단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싸움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차별에 맞서는 것은 자신의 존엄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멈출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법 제정을 넘어 평등으로 우리 사회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봄, 시민들이 곡진하게 내어준 기회를 놓친 거대양당은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떨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다시 만나 새로운 싸움을 이어가게 될 겁니다. 평등의 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_5월 26일 미류 활동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뻔하고 당연한 말이 참 어렵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무능에, 국회의 무책임에, 정치의 실패에 우리는 지쳤고 또 슬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계속되기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당신들의 실패이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친 동료들을 북돋고, 서로를 돌보며 우리의 존엄한 삶이 온전히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_5월 26일 이호림 활동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도 어제와 다름 없는 차별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아프더라구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계속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엄을 놓은 적이 없습니다. 버린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꼭 쥐고 갈겁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충분히 아파할 겁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분해하면서 저희는 다시 싸울겁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우리가 끝내 살아가야 하는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끝내 여기에서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차별의 현실, 혐오의 정치 바꿔낼겁니다.”_5월 26일 지오 활동가
저마다의 삶에서 투쟁하고 있을 우리들에게도
앞서 보았듯, 지난 두 계절의 폭력은 전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다쳐야만 폭력이 아니다. 명백한 사회구조적 폭력을 무화하는 것, 약한 존재들을 불필요해 보이도록 형상화하는 것, 타인의 존재가치와 애도가치를 차별하는 것은 모두 교묘한 방식의 폭력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나와 무관한 존재, 야만적인 존재, 약자도 아니면서 약자 행세를 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누군가의 생존 투쟁에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는 분절된 세계관을 마주했을 때, 끝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폭력은 이길 수 없겠구나. 모두의 존엄을 지키는 투쟁은 침범과 좌절로 점철되겠구나. 동시에 이런 확신도 들었다. 비폭력은 다만 완결 없이 그저 과정만을 품고 있는 투쟁이라고, 오직 과정만이 있는 투쟁 속에서 세계는 더 나은 곳으로 이동 중인 거라고. 그러니 이 투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태도는 지지 않고 버티는 것, 끝까지 투쟁을 지속하는 것뿐이라고.
결국 투쟁을 지속하는 힘은 지고 있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매일의 확인이다. 상상 속의 목적지와 거대한 가치를 바라볼 때 우리의 투쟁은 터무니없이 연약하지만, 오늘 하루의 도달과 그것이 이루어낸 아름다움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니 난 오늘 누군가와 대화하고, 안아주고, 눈물과 웃음을 나누겠다. 누군가를 지켜내겠다. 우리들의 삶이 파괴되거나 침범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연대하겠다. 돌보겠다. 한 사람을 돌보고 지켜낸 하루가 폭력에 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명백한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을 테다. 누군가는 나 자신을 지킬 테고, 누군가는 타인을 지킬 테고, 누군가는 모두의 존엄을 지키고, 또 각자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켜내며 살아갈 테다. 어떤 투쟁은 나를 망가뜨리고, 어떤 투쟁은 우리를 끝까지 소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이기지 못해도, 지진 말자. 끝까지 살아내고, 끝까지 지켜내자. “우리 모두의 승리를 위해,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1)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2022년 4월 23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집중 문화제 中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발언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