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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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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보이지 않던 노동을 마주할 때

[굽이치다] 편집위원 모자


<잠깐! 읽기 전에

‘2022 청소경비주차투쟁’은 학내 비정규 노동자들이 440원 임금인상, 정년퇴직자 인원충원, 샤워실 설치를 위한 원하청협의기구 설치를 요구하는 투쟁이다. 여러 대법원 판례(대법원 2020. 9. 3. 선고 2015도1927 판결 등)가 증명하듯 노동자는 자신이 노무를 제공하는 사업장에서 쟁의행위를 할 권리가 있으며, 이는 통상적인 노조활동에 포함된다. 즉, 하청업체에 고용된 학내 비정규 노동자들이 하청업체의 주소지가 아닌 자신들이 실제 노동하는 장소인 학교 공간에서 선전전을 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이다. 게다가 이번 투쟁이 지난 해 10월부터 시작된 임금 및 단체협상의 교착상태를 진전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수단임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투쟁을 결코 ‘왠지 모르겠지만 시끄러운 무언가’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8월 26일, 노사는 미화직 400원·주차직 400원·보안직 440원 임금인상과 정년퇴직자 인원충원에 합의했다. 이번 투장은 승리로 끝난 셈이지만, 우리는 내년에 또 백양로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매년 고용계약을 새로 체결하는 하청노동의 특성상, 원청이 노동자의 요구를 묵살하거나 노동자가 수용할 수 없는 임금안을 고수한다면 노동자는 (지난 15년간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앞으로 몇 년을 더 학교에 머물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기간만큼이라도, 누구나 당연하게 누리는 인간다운 삶을 ‘쟁취해내야만’ 하는 학내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을 제대로 지켜봐주길 바란다.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학교는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나도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예정된 시간은 10시 반. 사진 찍을 때면 항상 삐걱대는 안면근육과 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추억이 서린 학교 건물을 둘러보고자 1시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수료생이라 남는 게 시간이었던 나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의 여느 날처럼 자유롭게 학교를 쏘다녔다. 매번 채플 좌석 번호를 헷갈려서 결석 처리되기 직전까지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대강당, 시험기간 때 친구들과 탈주 금지 내기를 하곤 했던 중앙도서관, 지옥의 6연강을 버티며 공부했던 연희관, 김밥과 라면으로 배를 채우던 청경관, 학회 회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어올라가느라 숨이 턱턱 막혔던 대우관…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이 공간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친구들, 내가 힘들어 할 때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 주셨던 교수님들, 한창 학교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던 시절에 안면을 튼 행정실 선생님까지.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청소∙경비노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를 못내 슬프게 했다.           



어느 날 눈 앞에 나타난 노동자

쾌적하고 안전한 학교 공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언제쯤이었을까. 나에게는 2019년 서울대학교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이 분기점이었다. 고강도의 업무, 열악한 휴게실을 비롯한 노동환경은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야 겨우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비워져 있는 쓰레기통과 물기 없이 깨끗한 화장실, 먼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 강의실을 보면서도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바로 그 ‘언제나 깨끗한 상태’가 이들의 노동이 얼마나 비가시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도.     


청소노동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까지 출근해서 학교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9시까지 대부분의 업무를 끝마친다. 학교 시설을 주로 이용하는 학생과 교직원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좀처럼 노동자를 잘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에 와서 청소하고 사라져야 한다니. 무슨 게임 속 NPC도 아니고. 우리는 종종 노동자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NPC는 이미 프로그래밍된 대로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사람은 매번 힘을 들여가며 일을 한다. 특히 그것이 육체노동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무거운 쓰레기를 옮기고 건물 구석구석을 닦느라 관절염이 생기고 손이 퉁퉁 부은 청소노동자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본인의 쾌적함을 포기한 사람들의 존재가 무겁게 다가온다. 경비, 주차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불규칙한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경비노동자, 무더운 날씨에도 파라솔 하나만을 의지한 채 몇 시간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주차노동자의 노동환경은 당장이라도 산업재해가 발생한다 한들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노동자들은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있다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 공간을 이용하고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 또한 학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청소노동자를 비롯한 학내의 경비, 주차, 미화노동자가 종종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학교 공간을 누벼왔다.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어색한 공기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빠른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난다거나 친구와의 대화에 좀 더 집중하는 식으로.     


그러나 학교를 다니다 보면 이런 노동자들을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투쟁의 순간이다. 백양로가 갑자기 빨간 현수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빨간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교정으로 나와 마이크를 쥐고, 빨간 배경에 강렬한 어조로 쓰인 문구가 있는 피켓을 들고 같은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강렬한 마주침이다. 나는 중앙도서관 앞 백양로에서 집회를 하던 노동자들을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을 기억한다. 벌써 4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 때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이 부끄러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투쟁은 모두가 결연한 표정과 말투로 학교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광경이었는데, 그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던 나머지 굳이 저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나에게 투쟁이란 곧 싸움이었고, 약자의 싸움은 언제나 처절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누군가를 상대로 싸움을 하기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 내내 ‘음료수라도 드리고 올 걸’, ‘응원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할 걸’ 하며, 낯섦이 걷힌 이후 밀려오는 죄책감과 후회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고작 힘내시라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왜 투쟁까지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생각하다가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 집회에 방문하다 보니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4년동안 연세대분회의 집회는 계속되었다. 그 시간 동안 투쟁을 통해 악질용역업체를 퇴출하기도 하고, 임금 동결과 정년퇴직자 인원 미충원 문제를 반쪽이나마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던 2022년 5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사가 하나 떴다. 연세대 재학생이 청소경비노동자들의 학내집회를 고소 및 고발했다는 내용이었다. 집회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영업방해로 고소하고, 미신고 집회라는 명목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련한 법률을 위반했다며 고발한 사건이다. 그래, 이건 ‘사건’이었다. 연세대에 청소∙경비∙주차∙미화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출범하고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학생 스스로가 직접 노동자를 가해자로 규정한 엄청난 일이었다.      


고소를 진행한 학생은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 고소 사실을 알리며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을 모았고, 그 게시글은 곧 꽤나 많은 익명의 이용자로부터 좋아요를 받았다. 물론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은 온갖 유해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기에 떼법이라는 둥 언더도그마라는 둥 하는 말들이 크게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유독 슬픈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지난 시간 동안 투쟁에 함께하며 실감한 비정규 노동의 구조적 문제가 이제는 더 가까운 곳에서 혐오를 추동한다는 것도 속상했지만,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조합원 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다행히 연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나오며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여러 형태로 혐오를 발산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투쟁을 지속하는 것은 엄청난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노조는 이익집단이며 투쟁은 우악스러운 짓’이라고 폄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 어디서 이유 모를 혐오를 마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내하면서도 목소리를 내러 밖으로 나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는 절박한 이유로 노조에 가입했다.      


연세대분회가 만들어진 것은 내가 입학하기도 훨씬 전인 2007년의 일이지만, 조합원들의 투쟁에 함께하고 그들과 인연을 쌓으면서 이따금 노조가 생기기 전에 만연했던 관습(을 가장한 부당노동행위)을 들을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겪었던 폭언과 임금체불, 사적인 심부름까지. 그러나 노동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일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던 조합원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한 일화를 말씀해주셨다. 당시 하청업체 소장은 청소노동자들을 본인 아내가 집사로 일하고 있는 교회로 불러내 청소를 시키는 부당노동행위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장의 눈 밖에 나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워 화가 나도 군말없이 교회로 가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정말로 괴로웠던 것은 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는 동료들의 사이가 심심찮게 틀어지는 일이었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때에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사권과 징계권 등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소장과 충돌하지 않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조를 결성한 이후부터, 개인으로는 어쩌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소장을 넘어 하청업체 사장, 그리고 원청인 학교에까지도 ‘우리 목소리를 들으라’고 힘을 모아 외칠 수 있었다. 실제로 떼인 임금 3억 5천만 원을 돌려받고, 임금을 제때 받게 되었으며, 폭력에 저항할 때 부당한 징계를 받을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전에 없던 자기효능감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노조를 향한 세간의 부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조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노조를 설립한지 1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조합원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끊이지 않는다. 2022년 현재 노동자가 학교에 원하는 것은 그저 진솔한 대화와 개선을 위한 노력이건만, 학교본부는 그마저 회피하기 위해 보안업체를 써서 노동자가 학교 건물에 진입조차 할 수 없게끔 하고 있다. 당초 노조는 여름방학이 시작된 이후부터 고령이 대다수인 조합원의 연령대를 고려하여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백양관 안에 위치한 총무처 앞 로비에서 중식선전전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학교가 보안대장까지 출동시켜 출입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조합원의 단체 출입을 제지하기 시작하면서 조합원들은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도 땡볕 아래에서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경비가 어찌나 삼엄한지, 몸자보(붉은 조끼)를 입은 조합원이 백양관 화장실을 쓰기 위해 문을 지나치려면 ‘정말로 오줌만 싸고 나올 것’임을 강력히 피력하며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수준이다. 무엇이 무서워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보장하지 않는 것인지. 급한 생리현상을 처리해야 함을 처음 보는 (그것도 자신에게 적대적인) 남에게 사정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노동자가 자기 일터에 드나드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청소할 때는 들어가도 되고 조합활동을 할 때는 들어가면 안 된다니! 분명 전자와 후자는 같은 사람인데. 게다가 매 집회 때마다 총무처 직원들이 먼 발치에서 조합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경찰관이 소음측정기로 데시벨을 측정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학교와 노동자 간 권력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판옵티콘처럼 정교한 장치는 아니지만, 집회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비탈길 그늘진 곳에서 조합원들을 관망하는 태도는 관찰 그 자체가 권력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런 모멸과 감시의 시선을 받아낼 때마다, 조합원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학교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그림1] 조합원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백양관 문 앞을 지키는 총무처 및 보안업체 직원들 (7월)

노조를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문을 열어달라는 구차한 부탁할 필요도 없고, 매일 뜨거운 햇볕을 받아가며 몸이 땀에 짓무르지 않아도 되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감시받는 일도 없었을 테다. 그러나 노조를 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가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노동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교에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생기고. 무엇보다 노동자가 뭉치면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노동자들은 이제 노조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항상 빼앗기기만 하던 이들이 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해하지 않은 투쟁정당한 투쟁

사회적 약자의 투쟁엔 언제나 ‘무해하게 행동하라’는 공격이 함께한다. 조금이라도 시끄러우면 안 되고, 주변 미관을 헤쳐서도 안 되고, 정치 얘기를 해서도 안 되고… 그래야 정당한 투쟁이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투쟁에 가해지는 공격도 마찬가지로, 나는 ‘조용히 피켓만 들고 1인시위를 했으면 누구나 응원했을 것이다’, ‘민중가요를 틀며 사상을 주입하려 하는 것이 불순하다’는 등의 온라인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기실 투쟁에 들어가기까지 연세대분회는 4개월동안 무려 열한차례나 학교와 교섭을 시도했다. 중간에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원청인 연세대학교가 미화직 노동자의 시급을 400원 인상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내놓았으나 학교는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포기한 듯한 학교의 모습에 연세대분회는 3월 28일, 2022년에 들어서는 처음으로 학내에서 선전전을 시작했다. 손수 먹물로 쓴 붉은 현수막을 백양로에 매달고, 요구사항이 적힌 몸자보를 입고 출근하고, 매일 점심 휴게시간을 할애하여 생존권을 보장하라 외쳤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시작되는 선전전은 대부분 여는 말, 분회장 발언, 연대발언, 민중가요 제창, 닫는 말의 순서로 매일 1시간가량(주중 11시30분부터 12시30분까지) 학생회관 앞에서 진행되었다. 선전전을 하는 한 시간 동안 백양로는 노동자의 외침으로 가득찼다. 원청인 학교의 책임을 촉구하는 것은 물론, 비정규 노동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목소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노동자들은 학교 관계자가 지나갈 때마다 분에 찬 고함을 지르거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백양로는 당연히 시끄러웠다.      


차분함과 비정치성이 무해함의 조건이라면, 무해하지 않은 투쟁은 있을 수 없다. 투쟁은 시끄러워야 한다. 그래야 투쟁사실이 알려지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투쟁하는지, 누가 이 투쟁을 끝낼 수 있는지를 힘차게 떠들어대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같은 학교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학생들조차 시끄러운 선전전이 시작되고 나서야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까. 동문 국회의원들이 움직여 총장으로부터 원하청 간담회 개최를 약속받을 수 있었던 것도 투쟁을 지속하며 외부에 문제의식을 계속해서 환기시켰던 덕분이다. 

[그림2] 연세대분회의 학생회관 앞 선전전 (6월)

또 다른 한편, 투쟁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투쟁은 주변인을 모두 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여 각자가 서 있는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급진적 좌파(…)의 상징이 된 민중가요가 울려퍼지는 이번 투쟁에서 누군가는 연대를, 누군가는 방관을, 누군가는 혐오하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안타깝게도 혐오하기를 택한 몇몇 사람들은 투쟁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가치를 폄훼했다. 최저임금보다 더 받으면서 징징거리지 말라는 둥, 최저임금만 줘도 그 일 맡을 사람은 줄 서 있다는 둥 표현방식도 다양했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투쟁은 운신의 자유마저 빼앗긴 상태가 되어서야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이제서야 ‘인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매년 나라에서 최저임금을 정하는 것은 누구나 생존하기 위해 최소한의 금액 이상을 노동의 대가로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지, 최저임금만 받아도 괜찮은 직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대학 비정규직 청소경비주차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 중이다. 그렇기에 최저임금보다 230원 많은 9390원을 받으면서도 실질임금의 하락을 막기 위해 400원 이상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 쾌적한 직장생활을 위해 샤워실을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사실 나는 혐오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혐오인지도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이 천성부터 악해서 혐오를 자행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조를 마치 권력을 가진 이익집단인 것처럼 묘사하고 노동자를 타자화하는 것은 분명 혐오지만, 불평등의 구조를 보는 시야를 아직 기르지 못했다면 눈 앞에 보이는 약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학생 또한 학교라는 권력구조 속에서는 약자이며,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는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약자와 약자의 권리는 함께 보장될 수 있으며, 이는 서로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약자와 약자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지부(이하 어학당지부)의 투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학당지부는 대부분이 비전임 교원으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으로, 2019년에 결성된 이후 한국어교육 업계에 만연한 노동착취를 단절하기 위해 2021년부터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한 신생 노조이다. 이들의 임금은 [강의시간*시급]으로 책정되는데, 코로나로 수업시수가 줄어들었던 2020년의 경우 월 100만원 남짓한 임금을 받으며 말 그대로 삶을 연명해나갔다. 시급이 비정상적으로 적기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이에 어학당지부는 교안회의, 시험 출제 및 채점, 문화체험 등 강의 외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할 것을 학교에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수업에 들어가고,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어학당 건물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작지만 큰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던 지난 5월, 학교는 강사들이 파업을 선언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기말고사에서 전면 배제하고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시험형식을 바꿔버렸다. 어학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말하기시험을 배제하고, 한글 타자를 배운 적 없는 학생들에게 온라인 텍스트로 답안을 제출하게 하는 등 엄청난 변화가 있었으나 이 모든 변경내용은 기말고사 바로 전 주에 학생들에게 단체메일로 공지되었다. 게다가 이 메일에는 이미 어학당지부 조합원들이 채점을 완료하여 업로드했던 중간고사 성적도 반영하지 않겠다는 본부의 결정이 담겨 있어 학생들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들 중에는 어학당에서 얻은 성적을 통해 한국대학에 원서를 넣고자 하는 학생도 많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학기 동안 노력한 것이 허사가 되어버린 황망함을 학교본부의 그 누구도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학당의 외국인 학생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어학당지부의 투쟁에 연대하고 함께 싸웠다. 5월 12일에 있었던 ‘한국어학당 평가파행 규탄 기자회견’에는 학생 대여섯 명이 서투른 한국어와 모국어를 섞어가며 연대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겪은 불합리한 처우가 ‘선생님’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며, 학교가 명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노동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렇게 이름있는 학교가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그림3] 어학당 본부의 시험 평가 파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외국인 학생들의 모습 (5월)

나는 당시 어학당지부의 투쟁에 가장 활동적으로 임했던 뷔리엔에게 자신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연대를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어학당지부의 투쟁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는데 선생님들이 밉지는 않았는지도.     

 




“그저 학생으로서 돕고 싶었고, 그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학교가 선생님들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목소리를 낸다면 그들(어학당지부 조합원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었으니까.”     


놀랍게도 그에게 연대하지 않는 방법 따위는 애초에 선택지로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당하고 말하며, 그 과정에서 설령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교원들의 노동을 착취한 학교의 책임을 묻는 것이 먼저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내게 반문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연대는 당연한 거였다. 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연대할 수 있었냐’가 아니라 ‘당신은 연대를 어떻게(어떤 방식으로) 했냐’고 물었어야 했다. 어학당의 투쟁에 연대했던 모든 학생들은 탄압을 받는 노동자도, 그로 인해 부수적인 피해를 입는 학생들도 모두 구조 속 피해자임을 인지하고,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학교당국에게 문제해결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를 확장하자

우리는 이제 투쟁을 권리의 충돌이 아니라 권리 향유의 확장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학생으로서 충분히 누리던 권리가 노동자의 권리 침해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을 실어줘야 할 때다. 나의 삶이 수많은 노동자와의 관계맺음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나’의 범위를 확장하여 연대를 도모할 수 있다. 수업이 중단되고 시험 평가가 파행되자 비전임 교원들의 투쟁에 연대했던 한국어학당 학생들처럼. 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뷔리엔에게 언제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물어봤다.      


“처음 선생님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들(어학당 학생들)은 놀라고 슬펐지만,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활발하게 연대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평가 파행으로 인해) 투쟁이 우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치자, 우리는 학교 구조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연대해서 나서야만 한다고 느끼게 되었어요.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어요. (무책임한) 학교의 대응을 통해 이 문제가 아주 심각하고 복잡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약자와 약자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나의 믿음이 이 사례 하나로 증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한국어학당지부의 사례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사용자이자 교육기관인 학교는 구성원 모두의 권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두가 인지할 수만 있다면 약자끼리의 연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서구의 근대성을 비판하며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이야기하는 브뤼노 라투르는 본인의 저서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서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세력을 분석하며, 혐오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경험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다. 나는 위와 같은 약자혐오, 노동자혐오에도 라투르의 진단을 유효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연세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덕분에 노동시장에서의 구조적 차별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가 될 것이며 노동권을 사수해야만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불합리한 세상이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세상이라고.      


모두가 투쟁을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의 꿈은 투쟁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약자의 투쟁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나’를 확장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인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와 함께 길을 걸어보자.            




                                  

*소제목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대사를,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는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공식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의 가사를 차용했음을 알린다.      


편집위원 모자(dyj06128@yonsei.ac.kr)


참고문헌

김세현, 오수빈, 용락. 빗자루는 알고 있다. 서울: 실천문학사, 2012.

Nagle, Angela. 인싸를 죽여라. 김내훈 옮김. 서울: 오월의봄. 2022.

Latour, Bruno.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서울: 이음. 2021. 

Haidt, Jonathan. Lukianoff, Greg. 나쁜 교육. 왕수민 옮김. 파주: 프시케의숲. 2020.




부록1. 2022 청소경비주차투쟁 타임라인 – 연세대분회                 


21년 10월~22년 1월

임금 및 단체협상(이하 임단협)을 11차까지 진행했으나 학교는 무반응으로 일관


2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 3차 조정에서 미화직 임금 400원 인상을 권고하였으나 학교가 권고안을 받아들이지 않음


3월

3월 28일, 학생회관 앞에서 첫 선전전 시작


4월

학교 총무팀, 노조가 생존권을 이유로 200원 임금인상 안을 거부하자 2년치 임금협상을 한꺼번에 진행하자고 제안 

노조, 임단협은 매년 물가상승률과 최저임금 상승분을 고려하여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교가 2년치 협상을 제안한 것은 노조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 여겨 선전전 진행


5월

재학생 3명의 민형사상 고소·고발

서대문 경찰서 수사 결과 선전전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60데시벨로, 생활소음(70데시벨) 범위를 넘지 않아 고소 취하


6월

선전전 진행


7월

노조, 방학 선전전은 총무팀이 있는 백양관으로 위치를 옮기려 시도

그러나 용역업체 이사가 총무팀장의 지시로 백양관 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통보하였고, 학교는 원청이니 노사갈등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 고수

 노조는 백양관 앞마당에서 선전전 진행 


8월

8월 26일, 투쟁 승리 (노사 모두 미화직 400원·주차직 400원·보안직 440원 임금인상과 정년퇴직자 인원충원 합의)



부록2. 고학력 비정규 노동자의 투쟁기록 – 연세대 한국어학당지부     


노동자란 무엇일까.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이라는 구글에 ‘laborer’를 검색해봤다. ‘결과 더보기’ 버튼이 보일 때까지 스크롤을 열심히 굴렸지만, 건설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외에 어떠한 직업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동자란 대충 ‘공부를 하지 못해서’, ‘일용직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왠지 불쌍한’ 블루칼라인 것이다. 

블루칼라로 분류되는 노동자들을 동정하거나 혐오하는 시선은 ‘화이트칼라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화이트칼라가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힘든 관문을 뚫고 대학에 들어와서, 비싼 등록금을 내 가며 지식을 쌓고, 사회에 나가서 ‘고귀한 커리어’를 쌓겠다는 소망과 함께. 그 얼마나 허망한 소망인가.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그 자체로 노동자인 것을 그들은 아직 알지 못한다.        

   

한국어학당지부는 이 모든 오해와 편견의 반례가 된다. 고학력이지만 비정규직 일자리를 생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그 일자리가 화이트칼라에 속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의 노동자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고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들. 나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7월의 어느 날, 어학당지부를 방문하여 이들이 어떻게 노동자로서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교사와 노동자

2020년, 투쟁을 본격화한 한국어학당의 조합원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갖춘 고학력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위치는 ‘나 또한 노동자’임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재현 지부장(이하 재현):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것… 쟁의행위 기간 중 노조 조끼를 입는 것에 대해 어떤 선생님들은 ‘선생님’의 모습을 잃게 된다며 꺼려하기도 했어요. 
윤지웅 조합원(이하 지웅): 처음에는 학교 관계자나 본부에서, ‘왜 스스로 노동자가 되려 하느냐’고 말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내부에서 그런 반응이 있기도 하고요. (중략) 또, 연세대 소속 기관의 강사라는 타이틀이 중요해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럼에도 ‘나 또한 노동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강사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은 세상이 ‘노동자’를 정의하는 방식이 편협하다고 꼬집으며,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장희수 조합원(이하 희수): 노동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ism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언젠가 노동자가 될 것 아닌가요?
지웅: 우리가 학교에게 우리의 지위를 물었어요. 근데 교원도 아니고 직원도 아니고… 근로자라고 답하더라고요. 근로자라니, 그럼 계속 이렇게 순응하며 살라는 소린가? 근로자보다는 (투쟁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 낫지 않나요. 다른 조합원 분들도 언어화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들 느끼실 거라 생각해요.  



노동자와 투쟁

한국어학당은 투쟁을 하기까지 지난한 세월을 버텨온 역사를 갖고 있다. 90년대 초, 재계약을 위해 사측인 학교에 면담을 요구했다가 학교가 그들을 계약해지(다시 말하자면 해고)하자 당시 교원들은 더 이상의 투쟁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만 최소한의 복지나 학사운영을 위해 ‘강사회’를 만든 그들은 어학당 원장과 전임강사들에게 애로사항이 생길 때마다 읍소하다시피 말하며 약 30년의 세월을 버텨냈다. 

희수: 지난 10년 동안 우리 시급은 지금까지 딱 두 번 올랐어요. 2012년, 2021년에 각 3프로씩. 그 때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노동강도가 높으니까 강사들을 달랜다는 의미로 인상해준 거였어요. 그렇다고 다른 어학당이라고 해서 노조가 있어서 임금이 올라간 건 아니거든요. 연세대 어학당만의 고질적인 문제가, 1960년대부터 주먹구구로 운영해온 것들이 발목을 잡았던 거죠.
지웅: 강사들이 눈치를 특히 많이 보기 때문에, 대상포진을 걸려도 말을 못했어요.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우리는) 구조적으로 그렇게 길들여진 노동자들인데, 학교는 운영자로서 제 몫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조직의 폐쇄성 때문에 투쟁이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 어떻게 다시 노동조합을 조직할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노동자성을 체화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꾸려 투쟁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야 했을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재현: 시니어 선생님들을 폭발시켰던 것 중 하나가 아침에 교안회의를 20분 동안 강제적으로 시키던 거였어요. 학교는 이게 자율이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교안회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거죠. 그러니까 시니어 선생님들이 폭발한 거예요. 전통 운운하면서 절대 빠질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우리도 당연히 업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는데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니. 임금성으로도, 교육적으로도 문제가 있어서 크게 분노하셨죠. 
희수: 이게 점점 아랫년차로 갈수록 생계형 직업이 되고 있어요. 시니어 분들 때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왔거든요. (중략) 우리는 직업인으로서 프로니까. 돈 받고 일하고, 받은 만큼 일하고 싶어요.      



학생들의 연대와 투쟁의 정당성

어학당지부의 투쟁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세 한국어학당의 명성을 보고 비싼 등록금도 불사하고 학교를 찾은 외국인 학생들에게 투쟁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조합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투쟁 초기에는 투쟁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지웅: 몇몇 선생님들은 파업 전에 학생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수록 등을 돌릴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우리 스스로도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외부의 시선으로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고요. 

다행히 파업으로 인해 시험 평가가 파행되는 일이 있었는데도 학생들은 기꺼이 ‘선생님’들의 투쟁을 응원했다. 조합원들은 학생들의 지지와 응원이 엄청난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재현: 학교 안에서의 투쟁은 학생들의 인정이 필수적인 것 같아요. 학교도 우리를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던 게, 학생들이 우리를 많이 지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고.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니까,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사항에 대해 인정받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생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 투쟁은 지속할 수 없겠죠. 
지웅: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정당화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학교에서 일하면서 사측 때문에 행복함을 느낀 적은 없는데, 학생들이 주는 행복함은 있어요. 지나가면서 힘내라는 말을 하시는 게, 내 행동과 투쟁을 정당화해주니까 실제로 매일 집회할 때 동력이 되었거든요. 투쟁을 생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나 투쟁의 정당성이 학생들의 지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학당 지부의 투쟁은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임금을 올려달라는 당연한 요구였으며, 그것은 인간다운 노동을 할 권리를 되찾고자 한 점에서 그 자체로 정당했다. 주변인의 응원은 당연히 도움이 되지만, 응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투쟁의 정당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희수: 첫 투쟁에서 지지를 받아서 다행이고 감사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기뻐하지는 않기로 했어요. 우리는 (본교에서의 고소∙고발 사건처럼) 학생들이 반대하더라도 투쟁을 계속해야 하니까요. 학생들이 이런 불편을 겪으면서까지 우리 기관을 선택할 이유도 없고. 학생 수만큼 일하고 돈을 버는 구조라서 더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아요.      



노동자와 교사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쟁의행위를 할 때 언제나 ‘학생을 볼모로 잡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특히나 그 노동의 종류가 가르치는 행위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학생들이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한다는 직접적인 피해가 생기기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도 노동자와 교사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자주 흔들리고는 한다. 

재현: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못견뎌하는 선생님들도 많아요. 학생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에, 내가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조합을 탈퇴하신 선생님들도 더러 있고요. 

그럼에도 노조의 필요성과 실효성은 모두가 인정한다. 앞으로의 진로 때문에 학교와 반목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비조합원들도 노조를 적극적으로 방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어학당의 비전임 교원들은 현재 노조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이 노동자이자 교사인 자신의 위치성을 받아들이는 과정 위에 서 있다. 교사는 학생들의 성장을 돕기도 하지만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것, 교사를 마냥 숭고한 직업으로만 생각한다면 결코 노동자로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체감해 나가는 중이다. 

희수: 직업인인 프로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고객이 불필요한 피해를 받지 않도록. 그 선에서 섬세하게 (자신의 위치를) 다루려고 노력해요.           


연세대 한국어학당지부는 지난 7월 25일, 지난했던 투쟁을 마치고 학교와 2021, 2022 임금협약과 2023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한국어 교원으로만 이루어진 첫 노조에서 거둔 엄청난 성과다. 나는 그들과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것도 잠시, 앞으로 매년 반복될 투쟁을 그려보았다. 매년 임금 및 단체협상을 진행할 테고, 학교가 노조의 요구를 곧바로 수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렇다면 또 투쟁, 투쟁, 투쟁… 결국 비정규 교원의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비관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때가 오면 또 ‘나’를 확장한 학생들이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모여 힘을 합칠 테니까. 그들이 연대의 힘을 더욱 확장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그저 이 순간의 승리를 즐겨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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