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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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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우리는 나아가도 좋고 멈추어 있어도 좋다

[부서지다] 편집위원 온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은 때로 나를 힘들고 괴롭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시간 속에 여실히 남아서 미래의 나에게 떠올랐다. 좋은 사람과 나눈 소중한 대화를 기억하고, 줄을 서서라도 먹고 싶었던 맛집의 음식 맛을 기억하는 일, 오랫동 안 찾아 헤맨 것처럼 취향에 맞는 영화를 기억하는 일들이 내게 그랬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통화하며 나눈 연말 계획을 기억하고 행복해했고, 내가 무엇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편안해지는지 순간순간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힘든 일이 생길 때 그 기억을 떠올리며 견뎌냈다. 막막한 어떤 순간에도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면서 살아갔던 내게 기억은 삶의 기준과 꾸준한 흐름을 선사해주었다.


그래서 어릴 때의 나는 막장 드라마 속 주인공이 갑자기 기억을 잃고 등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 주인공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보며 안타까워했다. 기억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주인공처럼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면 당장 어제 친구와 놀았던 행복했던 감각을 잊을 것이고, 열심히 배웠던 태권도 자세를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하고, 만화책에서 봤던 웃긴 장면들이 자기 전에 떠오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게 해주는 기억 덕분에 그 안에서 나는 어제를 잊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매순간 잊히고 옅어지는 것이 기억이지만 비슷한 것을 보거나 들으면 다시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또한 기억이었으니까. 기억은 삶의 곁에서 재생되고 꿋꿋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난 영영 찾을 수 없는 기억들이 생기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치매를 마주하며 나는


반갑게 할머니께 달려갔던 어느 날,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평생 내게 또렷한 삶을 사실 것 같았던 할머니에게서 기억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겪는 상황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매주 동네에서 장이 서는 시간을 기억하고 꼭 그 시간대에 맞추어 장을 서던 분이셨는데. 장이 열리는 시간대에도 할머니는 가만히 앉아 계신 채로 앞에 있는 나를 쳐다보셨다. 잊어가는 기억과 함께 쇠약해지고 거동도 예전 같지 않은 할머니를 그날 마주했다.

그 후로 할머니는 친척 집에서 우리 집으로, 몇 주 간격으로 거처를 옮기며 생활을 이어 나가셨다. 할머니가 더 이상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시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엄마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보내기 전 마지막 시간을 준비했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기 전까지는 요양병원에서 비대면 면회를 지금처럼 아주 잠깐 마련할 것이었기에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앞으로 많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엄마는 할머니를 온전히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만이 할머니의 삶을 기억하게 되더라도, 가끔은 우리가 할머니에게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용하게 느껴지더 라도, 우리는 할머니를 지켜보고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곁에서 할머니를 지켜보고 마주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말투와 습관들이 가장 먼저 사라져갔다. 말을 문장으로 끝맺지 못하셨고 단어도 잊어 가셨다. 종종 허공을 쳐다보셨고 또 자주 소리치시고 집과 주위를 부산하게 돌아다니셨다. 내가 알던 사람이 달라 져갔다. 왜 자꾸만 할머니가 사라져가는 것만 같을까? 기억이 사라지는 일은 이렇게 사람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차츰차츰 하나씩 잃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고통일까, 아니면 할머니는 이마저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까? 할머니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기억을 잃는 것이 내가 보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두려운 일이면 어떡하지? 할머니를 지켜보기로 결정한 이후 나는 할머니의 곁에서 이런 근본적인 물음들과 종종 싸워야 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할머니 곁에 남았지만 이런 마음이 시작이었기 때문일까, 처음해보는 질문들이 많은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할머니를 지켜보겠다는 다짐과는 다르게 자꾸만 거리를 두었다. 가끔은 내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몸과 기억으로부터 계속해서 맞서고 계셨을지도 모르는 시간 앞에서 나는 모순 가득한 두려움을 느꼈다.


할머니를 가까이 마주하며 알게  돌봄


치매(dementia)는 실제로 de(잃다)와 mentia(정신)를 더한 것으로, 정신을 잃은, 정신 이상이라는 뜻을 가진다. 어원만 보면 우리는 시작부터 상실을 두려워하고 왜곡한 채로 치매인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나이들고, 늙어가며, 갖은 질병과 함께 살아 가야하는데. 이토록 아프지않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아픈 사람이 되는 길이 더 명확한데도 우리는 치매와 같은 아픔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우리가 거리두는 것과는 다르게 사회는 돌봄이라는 행위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기 때 문이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도 돌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 우리가 할머니를 지켜보고 함께하기로 한 이 시간도 돌봄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니고, 슬픔만 있는 것도 아닌 일상의 돌봄이라고 여기면 되었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확장했을 때 비로소 병은 삶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 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도와주었다. 치매라는 것이 그저 삶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 앞에서, 내가 가지던 두려움이 새삼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졌다. 이번 글을 쓰며 나를 마음껏 부끄러워했다.


그렇다면 잘 돌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 결국 알게 된 것은 헌신과 인내가 깔린 돌봄을 가족애나 효심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제대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돌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돌봄을 똑바로 직시하고 보존하는 것. 우리는 돌봄의 책임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


결국, 병과 아픔을 나와 가까운 삶의 방식이라고 느끼고, 돌봄과 나 자신을 거리두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아프더라도 이해와 돌봄의 인간 관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치매를 진단받은 이들은 그저 과거보다 현재의 기억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단지 보다 기이하고 역동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치매인을 바라본다면 많은 것이 내 안에서 달라졌다. 치매인이 대화 중에 가지는 침묵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되면서, 이들은 삶의 모든 경험을 세심하게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현재에 몰두하고, 강렬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서 얻은 새로운 모습이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인의 삶과 이 현실 사이엔 커져가는 괴리만이 남고, 현실의 감각이 부족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내게, 할머니는 기이함과 역동성을 포용하고 나니 오히려 치매인이 세상을 굳건히 마주하는 충만한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치매의 기이함과 즉흥성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2]


일상에서 돌봄을 구체화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치매가 가진 즉흥성과 역동성을 포용할 수 있을까? 어느 시점부터는 기억을 잃는 일은 비단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니게 된다. 옆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 앞에 앉은 이의 얼굴을 살피고 안부를 물으며 조금씩 대화를 시도하듯, 치매인과의 대화에서도 속도를 맞춰가는 것이 중요했다. 보다 많은 침묵을 가지는 이에게서, 현실의 충만함을 가진 이에게서 나는 소중한 대화들을 배웠다.

할머니와 긴 대화를 하는 것이 힘들어졌을 때 대화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 함께 맞춰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눈을 맞추거나 가만히 기다리며 할머니의 속도에 맞추었다. 그 시간 동안 할머니 눈매가 엄마 눈매랑 똑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언제 할머니 눈이 저렇게 작아졌지, 나의 나이 든 얼굴도 지금이랑 많이 다를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보면 할머니는 말하기를 시작하셨다. 할머니를 보며 기다리고 나 역시도 곁 을 냈을 때 할머니도 곁을 내어주셨다. 언어가 대화의 전부가 아니었다. 말의 시작엔 또 다른 것들이 있었다.   기다림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말하지 않고도 할머니와 대화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려운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기다리는 것이 중요했는데도 가끔 나 혼자 속도를 내는 순간이 있었다. 할머니의 기억력이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기억 나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좋지 못했다. “할머니, 어제 일어나서 이 물 마시기로 했잖아요.”, “우리오늘 여기 가는 게 처음이 아닌데?” 같은 말들. 그러면 할머니는 자신이 기억을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멋쩍게 웃으셨다. 혹은 “에고.. 기억이 안 난다. 우째.” 하고 할머니가 작게 읊조리셨다.


몇 년 전 봄, 벚꽃을 보러 우리가 차를 타고 왔던 순간을 우리 가족은 모두 기억했다. 예전 기억을 한껏 추억 삼아 모두가 꽃을 즐길 때 할머니는 침묵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기억해 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던 점이 할머니를 당황하고 속상하게 한 것 같았다. 그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쉽게 그들이 동요할 수 있는 언어를 쓰는 건 피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느꼈다. 대신 “오늘 꽃을 보러 갈 거예요. 봄에 보는 벚꽃이 예뻐요! 근데 할머니 랑 같이 봐서 너무 좋은데요?” 같은 말들, “오늘은 병원에 갈 거예요.” 같은 말을 했다. 할머니 는 말수가 줄어 가셨지만 “함께 해서 좋다, 함께 할 거다.” 라는 말을 들으실 땐 같이 웃어 주셨다. 역시, 당일이 되어서 새로 말하는 것처럼 상기시켜 주거나 지금 상황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나는 종종 실수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뵐 때면 나를 소개하다가 자꾸만 말을 덧붙였다. “할머니, 여기는 할머니 사위이고, 저는 할머니 막내딸의 딸! 할머니 손녀예요.”라고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어릴 때 너무 좋아했다던 그 손녀딸!”이라는 말을 덧붙여 버렸던날이 있다. 아차,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는게 안 좋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옛날처럼 “영감은”, “그 사람은” 이라는 말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았지만 분명했다.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계셨다. 기억을 떠올리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할머니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할머니에게 남아있는 과거를 목도하는 일은 또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할머니에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어떤 기억들일까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삶을 사신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할머니를 재촉 하지 않고 할머니가 당신을 필요로 하시는 그 자리에서 마당을 쓸 빗자루를 들고, 할머니가 캔 나물을 담을 소쿠리를 든 채로 서계시는 분이셨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은 할머니와 대화 를 하며 오히려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재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대화하는 건 어렵지만 한 사람과 잘 살아가는 방식과도 연결된 소중한 규칙이었다.


단순한 대답을 할 수 있게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은데, 그럴 땐 “예, 아니오” 혹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게끔 선택지를 줄이는 질문이 좋았다. 하루는 “할머니, 오늘 뭐 드시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하다가 아차 싶었다.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를 할머니에게 건넨 날이었다. 할머니는 그냥 멋쩍게 웃으시거나 “나는 그런 거 모른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또 가끔은 화를 내시기도 했다. 당신이 당신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에 짓는 할머니 표정을 볼 때면 잃어가는 기억이 야속했다.


할머니는 배달음식을 좋아하셨다. 뼈가 없는 순살 양념 치킨을 사랑하셨다. 아차, 싶었던 순간 이후부터는 치킨을 고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이미 배달된 뒤에 할머니 앞으로 치킨을 들어 보여주었다. 치매는 정말 침묵과 함께하는 거였다. 좋을 때도 슬플 때도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는 점점 더 침묵하셨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 앞에서 할머니는 침묵과 함께 웃으셨다. 가끔은 할머니와 예전처럼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것은 어려웠고 할머니에게 바라는 것들이 자꾸만 생기는 날들이었지만 이만하면 좋은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을 했던 날이 많았음을 기억하고 싶다. 웃음만으로도 큰 답을 들었으니까.


한 번은 오늘 병원에 가야한다는 말을 하면서 문제가 있었다. 조곤조곤, 속도를 맞춰 할머니에게 오늘 새로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 했는데도 뭐가 문제였을까? “할머니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병원을 갈 거예요. 부산에 있는 병원을 갔다가, 할머니 큰 아들을 만날 거고요, 만 나고 큰 딸 집에서 한 밤 잤다가 다시 거제로 갈 거예요.” 우리는 일상에서 문장을 나열식으로 쭉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긴 문장을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모른 채로 나 혼자 브리핑을 끝냈었다. 길게 여러가지 문장을 섞고 이어서 말하는 경우를 줄이고, 대신 “이거 할까요?” 그 일이 끝난 후 “이번엔 이거 할까요?” 같은 방식으로, 단순한 문장으로 최대한 쪼개서 전달하는 방식이 좋다는 것을 그 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할머니와 이야기하기로 생각했다면 말의 소화를 돕기 위해 쪼개는 방법이 필요했다.


경상도는 사투리의 억양도 세지만 말소리도 크다. 할머니에겐 큰 소리가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조금은 완화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 모녀는 대화를 하면 늘 목소리가 넘쳤다. 대화 소리가 자꾸만 커져서 일렁였다. 꼭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큰 소리로 멀리서 이야기하기보다 몸을 가까이 붙여 낮은 목소리로천천히 이야기 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할머니와 만났던 그 시간 동안은 좋은 전달을 위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많은 시간을 쏟은 날들이었다. 누구나 마음먹기는 쉽지만 잊기도 쉬운 이 방법들과 나를 가까이 두기로 생각했었다. 예전처럼 할머니와 엄마가 통화로 실랑이를 벌였던 순간들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서 도로를 따라 할아버지 산소까지 걸어 올라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날도 많았다. 그가 기억을 잃는 것이 싫어서 그런 모든 것들을 붙잡고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날도 있고, 야속해서 엄마와 이야기하며 울었던 날도 분명 존재하지만, 치매를 마주하며 현재의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은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 시간동안 어떻게 내가 할머니와 치매를 무겁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었다. 돌봄이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어서 늘 좋지도,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게 대화하고 돕고 같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가는 것에  안녕하기


지금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후로는 글을 쓸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리니, 어느 날은 나 자신보다도 할머니를 더 많이 생각한다. 그러면 돌봄이라는 것은 서로의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짐이고 또한 힘이다.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고 해서 전진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짐이 된다고 해서 후퇴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여기에 우리 모두의 비슷한 삶이 있다. 치매가 무섭다는 불편한 마음으로, 어쩌면 오래 함께하는 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미안한 마음으로 곁에 있기로 시작했던 것은 할머니의 침묵과 결핍을 다시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지켜본 할머니의 시간은 기억을 잃어서 후퇴하고 빚지는 것들이 많은 삶이 아니었다.


모두가 시간에 충실하게 서로를 생각하며 침묵과 결핍을 사랑하고 돌보는 지금, 우리는 잘 안녕하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잃어가는 것은 아프고 슬픈 일이지만 잃어간다고 해서 그의 삶이 지는 것이 아니다. 아프더라도 이해와 돌봄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행복을 뺏기지 않는다. 나아가는 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나아가도 좋고 멈추어 있어도 좋다.



편집위원 온(eunyeongjo@yonsei.ac.kr)


[1] 김영옥  3, 『새벽  시의 몸들에게(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봄날의 , 2020

[2]  캐스틸 하퍼, 『여전히 같은 사람입니다; 치매,  사라지는 마음에 관하여』, 현대지성,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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