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7호 1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조울과 조우하기: 아픔을 껴안을 수 있다면

[부서지다] 편집위원 서로

아픔과 건강이라는 말 사이,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허우적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걸까. 병명과 의사의 소견이 적힌 진단서, 알 수 없는 약 이름이 성글게 혹은 빼곡히 쓰인 처방전? 혹은 그저 아픔을 감각하는 나의 온전한 느낌으로? 나는 가끔 그 경계가 참을 수 없이 얄팍해지는 순간을 맞는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깨어질 것만 같은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제대로 된 ‘병명’을 찾지 못해 아픔을 잃어버린 사람들, 무탈하고 건강하다고 믿어왔던 몸이 갑작스레 아프다고 여겨져 아픔을 얻게 된 사람들.


그 수많은, 아픔을 잃고 얻은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가깝고도 아주 소중한 이가 있다. 그는 조울증을 앓았고, 스스로가 조울증이며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말을 빌리자면, 그는 아프다는 말을 얻게 된 것에 가깝다. 내 눈에 비친 그는 한없이 건강했고, 그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 어떤 고정관념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인지 그는 항상 든든하고 따스하고 유쾌한, 꼭 슈퍼맨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내가 이 글을 써내려 한 것은 그의 조울을 조우한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 경험이 내게 남긴 족적을 풀어내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마음과 함께.


그러니 아픔과 건강. 이 사이의 경계를 고민하는 일은 이 사람을 빼두고 논할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의 아빠. 아빠는 단풍이 무르익어가던 작년 10월 즈음 조울증을 앓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아빠는 종종 나에게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일대의 기회가 왔다는 말을 부푼 마음으로 속삭였다. 또 가끔 엄마와 밤늦게 식탁에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빠는 종종 출근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빠의 회사 동료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그들은 엄마가 깎은 과일을 앞에 둔 채 묵직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또 아빠는 종종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진 채로.


그랬던 아빠는 엄마의 간곡한 설득과 강행으로 정신과를 찾았고, 그곳에서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날부터 아빠는 조울증 환자가 되어 아픔의 영역에 발을 들여야만 했다. 조울증이라고 적힌 진단서는 아빠의 동료들이 그의 ‘낯선’ 행동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했으며, 약을 처방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빠까지는 설득하지 못했다. 아빠는 여전히 당신이 건강하다고 믿는 세계에 살고 있었고 진단받은 약은 먹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아빠에게 있어 ‘건강’은 몸의 영역이었다. 아빠는 조울증 진단을 받기 몇 달 전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지가 보여주는 아빠 몸의 구석구석은 놀라우리만치 양호했다. 아빠는 결과지에 적힌 ‘양호’를 가리키며 당신의 건강함을 공고하게 주장했다.


나는 그때까지 아빠가 아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빠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가리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30년이 넘도록 아침 6시에 일어나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해 간단한 아침 청소를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올곧은 마음과 끈기, 한결같음,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책임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우스갯소리로, 때로는 아빠가 딸인 내게 그중 대체 무엇을 물려준 건지 한껏 질투하기도 했었다. 한편 아빠의 그런 모습이 회사든, 어디에서든 부드럽고 유연하게 녹아들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했을 때 그게 오답이 되고 그 오답의 근거가 자신의 예민함과 오지랖으로 치부되는 순간이 얼마나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지를 나는 잘 안다. 때로 아빠가 회사에서 오가는 알량한 아부와 은근한 친목의 현장을 흘리듯 이야기할 때에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아빠의 잘못이 아니고, 아빠가 아픈 게 아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믿어왔다.     


설령 아빠가 정말 아프다고 한들 나는 아빠가 살고 있던, 당신이 아프지 않은 세계를 지켜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여기더라도 가족만큼은 같은 편을 들어줄 수 있는 거지. 그래야 숨통이 트이고, 그래야 살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빠가 건강하다고 믿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그의 믿음을 깨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빠의 세계와 타인들의 세계가 자꾸 충돌하며 빚어내는 균열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더 정확히는 아빠의 세계에 균열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언제든 깨지고 상처가 잔뜩 나서 그 안에 살던 아빠가 무너질까봐.     


아빠는 대체 왜 그토록 당신이 아프지 않다고 이야기할까. 왜 그토록 ‘아프지 않으려’ 할까. 당시 나는 딸로서 아빠에게 약을 먹도록 설득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를 맡았다. 그것은 아빠의 그 묵직한 책임감의 근원이, 아빠의 모든 행동을 추동하는 것이 가족이고 자식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의 지시였다. 엄마만큼이나 나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 자체로 아빠에게 칼이 될 수 있음이 몸서리칠 만큼 싫었지만, 엄마에게 있어 그 외의 더 아름다운 선택지가 몇 없었을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빠가 약을 먹도록 하려면 우선 아빠에게 당신이 아플 수 있다는 세계를 보여야 했다. 그리고 기나긴 설득의 과정은 사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전부였다.


아빠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아빠의 마음이 지금 아프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아빠가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빠 말을 어떻게 믿어. 아픈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주겠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나는 얼른 다 나아서 아빠가 건강해진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아빠 말을 잘 들어줄 것이라 했고, 아빠는 다시 애초에 당신이 아픈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 똑같은 말들이 한참을 오갈 때에 나는 대체 왜 아빠가 아프지 않으려 하는 건지가 너무나도 궁금했고 또 그것을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아빠의 말속에 이미 그 답이 있었던 것만 같다. 아빠는 당신이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타인이 그의 말을 ‘아픈 사람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인식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으레 사람들 사이에서 통상 ‘아픈’ 상태란 불완전하고, 불안하며, 불편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을 거부하게 만든다. 아빠가 그랬듯이. 아픔은 물리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떨어지는 생산성과 그 속도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에는 사람들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일정한 기대치가 있으며, 장애와 아픔은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구성되는 것이다.[1] 삶의 속도는 장애와 아픔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몸이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주어진 일을 행하는 모습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낯설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속도나 느리거나 과정이 번거로워 보이는 몸은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몸으로 치환된다. 아빠가 당신이 아프지 않은 세계에 왜 그토록 머무르려 했는지를 곱씹을 때 정상성, 생산성의 울타리에서 급작스레 나오게 된 아빠의 낯섦을 떠올린다. 한편 삶의 속도와 생산성으로 아픔을 짚어내려는 감각은 나에게도 알게 모르게 낙인같이 남았고,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남과 나의 아픔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아픔과 건강, 장애와 비장애는 생물학적 요소만이 아니라 사회적 요소로도 함께 규정되기 때문에 그 경계가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웬델은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의 기준이 각 사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성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린다면, 그 사회에서 ‘정상적인’ 기능의 기준은 지나치게 낮아져 굶주림이 만들어 낸 광범위한 장애의 문제를 가리게 된다. 이렇듯 변화를 겪은 나의 몸은, 더 나아가 변화를 겪지 않더라도 나의 몸은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아픈 것으로, 장애를 가진 것으로 규정될 수 있고 또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픔은 항상 물리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만으로는 아픔을 판별하기 어렵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생리불순을 꾸준히 겪어 왔지만, 그것은 나의 당장 내 앞에 놓인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되려 매달에 일주일씩이나 배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내심 편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다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넷 속 혹자는 내게 생리불순도 병이라고 했다.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리불순을 아픔으로 느낀 적이 없었지만, 엄마의 간곡한 설득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남은 한 해 동안 피임약을 매일같이 복용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생리를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자궁이 수축되어 나중에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위협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경고와 조언을 남겼다. 엄마는 내가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매일같이 묻는다. 나는 그렇게 내 아픔을 인지했다. 우리는 아픔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함,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사회적 시선을 감각하는 것으로도 아픔과 건강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한편 아빠는 아픔의 낯섦이 너무 생경했던 것인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딸이라는 위치를 칼로 삼아 아빠의 건강한 세계를 찌르고 부수어내야 했다. 아빠만 믿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거라며, 학비 걱정 없이 졸업하고 싶다는 말들을 남발했다. 그런 말들이 아빠를 일렁이게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했다. 이 기억은 새삼스럽지만 떠올릴 때마다 조금은 입이 씁쓸하다. 길고 긴 이야기 끝에 아빠는 결국 당신이 아픈 세계로 들어왔다. 먹지 않겠다던 약을 먹기로 했다. 문득 내가 기어이 아빠를 ‘아프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되니 내가 아픈 건지, 아빠가 아픈 건지, 그 밖의 것이 아픈 건지, 아프다는 게 뭔지를 오래오래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특정한 병명도 진단서도 없었지만 마음 곳곳이 정말로 시큰하게 아팠다.           



조울증의 세계와 부표가 될 사랑     


앞서 아빠의 이야기를 다루며 나는 ‘세계’라는 말을 주로 꺼내어 썼다. 이는 어떤 문학적인 표현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빠의 조울증을 곁에서 관찰하고 겪으며 내린 결론의 일환 같은 것이다. 조울증이란 많은 이가 알고 있듯 조증 삽화[2]와 우울증 삽화를 보이는 정신 질환이며 이는 양극성 장애로 불리기도 한다. 내가 목격하고 또 분투한 조증이란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도 깨어낼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과 같았다. 아빠의 경우 당신이 아프지 않은 세계를 구축한 것처럼. 더 예를 들자면 계획하고 목표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세계, 답답함이 없는 세계와 같은 것들…. 막연한 자신감과 확신에서 비롯된 세계는 시간이 지나며 더욱 구체화되고, 타인의 행동도 철저히 그러한 맥락을 통해 해석된다.      


이러한 지점은 순전히 착각 내지는 망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세계’라고 이야기한 것은 정말로 조울증을 겪는 당사자가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그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는 틀림없이 그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아빠의 세계에서 당신에게 조울증 진단을 내린 의사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과잉 진료를 하는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으며, 그건 아픈 거라며 병원에 가보라던 동료들의 조언과 비난은 당신을 향한 음해와 불신이 되었다. 아빠를 곁에 두고 이야기하며 나는 때로 그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는 나와 아주 가까이, 바로 옆에 앉아있지만, 그 사이에 투명한 유리막이 들어서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 막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고,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간다 한들 그로 인해 깨진 조각들이 나와 그를 모두 상처낼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가족, 직장을 비롯한 여러 관계에서 마찰과 충돌을 빚어내며 그러한 세계에 금이 가면, 우울이 찾아온다. 조울증을 겪는 이에게 울증이 더 위험한 것은 그가 살고 있던 세계가 조각나기 때문이다. 누구든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숨을 편안하게 한가득 몰아쉴 수 있는 삶의 공간이 조각나면 당황스러움을 넘어 참혹함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이제까지 파란 것이 하늘이고 흙이 땅이라는 믿음이 실은 반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두가 거꾸로 땅에 대롱대롱 매달려 걷고 있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그럴 리가 없다는 자기부정과 배반감이 밀려들지 않겠는가. 모두가 함께 사는 줄로만 알았던 세계가 실은 ‘나’만의 것이었음을, 그 안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무력감과 자기 비난은 당사자를 무겁게 짓누른다.      


조울증이 어떤 세계의 생성과 깨어짐과 같다고 느끼며 나는 동시에 주변인으로서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아빠의 세계가 터무니없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그의 세계를 지켜내고 싶었다. 물고기에게 물 밖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하며 그것을 물에서 꺼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어렵지 않다. 각자는 저마다 살고 있는 세계가 있고 그 안에서 각자가 세워온 규칙과 행동 양식이 있기에, 혹자의 눈에 아빠의 세계가 터무니없어 보일지언정 그것도 분명히 아빠를 구성하는 일부이고 또 아빠가 규칙과 양식을 세우고 들어서 사는 세계였다. 아빠의 세계를 함부로 부수지 않으면서도 그와는 또 다른 세계, 아빠가 아플 수 있고 또 아파도 괜찮다는 세계,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끝내 나는 아빠의 세계를 온전히 지켜내지는 못했다. 결국 아빠와 나의 관계를 무기 삼아 그의 세계에 금을 냈으니까. 나는 그 와중에도, 아빠는 아픈 거라고 거듭 외치면서도 꼭 그런 말들을 덧붙였다. 아빠의 정의와 말이 그른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을 내가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것. 딸인 나는 아빠를 무척이나 닮았고 그래서 아빠의 마음과 슬픔이 내 마음에 가까이 와닿는다는, 그런 말들. 그렇게라도 아빠가 아파도 괜찮은 세계, 아픈 사람의 말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귀 기울여 들을만한 것으로 이해되는 세계를 그에게 꼭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보이려고는 했지만 아빠가 당시 그런 마음을 온전히 느꼈을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며, 사실상 그 혼란과 슬픔의 바다를 헤쳐나와 아픔을 받아들인 것도 오롯이 아빠의 몫이었으니 나의 말과 의도가 유효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나는 아빠의 곁에서 조울증을 함께 앓았다. 나도 같이 조울증을 겪은 것이 아니라, 그 아픔으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파편 같은 아픔들을 함께 맞았다. 엄마도 같이. 나는 보기만 해도 아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아빠를 보며 비로소 알았다. 아빠가 우울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우울은 내 세포 하나하나 속에 깊이 들어와 찌르르 울린다. 엄마도 아빠가 아프다는 것을 나에게 숨긴 채 그를 돌보는 것이 너무나 지치고 무서웠다고 내게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쳤다. 엄마가 무서워한 것은 아빠도, 그를 힐난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고 그 순간과 앞으로의 일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주변인이라는 말은 다소 가벼울 수 있지만, 내가 주변인이라고 지칭하려는 사람들은 아픈 이의 곁에서 그것을 함께 앓는 사람들이다. 아픈 이의 곁에 머무르려는 사람들, 혹은 머물러야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주변인들은 쉽게 지워진다. 다시 말해 아픈 당사자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소위 ‘정말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곁에 있는 사람이, 그의 말과 행동과 표정이 보이지 않을 수가 있다. 당장 눈앞에 놓인 그의 감정, 상태, 그의 몸, 그의 감각이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변에서 보내는 도움과 믿음의 신호는 그에게 쉬이 가닿지 못한다. 아빠의 조울증을 마주하기 이전에도 나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주변 사람이 무척이나 아프거나 우울한 모습을 보며 내가 그것을 고쳐내거나 회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못내 속상해한 일이 많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내며 뼈저리게 느낀 것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은 내가 고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치료와 회복이 나의 몫이라는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인으로서 그의 곁에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눈에 나의 존재가 보이면 된다. 그가 우울의 바다에서 떠밀리고 휩쓸릴 때 떠올라 있는 부표같이.     


아빠의 변화를 한 차례 지나오며 나도 꽤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안 타고 뭐든 알아서 잘하는 딸로 인정받고 싶었던 나는 그 이상한 자존심을 굽히고 더 많은 고민과 일상을 가족과 공유한다. 이전까지 숫기 하나 없던 내가 아빠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잡아보고,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지더라도 그 속에서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가고 싶은 곳들을 같이 가곤 한다. 그렇게 자꾸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눈을 맞대는 연습을 한다. 그런 일들로 일상의 틈을 메워가는 것이다. 언제든 다시 마음속에 혼란과 슬픔의 파도가 차곡차곡 채워질 때 부표처럼 서로를 찾을 수 있도록. 내가 느낀, 주변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 전부였고 또 그 전부가 참 중요했다.     


주변인을 둘러싸고서도 많은 혼란의 파동과 무너짐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주변인으로서 위선과 위악 사이의 줄타기가 가장 괴롭게 다가왔다. 많은 이들은 대체로 아픈 당사자를 돕는 주변인을 칭찬하고 보듬어 준다. 때로는 그 따스함 속에서 내가 대단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고양감. 나는 타인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인물이라는 미묘한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느끼는 순간들은 주변인에게 자신이 당사자를 낫게 할 수 있고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어딘가 그릇되고 부풀어 있는 믿음을 갖게 한다. 위선은 여기서 비롯된다. 당사자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시혜적 시선은 때로, 아니 자주 피상적이거나 어긋난 도움으로 이어진다. 초점이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으로서의 나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타인을 바꿀 수 있다는 특별한 고양감에, 내가 타인에게 이만큼이나 마음을 쓸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더욱 그 아픔으로 나를 던져 넣고 아픔을 겪고 있는 상대가 쉬이 변하지 않아 불안과 슬픔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이 울었고 또 가족과 친구들에게 꺼냈던 말들에는 상대가 나를 아프게 하며 그것이 상대의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은연중에 묻어났다. 그렇게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미 나의 마음이 그렇게 상황을 편집해두고 있었다. 그런 일들은 나 자신을 상대의 아픔을 돌보며 상처 입은 작고 유약한 존재로 꺼트림으로써 가능했다. 나는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감정은 물론이요,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를 의식해 재구성되어 자연스레 일상이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시간이 흘러 상대가 곁을 떠나고 나서야 내 안에 남은 것이 껍데기 같은 감정이었음을 실감했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나는 때로 주변인으로 위치하게 될 때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내 눈앞에서 아픔과 슬픔 속을 헤매고 있을 때, 그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가되 그 안에서 내 몸집과 역할을 부풀리거나 아주 작게 꺼트리지 않도록 한다. 이는 더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부표를 만드는 중요한 작업이다.          



돌아가기(回歸대신 나아가기     


나는 자주 사람들에게 ‘아프지 말라’, ‘건강해라’라는 인사말을 건네곤 한다. 그런데 이따금 그 말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왜 아프면 안 되는 걸까, 건강하다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들을 발음하는 걸까. 이러한 의문들은 이 글을 쓰기로 막연하게 다짐한 시점에 어느 순간 불쑥 떠올라 내 마음 한 켠에 잠시, 아니 꽤나 오래 머물렀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은 아픔이 사회 속에서 불완전, 불안,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전제로 하며, 건강하라는 말은 그 건강함의 기준과 요건이 무엇인지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 말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픔의 사회적 구성을 의도한 것일 리가 있나. 생각은 죽 이어져 결국 사람들이 아프지 말라는 말을 건네는 마음은 하나로 수렴하는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오늘 내가 마주한, 안온하게 살아가는 네가 그 모습 그대로 삶을 이어갔으면 좋겠어.’, 혹은 ‘지금 당장은 아프더라도 내가 봐온 이전의 너처럼 다시 안온하게 생활했으면 좋겠어.’와 같은 마음들로.      


그러나 언제까지고 변화를 겪지 않을 수는 없지 않나. 그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인 변화든 어떤 사건이나 의도에 의한 변화든 몸과 마음의 변화는 이따금씩 그 자체로 아주 낯설 것이고 불편할 것이며 때로는 사회 속에서 그 변화가 아픈 것으로 지칭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지칭되어 일상에서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던 각종 인프라가 되려 나를 구속하고 제한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변화는 모든 인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알 수 없는 변화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사실 변화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낯설고 불편한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이제 내가 발음하는 ‘아프지 말라’, ‘건강해라’라는 말은 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대신 이렇게 길고 긴 말로 풀어낼 수 있겠다. ‘네가 신체 구조에 변화를 겪더라도 그것이 너의 이동과 활동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우울과 슬픔, 혼란 속에 있더라도 그 사이를 헤쳐나올 여러 갈래의 길을 보고 또 기꺼이 걸을 수 있으면 좋겠어.’ 다만 매번 이렇게 이야기했다간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도망거거나 혹은 잠들어버릴 사람들이 있을테니…. 긴 말을 뭉뚱그려서, 아니 조심스럽게 살포시 접어 아프지 말라는, 건강하라는 말에 담아 이야기한다. 상대가 내가 접어 넣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건넨 말에 슬쩍 웃으며 ‘알겠어. 너도’라고 이야기할 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맑고 따스한 기쁨이 조용히 차오른다. 그리고 방금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글을 읽는 이가 그 흔한 안부 인사를 들을 때 누군가는 이런 마음으로 발음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준다면 조금 더 기쁠 것 같다고.     


조울증을 포함한 여러 정신질환들은 으레 완치를 상상하기 어렵다. 정신질환은 영원히 나을 수 없다며 겁을 주려는 마음에서 꺼낸 말은 아니다. 그것이 꼭 ‘완치를 상상해야만 하는 아픔’인지에 대해 물으려 한다. 어떤 종류의 변화를 겪더라도 변화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묻는다면 많은 이들은 무심코 ‘그렇다’라고 하지 못하고 망설일 것만 같다. 앞서 말했듯 아픔은 많은 변화들 중에서도 사회에서 매우 특수하게 규정하고 있는 변화다. 그런 아픔이라는 변화 앞에서 아프기 이전으로 회귀하려고만 하는 시도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꼭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엄마가 아빠의 완치와 아빠가 아프기 이전의 우리 가족을 꿈꿀 때, 미처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이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이제 자신의 정의가 부수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아빠를 크게 상처입힐 때 아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안다. 아빠는 이제 지칠 때마다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는 또 딸이라는 위치를 볼모로 아빠를 협박하게 될 수 있다. 그걸 아는 엄마와 아빠와 내가 그 이전의 모습과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나는 회귀보다도 이 공통적이면서 개별적인 아픔의 경험을 안고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아픔을 겪은 몸과 마음은 어떤 상태이며 그 몸과 마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낼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많이 거두어졌을 즈음 각종 뉴스와 신문에서 한껏 다루던 주제만 보아도 그렇다. ‘엔데믹,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따위의 제목으로 채워진 보도들은 코로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그려나가야 할지를 여럿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엔데믹이니 포스트 코로나 시대니 하는 거창한 말들 이전에 우리는 이미 몸소 코로나가 남긴 경험과 감각을 안은 채 그에 맞춰 일상의 방식을 조금씩 바꾸어 살고 있다. 나만 하더라도 학교 수업, 스터디나 연말 모임을 할 때 줌과 구글미트를 이용하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또 무조건 필참, 무조건 음주라는 무언의 규칙이 존재하던 단체 모임보다 개인의 시간과 상황을 존중하는 단체 모임의 분위기가 이제는 더 익숙하다. 이렇듯 나아가기에 대한 고민에는 나의 생각보다도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한다. 아픔이 주는 새로운 일상의 리듬은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내게 익숙해져 있다. 아픔을 어떻게 다룰지, 받아들일지 고민하기보다 그저 그렇게, 그냥 그 경험을 안은 채 나아가는 것이다.     


아빠도 나도 그렇게 당사자로서, 주변인으로서 함께 겪은 조울증의 경험과 감각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 아픔의 경험은 여전히 낯설고 또 조금은 두렵지만, 그것을 한껏 껴안고 있다. 그렇게 그것을 안은 채 산다. 나는 그것을 안고 있기 때문에 아빠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한다. 아빠도 그것을 안고 있기 때문에 매일 저녁 약을 먹고 나와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한다. 약과 산책과 대화와 눈맞춤은 그렇게 나와 아빠의 새로운 일부가 되었다. 그런 새로움 속에서 지내면서도 조울증은 문득 또 다른 국면으로 나와 아빠를 찾아올 수 있고, 혹은 그와는 다른 모습의 아픔과 슬픔이 덮쳐올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아빠가 당신이 아플 수 있다는 세계에 발을 들인 것과 곁에서 아빠와 내가 손을 맞잡고 있는 서로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견고함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아픔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쓰리겠지만 또 그것은 새로운 몸의 감각과 경험을 내게 남길 것이다. 그렇게 좀 더 많은 아픔을 다루고 그 아픔에 나를 기꺼이 맞추어 낼 것이다. 이리저리 많은 아픔과 부딪히며 내 몸과 마음은 어떻게 조각될까. 그 조각이 이제 나는 조금 기대되기까지 한다. 그렇게 아픈 몸과 마음의 리듬에 맞추어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게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전하고 싶다. 아프기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안은 ‘나’의 모습과 행동에 맞춰 새로운 양식의 삶을 그려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나는 감히 이야기해본다. 우리는 무수히 아플 것이다. 하지만 기어이 살아가리라. 서로의 부표를 끊임없이 찾아내면서. 한껏 껴안고 둥글린 아픔과 함께.



편집위원 서로(seoroes@naver.com)


[1] 수잔 웬델, 「거부당한 몸」, 2013, 그린비.

[2]  일정 시기 동안 정신과 행동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성향이 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17화 우리는 나아가도 좋고 멈추어 있어도 좋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