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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9호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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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25. 2023

별이 바람에 스치어도

[움트다] 편집위원 오월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


7월 한 달 내내 글을 쓰는 것보다 글이 안 써진다는 생각을 하는 일이 더 잦았다. 물론 지난 여름에도,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며 보낸 숱한 새벽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 편집자의 신고식에 불과했고 이번에는 문제가 좀 심각했다. 대학 내 나만의 공간을 찾다 연희관 015B에 무작정 도착한 이후 매번 소재 고민에 시달려왔던 나지만, 편집장이 되자마자 이런 위기를 맞이하다니. 마감에 맞춰 글을 생산해내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나무에게 미안한 수준의 글만 쓰고 지우기를 한 달 내내 반복했다. 대체 원인이 뭘까. 원인을 찾아 끊임없이 부유하던 나의 무의식은 6월 말, 방학 후 처음으로 열린 공일오비 편집 회의에서 멈추었다.


“홍콩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홍콩이 시위를 통한 민주화를 시도했지만 코로나 19 때문에 좌절되었다고 들어서… 다들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보고 싶어요. 홍콩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요. 퇴보하는 것만 같은 세상 속에서도 잘 살아가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분명 나는 그 날 이렇게 얘기했다. 참 해맑게도 말했다. 잘 살아가보자고, 홍콩을 잊지 말자고. 글의 방향이 홍콩영화가 될지 홍콩 사회가 될지는 미정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홍콩과 홍콩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홍콩을 잊지 말아 달라고, 동시에 우리 무너지지 말고 계속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미 워드 창에 ‘모든 게 불안했지만 필사적으로 불안함을 눌렀던 2021년 6월, 나는 매일같이 중경삼림을 틀었다.’ 라는 문구를 입력해둔 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호에서 내가 쓸 원고가 홍콩과 홍콩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허나 그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소식이 들렸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무너졌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하다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온열 질환으로 죽었고, 어떤 사람은 수해로 인해 죽었고, 어떤 사람은 그저 길을 걷다가 죽었다. 비상식적인 상황을 매일매일 목도하고 있자니 기운이 쭉 빠졌다. 내 일상이 무너질까 하는 걱정에 애써 묵혀두고 살아가다가도 문득 문득 단말마처럼 터지는 분노가 존재했다. 몇 주간 아무런 글도 쓰지 못한 채, 7월 중순의 편집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일이 너무 많네요. 매일같이 속상한 소식들만 들려서… 이런 상황 속에서 홍콩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철없게 느껴져요.”


그 후 거짓말처럼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개인 원고를 쓸 자신이 없어 공동 기획 원고를 썼지만, 예전 같았으면 4시간만에 써 내려 갔을 글이 문장마다 막혔다. 문장 하나하나에 자신이 없었다. 뭘 해도 ‘구렸다’.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쓰기 싫은 보고서를 어거지로 쓰듯이 인위적으로 분량을 늘렸다. 이대로 글을 써서 낸다면 공일오비의 이름에 먹칠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편집장인데 고작 이런 글이라니. 매 편집회의에 갈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내 발은 반석 위에 섰다


동주: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 속에 숨어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몽규: 그 힘이 어더렇게 모이는데. 어?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리 문학 속으로 숨는 것밖에 더 되니?
동주: 문학을 도구로밖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렇게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어느 날, 영화 <동주> 속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해당 장면은 영화 <동주> 속 두 핵심 인물, 윤동주와 송몽규가 대립하는 장면으로 둘의 문학에 대한 상반된 인식을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의 힘을 믿었고, 송몽규는 한 때 윤동주와 함께 문학인으로 살아갔으나 이후 문학보다는 총의 힘을 더 믿고 독립 투쟁을 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동주>는 둘의 이러한 관계를 윤동주 내면의 대립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사용하며, 윤동주는 시를 쓰면서도 송몽규처럼 적극적으로 독립 투쟁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동주>는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던 중학생 시절 세 번이나 연속해서 봤던 영화였다. 당시 나는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서 그의 시를 읽고, 평전을 보고, 그를 주제로 한 여타 작품들을 찾아보곤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부끄러움에 대해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냥 좋아서 마음 속에 계속 담아두던 장면들은 내가 자라나는 동안 계속 내 마음 속에 있다가 22살의 어느 여름 갑자기 풀려난 것이다. 내가 글로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자각한 그 순간에 말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갖고 있었을 대학에 대한 로망이 없는 편이었다. 대학에 온다고 해서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란 기대를 하진 않았다. 다만 대학에 와서 여러 활동을 하고, 나의 경험을 넓혀가겠다는 단순한 다짐은 여러 번 했고 내가 기대했던 여러 활동과 경험에는 사회 운동적인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대학에 오면 당연히 시민단체를 찾아가거나 학내 인권 단체 등에 들어가서 여러 활동을 할 줄 알았다. 대학생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뭔가를 해 나가겠다는, 21세기 학생의 7-80년대 대학생적 낭만은 재수를 하는 동안 한 번, 또 송도 캠퍼스 기숙사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 화면만 바라볼 때 두 번 꺾였다. 대학에 들어오고 깨달은 것은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두려움이 많고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재수가 끝나고 나니 사회는 좀 더 극단적으로 변해 있었고 극우는 전세계적인 트렌드처럼 번져갔으며 사람들은 좀 더 예민해졌다. 그 약간의-사실 꽤나 큰-차이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거쳐 대학에 들어와보니 사회는 내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합격 발표를 확인한 후 인스타그램에 합격증을 업로드하자마자 했던 에브리타임(이하 에타) 가입은 대학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도 했다. 보수 정당에서 내놓은 차별적이고 근거 없는 공약들은 큰 호응을 얻는 듯 보였고 백래시는 내 생각보다 컸다. 에타 내 인기 있는 게시물을 모아 보여주는 ‘핫게시판’을 보고 있자니 대학 사회에서 나의 의견을 펼쳐 나가기가 꺼려졌다. 고등학생 시절 n번방 이슈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 이슈를 내 인스타그램으로 퍼나르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며 사회 문제를 알려보려 애쓰던 나는 온데간데 없었고 내 인스타그램은 줄곧 조용했다.


움츠러든 나는 자연히 과 생활에서도 멀어졌다. 이미 대학 사회에 대한 피곤함을 느껴버린 것이다. 혹자는 온라인 세상을 보고 오프라인 세상을 멀리 하는 내가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생각은 오프라인 세상에서 멀어진 내가 온라인 세상에서 영혼 없이 유튜브나 sns를 떠돌았다는 점에서 정당한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온라인 세상과 오프라인 세상의 미묘한 단절 때문에 더더욱 오프라인 세상이 낯설었다고 항변하고 싶다. 온라인 세상 속 사람들은 사익과 공익 사이에서 사익을 선택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고, ‘누칼협(누가 칼로 협박했냐)’[1] 는 레토릭을 망설임없이 많은 상황에 대입하는 등 잔인하도록 이기적이었지만 오프라인 세상의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라인 세상의 사람들이 극소수라 오프라인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고, 역으로 오프라인 사람들은 온라인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엔 언론이 보여주는 이기주의적 목소리가 너무 컸다. 때문에 그 간극이 나에게 피로감으로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공일오비에 흘러 들어왔다. 과 잡담방을 나갈까 말까, 고민고민하던 찰나 무심히 띄워진 몇 개의 카톡에는 공일오비 모집 공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에서 할 만한 활동을 찾던 나는 무심코 공일오비 브런치를 눌렀고, 나와 같은 가치관,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이 만든 온라인 공간은 자연스레 나를 공일오비로 이끌었다. 오프라인-온라인의 미묘한 단절과 연결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가 온라인 세상을 통해 오프라인 공간, 공일오비로 당도하게 된 것이다. 


공일오비는 내게 꽤 괜찮은 도피처이자 낙원이었다. 말과 대화 대신 글로 대학 사회와 소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이들의 다른 말을 듣고 대화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대신 글이라도 써보겠다고 다짐했다. 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글쓰기라는 점도 내게 꽤 괜찮은 핑계였다. 내 본명 대신 오월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오월의 이름을 빌려 내 이야기를 썼다. 필명은 내게 자유를 줌과 동시에, 온라인-오프라인의 미묘한 단절과 연결을 또 다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쓴 첫 글은 공일오비를 처음 시작하던 내 기대보단 간접적인 글이었고 나는 내가 글로 도피해 와서는 또 다른 주제의 글로 도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리 문학으로 숨는 것밖에 더 되니?’ 이 질문에 나는 영화 속 동주처럼 ‘문학을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공일오비에서 글을 쓰는 것 역시 하나의 활동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활동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인 도피자라고 나를 규정지어버렸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몽규: 야 동주야, 니는 시를 계속 쓰라. 총은 내가 들거이니까.
동주: 왜.
동주: 너는 내가 시를 쓰는 게 문학으로 도망치는 거라면서 왜 자꾸 나를 도망치게 만드니.
*
몽규: 세상이 날 필요로 하는데 어찌 책만 보면서 살겠니.


시간이 지나고 점점 대학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도피자라는 생각은 조금씩 강해졌다. 변화해야 한다고 세상이 나에게 촉구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게 느껴졌다. 공일오비도 특이점을 지나고 사회도 특이점을 지났다. 나는 공일오비에서 유영하던 편집 부원을 지나 편집장이 되었고, 동시에 1학년에서 2학년이 되었다. 국제 캠퍼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교양 수업만을 들으며 유유자적 살아가던 1학년은 다신 돌아오지 않으며 서울 한복판 서대문구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비로소 새내기가 된 듯한 설레는 마음이 듦과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심란함이 함께 찾아왔다. 사회는 내게 훅 덮쳐왔고 온갖 사회 문제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와중에 나는 매일 학교에 와서 정치 사상 수업을 수강하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토론을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때가 오면 말하기보다는 그림자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를 택하기도 했다. 


더 이상 그림자처럼 앉아 책만 읽을 순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고, 내가 뜨거운 태양을 피해 에어컨 바람 밑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누군가는 폭염을 맨몸으로 견디며 노동하다 사망했다.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하루에 약 26km, 걸음 수로는 대략 4만 3000보를 걸었던 30대 카트 노동자 김동호 씨는 이번 여름, 폭염을 견뎌가며 근무하다 온열질환으로 숨졌다.[2] 단순히 올해가 유난히 더워 생긴 문제는 아니다. 지난 여름에도 열사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있었다. 2022년 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도 변함없이 돌아가던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온몸이 익은 채 사망했다.[3] 이 두 번의 여름 사이에서 또 다른 건설 노동자 양희동 씨가 분신했다. ‘건폭‘을 때려잡겠다는 정부에 따라 경검이 건설 현장 업체와의 교섭을 통해 노동조합원을 채용하고 노조 전임자에게 활동비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던 이들을 공갈로 판단, 수사를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4] 이에 따라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지난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1박2일간 집회를 진행했다.[5]


2022년 8월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지난 19일 기준으로 53회차를 맞았다. 한창 학기 중이던 지난 5월에는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이 고공 농성을 하다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6]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전국의 교사들은 주말마다 서울에 모여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를 벌였다.[7] 결국, 종내는, 기어이, 시작되고 만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막기 위해서 민주당에서는 지난 23일 국회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했다.[8]


수많은 소식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 소식 속에는 수많은 사망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책이 죽었다. 노동자가 죽었고 시민이 죽었다. 방송이 죽었고 지구도 죽어갔다. 행인도 죽고 모두가 죽는다. 세상이 온통 장례식이라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 보이는 온 세상의 번잡함을 보고 잠깐 밖에 나가면 내 피부에 와닿는 것이라곤 무더운 더위 뿐이었다. 약간 더울 뿐,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그 평화로움을 느끼며 외려 나는 몇 번이고 조급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뭐라도 해볼 용기가 있지는 않았다. 뭔가를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하는데 어찌 책만 보면서 살겠니.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동주>의 장면에서 이 말이 마음에 콕 박혔던 것은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가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몽규처럼 적극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2월 독일어 수업을 들으러 매일 남산까지 향했던 어느 날, 나는 시위를 지나쳐 수업을 들으러 갔고 그 시위에서는 이태원 참사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발언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버스 노선이 변경되어 50분동안 걸어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시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능동적이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짧은 외면의 순간은 드문드문 내 일상에 나타났다. 다시 5월이 돌아오자 학내 경비 노동자와 청소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조끼를 다시 입었고, 나는 인사드린 후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러나 성큼성큼 내 차례가 돌아오고 있었다. 편집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르던 8월 24일에는 일본 대사관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된 대학생 16명 중 우리 학교 학생이 포함되어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나는 경찰서에 연행된 대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서명을 했고, 인스타그램에 해당 사건을 공유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저렇게 다른 사람들이 갖은 노력을 다해도 세상은 끊임없이 뒷걸음질 치는데 내가 무얼 하든 달라질 게 있나, 하는 생각은 그나마 있던 용기마저 지웠다. 


미미하고도 미지근해진 내 삶의 온도. 붉게 타오를 줄 알았던 청춘이 픽 꺼져버리는 기분. 매일매일 작은 보폭으로 나의 청춘이 죽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픽 꺼져버린 내 이십대는 보잘것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 후 그렇게 나는 일종의 도피처였던 글조차도 놓아버린 것이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지만


해답을 얻은 곳은 기후위기 독서 모임이었다. 마지막 모임에서 나온 질문, ‘특이점이 지난 AI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에 난 No를 택했다. 인간다움에 논하던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 들어선 비인간, 키오스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으로 그 방향이 바뀌었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환대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AI 관련 업계에 종사 중이던 한 분은 키오스크가 적응이 되니 편하다, 자신은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기에 일상 속에서의 교류가 불편하다며 일상 속 사람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줄어든다는 면에서 키오스크가 인간보다 훨씬 좋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머릿속에 혼재되는 온갖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뗐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것, 그리고 비인간이 인간의 업무를 떠맡은 여러 매장에 가면서 느꼈던 바를 토대로 키오스크가 인간을 100% 대체하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던 나는 곧이어 일을 하며 느꼈던 환대의 가치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가게에서 기계가 된 것처럼 주어진 일을 시간 내에 해내다보면 그 짧은 시간동안 저는 저 자신보다는 서브웨이 알바생1로 남게 돼요. 바쁘게 흘러가는 알바생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제가 저 자신을 느꼈던 때는 그 와중에도 굳이, 애써 노력해서 사람을 환대하던 날이었어요. 처음 매장에 오신 할머니께 하나하나 단계별로 친절히 알려드린 후 결국 할머니께서 샌드위치 하나를 다 드시고 가게를 나설 때, 그런 순간이 당시에는 바빠서 그냥 지나치지만 결국 월급 대비 과중한 업무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작은 환대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인간이 너무 오만하고, 그래서 AI가 인간 이상의 능력치를 발휘할 때 비로소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인 ‘인간다움’을 부여하려고 한다는 차원에서 저 질문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마음 속에 있던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너무 안 좋아져도, 인간다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굳이 다정함을 보여주고 사람을 환대하는 존재들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도처에 널려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온갖 생명을 죽여가며 생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인류를 바라보며 ‘인간다움’이 좋은 가치가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던 나, 의심 끝에 진보에 대한 희망도 용기도 놓아버린 채 그저 미지근한 하루를 이어가던 나를 역설적으로 인간다움 그 자체가 위로한 것이다. 인간의 모순을 알면서도 환대라는 가치를 지켜나갈 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느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용기를 얻는 나와, 나의 말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음을 느꼈다. 


굳이 무언가를 하는 것. 빠른 배송으로 싱싱한 야채가 집 앞까지 배달되는 편의를 누릴 수 있음에도,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고 있으니 굳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나는 오늘도 핸드폰에 띄워지는 뉴스 알람을 보며 울적함을 느끼지만, 밖에 나가보면 어느새 가을은 성큼 다가와 내게 높다랗고 맑은 하늘을 보여준다. 오늘도 글을 제대로 못 썼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편집 회의를 하러 가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지나치는 학교의 풍경들이 꼭꼭 챙겨보다 보면 예쁜 풍경이, 좋은 바람이 느껴져 금방 행복해진다. 버스를 타며 습관처럼 건넨 인사에 기사님이 밝게 응하실 때 또 기분이 좋아진다. ‘누가 칼로 협박’하지 않아도, 굳이 굳이 해나가는 일상의 작은 다정들은 내 안팎을 위로하고 내가 뒷걸음질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텅 빈 문서창을 다시 바라본다. 윤동주는 왜 1년 2개월의 절필을 끝내고 다시 펜을 잡았을까?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언론 탄압을 당한 기자들이 펜을 놓겠다며 발표한 선언문은 왜 아직까지 남아 매년 5월마다 기억될까? 왜 독재 국가에서는 금서를 지정할까? 언젠가 친구는 내가 공일오비에 들어오라 권했을 때 아직 그렇게까지 용기 있지는 못하다고 답했다. 그 말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용기를 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절망하는 마음을 녹여 시를 써내는 것, 펜을 놓는다고 글로써 선언하는 것, 기록과 글이 두려워 금서를 지정했던 독재 정권. 나는 도피처랍시고 도착했던 공일오비에서, 사실 내가 용기를 내고 있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굳이 글을 쓰는 것, 개인 원고를 쓰지 말까 고민하다 결국은 써내는 것. 부끄러움을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한 줄 한 줄 써보는 것. 절대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폄훼하고 싶지는 않은 나의 시도. 세상은 징그럽게도 더디게 변하고, 그래서 어떤 날은 세상이 한없이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오늘도 공일오비 책이 꾸준히 소진되고 올해도 공일오비는 여전히 세 곳의 독립 책방에 책을 보냈으며 공일오비는 어느새 19번째 책을 낸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오늘 밤도 부끄러움에 한없이 청동 거울을 닦을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내가 글의 가치를 의심했지만 결국 다시 펜을 잡은 것처럼, 당신이 의심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길. 그래서 매일 자신만의 작은 진보를 지켜낼 수 있길 바라면서.



[1] ‘누칼협’ 레토릭은 2021-2022년 등장한 레토릭으로, 개인이 겪는 어려움과 불만이 모두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임을 강조하여 구조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의 시작을 막는 레토릭을 뜻한다. (출처: 시사오늘, 한국기자협회보)

[2] 연승, 「코스트코 대표, 폭염에 4만 3000보 걸으며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에 “병 숨겼지?” 막말」, 서울경제, 2023.07.29. (https://www.sedaily.com/NewsView/29SBI85XQC) 

[3] 전수경, 「건설 현장은 40도…사망한 노동자 본 의사 “온몸이 익었다”」, 한겨레, 2023.07.26.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01797.html)

[4] 전혜원, 「2023년 노동절에 건설 노동자가 분신했다」, 시사IN, 2023.05.23.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332)

[5] 신정환·임준형, 「건설 노동자 수만 명이 상경 파업 집회를 하다」, 노동자연대, 2023.05.16. (https://wspaper.org/article/29427)

[6] 김용희, 「경찰, 고공농성 노조원 머리 1분간 내리쳐」, 한겨레, 2023.05.31.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94011.html)

[7] 장재훈, 「서이초 교사 3차 추모 집회 8월 5일 광화문서」, 에듀프레스, 2023.07.31. (http://www.edupress.kr/news/articleView.html?idxno=10668)

[8] 고범준, 「민주, 촛불집회서 일본 오염수 투기 규탄... “윤석열 탄핵” 구호도(종합)」, 뉴시스, 2023.08.23.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30823_0002424173)


편집위원 오월(chlsunny@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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