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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9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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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25. 2023

파란(波瀾)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

[움트다] 편집위원 파란

*주의 –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질구질하고... 뭐 그렇습니다.


 자동차 에어백을 터트려 본 경험이 있는가?

 지독한 화학 약품 냄새, 안경을 날려버릴 정도의 강한 충격, 그리고 뜨거운 발열. 에어백이 터지는 것 또한 아자이드화 나트륨이 질소와 나트륨으로 분해되는 화학 반응이므로, 발열 반응과 에너지 방출로 인해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터진 에어백 한 개의 가격이 80만 원 이상이라는 사실과, 커튼 에어백을 수리하려면 여러 개의 센서와 안전벨트 주변 부품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의 속은 더욱 쓰라릴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고 이후 당신의 정신이 온전할 때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에어백이 작동할 정도로 사고가 크게 일어났다면, 당신의 정신이 온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22.01 – 에어백에 얻어맞고, 삶을 복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에어백이 터졌을 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할 수 있냐고? 그야 내가 해당 사고의 당사자였으니까. 

2022년 1월 1일의 해돋이.

 2022년 1월 1일 오전 8시경, 나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의 한 왕복 2차선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사고 시점의 정확한 기억이 없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매우 피곤한 상태였던 것 같다. 좁았던 도로는 갑자기 두 갈래로 갈라졌고, 나는 길을 잘못 들어 휴양 시설의 입구로 진입하고 말았다. 길이 좁아 차를 돌리기 어려웠고, 주변에 차량 통행이 없었으며, 분기점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후진하여 올바른 경로로 복귀하려 했다. 오르막길이었기에, 후진을 하자 차는 꽤 빠른 속도로 굴러갔다. 나는 차량을 통제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차는 도로 오른쪽의 깊이 2m 정도 되는 도랑에 빠지며 전도되었다. 차의 전복 감지 센서가 작동했고, 차량 좌우의 커튼 에어백과 사이드 에어백이 작동하며 내 옷과 안경을 강타했다. 이후 화학 반응의 부산물인 연기와 불쾌한 냄새가 차 안을 감쌌다. 나는 황급히 시동을 껐고,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차가 오른쪽으로 전도된 상태에서 왼쪽 문을 열기 위해서는 (차 문을 들어 올리듯 하여 열어야 하므로) 엄청난 힘이 필요했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힘이 센 편이 아니었기에 차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바깥쪽에서 열어주어서, 나는 차량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 일가족이 나를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쪽팔림(더 정확한 표현을 찾으려 했으나 없는 것 같다)’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차 상태를 확인해 보니, 오른쪽 창문 상단부의 철판과 사이드미러가 약간 부서진 것 이외의 손상은 없었다. 나 또한 별다른 외상을 입지는 않은 상태였다.  

뒤집어진 자동차.

 나는 ‘차가 좀 다쳐서 문제가 될 것 같지만 괜찮다, 정말 감사하지만 가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그 일가족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고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가족의 아버지 되는 분은 나의 음주 여부를 물어보았고(나는 맨정신이었다), 어머니와 딸로 보이는 분들은 자신들의 차로 나를 데리고 와 따뜻한 차를 건넸다. 이윽고 그들이 부른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했다(나는 부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불러 주셨다). 구급대원들은 내 상태를 보더니 다시 돌아갔다. 경찰관들은 내 운전면허 정보를 조회하고, 보험사 견인차가 올 때까지 자신들의 차에 잠시 머무를 것을 권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경찰차 뒷자리에 앉아보았고, 경찰차 뒷자리 내부에서는 차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험사 견인차가 도착했고, 아까 나를 도와주셨던 일가족과 경찰차는 현장을 떠났다. 거대한 크레인을 들고 온 견인차는 40만 원을 받고 차를 도랑에서 끌어올렸다. 차는 다행히도 굴러갔기에, 사고 장소인 남해가 아닌 거주지에서 수리하기로 했다.  

 크레인으로 인양된 차는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으나, 여러 문제가 있었다. 시속 60km 이상의 속도를 내면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고, 차량 내장재는 에어백 작동의 여파로 산산조각이 났다. 사고로 부서진 오른쪽 사이드미러는 덜렁거렸다. 도저히 고속도로를 통해 집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국도 경로를 찾았다. 

 남해에서 내 집인 성남시 분당구까지 국도로 가려면 약 400km를 달려야 했다. 하루 안에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기에, 나는 전북 전주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새해 첫날 거의 모든 숙박업소는 예약된 상태였고, 나는 의도치 않게 꽤 비싼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호텔 방에 누워 멍을 때리며, 어쩌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는지에 대해 자문했다. ‘진상 규명’ 과정을 통해, 나는 이 또한 내 악취미인 ‘자유의 남용’으로부터 기인한 현상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면허를 따고 약 6개월간의 연습을 거친 뒤, 나는 우리 집의 차를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새벽에 해돋이를 보러 가겠다는 무리한 목표를 수립했고, 결국 졸음운전을 함으로써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내게 주어진 자유를 그리 잘 활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유를 남용했고, 마지노선을 시험했다. 대학생이 되고선 마음대로 수업을 빼먹었고, 스마트폰을 처음 샀을 땐 중독자처럼 사용했다. 독학 재수학원에 다닐 때는 ‘부모 찬스’를 써서 계속 늦게 출석하다, 결국 학원을 그만뒀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내게 느낄 강렬한 한심함이 내게 엄습하는 것 같다. 

 여러분이 그래도 내 입장을 이해하길 원하니, 내 나름대로 항변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토록 자유를 활용하는 데 서툴렀던 이유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내게 허락된 자유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나의 성장 과정을 상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09.08 – 미숙한 부모와 어렸던 외아들


 2009년 8월, 나는 아빠 회사 사정으로 대구에서 경기도 용인시로 전학을 왔다. 첫날 엄마 손을 잡고 등교했을 때, 초등학교 담임의 첫마디는 “애가 한글은 알아요?” 였다. 우리 엄마는 그 말에 상당한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말은 늦게 시작했어도-너무 말을 안 해서 언어치료센터까지 갔었다-글은 말을 뗌과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첫날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애가 지방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거냐며 분노했다.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내 학교 성적을 엄청나게 챙겼다.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수학 시험에서 2개를 틀려 90점을 받아왔을 때 엄마의 싸늘한 표정과 한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오답 노트를 쓰게 하면서, 엄마는 지속해서 ‘왜 맞힐 수 있는 문제를 틀려 오냐’, ‘반에 100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너는 왜 90점이냐’라며 나를 몰아붙였다. 

 이후에도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마다 2개 이상 틀리면, 그날 집의 분위기는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시험을 망친 날이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초등학교 도서관에 책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 ⌜율리시스 무어⌟, ⌜해리포터⌟ 시리즈를 외울 정도로 읽어댔다. 도서관은 4시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후에는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2015.03 – 멀었던 외대부고, 가까웠던 권위주의


 아무튼 그렇게 6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첫 시험의 평균은 91.9점이었다. 두려웠다. 집에는 평균 93점 이상, 전교 20등 이내의 성적을 받을 것 같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 후 성적표를 받아든 아빠의 표정은 굳어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라고 나를 힐난했다. 더군다나 그날은 5월 8일이었는데, 너는 어떻게 된 게 선물 하나 안 사 왔냐고 한 번 더 혼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돈통에서 5만 원 한 장을 꺼내 선물을 사러 동네 빵집에 갔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기에, 제일 비싼 케이크 2개밖에 남지 않았었다. 나는 3만 8천 원짜리 케이크 하나를 사서 집에 돌아갔다.  

 부모는 내가 이름조차 어려운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이하 외대부고)’라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하길 원했다. 부모의 꿈은 곧 내 꿈으로 전이되었다. 부모는 외대부고에 가면 진학 가능한 대학이 엄청나게 달라지고(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인생이 변할 것처럼 말했다. 외대부고 진학은 성적만 잘 받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험이 끝나면 각 과목 선생님을 찾아 소논문을 제출해야 했고, 입시를 위한 동아리 활동도 병행해야 했다. 내 보고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빼앗듯 집어채 가던 1학년 체육 담임, ‘욕심이 많은 아이’라고 생활기록부에 낙인을 찍은 2학년 체육 담임, 동아리 명단을 제대로 작성해 가지 못하자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던 3학년 과학 교사는 아직도 꿈에서 나를 괴롭힌다. 학교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외대부고 입학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당연한 과정들이라고 생각하고 인내했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과학 시험을 망쳤고, 이에 따라 외대부고 진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과학 시험이 끝난 날 엄마와 끌어안고 펑펑 울던 것이 기억난다. 가족은 ‘외대부고가 안 된다면 다른 자사고라도 가자’며 급히 다른 학교를 알아보았고, 나는 타지역의 전국 단위 자사고에 진학했다. 


 사회, 경제적 지위가 안정적이지 못하지만,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교육 정책의 변화는 뼈아프고 두렵게 다가온다. 내 부모가 외대부고에 목맸던 이유도, 그래서 나를 ‘쥐 잡듯 키우던’ 이유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평준화 정책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평준화 이후의 일반고는 별로다’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그렇다면 자사고/외고/과학고 등에 진학하는 것이 주요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믿음이 공고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공교육과 교육 정책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비틀린 믿음이 지속해서 가정과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정부는(어떤 정부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공교육의 신용도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념에 지배당하거나 여론에 휘둘려 졸속 행정을 거듭한다. 충분한 예고 없이 고교 블라인드제를 시행하고, 정시/수시 비율을 입맛대로 변경하고, 자사고를 폐지한다고 했다가 부활시키고, 난데없이 수능의 난이도를 문제 삼는다. 이래서야 공교육을 신뢰할 수 있을까. 제도의 변화로 야기되는 혼란은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이들에게 직격탄을 안길 뿐이다. 특권계층은 제도가 어떻게 변화하든 그들의 갈 길을 묵묵히 나아가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신념과 장기적인 안목에 기반한 개혁이 아니라면, 대입 제도를 그만 건드렸으면 한다는 생각을, 전직 수험생으로서 해보게 되었다.


 내가 진학했던 전국단위 자사고는 기대와 딴판이었다. 기숙사형 남고였던 그 학교는 첫날부터 ‘군기’를 잡았다. 1학년은 2, 3학년에게 인사해야 한다는 규칙을 주입당했고, 수시로 급식실에 불려 가 ‘왜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지’, ‘왜 전화기를 학교에 들고 오는지(스마트폰을 학교에 반입할 수 없다는 교칙이 있었다)’, ‘왜 라면을 기숙사에서 먹는지(외부 음식을 기숙사에서 먹으면 안 된다는 기숙사 수칙이 있었다)’ 같은 이유로 단체 기합을 받았다. 이런 비상식적인 악습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사감과 교사들의 묵인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당히 하라’고만 했으며, 군기를 잡는 행위에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학교 익명 페이스북 게시판에 군기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올라왔으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반발에 부딪혀 매몰되었다. 

 전화를 사용할 수 없고, 학교에서 주는 밥만 먹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매일 6시 40분에 일어나고,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인사도 잘하며 살아가야 했던 약 2주간의 신입생 적응 캠프 기간은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 기숙사 공동 전화기에 줄 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전화기 속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부끄러웠지만 울었다. 

 우리가 80년 5월의 민주화운동과 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로서 민주화를 쟁취해 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자명한 현실이다. 특히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단성 학생만 선발하고, 사립학교의 특성상 교원의 이동이 제한적이었다. 자연스레 구성원들은 구시대적, 권위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회 여러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노력과 사회적인 압박이 진행되어야,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고등학교에서의 첫 학기는 빠르게 스쳐 갔다. 수학을 제외한 내신 성적은 괜찮았고, 친구도 여럿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2학기에 접어들자, 문제들이 중첩되어 나를 압도했다. 기숙사 룸메이트의 비상식적 생활방식으로 인한 갈등, 성적이 별로였던 수학에 매몰된 나머지 다른 과목을 등한시해 추락해버린 내신, ‘스테이플러로 보고서를 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고서를 내 얼굴에 집어던지던 물리 교사, 교내에서 전염병처럼 확산하던 독감에 걸려 아팠던 경험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으로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에게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나를 비난했다. ‘고등학교 자퇴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이다 → 자퇴생이라는 낙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 → 네 실력에 무슨 의대에 가냐 → 그냥 고등학교 3년 꾹 참고 다녀라’라는 논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의 적대적 기류와 싸늘한 대화 과정 전반을 견딜 수 없었고, 차가 집 앞에 멈추자마자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달아났다.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아파트를 지났고, 육교를 건넜고, 하천의 다리를 내달렸다. 지갑에는 만 원밖에 없었고, 시험 기간이었기에 공부할 것은 많았다. 할 수 없이 동네 시립 도서관에 들어갔고, 중학교 때 가장 싫어했던 여학생과 그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학생, 그리고 나 셋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열람실로 향했다. 나의 가장 비참했던 순간을 왜 그들과 함께해야 했던 것인지, 아직도 황당하다. 

 집에 안 들어올 거냐고 몰아세우는 가족의 전화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사실대로 말했고, 도서관에 걸어온 아빠와 손잡고 집까지 걸어왔다. 다 너를 위한 거라고, 고등학교 자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차분한 어조로 설득하는 아빠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퇴를 포기했다. 

 사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기보다는 ‘내가 힘들다는 것, 정신적 지지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가족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답을 정해놓고 묻는 행위는 비합리적이지만, 나는 가족으로부터 ‘많이 힘들지, 그래도 고등학교는 끝까지 다녔으면 좋겠다. 네 곁에는 언제나 우리가 있으니, 힘들면 의지해도 괜찮다’와 같은 종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 종류의 말을 엄마·아빠가 내게 해주었다면, 나의 청소년기는 우울과 무력함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웠을 것 같다.


 나는 대학생이 된 지금도 일주일에 여러 차례 중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시험’과 관련된 악몽을 꾼다. 단원평가와 중간, 기말고사 그리고 내신 점수는 나를 옥죄는 존재였고, 그로 인한 부담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두렵고 괴롭게 만든다. 지금 와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가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엄마나 아빠에게 ‘왜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워야 했는지’에 관해 물어보곤 한다. 그것에 대한 당신들의 답은 ‘그땐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말들이었다. 그건 맞다. 당신께서도 자식이셨던 적은 있었겠지만, 누군가의 부모였던 적은 없으셨으니까. 자식 된 입장으로서 그것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는 분명 나보다 더 부모님과 비극적인 관계에 처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정신적 학대뿐만 아니라 신체적 학대, 나아가서는 경제적 착취로 이어지는 악의 굴레에 빠진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이들에겐 나의 푸념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나마 공통점이 있다면, 미숙한 부모에게 자율성을 침해당하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왜곡된 유교적 가치에 매몰되어, ‘낳아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를 선택하지 못했고, 부모는 자신의 의지로 자식을 세상 밖에 내놓은 이들이다. 재량권을 가진 이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인데, 유독 우리 사회는 부모-자식 관계에 있어 해당 원리에 무심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우리와 너무나도 가깝고 큰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타인’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부모와 나의 관계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들이 나의 바람대로 행동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 또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부모와 자식은 엄연히 별개의 존재이며, 그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냉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또 하나의 인격체이며, 나름의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받아들이면 앞선 후유증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21.03 – 황폐했던 대학가, 가까웠던 대치동


 중, 고등학교에서의 6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이 글을 읽는 20, 21학번은 알겠지만, 2021년의 봄은 대학생에게는 침묵의 봄에 수렴하는 형태로 다가왔다.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행사는 전무했고, 대학교 강의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도 미치지 못하는 품질과 상상 이상의 가격을 자랑했다.  

 나는 내가 합격한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 외진 위치, 그리고 학과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교 사람들과의 애매한 관계도 학교생활의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요소였다. 그래서 학교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다. 결석할 명분이 필요했고, 약대를 목표로 반수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가족은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대치동의 한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비싼 학원비와 막대한 시간을 소모하며 반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도피성이 짙은 반수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결국 6월 평가원 시험을 기점으로, 나는 반수를 포기했다. 

 반수를 포기하니,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에 파묻혔다. 밤낮이 바뀌었고 무기력한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세상은 넓었고, 스마트폰 속 세상은 참으로 깊었다. 무기력하게 유튜브와 넷플릭스 그리고 커뮤니티에 중독되어 황폐한 인생을 살았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고통받았던 기억들도, 2021년 하반기 골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에 매몰되었던 시간도, 2022년 1월 차를 뒤집은 경험도 어찌 보면 시간 낭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과였으나 결국 대학은 인문논술로 입학했으며, 2021년 하반기에는 반수도 대학 생활도 하지 않고 애매하게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헤매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수할 때 매일 들었던 노래 중 싱어송라이터 김마리의 ‘파란’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내가 표현하려는 바를 정확히 말해준다. ‘사라지는 것들은 사실 사라진 게 아냐, 더 커다란 마음을 내게 가져다줄 거야, 헤매이는 시간은 버려지는 것이 아냐’라는 노랫말은 지금 방황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의미 없는 시간은 없음을 우리에게 각인해 준다. 살아가며 부딪히는 순간들은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수많은 순간들이 축적되어 나와 우리의 관계를 구성하고, 현재를 직조하기 때문이다. 혹시 인생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가. 당신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 같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미래에 지금을 되새겨 본다면, 모든 순간은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사고하고 생활하는 방식에 모종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오늘이 낭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1.12 – 홀로서기, 그리고 거듭나기


 그렇게 한 해를 흘려보내고, 나는 ‘다시 수능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능을 한번 포기한 과거가 있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내기는 두려웠다. 2021년 12월부터 나는 수능 준비를 조금씩 시작했다. 인강 패스와 교재를 구입해서 공부했다. 그러다 아빠가 집 앞에 놓인 인강 교재 택배 상자를 발견했고, ‘이게 무엇인지’ 질문함에 따라, 나의 삼수 계획이 발각되었다. 

 예상대로, 내 부모는 삼수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부모의 입장이었더라도, 이미 수능을 한번 포기하고 반년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 자식이 또다시 수능 준비를 하겠다고 하면, 강력하게 반대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삼수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빠와 오랜 시간 논쟁했다. 격앙된 아빠는 내게 ‘재수는 흔하지만, 삼수는 잘 없다’, ‘남자 군 미필 삼수는 답이 없다’, ‘우리 집안의 유전자로는 지금 네가 간 대학이 한계다’와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 나는 그러한 말들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는 집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고시원을 알아보았고, 지금 내 수중의 돈으로 약 1년간은 버틸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그다음 날 아침, 집을 나가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당신의 능력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아빠를 부르고, 해당 내용을 인계했다. 그러자 아빠는 내게 나가라고 ‘흔쾌히’ 동의해 주었고, 큰 목소리와 함께 ‘니 X XX는 대로 살아라’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난 집을 나왔다.


 ‘월세 35만 원, 보증금 없음. 지하철역, 대학교 도보 5분 거리. 아침, 저녁 무료 제공.’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의 한 고시원 세입자 모집 광고 문구였다. 

 3수 선언 이후 집을 나와야 했고, 자금 상황이 넉넉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그곳이 최적의 주거 공간이었다. 저렴한 방값, 아침과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고시원 방 안에는 자그마한 침대와 한 칸짜리 옷장, 낡은 책걸상이 있었다. 책과 가방, 캐리어를 비롯한 최소한의 짐을 넣고 나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책상은 보기 흉했기에, 시트지를 새로 사다 붙였다. 방 안에서 음식을 먹고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레가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러 고시원 내의 식당에 가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환경미화원 근무복을 입은 사람, 인근 아파트 공사 현장의 건설사 마크가 찍힌 작업복을 입은 사람, 공장 안전복을 입은 사람까지. 방 한 칸에 한 명만 살았고, 공용 공간인 식당과 샤워실을 왕래하며 잠깐 마주치는 것 이외의 세입자 간 접촉은 없었다. 때문에 아침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모두가 스마트폰 속 공간에 몰두한 채, 소박한 식사로 위장을 채웠다. 그러고선 각자의 일터 혹은 학교로 향했다.

고시원 방의 모습.

 좁은 고시원 방 안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우울해지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창밖에는 바로 도로와 기차 철로가 있었기에, 차 소리와 기차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석고 소재의 가벽은 방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방어해 내지 못했다. 나는 예민한 편이었기에, 옆방 거주자와 소음을 두고 자주 싸웠다. 매일 밤 여러 방문 밖으로 다양한 국가의 언어로 통화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이에 따라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다. 여름철 에어컨은 제한된 시간 동안만 허용되었다. 도저히 방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기에, 취침 시간 이외의 시간은 밖에서 보내려 최대한 노력했다. 대학교의 빈 강의실, 시립 도서관 열람실, 독서실을 전전하다 보면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방에 들어가면, 예민한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시립 도서관 열람실에 갔다. 국어-수학-탐구 과목 순서대로 공부했고, 모의고사로 탑을 쌓을 만큼 많은 문제를 풀었다. (아직도 방 한쪽에 그때 풀었던 모의고사와 연습장 뭉치가 있는데, 양이 많아 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중간에 학교 수업이 있으면(부모는 삼수하더라도, 대학교 수업을 들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자전거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대학교에 잠깐 다녀왔다. 수능 성적도, 학점도 모두 챙기지 못하고 애매하게 또 1년을 날릴 것 같아 두려웠지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능만 준비하여 대학을 진학하는 것은 불안했기에, 나는 인문논술 원서를 하나 썼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보다 좋은 대학들 중에서 인문논술로 학생을 선발하는 곳은 신촌에 딱 하나 있었다. 그 대학의 인문논술 경쟁률은 역시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나는 ‘그냥 신촌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논술 시험에 임했다. 어차피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에, 시험에 별다른 공을 들이지는 않았다. 인문논술 시험 당일에도 학교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땀을 뻘뻘 흘리는 상태로 겨우 답안지를 썼다. 논술 시험이 끝나고 둘러본 연세대 교정은 정말 아름다웠다. 연희관과 독수리상, 그리고 백양누리로 이어지는 정경은 나도 이 대학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인문논술 시험 이후, 수능 당일이 다가왔다. 다 큰 성인이 도시락을 엄마에게 부탁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 프랜차이즈 업체의 도시락을 달랑달랑 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은 지나치게 어렵지도, 또 그렇다고 변별력을 상실한 상태도 아니었다. 수없이 보았던 모의고사들 중 하나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능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며 느꼈던 감정은 ‘분노’와 ‘허무함’이었다. ‘고작 이것 때문에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인지’에 대해 자문하니,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퇴근길 버스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끅끅대며 웃다가,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가채점을 해 오지는 않았지만, 수능 성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는 어렵겠다는 사실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능을 또 준비하겠다고 결심했고,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1년간의 수험생활로 인해 많은 돈을 소진한 상태였고, 부모의 도움 없이 또 수능을 준비하려면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래서 나는 빠른 배송으로 유명한 한 기업의 물류센터에 계약직 사원으로 출근했다. 주간 아르바이트보다 돈을 더 주는 야간 타임 아르바이트(오후 9시~새벽 4시 근무)로 일했다. 거대한 카트 혹은 핸드파렛트(일명 작키)로 음료수 상자 따위를 나르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렇게 다양한 대용량 음료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원에게 1개씩 지급되는 PDA 기기 속 근무 애플리케이션은 끊임없이, 그리고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노동 강도를 지속해서 요구했다. 7시간 근무 중 휴식 시간은 식사 시간 1시간뿐이었고, 다른 시간은 모두 원칙적으로는 일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중 5일을 출근하면, 한 달에 240만 원을 수령할 수 있었다.

 약 4주 안 되는 기간동안 일하고, 나는 결국 ‘추노’를 택하기로 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은 ‘다른 아르바이트(예-S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건설 노무직)를 알아보는 것’ 혹은 ‘연세대 인문논술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후자의 경우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5만 원을 내고 학원에 가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을 이수하고 평택에 갈 준비를 했다. 고시원이 있었던 수원에서 짐을 싸서 나오려던 아침, 연세대 인문논술 공식 합격자 발표 기간(2022년 12월 15일)이 아니었음에도 문득 인문논술 결과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학처 사이트를 접속해 보니, 이미 그들은 합격자 발표를 마친 상태였다. 황당해하며, 그리고 불합격 사실을 확인할 5초 뒤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수험번호와 생년월일, 성명을 입력했다. 놀랍게도 총장님이 나오는 동영상 한 편과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출력되었고, 나의 평택행은 백지화되었다. 그렇게 약 1년여의 수험 기간이 끝나고, 나는 고시원을 나왔다.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의 주관을 우선시하지 않거나, 현실과 타협하려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적성이 맞지 않지만, 취업이 잘 되니 이공계에 진학해야 한다’, ‘고등학교가 아무리 네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그냥 참고 다녀라’, ‘남자 3수 이상은 답이 없으니, 수능 준비하지 말고 다니던 학교 다녀라’와 같은 요구들과 타협하는 것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때의 결정들을 되새겨 본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주변인의 압박에 굴복하여, 당신의 환경을 감안하여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결정을 내려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어떤 대가가 따를지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절대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오롯이 달려 나가길 바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그게 맞기 때문이다. 타인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최종 결정자는 당신이어야 한다. 물론 결정에 따른 책임과 대가 또한 오롯이 당신의 몫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2023.03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


 백수 생활, 그리고 삼수로 인해 꽤 오랜 기간 ‘반사회’적으로 살아온 나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나를 옥죄었다. 2박 3일간 진행되었던 새내기 배움터 행사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고, 여러번 중도에 나오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 보였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소개했고, 능숙하게 술게임을 했다. 나는 옆 사람에게 말조차 걸기 힘들었는데, 어찌 그들은 이토록 즐거운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다른 세상을 사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느낌은 사회학과 오리엔테이션 때도 지속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고, 웃는 얼굴로 처음 만난 이들의 안부를 묻는 과 동기들의 모습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나는 하루빨리 졸업하고 취업하여 학교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주에 바로 PSAT(행정고시 1차 시험) 교재를 사와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학과 회식에 참석했고, 전공수업에서 만난 이들과 대화하며 내 마음과 꼭 맞는 친구를 찾았다. 이로써 사회학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내 인생 이야기, 그리고 나의 발언들을 흥미롭게 들어주었고, 그들과 함께하는 대학 생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학과 내 다양한 모임의 구성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한 모임의 술자리에 나가고, 그다음 날에는 다른 모임의 식사 자리에 나가 놀았다. 음주·가무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의 첫 학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혹자는 과에서의 나의 입지에 대해 ‘광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단어는 내 속을 제대로 긁어놓았고, 약 일주일 동안 학과와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해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가 아무리 적을 만들지 않고, 만인과 원만한 관계를 조성하려 해도, 나와 맞지 않는 이들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다.


#2023.08 –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그래서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건데?’라는 질문을 하고 싶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 또한 내가 뭘 말하고자 이 글을 시작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글 자체를 엎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신제품을 내놓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차례 들었다. 매주 있는 공일오비 편집위원들과의 편집회의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들의 냉철한 피드백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쓰인 그들의 작품과 나의 글이 동일선상에 놓여 분석되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거대담론은 ‘위로와 회복’이다. 십수 년간의 세월 동안 나는 감당하기 벅찬 압박을 지속해서 받아왔다. 자녀 교육에 있어 미숙했던 부모, 학생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권위주의적이었던 학교, 전염병으로 인해 황폐했던 대학 생활, 자동차 에어백에 얻어맞은 기억, 낡고 좁았던 고시원에서의 생활, 그 속에서 이루어졌던 삼수, 그리고 노동 착취적이었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경험은 지극히 예민하고 속 좁은 존재인 내가 견뎌내기에는 벅찼다. 몇 번이나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려 있었던 고등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좁은 고시원 방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면,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핸들을 꺾어버리면 이 모든 것들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꾸역꾸역 내 삶을 살아갔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 중요한 결정과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 부모와 나는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나의 희망대로 그들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삶에서 무의미한 순간은 없기에 흘러가는 시간을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 나의 태도와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던 우울과 무력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삶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혹시 당신 또한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빼앗긴 적이 존재하지 않는가. 주변인과 나는 엄연히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우선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분명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가더라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슬픈 생각과 부정적인 예측들에 침잠하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예민함을 주체하지 못해 너무나도 많은 감각과 자극에 매몰되었을 수도 있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신경안정제가 있어야 잠들 수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지금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조금 더 무심해졌으면, 그리고 더 뻔뻔해졌으면, 그래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으면 한다. 삶에서 수많은 파란(波瀾)을 만나더라도, 당신만의 푸른 꿈을 바탕으로 이겨냄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뤄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편집위원 파란 (dowon6162@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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