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띵동, 오월
종종 나와 나를 둘러싼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는 합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여름의 어느 날에 바라본 풍경은 짙어진 녹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여름 안에서 우린 몰아치는 격랑에 몸을 곧추세우기도 힘겨운 오늘을 한탄하기도 하고, 그것을 버텨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저 고생 많았다고, 잘해 왔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관찰하고 돌아보며 반추하기로 합니다. 세계가 단순히 사회의 집합일 수 없듯이, 우리의 세계는 하나면서 동시에 여러 개이기도 합니다. 저마다의 삶이 각각 또 다른 세계가 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역경을 맞닥뜨리더라도 각자의 세계를 온전히 지켜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어느덧 자라날 시간을 맞이합니다. 유난히도 푸른 이번 가을의 19호는, 바로 그 기록을 담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첫 번째 카테고리 ‘움트다'에서 우리는 무한한 성장의 출발점을 ‘나’로 잡고 기지개를 켭니다. ‘움트다'에서는 자신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토대로 세계를 조망합니다. 바깥 세계를 담아내는 동시에 고유한 세계의 주체가 되는 ‘나' 없이는 그 어떤 분석과 고찰의 의미도 퇴색될 테니까요. 오월은 거세고 흉흉한 세파에 윤동주 시인을 떠올립니다. 부조리한 사회의 몇 장면들을 들춘 오월은 자신이 대학생활에서 느꼈던 부끄러움을 곱씹으며 글로 더 많이 기록하고 발언할 것을 다짐합니다. 한편, 파란은 자신의 경험으로 구축된 세계를 두루 돌아보며 자신이 마주했던 파란波蘭을 진솔하게 기록합니다. 기나긴 여정에서 나온 파란의 결론은 각자가 삶의 주체로서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월도 파란도 자신들에게 닥친 난관과 부조리를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잃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세계가 발아하고 싹을 틔워내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킨 어린잎은 호기심을 품은 채 외부 세계로 시선을 향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새싹에게 바깥은 그리 녹록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때때로 부당하고 가혹한 일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말이죠. 여름날의 뙤약볕과 겨울날의 서리를 견디는 데도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그 가혹한 일면을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두 번째 카테고리 ‘피워내다'에서 우리는 사회의 이면을 폭로합니다. 비단 적나라한 공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부조리를 피하는 데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해 보고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느루는 기발함과 창의성으로 무장했다는 인공지능이 얼마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문제를 답습하는지 지적합니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가장 많이 접하고 배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기득권의 논리이기에, 기계학습이 평등하다는 전제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깨집니다. 띵동은 학내 현안인 아카라카 배리어프리 구역의 현황을 진단합니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실질적 동등함이 어떤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는지 교내 장애인권위원회를 만나며 띵동은 실마리를 얻습니다. 느루는 또한 공무원이 민원에 시달리는 이유를 사회 인식과 구조적 문제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지적합니다. 그리고 공공도서관의 노동자가 얼마나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는지와 공공도서관의 양적 팽창이 어떤 문제를 가져오는지 신랄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기고자 날틀은 연세대 공대위에서 청소연대활동(약칭 청활)을 했던 경험을 담아내 평가절하되는 청소노동자의 노동 숙련도를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단지 노무와 자본을 교환하고 청활을 봉사활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학교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으로 연대할 것을 날틀은 권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둘러보고 버텨내며 우리는 각자의 독특한 무언가를 막 피워내려고 합니다.
나를 움터내고, 사회를 바라보며 자신을 피워낼 준비를 하던 이로비들은 이제 한자리에 모입니다. 바로 여기, 연세대학교 연희관 지하 한 켠에 자리한 우리들의 보금자리, 자치도서관에서요. 세 번째 카테고리 ‘우거지다’에서 자치도서관에서 모인 이로비들은 한 명씩 자신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작은 숲 같은 공간이기도 하고,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오월은 홀로 할머니 댁을 다녀오면서 느낀 경험을 통해 공간을 재구성합니다. 관계가 변하면 공간도 새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오월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골을 자신만의 작은 숲으로 바꿔냅니다. 영원은 책과 사람의 공간,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 P)에 대해 알아보면서 공간과 책,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파란은 자신이 사는 도시를 바라보며 행정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4월 발생한 정자교 붕괴 사고의 원인부터, 이후 발생한 성남시와 정치권의 대처를 차근차근 바라보며 도시의 조용한 비명을 조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띵동은 자신이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 장애학생휴게실을 바라봅니다. 장애학생휴게실을 사용했던 경험을 토대로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뿐 아니라 공간의 문제점까지 차근차근 짚어내는 띵동은 우리를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로 안내합니다.
자신만의 공간 이야기를 마친 이로비들은 이제 우리의 공간, 자치도서관과 공일오비를 바라봅니다. 먼저 오월은 자치도서관에서 태어난 공일오비에 대해 알아보며 자치도서관과 공일오비가 공유하는 기조, 즉 다양한 개성이 모인 공간에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짚어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은 이로비들은 이제, 우리의 안식처이자 물리적 공간인 자치도서관을 바라봅니다. 띵동과 영원은 독자들을 자치도서관으로 안내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는 자치도서관을 만들어 온 자도의 관장 세 분을 인터뷰하며 자치도서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도서관이자 공일오비의 동아리방, 동시에 자치단체이기도 한 자치도서관을 세세히 바라본 이로비들은 이제, 여기야말로 우리의 언어가 숨 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이번 19호의 표지는 ‘테라리움’입니다. 밀폐된 공간에 모여 살아가는 작은 식물들에게는 그 테라리움이 자신만의 세계일 것입니다. 테라리움의 밀폐된 공기, 뿌리가 살아가는 땅 밑의 공간, 그 속에 살아가는 식물. 식물에게는 여러 세계가 중첩되어 있고, 그 세계를 느끼며 살아가는 식물 또한 그 자체로 세계입니다. 이번 호에서 소개되는 이로비들의 글은 테라리움 속 식물들과 닮아있습니다. 나라는 세계, 사회라는 세계, 그리고 우리의 세계. 여러 세계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찾기도 합니다. 2023년도 절반이 넘게 지나간 지금, 우리는 또 어떤 세계를 마주하게 될까요.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공간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 연희관 지하 015호에서 말이죠.
편집위원 띵동(glowingpinky0@gmail.com)
편집위원 오월(chlsunny@yonsei.ac.kr)
움트다
별이 바람에 스치어도
파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
피워내다
시나브로, 기계학습
배리어-프리?
무너지는 민원대
눈 똑바로 뜨기
우거지다
공간의 재구성
책이 만들어지는 세계
낡은 신도시, 조용한 비명
나만 아는 곳? 모두가 아는 곳!
우리의 언어가 숨 쉬는 곳
자치도서관의 언어를 기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