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데어
지난겨울 끝자락에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부터 들떠 몇 시간을 걸어 다닌 우리는 둘째 날부터 지쳐 늘어졌다. 구경 다니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여행이니 하루쯤은 느긋하게 보내기로 하고 카페를 찾았다. 그때가 아침 10시쯤이었는데, ‘카페 거리’라고 이름 붙여졌어도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곳은 몇 없는 듯했다. 불이 켜진 곳을 찾아 골목을 두어 바퀴 돌다가 우리 취향에 꼭 맞는 인테리어를 보고 방향을 튼 순간, 카페 앞 광고판에 ‘노키즈존’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NO’라는 글자가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나는 현관 앞길에 발까지 디뎌 놓고 친구 손을 잡아끌어 길 건너 카페를 들어갔다.
노키즈존이라고 적힌 가게는 피하는 편이다. 나는 ‘키즈’가 아니기 때문에 노키즈존을 ‘피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 들어가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그 카페는 나와 내 친구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노키즈존 카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와중에, 어떤 어린이는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누군가 부당한 이유로 카페로부터 거절당한다면, 나는 그 카페를 거절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노키즈존 가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업주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불매 운동이다. 어린이는 카페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우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동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나보다 훌쩍 어린 중학생 동생을 데리고 거리를 지나가다 흡연자들이 모인 곳을 보면 일부러 골목을 빙 둘러 가고, 근처 초등학교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술집이 늘어선 것을 보면 미간을 좁히게 된다. 그런 곳에 동생이 혼자 간다고 하면 동생을 내버려 두지 못할 것이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비틀거리는 무리를 보면, 어린이의 자유에 그런 곳은 포함되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근거 중에 ‘술집과 같이, 노키즈존이어야만 하는 곳이 있다’가 있다. 술은 어린이에게 유해하므로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술집에 어린이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어린이를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노키즈존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후의 논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자면, 나는 아동이 주류판매업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특히 앞서 말한 것처럼 동생이 있는 입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술집에서는 보호자의 부주의로 아동이나 청소년이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섭취한 술은 미성숙한 신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술집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음주 문화는 수직적 위계가 있는 집단 속에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분위기에 노출되는 것이 어린이에게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어린이의 술집 출입을 반대하는 것은 어린이를 어른과 어른으로부터 비롯되는 위험한 환경에서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노키즈존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노키즈존과 주류판매업소는 경우가 다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주류판매업소에 어린이 출입을 금지하자'는 주장은 목적이 명확하다. 음주와 음주문화가 아동과 청소년에게 유해하므로 출입을 금지해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술집에서 이 이유로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고 싶다면, ‘어린이’라는 모호한 단어, 업주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노키즈존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적 근거를 획득한 청소년 출입·고용금지업소라는 대안이 있다. 이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에 대해 청소년의 출입 또는 고용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인정되는 영업 행위를 지정해 청소년을 보호하는 정책이다. 노키즈존을 설정하는 것이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적절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편 업주들이 노키즈존을 선언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앞서 말한 청소년 출입 · 고용 금지 업소와 같이 ‘어린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품, 가게의 환경이 어린이에게 위험하니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가게 안이 좁고 뜨거운 음식이 나와 아이들이 다칠까 봐 노키즈존을 결정했다" 라는 식당 주인의 말도 있었다.[1]
노키즈존은 2011년 강남의 카페와 식당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후 성남, 고양, 수원시 등 어린이 인구가 많은 경기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2] 그러나 카페나 식당이 어린이에게 그만큼 심각한 위협인지는 의문이다. 업주가 말하는 좁은 통로와 뜨거운 음식은 집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식당에서 ‘노키즈존’을 선언한들 어린이를 위험 요소로부터 완벽히 격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위험 요소라고 불리는 좁은 복도, 뜨거운 음식도 자라나는 과정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인데, 어린이를 그런 경험과 분리시키는 것이 어린이의 성장에 더 방해가 되는 것 아닐까.
또한 업주의 주장과 달리 당시 사람들이 공감했던 주장은 ‘어린이를 보호한다’보다 ‘업주와 다른 손님을 보호한다’에 더 가까웠다. 노키즈존이 어린이들의 소란스러운 행동으로부터 다른 손님의 평화로운 시간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위 ‘진상 부모’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부터 업주와 다른 손님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할 시에 억울하게 책임을 지는 업주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는 논리였다.[3] 이때 어린이는 ‘위험 요소’로 취급된다. 즉 노키즈존은 본질적으로 어린이가 없는 어른만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어린이가 카페와 식당에 있는 다른 사람들, 특히 어른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이와 분리된 공간에서 서비스를 즐기겠다는 뜻이다. 이는 술집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논의이다. 이처럼 ‘술집과 같은 위험한 장소가 있다’라는 주장은 논점을 흐려 실제 차별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카페와 식당과 관련된 논의를 어렵게 한다. 동시에 실제 차별당하는 대상인 어린이로부터 주의를 돌려 ‘어린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어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 가리려고 하는 노키즈존의 진짜 의도는 ‘어른을 어린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린이와 그 부모로 인해 종종 소란스럽고 불편한 상황이 생기곤 하는데,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어른과 어른의 공간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때 어른은 어린이를 통제할 수 있는 주체, 명령할 수 있는 주체로 여겨진다. 더구나 이 방침은 보호보다 회피에 가깝다. 업주에게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란을 피우는 특정 어린이, 혹은 그 어린이를 감독하지 못하는 어린이의 보호자에게 있다. 그렇다면 어른이 해야 할 행동은 그 특정 어린이에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니 얌전하게 행동하기를 부탁하거나, 어린이의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린이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업주는 그들에게 직접 제재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편의주의적이게도 모든 ‘키즈’를 전부 가게 밖으로 내보낸다. 그 어린이가 공공 예절이라는 체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 설령 내면화했다고 하더라도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슬쩍 가린 채로. 노키즈존은 마치 어질러진 방안 물건들을 침대 밑으로 구겨 넣듯이 어린이를 시야 밖으로 치우고 싶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아동이 공공장소를 이용하면서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아동이 사회의 체계를 터득하고 그 일부가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말과 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때 배운 이론을 실제 상황으로 겪는 것은 아동에게 필수적인 성장 과정이다. 그러나 노키즈존은 이러한 경험을 빼앗음으로써 아동이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모두가 그랬듯이 배움에는 시간과 반복이 필요한데, 노키즈존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어른으로부터 ‘인내해야 하는 책임’을 면제해주기만 한다.
덧붙여 ‘노키즈존’이 가능한 이유는 순전히 그 대상이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한창 ‘갑질 범죄’가 주목받을 당시 가해자 중 50대, 남성, 사업가의 비율이 높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4] 그러나 어떤 업장에서도 갑질로부터 업주와 다른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노50대존’, ‘노남성존’, ‘노사업가존’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좀 더 최근의 예를 들면, 2021년 부산대 앞 술집의 ‘노교수존’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해당 술집에서는 부산대 교수라는 권위를 내세우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일부 교수에게 대응하기 위해 교수는 출입을 삼가길 부탁드린다는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그러한 교수들의 행동은 업주에게 피해가 되기도 하지만, 손님 중 대학원생이 많아 다른 손님에게도 실질적으로 피해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해당 술집의 주인은 ‘노교수존’이 보도된 지 하루 만에 포스터를 떼기로 했다. 보도를 본 부산대교수협의회에서 일부 교수의 무례한 행동이 모든 교수의 행동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기 때문이다.[5]
이처럼 성인의 경우, 일단 그들을 거부하는 가게가 많지 않다. 설령 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업주와 대화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업주를 고소하는 등 확실한 대응을 할 능력이 있고,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면 자신이 소속된 단체와 함께 일을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이의 의견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이유로 쉽게 묵살된다. 어린이는 이러한 일에 대해 진정을 넣거나 고소하는 등 행정적, 법적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돈이나 과정을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업주가 어린이 고객을 차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조처해도 어린이는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자. 약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 특정 약자, 또는 약자 집단뿐만 아니라 집단 외 사람들,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차별과 혐오는 쉽게 다른 집단으로 옮겨간다. 실제로 노키즈존은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보호자,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도 겸한다. 예를 들어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주장을 보면, 어린이만큼 어린이의 엄마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흔히 보이는 ‘맘충'이라는 단어는 특정 행태에 대한 비난을 넘어 엄마라는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상황에서 아빠는 대개 자리에 없거나 아이와 상관없는 존재가 되며, 약자인 아이와 엄마에게 비난이 집중된다. 그들의 사정, 앞뒤의 맥락은 고려되지 않는다.
노키즈존의 당사자인 아동과 성인을 놓고 비교해본다면 아동은 약자이다. 강자인 어른의 편의를 위해 약자인 어린이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단순히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약자에 대해서도 이러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사회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집단, 그다음에는 다른 집단을 향한 배타적인 태도가 점점 쌓여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각각의 차별 행위는 서로에 대한 근거가 된다. 아이가 어른들의 휴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이를 선례로 삼아 다른 사람의 불쾌감을 이유로 다른 약자를 거부하는 것도 정당성을 얻는다. 사회에 관용이 없어지기 때문에, 각박해지기 때문에, 약자에게 너그러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이 옳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이것에 있다. 노키즈존은 약자를 배척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는 하나의 지표인데, 그러한 메시지를 주는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다. 사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같이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동생활을 영위할 때 즉,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양보하기로 합의할 때 무리는 사회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런데 약자로 규정당하면 곧바로 공격당하는 사회를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고 함께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그 사회가 여러 세대를 거친 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미래에 자신이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자신이 부당한 이유로 공격받을 때 누군가 나와 함께 목소리를 높여줄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약자에게 포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모두가 침묵하는 사회에서는 마지막에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6]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단지 어린이를 차별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앞서 말한 이유로, 또는 자신이 낳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노키즈존’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노키즈존이 불러올 사회경제적인 손해를 가늠하는 것을 넘어서, 그 존재 자체가 가지는 차별적 의미를 이해했으면 바란다.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래로 어느 정도의 관용, 관대함은 의무가 되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1만 5천 년 전의 ‘부러졌다 다시 붙은 흔적이 있는 대퇴골’이라고 답했다. 인간의 대퇴골이 다시 붙기까지는 약 6주가 걸리고, 자연 상태에서 대퇴골이 부러질 정도로 다친 사람은 위험을 피하기도, 사냥을 하기도, 심지어는 식수를 찾으러 가기도 어렵다.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은 누군가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남지 않은 사람의 곁에 남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돌봐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 이처럼 적극적으로 돌봄에 나서지 않더라도,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때 그를 배려해주는 것이 문명의 전제 조건이다. 어린이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어른은 어린이를 보호하고 돌볼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노키즈존은 사회 구성원이 마땅히 가져야 할 관용의 의무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편하다. 그러나 언제부터 자신의 편의를 위해 다른 개인을 금지하는 것이 옳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될 수 있었나?
이 경우에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모두가 똑같이 울고 똑같이 뛰어다니기 마련이다. 누구도 사회 시스템에 완벽히 들어맞는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이었을 때 어른이었던 사람들,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가르치고 타이르고 때로는 꾸중했던 어른들 덕분에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그때 우리가 환대받았던 것처럼, 지금의 어린이를 환대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의 의무이다.
노키즈존을 방문했다가 입장을 거절당한 아이의 보호자는 노키즈존이라는 표시를 보지 못한 적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노키즈존이지만 노키즈존이라고 표시하지 않은 가게들이 많고, ‘노키즈존 리스트’에 올라가면 영업 방해로 신고하겠다는 업주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노키즈존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아이를 받고 싶지 않은 업주에게도, 가게를 피하고 싶은 보호자에게도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업주들은 자신의 사업장이 ‘노키즈존’이라고 알려지는 것을 불쾌해할까? 업주는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행위가 차별적임을 안다. 그것이 부끄러운 행위인 것도 이미 알고 있다.
11살 동화작가로 잘 알려진 전이수 작가는 자신의 SNS에 동생의 생일에 식당을 찾았다가 노키즈존이라는 이유로 나와야만 했던 경험에 관해 썼다. 글에서는 잔뜩 신이 나 가게로 달려갔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야 했던 동생의 슬픔과 억울함을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우는 동생을 보며 전이수 작가는 “우태는 돌아가는 내내 먹고 싶어! 아무 말 안 하고 먹으면 되잖아.”하고 울었다.”라고 말했다.[8] 어린이 당사자에게 노키즈존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나이’라는 특징으로 차별당하는 경험을 심어준다. 자신의 경험을 차별이라고 인식하고 이름 붙이지 못 할지라도, 그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은 어린이라도 잘 알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편 노키즈존이 늘어나자 ‘예스키즈존’을 표시한 가게도 등장했다. 예스키즈존 가게들은 아이들을 환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동용 의자, 식기, 메뉴 등을 따로 구비하고 수유실, 놀이 공간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른을 위한 커피 자판기 옆에 아이들을 위한 코코아 자판기를 따로 마련하기도 한다.[9] 노키즈존을 표방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어린이 손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가게들이다. 예스키즈존 카페를 운영하는 조영권 민중의집 운영위원은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혐오의 연장선에서 노키즈존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이곳만큼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안심하고 올 수 있길 바라며 예스키즈존을 내걸었다”라고 말했다.[10] 다른 업주 역시 혹시 카페가 노키즈존일까봐 출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어린이와 보호자를 본 후 일부러 예스키즈존이라는 표시를 걸었다고 밝혔으며, 모두가 이용하는 공간에 아이와 아이의 보호자만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이 메뉴와 놀이방이라면 옛날 가족끼리 같이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예스키즈존 가게를 예스키즈존으로 만드는 것은 출입구에 아이를 환영한다는 표시를 크게 써 붙인 팻말과 포스터이다. 이러한 ‘선언’은 내가 아동이 아님에도 노키즈존인 가게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다른 약자가 겪는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선의가 사회를 유지시킨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예스키즈존의 핵심은 그것이 사라져야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예스키즈존’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보호 구역 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동물원의 동물처럼 한정된 보호 구역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모든 곳에 존재할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한 반에 27명씩 5반이었는데, 여섯 살 어린 동생은 22명씩 4반이라고 한다. 어린이가 줄어들고 있다. 사실 주변에 어린이들이 너무 없어서, 드물게 어린이를 보면 어떤 행동이 나올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나 자신이 삐걱댄다고 느낀다. 어린이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질 때도 있고, 아주 들떠서 어쩔 줄 몰라 할 때도 있고, 본인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엉뚱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모든 모습이 순간순간마다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어린이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만든 미디어 속 얌전하고 귀엽게 방긋방긋 웃는 어린이와는 많이 다르다. 노키즈존은 ‘어린이를 모름’에서 비롯되는 삐걱거림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아동이 없기 때문에 아동을 모르고, 아동을 모르기 때문에 아동을 존중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아동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아동을 배제한다. 더욱 주변에서 아동이 사라진다. 아니, 아동은 자의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의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치워진다.’ 존중과 공감과 이해는 자신 외에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에서 오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력의 부족을 초래하고 있다. 노키즈존을 거부하는 것이 아동을 사라지게 하는 악순환을 끊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 문득 생각이 나서 노키즈존 지도를 검색해보았다. 내가 사는 곳은 0-18세 인구수로 따지면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역구인데, 노키즈존이라고 알려진 카페와 식당이 적지 않게 보였다. 그 지도는 업데이트가 꽤 오래전에 멈춘 것 같았는데 그것을 감안한다면 노키즈존은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어린이의 가족은 매번 지도에서 ‘노키즈존’을 검색해서 피해 다닐까. 그런 생각에 나는 아직도 노키즈존 지도를 들여다본다. 여전히 나는 노키즈존을 들어가지 않는다.
[1] “노키즈존, 배제 넘어 배려로 갈 수 있을까”, <서울시립대신문> 2021년 11월 23일.
[2] 김도균, 유보배. 「노키즈존 확산,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슈&진단』, 제221호, 2016, 1~25쪽
[3] 김도균, 유보배. 앞의 논문, 20쪽
[4] “警 '갑질 범죄' 한달간 1702명 검거…'진상고객' 69%”, <뉴스1>, 2016년 10월 5일
[5] ““일반화 말아달라” 우려에…부산대 앞 술집, ‘NO 교수존’ 내렸다“, <한겨레> 2021년 12월 8일
[6] 마틴 니묄러. “처음 그들이 왔을 때”
[7] “’돌봄’에 관한 단상”, <한겨레>, 2021년 5월 23일
[8] “우태의 눈물”, https://www.instagram.com/p/BqXQCVzjT9x/?utm_source=ig_web_copy_link, 2018년 11월 19일
[9] “"어서오세요! 어린이 손님"…늘어나는 예스키즈존”, <경향신문>, 2022년 3월 26일
[10] “"우는 아이 환영" 노키즈존 논란에 뜨는 예스키즈존”, <아시아경제>, 2017년 12월 3일
수습편집위원 데어
plannedplu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