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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l 05. 2022

<131호> 근육의 문제

기고자 nope

검정색 쇠창살이 그려져 있는 초록색 배경에 '근육의 문제'라는 제목이 써져 있다. 제목 위를 가로지르는 쇠창살은 중간에서 끊어져 있다.



* 이 글에 사용된 모든 사진은 필자가 직접 촬영했다.

[사진 설명] 국가가 ‘장애인의 날’로 지정한 4월 20일을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고 부른다.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진보적 장애인 운동 계열 단체는 행정부처가 밀집된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6차선 도로를 예고 없이 점거한 이 집회에서는 경찰들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위 사진은 한 비장애인 활동가 A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길고 가느다란 물체에 목이 눌려 눈을 잔뜩 찡그린 장면을 담고 있다. 그의 뒤에는 경찰 인파가, 옆에는 카메라를 들고 채증(採證)을 하는 공무원이, 앞에는 경찰의 행렬에 대항하여 A가 버틸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이 보인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패스트푸드 식당, 한의원, 학원, 카페가 가득 들어찬 지극히 평범한 상가 건물과 새로 지어진 네모반듯한 아파트가 있고, 교통이 멈춘 공간에서 다른 시민들은 욕을 하거나 상황을 구경한다.



30년이 넘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지금만큼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지하철을 타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사진이 온 언론에 가득했다. 성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며 여성혐오를 부추기던 당시 야당 대표는 곧 여당 대표가 될 시점에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혐오의 표적을 바꿨다. 혐오의 정동은 장애인들과 활동가들에게 들러붙어 ‘일반 시민의 편의’와 ‘장애인 이동권’을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사이버 렉카’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부 ‘시민’들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실 근처를 돌아다니며 활동가들을 온/오프라인으로 스토킹 하는 동안, 매일같이 이어진 활동가들의 삭발은 이 모든 대립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주목하길 끊임없이 요청했다. 


이동권 투쟁에서 탈시설 정책을 이야기하고, 지역사회 자립을 위한 예산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시위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비난의 기저에는 이동권, 탈시설, 지역사회 자립이 별개의 영역이라는 전제가 있다. 틀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역사회, 거리, 지하철은 장애인을 시설에 가둔다는 전제에서 건설되었다. 따라서 이동권을 말하는 것은 장애인이 시설 밖에서 살아갈 권리를 말하는 것이며, 탈시설을 말하는 것은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자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탈시설 운동은 단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시설에서 장애인이 나와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형성된 전제 자체를 겨냥하는 발본적인(radical) 문제 제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싸우는 이들이 고발하고자 하는 사회는 그저 엘리베이터가 조금 더 필요하고, 저상버스가 조금 더 필요한 사회가 아니다. 장애인의 자율성을 박탈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수 없도록 시설화하는 사회, 즉 시설사회다. 시설사회는 이 사회의 일면이 아니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를 폭로하는 언어다.



부재중 전화

그의 이름이 두 번 찍혀 있다     

안부 전화거나

연대 사업에 관한 일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최악의 경우일 수도 있다     

자살과 살인이

문장과 문단마다 번갈아

등장하는 글을 써야 할 수도 있다     



해방 이후 경제 발전에 온힘을 쏟던 발전국가 대한민국에서 ‘부랑인’, ‘불구자’ 혹은 ‘장애자’ 혹은 ‘장애인’은 단지 빈곤으로 내몰려 구제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복지 지출을 최소화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하려는 국가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복지법인들의 이해관계 안에서 희생된 존재들이다. 국가는 적절한 수준의 복지 예산을 지출할 생각이 없었고, ‘사회정화’ 같은 공적인 구호를 던져둔 다음 그것의 달성은 민간 부문에 값싸게 맡겼다. 하지만 애초에 목표가 비용의 최소화였기에, 자활이나 복지가 실제로 잘 이루어지는지와 무관하게 그들의 공조는 성공이라고 자축되곤 했다. 국가 경제는 이렇게 마련한 돈을 밑절미 삼아 발전했다. 


주로 부랑인을 대상으로 사용된 ‘자활’이라는 용어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부 시기까지 구호 수준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직업 교육을 통해 하층민을 자활시키겠다는 사업이 정부와 하층민이 아닌 정부와 시설을 연결함으로써, 국가의 ‘자활정책’과 시설의 ‘자활사업’은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로 이어졌다. 개인의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정당화되는 국가와 시설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1] 이 시기의 ‘자활’은 사회복지시설이 직업훈련을 빌미로 수용자를 이익사업에 동원할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된 사회복지시설과 정부의 공모는 1980년대 초에 더욱 강화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은 이전부터 운영해 오던 수익사업을 직업훈련의 일종인 ‘자활사업’으로 변용했으며, 정부는 이를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했다. 


정부는 시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되 시설이 수용자의 ‘자활’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자활정책은 민간이 주도했다. 정부는 시설의 수익사업과 수용자 인권 침해를 막지 않았고, 수용자들이 지역사회로 복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비용의 최소화와 거리를 ‘정화’하겠다는 목표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적 개입의 부족을 민간 영역과의 탈법적 관계로 채우며 부랑자들을 철저히 도구화하는 과정이었다.[2]


이는 기본적으로 형제복지원과 같은 부랑인 시설에 대한 분석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부랑인 시설에도 장애인이 있었다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장애인을 대한 방식이 부랑인 시설의 원리와 오버랩되는 지점을 살피는 일이다. 1980년대 이전 상이군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폭력, 구걸, 강매와 같은 것들로, 부랑인에게 씌워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낙인이었다. 전쟁이 상이군인들에게 남긴 폭력은 전후에도 지워지지 않은 채 일상생활 속에서 재생산되었고,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원호 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상이군인 단체는 비공식적으로 미군 부대 폐기물 처분권, 공설시장 관리권, 버스 배차 업무, 혹은 정부가 요구하는 청부 폭력(판자촌 철거 등)과 같은 이권 사업에 개입함으로써 생존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국 복지정책의 시초가 되는 이승만 정부의 상이군인 원호 정책은 원호 대상자의 수를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일부 상이군인 단체에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권을 배분한 국가에 상이군인 단체도 순응하면서 둘 사이의 공모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3] 원호 정책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자 민간 부문에 값싸게 필요한 일을 맡기는 이러한 모습은 부랑인 시설을 매개로 국가와 사회복지법인의 공모가 이루어지는 것과 정확히 겹친다. 대한민국의 국고는 그렇게 부랑인과 장애인이 흘린 피 같은 돈, 혹은 돈 같은 피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여기서 시설은 부랑인이나 장애인을 실질적인 ‘갱생’ 혹은 ‘자활’로 이끄는 장소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처럼 이들을 효율적으로 ‘절멸’시키는 장소도 아니었다.[4] 대한민국 시설 문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형제복지원을 통해 볼 때, 시설은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오물’을 치우는 공간일 뿐 아니라, ‘대충 오물인 것 같은’ 사람들을 경찰을 동원해서 모조리 잡아다가 ‘실제 오물’로 만드는 공간이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수용 인원의 수에 비례하여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랑인’에 대한 굉장히 모호한 규정을 통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수용하고 있었다. ‘부랑인’에는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홈리스, 껌을 팔거나 구두를 닦던 사람들부터 혼자 다니는 아동이나 여성, 장애인들까지 포함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사회정화’를 통해 도시를 깨끗이 만들겠다는 이유로 부랑인들을 단속, 검거하여 격리·수용했다. 신문 기사나 지식인들은 부랑인을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표상했고, 언론들은 부랑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든, 사회로부터 부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필요한 것은 시설 수용을 통한 분리 조치라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범죄자, 구호 대상으로만 그려지거나 그저 삭제되어 버렸고, 복지원 내부의 폭력은 이들을 정말 “‘부랑인’의 행색으로, 부랑인이라 말해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수용자들은 수용소 안에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가 될 능력을 상실했고, 실제로 수용시설을 나온 이후에도 사회에서 배제되고 고립되었다.[5] 그들은 수용시설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수용시설 안에서 운이 좋으면 조장이나 소대장처럼 직급을 얻을 수도 있지만, 지역사회에서는 어떻게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매일같이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단지 그 안에서의 생존을 이어갈 뿐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식민지를 자본 창출의 도구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신체적·심리적 통제는 피식민자(the colonized)가 식민지 바깥의 질서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조건들로 식민지를 정의하거나 이해할 때, 형제복지원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내부 식민지였다.     



진압 경찰을 노려보던 그의 충혈된 눈동자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다른 쇠사슬에 얽매인

평등하지 않은 두 남자가

분노 때문에 계급 밖으로 동시에 도약했다     

한끝을 짓밟으면

다른 끝이 몇 년 후에 절규하는

무너지는 세계 속의 보이지 않는 인과율이

우리 눈앞에 잠시 폭로됐다     



2021년 3월에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신아재활원의 탈시설을 주장하던 기자회견장 한쪽에서 갑자기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시청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는 길을 막은 활동가들은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활동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장애인들은 수십 년을 갇혀 살았는데 지하주차장 입구를 막는 게 대수냐.’


이는 탈시설 집회뿐 아니라 버스를 막고, 지하철을 연착시키는 이동권 집회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엄밀히 따졌을 때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했거나 시설에 갇혀야 했다고 해서 현재 비장애인의 교통을 방해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고, 집회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지하주차장 입구를 막는 이유도 불분명했다. 집회, 시위의 자유만으로도 해당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한데, 활동가들은 그런 논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오히려 소모적이고, 소위 ‘폭력적인’ 이런 전략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2021년에 어떤 이유에서, 무엇을 위해 채택된 것이었을까?      


“아 씨발, 안 놔? 내 거야, 씨발.”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에 장애인 인권에 관한 정책들을 논의하자고 요청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날 세종시의 도담동에서는 “비밀스럽고 갑작스러운 시위, 점거, 농성”[6]인 ‘비택’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약속한 때가 되자 바로 앞에 있던 차별버스[7] 앞을 막고 6차선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곧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활동가들을 멈춰 세우기 시작했고, 현수막을 빼앗으려 했다. 그때 현수막을 잡아당기던 활동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의 눈에는 처음 보는 살기가 가득했다. 


활동가들이 경찰과 쇠솨슬을 두고 대치한다. 그 중간에는 머리가 길고 안경을 쓴 활동가가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런 눈빛, 표정, 욕설은 충돌이 일어나는 모든 현장에 가득했다. 6차선 도로를 점거한 집회에서는 경찰들과 활동가들이 충돌할 공간 또한 많았다. 집회가 진행되는 6시간 정도 동안 군데군데에서 갑작스러운 충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충돌은 대부분 쇠사슬이나 사다리 같은 사물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충돌 없는 상황이 이어지다가도, 활동가가 보도용 사진을 찍기 위해 쇠사슬을 꺼내면 주로 지시를 내리는 경찰 한두 명이나 공무원에 이어 방패를 든 경찰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경찰들은 단 한 번도 경찰이나 일반 시민을 향하지 않은 쇠사슬을 위험하다는 이유로 빼앗아갔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쇠사슬에 걸려서 다치곤 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 몸이 아니라 휠체어 하단부에 쇠사슬을 두르는 것에 경찰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쇠사슬, 무력 충돌, 활동가들의 욕설, 경찰들의 과잉진압은 수시로 아비규환을 불러왔다. 충돌의 양상은 매번 조금씩 달랐지만, 그 중심에는 보통 쇠사슬이나 휠체어가 있었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드러내려 하고, 경찰들은 감추려고 하는 쇠사슬의 의미는, 결코 그 순간에 한정되지 않은 것 같은 활동가들의 욕설과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경찰들과 충돌하는 상황에 밑에서 위로 치켜뜬 활동가들의 눈과 격하게 휘두르는 팔뚝



내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자

그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보여주고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 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 했다     

같은 목록에서 이제 내 이름을 찾아보라 했다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와 똑같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철저하게 군대와도 같은 상명하복 체계였다.” 군기(軍氣)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폭력이 자행되고, 하루도 안 빠지고 군가를 불러야 했으며, 군대식 제식 교육이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명치에 잘못 맞아 숨이 끊어지더라도 우선 때릴 때는 무조건 맞아야만 한다”라는 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 수용자들에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일상적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수용소 안에서 가혹 행위로 인해 사망하거나 탈출을 기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수용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은 폭력이 멈추리라는 어떠한 확신도 없지만 멈춰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순간에,[8] “맞고 있는 이보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더 떨어야 하는 공포감”에 터져 나왔다.[9] 눈앞의 폭력이 “이미 남의 일일 수 없”으며,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이 목전에 닥쳤을 때, 죽은 혹은 죽어가는 자의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은 형제복지원 안의 “매일매일이 그렇게 끔찍한 전쟁터”[11]였음을, 그래서 언제나 수용자들은 자신 혹은 옆 사람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어야 했음을 암시한다. 


형제복지원의 폭력으로 사람들의 몸은 실제로 바뀐다. 매일 죽기 직전의 상태로 가거나, 다른 이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정신질환과 신체장애를 겪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 그들은 철저히 비(非)국민, 즉 국민이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국가의 비용 최소화와 사회복지시설의 이윤이었다. 즉, 그들은 형제복지원에서 ‘구제 불능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존재일 수 있었다. 이러한 시설 안에서의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한두 개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기 어려울 만큼 수없이 보도되는 장애인 시설 내의 인권 침해 사건들은 형제복지원에서 드러나는 국가와 사회복지법인의 공모 관계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먹 바로 앞에 달라붙어 있는 식은땀이다. […] 주먹은 땀을 숨기기 위한 마지막 요새인 동시에 반란의 시작이기도 하다.” [12]


역사학자 도미야마 이치로는 오키나와가 일본 제국에 의해 식민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오키나와 사람들의 ‘식은땀이 흐르는 주먹’에서 포착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가 프란츠 파농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학자라는 것과도 관련된다. “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사건”이라고 말한 파농은 식민지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이 아프리카인들의 ‘근육에 쌓이며’, 그렇게 긴장된 근육에 쌓인 폭력을 정확한 방향으로 사용해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3] 이는 폭력이 결코 ‘폭력’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만으로는 포착되지 않고, 채찍이나 주먹으로 맞거나 총구 앞에 서는 것처럼 개개인의 신체와 심리에 파고드는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며, 나아가 여기에 저항의 가능성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논의는 한국의 내부 식민지인 시설의 문제를 이해할 때도 참고할 만하다. 


탈시설, 생존권·이동권 문제를 주로 다루는 진보적 장애인 운동 단체의 활동가들은 시설들, 시설로 말미암아 발전할 수 있었던 도시에 맞서 싸운 투쟁과 죽음의 역사를 기억한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벌어진 폭력과 비국민화, 비인간화는 지금도 적지 않은 장애인 시설들에서 반복되고 있고, 피해생존자들이 겪은 폭력은 그들의 근육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연대하는 이들, 그들과 함께 싸우는 이들의 근육에도 쌓인다. 형제복지원이라는 시설에서 ‘밑에서 위로 치켜뜬, 짐승과도 같은 눈’과 욕설이 피해생존자의 근육에 새겨져 버린 것처럼, 탈시설 당사자들은 한동안 스스로 ‘왜?’를 묻지 못하는 무기력과 싸우기도 하고, 집회 현장에서 온 근육을 다해서 시설 안의 폭력을 고발하기도 한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들의 폭력은 탈시설 의제에 결합하면서, 폭력의 역사로서 활동가들의 근육에 쌓인다. 


1990년대부터 점화된 탈시설 운동과 생존권·이동권 투쟁의 적지 않은 수는 소위 ‘불법 집회’나 ‘폭력 시위’의 형태였다. 박경석은 “지하철 연착 투쟁이라는 불법(?) 행위”의 이면에는 장애인들에게 가해진 사회의 차별이 담겨 있고, 이 연착 투쟁은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도 “떨어져 다치고 죽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라고 말한다.[14] 장애인 운동은 빛나는 경제 성장과 도시화, 국제 관계의 발전과 첨단 문명이라는 ‘현재’에도 여전히 시설과 같은 ‘과거’에서 살아가고 죽어가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들에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장애인 노점상이었던 고 최정환 열사는 서초구청의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하고 “복수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위대한 혁명가들이 죽은 뒤에는 그들을 무해한 우상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 말하자면 그들을 성인 명부에 올려놓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들의 이름에는 피억압계급을 ‘위안’하고 기만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명성이 부여되지만, 그들의 혁명 이론은 내용을 박탈당하고 혁명적 예리함을 잃은 채 속류화되고 만다.” [15]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생긴 열사들은 그 사진과 이름만이 남아 있다. 그들이 정작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는 깡그리 잊힌 채로, 선형적인 발전의 서사에 통합되어 버린다. 연세대학교에서 총여학생회 폐지를 주장하던 이들이 열사들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열사 추모 주간이 올 때마다 백양로에는 악취가 풍긴다. 학내 청소경비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해 달라는 안건에는 기권하거나 반대표를 던지지만 열사들께는 번지르르한 문장이 적힌 현수막을 헌정하는 역겨운 이중성의 악취. 열사가 흘린 피, 그의 시체를 국가에 빼앗기지 않고자 싸운 이들의 피는 딸기, 설탕 시럽과 섞이고 얼음과 함께 갈려 민주주의의 역사, 민주화의 영웅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달달한 스트로베리 스무디가 된다. 쿠바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얼굴이 티셔츠에 인쇄되어 힙한 패션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듯이.


열사가 이처럼 오염된 단어임에도 장애인 운동이 장애해방열사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여전히 유효한, 그들이 죽음으로 부탁한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이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국의 영웅’과 같은 맥락에서 열사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폭력을 고발한 “시대의 악령”들을 계속해서 되살리기 위함이다.[16] 달리 말해, 열사를 호명하는 일은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열사를 우상화함으로써 약자를 침묵시키는 사회를 파괴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복수의 몫이다.     



불을 꺼뜨리는 물이 있다면 

물을 증발시키는 불도 있다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뭔가 시작하려는

역설, 진동, 이끌림, 자기장의 형성     

내가 군중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평범한 말들에 불을 붙이듯이

내 이름이 아주 길어지거나 아예 사라지듯이

내가 동지라는 어색한 명칭으로 불리듯이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야, 안 놔? 놓으라고! 경찰들 때문에 다치는 거 아냐 지금! 경찰들이 먼저 놓으라고 씨발.”     


세종시에서 점거된 도로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현장을 눈에 담으면서 조금씩 내 몸이 집회 현장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바닥에 잘 앉지 않는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무릎을 꿇거나 아스팔트에 엎드려 사진을 찍고 있었고, 급기야는 어느새 카메라를 놓고 쇠사슬을 쥐고 있었다. 바로 10분 전쯤 현수막을 두고 대치할 때 나를 당황시킨 활동가의 욕설과 표정이 내 얼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장면들이 하나씩 빠르게 머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취재 날에 농성 텐트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에 대해 전해들은 것,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에 나온 대중교통 점거 투쟁 장면, 신아재활원 앞에서 쇠사슬을 두르고 철 사다리에 목을 끼운 활동가들의 모습, 광화문역을 수없이 지나치며 본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농성장, 그곳에 줄지어 놓여있던 영정사진들이 머릿속에서 포개어졌다. 근육의 떨림이 잠시 가라앉는 것은 분노가 진정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눈앞에서 쇠사슬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아비규환, 아마 이 상황이 진정되고서도 반복될 충돌을 예비하는 과정이었다.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 장면들은 옳고 그름의 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씨발놈들.”과 같은 중얼거림과 얼얼한 얼굴 근육, 새끼손가락의 통증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기억들과 역사들은 머리를 잠시 스쳐 곧장 근육에 쌓인다. 치켜뜨는 눈과 입꼬리가 일그러진 채 벌어지는 입, 통제를 벗어난 목에서 나오는 건 주장도, 말조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당장 쇠사슬을 빼앗으려는 경찰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기회만 되면 그의 방패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싶다는 폭력이었다. 


점거된 도로를 뛰어다니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경찰들과 대치하는 사람은 많았다. 충돌이 잠시 멈췄을 때 나는 가방을 내려 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때 한 활동가가 나에게 물을 건넸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 몇 번 간 적도 없고, 내가 입은 옷은 평범한 티셔츠였는데도 그는 나를 알아봤다. 곧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몰아쉬는 숨과 진정되지 않은 눈 근육, 아무렇게나 풀어져 버린 몸의 자세가 ‘동지’의 징표였다. 집회는 근육의 문제였다.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육의 문제였다

자살과 살인, 죽음, 삶,

죽음의 죽음, 삶의 삶……

그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근육 안에 흐르는 전기의 세기와 방향

그것들이 문제였다     

그 전기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모르는 구름에서 탄생했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서 마주한 활동가들의 살기 어린 표정은 욕설과 분노, 격하게 움직이는 팔뚝처럼 근육의 문제였다. 구청에서 자신의 몸에 직접 불을 지른 사람, 도시의 턱들을 없애서 휠체어가 다니게 해 달라는 유서를 쓰고 가족을 남겨둔 채 독극물을 마신 사람, 그 죽음들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과 죽음에 대한 공권력의 외면, 이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내 통제 바깥에서 나의 근육을 움직이는 그 전기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결코 있는 그대로 닿을 수 없는 폭력에서 탄생한 것이다. 


시설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도시는 장애인이 이동할 수 없다.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살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장애인 운동 집회에서 쇠사슬은 이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폭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더는 남의 명령으로 쇠사슬에 묶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 사회 전체로부터 받아 온 폭력을 시설 바깥의 도로에, 지하철에 도리어 펼쳐놓음으로써 이들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 


비문명적 시위를 그만두라는 말은 시설사회를 정당화함으로써 ‘일반 시민’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폭력적인 시위를 그만두라는 말은 해방 이후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폭력의 역사를 보호한다. 그러니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를 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온 사회가 나서서 폭력에 대해 똑바로 이야기할 때, 폭력의 피해자여야 한다고 규정된 이들이 도리어 그것을 행사할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토대가 드러난다. 이동권 투쟁이 비문명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투쟁이 시설사회로부터 폭력의 주도권을 빼앗아 근육 안에 쌓인 폭력을 전기로 흘려보내는, 그럼으로써 쇠사슬을 통해 바깥으로 전도(傳導)시키려는 장면이었기 때문일 테다. 


일상을 빼앗겼던 이들은 이제 자신의 바깥으로 향하는 근육으로 자기 일상 안에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폭력을 배치한다. 투쟁은 일상이고 삶이 되었다. ‘국민’이 되고자 노력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죽은 이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 망막에 마지막으로 맺힌 사람의 망막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새겨진다. “망막에 각인된 그 영상은 나의 얼굴이자 당신의 얼굴일 것이다.”[17] 우린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평상복 차림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쾌활한 표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눌 때

순간 두 개의 쇠사슬이 부딪쳐

찌릿, 정전기가 흘렀지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심보선, ‘근육의 문제’     



[사진 설명]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세종특별자치시에서 6차선 도로를 예고 없이 점거한 활동가들을 경찰들은 협박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위 사진은 한 비장애인 활동가 A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장면을 담고 있다. 그의 뒤에는 경찰 인파가, 옆에는 카메라를 들고 채증(採證)을 하는 공무원이, 앞에는 경찰의 행렬에 대항하여 A가 버틸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이 보인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패스트푸드 식당, 한의원, 학원, 카페가 가득 들어찬 지극히 평범한 상가 건물과 새로 지어진 네모반듯한 아파트가 있고, 교통이 멈춘 공간에서 다른 시민들은 상황을 구경한다. 바로 옆에 선 활동가를 바라보는 A의 웃음. 그 활동가가 입은 평범한 티셔츠에 적힌 문구는 다음과 같다. “투쟁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1]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64~165쪽

[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같은 책, 99~104, 127~162, 166~183쪽

[3] 하금철, “‘앵벌이 장애인’의 외침은 어디로 갔는가: 1980~1990년대 영세 장애인 문제와 장애인운동의 대응,” 『기억과 전망』 42, 2020, 295-347

[4]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같은 책, 59~62쪽

[5]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같은 책, 67, 75~80쪽

[6] 조아라, <장판과 함께하기: 장판 신입활동가를 위한 단어장>, 2021. 03. 31. (미간행). 

[7] 장애계에서 세종시와 대전시를 잇는 B1 버스를 부르는 명칭. 저상버스인 B1 버스는 한 대도 없다.

[8]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살아남은 아이』, 이리, 2013, 36, 41, 44, 48~58, 68, 206쪽

[9] 유해정, “부랑인 수용소와 사회적 고통: 피해생존자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39, 2018, 387-436

[10]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임성모 옮김, 이산, 2002, 11쪽

[11] 한종선·전규찬·박래군, 같은 책, 40쪽

[12] 도미야마 이치로, 『유착의 사상』, 심정명 옮김, 글항아리, 2015, 85쪽

[13]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10

[14] 박경석,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책으로여는세상, 2013, 114~115쪽

[15]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옮김, 돌베개, 2015, 27쪽

[16] 비마이너 기획, 『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2022

[17]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임성모 옮김, 이산, 2002, 13쪽


■ 참고문헌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임성모 옮김, 이산, 2002

도미야마 이치로, 『유착의 사상』, 심정명 옮김, 글항아리, 2015

박경석,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책으로여는세상, 201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옮김, 돌베개, 2015

비마이너 기획, 『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202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사, 2017

유해정, “부랑인 수용소와 사회적 고통: 피해생존자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39, 2018, 387-436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10

하금철, “‘앵벌이 장애인’의 외침은 어디로 갔는가: 1980~1990년대 영세 장애인 문제와 장애인운동의 대응,” 『기억과 전망』 42, 2020, 295-347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살아남은 아이』, 이리, 2013     

<자료>

비마이너, “‘통장, 도장, 내꺼 전화 주세요’ 신아원 거주인 탈시설 의사 밝혔지만…,” 2021.3.4.

비마이너, “장애인 활동가 200명, 세종시 6차선 도로 점거 “장관 나와라”,” 2021.4.20.





기고자 nope

yonseij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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