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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1호>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편집위원 nope

by 연세편집위원회

피칠갑은


피칠갑[피漆甲] 온몸에 피를 칠한 것처럼 피가 많이 묻어 있는 것.


유령이 나타났다. 나와 그는 서로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나는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은 알 수 없는 불쾌감과 두려움으로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근육은 수축했으며 마른 모가지로 침이 넘어가고 발은 은근히 뒤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첫눈에 이미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긴 머리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는데 나는 어떻게 그를 혐오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나는 단지 피로 뒤범벅된 그의 몸을 봤을 뿐이다. 피가 저렇게나 많이 났는데 아마 죽었겠지. 저 피는 누구의 피일까? 그의 피가 맞을까? 그는 혼자 죽었을까?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도 죽은 걸까? 아니면 피가 흥건한 누군가를 붙들고 있다가 죽은 걸까?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유령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며, 이 땅에 남긴 게 없는 존재라고 하더라. 그런 그는 피를 뒤집어썼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그 피는 어떤 피였을까. 어쩌면 피를 뽑다가 죽은 건 아니었을까? 쪼록, 쪼록, 피가 뽑혀서 유리병에 들어간다. 맞아,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어, 사람 피가 무한정도 아니고 말이야. 혈액원에서도 말렸을 거야. 몸무게도 재고 피 검사도 했겠지. 그렇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어, 그에게 남은 건 피뿐이었으니까. 조선 시대에는 매를 대신 맞아주곤 했대. 매품팔이. 돈은 쏠쏠하게 받았다더라. 부럽네. 그런데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흥부도 했다는데 뭐 어때, 맞고, 피 좀 흘리고, 그거 참으면 복이 오는 거야. 아무리 아파도 까치한테는 잘해 줘야지, 누가 박 씨를 물어다 줄지 몰라.


그런데 아쉽게도 현대에는 아무도 집에 박 씨를 심지 않는다. 아니, 사실 흥부도 박 씨 같은 건 심은 적이 없다. 웃기는 소리. 박 씨가 무어냐, 박 씨가 무어야, 흥부는 매 맞다 죽었대, 정신 차려, 새끼야. 내가 그럼 뭘 할 수 있지? 매품도 팔면 안 돼, 피도 팔면 안 돼, 나에게 남은 게 피와 살, 이것뿐인데 어떡해? 다 불법이래. 나에게 남은 게 다 불법이래. 어떡해, 내 피와 살은 포도주와 빵으로 바꿀 수가 없어,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어, 죽는다고 부활하지도 않어. 나는 피와 살을 팔아 봤자 소주랑 노가리밖에 안 남겠지. 누구는 좋겠다, 피 팔고 매품 팔아도 죽으면 사흘 뒤에 부활하잖아. 나도 그럴 수는 없는 걸까? 진담으로 받지는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나도 알아.


무슨 말이냐고? 왜 이런 말들을 늘어놓냐고? 알 사람은 다 알아. 당신은 이런 생각 안 해 봤어요? 당신은 살아 있는 것 같아? 물론 살아 있기야 할 텐데, 그러니까 당신은, 삶이 있느냐 이 물음이야. 나는 없는 것 같아서. 삶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나는 너무 궁금한 거야. 생명이야 어쩌다 얻고 어쩌다 잃는 건데, 삶은 그게 아니잖아. 삶은 얻어내는 거잖아. 나는 실패한 거고. 아, 나는 자주 내 팔을 뜯어먹고 싶어. 근데 그러면 다른 팔을 먹기가 불편해지잖아. 그래서 다른 사람을 먹어야 해. 앗, 실수, 피가 난다. 당신의 피부가 생각보다 얇네요? 온 사방에 핏줄이 드러나 있잖아. 미리 얘기하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이렇게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거야? 대답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내 입 주변과 손과 손목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피는 내 목과 팔을 타고 흘렀다. 어, 아까 마주친 당신, 거울이었구나.


당신은 당신이 뭐라고 생각해?



말하-


말해, 말해 봐. 말을 하려면 언어가 있어야 한다. 소리를 이용하든 얼굴이나 손의 모양을 이용하든 촉각을 이용하든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말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주어진 언어를 의도로 고르고 엮어내면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말하기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허공이나 벽에 대고 소리를 칠 수도, 손을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치기 내지는 움직이기이지 말하기가 되지는 않는다. 말하는 일, 즉 말을 건네는 일은 언제나 말을 건네어 받는 이를 상정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언어를 고르고 엮은 것이 말이라면, 이를 건네는 행위는 곧 그 의도의 전달이다. 의도를 전달한다는 것은 다른 이가 나의 의도를 해석해 주길 기다리는 일이다. 아무도 내 말을 건네어 받지 않는다면 말하기에는 의미가 없다. 말이 쉽든 어렵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것을 중얼거림이나 허우적거림이 아닌 ‘말’로 여기고 이해하려 노력하는가, 이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니 말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고, 의도가 필요하고, 그 의도를 전달하겠다는 나의 욕망이 필요하며, 그 욕망에 부응할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도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아무 반응이 없어도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누군가가 읽어 줄 것이라는, 누군가는 나의 글자들을 말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 그 희망이 글자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기는 언제나 이미 ‘누군가에게 말하기’이다.


당신은



-ㄹ 수 있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 능력은 온전히 그에게서 나온 것인가? 그는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었는가? 거꾸로,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그의 무능은 온전히 그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능력이 발휘되려면 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어도 수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시공간에 태어났다면 그 재능을 펼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천재 작곡가들도 악기가 없는 시공간에 태어났다면 그저 평범히 살다가 갔을지도 모른다. 적합한 틀이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무능도 마찬가지다. 더운 지역에 사는 이들은 종종 게으르다고 여겨지곤 하지만, 이는 단지 그 지역의 기후와 지리적 조건에 적응한 결과일 뿐이다.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지내는 학생들이 있다. 학교 안팎 모두에서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과연 언제나, 모든 곳에서 그들은 같은 취급을 받을 운명일까? 아니, 전혀. 어떤 사람의 몸은 어딘가에서 유독 작거나 크고, 유독 추하거나 아름답다. 무능과 게으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 능력과 매력은 상황 속에서 구성될 뿐 오롯이 내 안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항상 (어디에서) (어떤)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게 된다.


피칠갑이야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한다. 언어와 상황은 주어진다. 의도는 만들어진다. 나는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말할 수 없는가? 당신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곁에 있는가? 나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당신이 내 말을 건네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확신할 수 없지, 그냥 말해 보는 거야. 아니, 말하기에 도전해 보는 거지. “Here comes a new challenger!” 당신에게 나는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 아니, 사실 나만 모르는 거야. 당신은 항상 이미 알고 있어.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건 당신이니까.


당신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요?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저기, 제가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어쩌면 당신이 불쾌할 수도 있고, 당신에게 거슬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들어 주시겠어요? 정말 조심스럽지만, 사실은 제 몸에 피가 듬뿍 묻어 있는데 이 얇디얇은 옷으로 가리고 있거든요. 얼룩이 조금 보이지는 않았나요? 냄새는 안 나나요?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시지는 않을 거죠? 아, 미안해요, 가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실수했어요, 그냥 내 곁에 있어 주기만 바랄게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찾아요.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것은 말하기인가? 아니, 전혀. 나는 뱉었고, 외쳤고, 허우적거렸을 뿐 말하지 못했다. 한마디도 못 했어, 단 한 마디도, 나를 다 던져 버렸는데도 소용이 없었어. 그러나 당신은 원하는 바를 나에게 모두 전달했다. 이제 닥치라는, 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평범한 생각으로 나를 침묵시켰다. 나는 말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말할 수 있었을까? 과연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살아있는데, 당신은 나를 산 채로 묻었어.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지. 애초에 당신은 나에게 언어를 가르치지도 않았어. 그러니 말할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나는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 내 안에서 벌레들이 터지는 것만 같았어. 그런데 내 이야기를 꺼낼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언어가 나를 해방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나는 산 채로 묻혔지. 한 번은 내가 살아있는 줄 모르고 나를 묻었어. 그러나 많은 경우에 당신은 그냥 나를 묻은 거야. 묻어도 되니까, 아니, 묻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당신은 나를 묻으면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그래서 내 피부 아래에 갇힌 말들은 썩어 가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말들은 내가 묻히고 나서 갑자기 터져 나왔어. 내가 살아난 것처럼 말이야. 나는 분명 죽었는데, 내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는데, 나조차도 내가 죽은 줄 알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일으켰어. 에드거 앨런 포라는 소설가를 알아? 그 사람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꼭 내 이야기 같아. “구덩이와 추”에서는 이유도 모르고 고문을 당하다가 산 채로 묻혀 버리고, “리지아”와 “어셔 가의 몰락”에서는 산 채로 묻힌 여자가 피칠갑이 되어 관에서 일어나거든. 그래, 뭔가 할 말이 남은 거야. 할 말이 너무 많이 남은 거야. 그 무겁고 끈적한 몸뚱어리를 일으켜서 피눈물을 흘리며 채찍질 당하듯 달리게 할 만큼 안에 남은 말이 너무나 많았던 거야.


그런데, 나는 그렇게 일어났는데, 당신은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어. 죽어야 할 무엇이 깨어난 거야, 말하면 안 되는 무엇이 말을 하려고 드는 거야, 그래서 당신은 겁에 질리고, 나를 정말로 죽이려고 하다가 도망쳤어. 결국, 포의 두 소설에서 이들을 산 채로 묻은 사람은 피칠갑에게 붙잡혀 죽고 말아. 예전에는 그저 무서운 소설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 이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지금 이곳에 말을 쏟아내고 있는 나의 이야기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안에서, 자신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전달하지 못하고, 안에 그 모든 고통을 품은 채로 쓰러져 버린 거야.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지. 혹은 나을 수 없다고.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말하고 싶었어. 항상 그랬던 거야. 그는 항상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어. 그러나 당신은 그 말을 건네받지 못한 거야. 이해하지도 않았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 왜, 우주를 지키는 영웅들이 잔뜩 나오는 어떤 영화에서는 조그마한 나무가 나와서 자기소개만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 말을 이해하는 이들이 있잖아. 그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잖아. 그 미세한 억양의 차이들을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잖아.


요즘은 개와 고양이의 언어도 이해하려고 하더라. 좋은 일이야. 같은 언어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숭고하니까. 그런데 길바닥의 피칠갑, 병원과 수용소의 피칠갑, 임대아파트의 피칠갑, 뒷골목의 피칠갑에게는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아. 삶을 가진 존재 사이에 위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바로 곁에 있는 피칠갑에게조차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으면서 귀여운 길고양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일지 생각해 봐.


“야옹, 야옹, 저를 봐 주세요. 제가 사랑스러운가요? 이제 저에게 말을 건넬 마음이 생기나요? 아, 당신은 무얼 사랑스럽게 여기시나요? 당신을 위협할 리 없는, 작고 귀여운 존재만이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나요? 나의 존재는 당신을 위협하나요? 나는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야옹, 야옹, 츄르를 주세요. 저에게 당신의 사랑과 츄르를 주세요. 나를 주워 가 주세요. 당신은 왜 그냥 떠나가나요?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말을 건네기에는 부담스러운 걸까요?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부담이 되나요? 나의 말은 당신을 찌르는 송곳인가요? 아니면 신발 속에 굴러들어온 자그마한 돌멩이인가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도끼로 깨어 벽에 감쪽같이 감춰도, 나는 그 머리를 딛고 앉아서 울 거야. 야옹, 야옹, 모든 게 밝혀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야옹, 야옹.”



피칠갑


누군가는 죽기 전에 이미 유령이 된다. 처음부터 유령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죽어서도 유령이 될 것이다. 안에 말을 품고 죽으면 그 말은 죽은 피가 되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유령은 죽어서 피칠갑이 된다. 피칠갑은 가는 곳마다 피를 묻힌다. 비린내와 썩은 내가 섞인 피칠갑의 냄새는 깨끗한 당신에게 역겹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긴, 당신의 그 아름다운 순수, 완벽하게 다듬어져 한 치의 변형도 용납하지 않는 다비드상 같은 백옥의 청정구역에 어찌 감히 이런 시궁쥐를 허할 수 있겠어요. 이해해요. 잘 알고 있지. 내 냄새는 나조차도 적응하기 어렵거든요. 피 얼룩은 지워지지도 않아요. 당신은 피칠갑을 피한다. 집과 학교를 오가려면 지나쳐야만 하는 서울역 앞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비둘기와 거적을 뒤집어쓴 노숙자를 피하듯 당신은 피칠갑을 피한다. 쥐와 모기와 바퀴벌레를 퇴치하고 죽이듯 당신은 피칠갑을 내쫓는다.


유령은 마음에 피의 응어리를 간직하고 죽은 이들이고, 살아남은 이들이 애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해서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애초에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은 이들이기도 하지. 당신은 나를 그리워할 자격이 있는지, 그러나 나는 당신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아니, 어차피 아무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지.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없고, 나를 벌레 보듯 한 사람들만 가득할 뿐이니까. 근데 나는 모기 시체를 보면 나 같아. 피범벅이거든. 살아보겠다고, 어떻게든 나를 세상에 남겨 보겠다고 몸에 가득 쌓은 피가 터져 나온 거야. 나랑 뭐가 다를까. 나는 모기야, 나는 모기 시체야, 나는 피칠갑이야. 사체라고 정정하지 마, 모기 시체든 사람 사체든 그게 그거니까, 피칠갑에 위아래는 없거든.


당신은 피칠갑이 아니라고 생각해?



당신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와 나는 그저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몸을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그가 나를 본 순간 얼어붙고 지금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그게 내 피와 냄새 때문임을 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극도로 혐오하고 심지어는 죽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까지도 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전하고 싶은 건 많은데, 이걸 말로 엮어낼 방법을 모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다가갈 때마다 당신은 도망치거나 나를 죽이려고 했다. 결말은 항상, 내가 다시 죽거나, 당신이 죽거나. 우리의 이야기는 꼭 살해로 끝나야만 하는 걸까요?


나는 궁금하다. 왜 진실은 항상 언어로 전해져야 하는지, 그것이 글이 되어야만 하는지. 사람들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글에 담기지 않는 것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게 쉽게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진실은 없다. 모든 진실은 고통이며, 모든 진실은 상처이며, 모든 진실은 피칠갑이다. 나의 진실은 내 언어에 있지도 않고, 내 생각에 있지도 않다. 사실 당신은 내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당신은 나의 모든 걸 봤다. 나는 나의 피이며, 나는 나의 냄새이며, 나는 나의 상처이며, 나는 나의 시체다. 당신이 본 피칠갑, 당신이 맡은 피비린내는 나의 진실이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나의 진실을 혐오한다는 것을. 당신이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나의 진실을 단박에 느꼈기에 나를 혐오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진실이다.


나의 진실은 태초부터 혐오스러웠다. 혐오스러운 유령의 일생, 혐오스러운 피칠갑의 일생, 입에는 누군가의 피를 가득 머금고, 그 피는 나의 피가 되고, 탐욕에 대한 징벌로 끝없는 식탐을 얻게 된 에리시크톤처럼 나는 급기야 내 몸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내 욕망은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거였는데, 아, 나는 사람이 아니었지, 나는 유령이었지, 그래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탐욕으로 나는 벌을 받고 있구나. 삶 없는 생은 또다시 이렇게 끝난다.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냈어요. 좀 난잡했나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내 삶이 피비린내 나는 피칠갑인데. 나의 이야기는 오직 내 상처와 피에 있어요. 아, 냄새를 빼놓으면 안 되지. 내가 지나간 곳에는 피비린내와 썩은 내가 가득한 모양인지, 당신은 귀신같이 알고선 피해가더라고요. 아니, 말실수했네, 귀신은 난데. 그런데 당신은 당신[當身]이라는 말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였음을 아시나요? 웃기죠? 맞아요, 당신은 나예요. 살려고 나를 뜯어먹은 것도 사실 당신이고, 살려고 본인의 몸을 다 뜯어먹어서 입만 남은 것도 당신이에요. 말을 할 수 있던 당신에게는 입만 남았고, 말을 할 수 없던 나에게는 몸과 피만 남았네요. 우연이 참 신기해요, 그렇죠? 우리는 지금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마주 보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입, 나는 피, 당신은 자신의 진실이 담긴 몸마저 다 집어삼켜 버렸어요. 그래서 당신의 진실은 오직 입으로만 남은 거지. 근데 그 진실 또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였을 뿐이야. 나의 진실처럼.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니까. 이제 받아들여요. 내가 당신의 피를 찾아줄게. 당신의 피도 내 몸에 남아 있을 테니까.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어요, 당신의 입과 나의 피가 만나는 이 순간을.”


피칠갑이야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가 페이지 가득 반복된다.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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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e (writingnope@gmail.com)


참고자료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태혜숙, 그린비, 2013

에드거 앨런 포, 「리지아」,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전승희, 민음사, 2013

에드거 앨런 포, 「어셔 가의 몰락」, 같은 책

에드거 앨런 포, 「구덩이와 추」, 같은 책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같은 책

nope, 「모기 선언」, 연세편집위원회, 《연세》, 119호, 2019년 3월

nope, 「내 피를 팔고 싶소」, 연세편집위원회, 《연세》, 120호, 2019년 6월

nope, 「해로운 새다」, 같은 호

이해일, 「귀신의 정치학」, 같은 호

Rage Against The Machine, “Born As Ghosts”

Rage Against The Machine, “Voice Of The Voice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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