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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2호>예민하게 살기

수습편집위원 하루

by 연세편집위원회

1학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11월이다. 원래 이렇게 시간이 빨랐나?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았는지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주일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벌써 주말이 와 있었고,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지나 일 년이 지났다. 시간은 지났고 나이는 먹었지만, 그 나이를 다른 사람이 먹은 기분이었다. 내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일상이라는 굴레에 깊이 박혀 그냥 돌고 있었다. ‘잉여의 시간’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나는 그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알아서 굴러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그리고 다양한 감각을 느끼며 의미를 찾는 ‘나’의 하루를 살 수 있기를.



[어린 시절의 나]


어린 시절 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새로웠다. 무언가를 듣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새롭게 얻은 정보가 신기했다. 상자에서 소리와 화면이 나와 사람들이 무언가를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신기했고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핸드폰이 신기했다. 놀이터를 가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이 신기했고 박물관에서 옛 물건들이 보존되어 내가 볼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했다. 마트를 가면 새로운 맛의 과자가 나오고 원래 있던 과자가 없어진다는 것이 놀라웠고 문구점에 다양한 모양의 지우개가 있고 형형색색의 딱지들이 있는 것도 새로웠다. 가는 장소마다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다른 것이 신기했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먹는다는 말도 신기했고 계절에 변화가 생겨 낙엽의 색이 바뀐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된 줄 알았고 나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좋고 신기했다. 또한, 일 년에 한 번씩 생일이 항상 돌아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생일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었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현재의 나]


많은 것들에 관심과 호기심도 많고 모든 순간에 충실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365일이 지나고 12달이 지나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나는 둔감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새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와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라면 관심이 잘 생기지 않았고 호기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언가 없어지면 없어졌구나, 무언가 새로 생기면 생겼구나 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존재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다. 잎의 색이나 하늘의 색, 구름의 높이에 집중하여 계절의 변화를 알기보다는 내가 추워서 긴팔 옷을 입어야 하면 겨울이 온 것이고 더워서 반팔 옷을 입어야 하면 여름이 온 줄 알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생일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생일이 되어도 어제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무심하게 보내기도 했다. 반복되고 변화가 없는 일상에 살아가고 있었다.


차에 타면 좋아하며 지나가는 것들을 구경하던 나는 이제 없다.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 밖을 바라보며,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창문에 기대어 가는 것이 편하니까. 내 주변의 어른들도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받을 때 기분 좋음이나 고마움을 먼저 표현하기보다 ‘뭘 이런걸’이라고 하며 미안함을 먼저 표현했고, 힘든 일은 없냐는 질문에 ‘다 힘들지.’라는 답을 하였다. 또한, 무슨 일을 겪든 ‘원래 그런 거야.’라고 했다. 퇴근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을 보면 창 밖을 관찰하기보다 핸드폰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잠을 취하기로 한 것 같았다.



[미래의 나]


나에게 어른이라는 단어는 쉽게 화내지 않고 울지 않고 지쳐있고 무던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이런 어른들을 마주하며 나는 그런 모습을 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성인이 된 후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내가 바란 나의 모습 중 하나에는 ‘감각적으로 살기’가 있었다. 감각이 두드러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언가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다양한 부분에서 영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싶었고 그 감정들을 나의 작품들에 녹이고 싶었다. 모든 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이 즐거웠으면 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라도 그 속에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5일 동안 최대한 감각적이고 예민하게 살아보기로 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다른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주일을 감각적으로 살자고 마음을 먹고 나니 막막했다. 그동안 무뎌진 상태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예민해지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주제를 정해 살아보기로 했다.



#날씨

첫째 날은 날씨에 더 민감해져 보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이었다. 아침에 창 밖을 보니 햇살이 밝았다. 햇살로 인해 집 안은 따뜻해졌고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그동안 나도 현실에 지쳐 창문 앞에서 구경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기만 했는데 오늘은 햇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밖을 나와보니 바람이 세게 불었고 바람을 따라 낙엽들과 나무와 거미줄과 거미가 모두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한번 세게 불고 지나가면 다음에는 작은 바람들이 불어왔다. 바람은 세게 불었다 약하게 불었다를 반복했다. 바람은 머리를 쓸고 지나가서 내 발끝까지 스치고 갔다. 평소에는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 놓는 게 싫었겠지만, 오늘은 바람이 내 곁에 함께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바람을 느껴본 적 있었나?


아침부터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벤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내가 엄청난 어른으로 보이겠지. 나는 그저 너네보다 밥을 몇 번 더 먹은 사람일 뿐이란다. 몇 번이라고 하기에는 많긴 하지만.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졌기에,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5살 때는 손가락을 몇 개 더 펼 수 있는 6살이 되고 싶었다. 11살에는 설날에 떡국 세 그릇 더 먹고 세 살 더 먹을 것이라고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이미 나도 어른이 된 것 같아 나 혼자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몇 살 차이 안 나던 교생 선생님은 나에게 엄청난 어른이었다.


햇빛은 따사로웠고 눈이 부셨다. 평소에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찌푸리고 다니기만 했는데 오늘은 눈 크게 뜨고 그 햇살을 느껴보았다. 햇빛을 받은 나무는 무대 위에 조명을 받는 배우와 같았다. 그와 다르게 그늘진 곳은 서늘했고 어두웠다. 햇빛이 비추는 곳은 머물지 않고 옆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세상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듯 여러 곳을 공평하게 비추었다. 한때는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될 줄 알았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모두 각자의 영화를 찍고 있으니 세상은 나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슬프기도 했다. 햇빛은 그때 나의 슬펐던 감정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가을 하늘은 더 높아 보였고 그 위 구름은 띄엄띄엄 있었다. 태양과 가까운 하늘은 옅은 파란빛을 띠고 있었고 그와 멀어질수록 조금 진한 파란색을 가졌다. 어느새 구름은 바람을 타고 흘러가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는 시간이 지나자 땅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나의 주위를 비추는 햇빛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해는 이른 저녁부터 지기 시작했고 곧 하늘은 붉은색을 띠었다. 노란색인 줄만 알았던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색이었다가 검은색이 되었다. 쳐다볼 수 없었던 태양은 뜨거움을 가시고 따스함만을 남겨 내가 쳐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햇살이 비추는 밝고 따뜻한 자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주인공들은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 휴식을 취해야 하나 보다. 나도 오늘의 무대를 마치고 잠시 들어가야겠다.


하늘이 제일 밝았던 아침에서 땅이 제일 밝은 밤이 되자 금세 추워졌다. 건물들은 낮보다 빛나 보였고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다. 밤에 밖을 나온 나는 몸을 웅크리고 걸어 다녔다. 하늘에는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였다. 보름달이 빛났고 별이 빛났다. 바람이 불어서 좋고 별이 빛나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있어 좋았다. 아! 날 좋다.



#사람

둘째 날은 사람들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동네 버스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버스 노선을 보며 목적지를 확인하는 사람, 재미있는 영상을 보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자신의 버스가 오는지 고개를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차가 도로 위를 빠르게 지나가고 내가 타야 하는 버스도 곧 도착했다. 금방 도착하다니 오늘 운이 좋은 날인가보다. 자리 앉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평일에는 많이 보이지 않았던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곳을 가는 것처럼 들떠 보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 부신 듯 눈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컵에 든 커피를 음미하듯 마시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차들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가 밀리지는 않아 내가 탄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버스에 탄 한 어린이는 지나가는 길에 있는 국제 학교를 보며 옆에 앉은 사람에게 국제라는 단어의 뜻을 물었다. 답을 듣고 나서 궁금한 것이 더 생겼는지 쫑알쫑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인가보다. 최근 나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라며 넘어가고는 했었다. 아이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계속 질문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렸을 때 무얼 가장 궁금해 했었지?


자신이 내려야 하는 정거장이 다가오자 미리 카드를 찍는 사람,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내리는 문 가까이 자리를 옮기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버스 안에는 차가 정차하고 나서 일어나라는 문구가 적혀있지만,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면 마음이 급해진다. 내가 내리기 전에 버스 기사님이 문을 닫고 버스를 출발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내리기 위해 카드를 미리 찍어 놓기도,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있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조급한 적이 많았다. 급식실에 빨리 가기 위해 빼꼼 다리를 빼놓기도 했고 수학 문제를 풀 때 빨리 풀려고 하다가 계산 실수한 적도 많았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급하지 않게 지내려 했는데 아직 버스에서만큼은 급해진다.


다른 버스로 갈아타니 기사님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밝게 인사를 받으니 활기찬 하루가 될 것 같다. 기사님은 활기찬 하루를 나눠주고 계셨구나. 버스가 정거장에 서고 새로운 사람들이 탈 때마다 기사님은 인사를 환하게 건네셨다. 기사님에게 인사를 받고 다시 건네는 사람, 그리고 인사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인사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활기찬 하루 거부합니다’인걸까? 바쁜 사회 속에서는 풍경처럼 지나간 것들이 너무 많다. 다음부터는 내가 먼저 활기찬 하루를 나눠 줘야겠다. 하루가 끝나고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은 모두 끄트머리에 앉으려 했다. 나도 내 주변에 자리가 나자마자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살이 옆 사람과 맞닿아 있을 때보다는 춥긴 했지만, 철봉 옆에 기대어 가니 편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설 때마다 많은 사람이 내리고 탔다. 역에서 지하철을 탄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빨리 앉고 싶은 듯 빈자리를 훑으며 들어왔다.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는 파스 냄새가 많이 났다. 어떤 하루를 보내셨는지 묻지 않아도 고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들 하루를 열심히 살았겠구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밤이었다. 나도 수고했어.


사람들을 보다 보니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오늘은 어떤 하루네요.’, ‘좋은 하루 보내요.’ 같은 말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못 들었을 것 같은 목소리도 들리는 날이다.



#색감

셋째 날은 색에 민감해져 보기로 했다.


하늘이 파란색이었다. 그 위에 하얀색의 구름이 몽글몽글 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토이 스토리> 앤디의 벽지가 생각나는 하늘이었다.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그림 같은 사진이 찍혔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멋있지는 않았지만. 왜 좋은 사진을 보고는 그림 같다고 하고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고 할까?


바닥 흩뿌려진 은행잎으로 가득했다. 길은 가을 임을 보여주는 듯 진한 노란색이었다. 단풍도 빨간색과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잎 중에는 아직 덜 무르익어 초록색과 주황색이 섞인 잎도 보였다. 자연의 색은 평소에도 많이 보긴 했다. 아주 집중해서 보지 않았더라도 ‘단풍이 들었네’, ‘은행이 익어서 떨어졌네’, ‘잔디가 푸르네’의 정도는 인식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나의 눈에 도로 위에 칠해진 횡단보도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아스팔트 위에 칠이 많이 지워진 하얀색 횡단보도가 보였다. ‘많은 사람이 지나갔구나’, ‘원래 위에 칠해져 있던 부분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검은 아스팔트는 마그마이고 하얀색은 나를 살려줄 징검다리인 것처럼 하얀색만 밟으며 퐁당퐁당 뛰어 걸어가기도 했었는데 그때 하얀색들이 나를 따라왔겠구나 싶었다. 나의 걸음에 따라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나의 신발에 붙어 여러 군데를 나와 함께 다니다 다시 바닥에 붙었으려나? 나의 걸음과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촉감

넷째 날은 촉감에 더 민감해져 보기로 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밖의 온도는 낮아지고 그에 따라 실내의 온도도 낮아졌다. 아직 난방을 켤 때가 아니라서 방 안이 따뜻하지는 않다. 이불을 두꺼운 것으로 바꾸고 나니 침대가 그나마 내 방에서 제일 따뜻한 곳이 되었다. 부드러운 이불이 있는 침대 밖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더 드는 날이다. 결국에는 학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차가운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끄고 푹신한 이불 곁에서 멀어진다.


방 밖으로 나가는 손에 닿은 문고리는 차가웠다. 세상 밖은 내가 생활하는 공간보다 훨씬 춥고 외로울 것이라는 말을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밖에서 나를 맞아주는 가을 아침 바람은 차가웠다. 문고리가 전해준 말이 맞았나 보다.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거리의 바닥은 얇은 나의 신발 밑창을 뚫고 느껴졌다. 거리의 바닥은 딱딱했고 바닥에 있는 볼록 나온 돌 때문에 발이 살짝 아프기도 했다. 언제부터 세상은 딱딱해졌을까? 아스팔트를 깔고 대리석을 깔게 된 후부터 우리는 딱딱한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일까? 그때부터 경쟁이 시작된 것일까? 나도 경쟁하면서 딱딱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겠지?


이 세상에 딱딱한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도 존재한다. 고양이의 등은 부드럽고 나한테 도움을 주는 사람의 손은 따뜻하고 점심때 먹은 국도 따뜻하다. 따뜻한 것도 참 많다.


한때 나는 외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독을 삼키는 모습이 어딘가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를 위하는 따뜻한 걸 보아도 위해를 가하는 차가운 것으로 여기며 피해 다녔다. 어쩌면 지금 내가 추운 것도 그때의 나처럼 따뜻한 걸 보아도 따뜻한지 모르고 피해 다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다. 씻으러 가는 길은 춥고 씻고 나왔을 때 나를 맞을 차가운 공기가 싫어 씻는 것을 미루며 단단한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러다 겨우 화장실로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폭 누우니 온몸을 이불이 감싸준다. 목까지 이불 덮고 자야지. 이불도 따뜻하네. 나는 지금은 외로운 사람이 아닌가 봐.



#움직임

다섯째 날은 나의 움직임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항상 힘들다. 알람을 듣고 실눈을 뜨고 손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10분만 더 누워있어야지 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부볐다. 침대에 누운 채로 팔과 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터덜터덜 나갈 준비를 하고 오른손으로 가방을 먼저 메고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 밖으로 나가며 손에는 핸드폰, 지갑, 이어폰이 들려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낀다. 길을 걷는 중에 발이 시린지 발가락을 웅크린다. 날이 추워지긴 했나 보다.


강의실로 걸어가는 길에 노래를 듣는다. 신나는 빠른 템포의 노래가 나오면 걸음이 빨라졌다가도 슬픈 느린 템포의 발라드가 나오면 나의 걸음도 같이 느려진다. 손은 걸음에 맞춰 흔들리다가 주머니에 넣어져서 움직임을 멈췄다. 손가락은 주머니 안에서도 꼼지락거린다.


강의실에 도착한 나를 보며 사람들은 인사를 건넨다. 그 중에는 친한 동기도 있고 친하지 않은 동기도 있다. 그때 나는 눈에 띄게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느껴질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나는 학생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계심까지 얻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전학을 갔고 거기에서 적응하면서 경계심이 생겼다. 낯은 가리지만 인사는 해야 하니 인사를 건넨 친구에게 손을 들어 손가락을 활짝 피고 다시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는다.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내 몸이 이렇게 가벼웠었나? 발걸음이 사뿐사뿐해진다. 걸음이 빨라지고 보폭이 넓어졌다. 가방을 등에 멜 때 분명 무거웠는데 집에 가까워질수록 가방의 무게는 줄어든다. 집에 가는 행복은 중력까지 거슬러주나 보다. 집에 들어와 씻었다. 씻기까지의 과정은 언제나 느리다. 밍기적밍기적 걸어서 화장실에서 씻는다. 오늘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하기 싫다. 느릿느릿 책상에 앉아 오른손으로 펜을 잡고 공부를 시작한다. 책상으로 가는 몸은 또 한껏 무거워져 있다. 시험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공부지만 막상 시작하면 시간은 빨리 간다. ‘아직 다 안 봤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고?’라고 하며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잠을 자러 한 발씩 침대에 올라간다. 내가 어느 쪽을 보고 자는지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 왼쪽으로 누워 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오늘도 왼쪽을 바라보고 베개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 때까지 발로 침대 시트를 꼼지락 만졌다. 이렇게 일찍 침대에 올라간 것은 오늘의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내일의 나를 위한 준비야. 푹 자고 내일도 알차게 보내야겠다.


나의 행동을 보니 어떤 부분에서 움츠리게 되는지,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게 되었다. 하루의 행동이 쌓여 나의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둔감의 이유]


어쩌면 둔감해진 것이 삶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살아가는 나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건물들과 간판들에서 나오는 눈이 부신 불빛들, 시끄러운 차의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복잡한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고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에 감정적이고 감각적으로 살기는 버거운 세상이고 내가 이미 지쳤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렸을 때는 처음 접하는 것들도 많고 신기한 것이 많았겠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익숙해졌을 것이다. 어제와 비슷한 푸른빛을 띠는 하늘, 풀, 나무, 건물, 사람들, 풍경. 무언가에 관심을 들인다는 것은 체력 소모를 하는 일이니, 비축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무뎌졌고 많은 일을 당연시해왔다.


일주일을 살아보니 ‘나’를 더 볼 수 있었고 더 알 수 있었다. 많은 일에 감각적으로, 예민하게 산다고 했을 때 바깥세상에 많은 관심 가지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의 움직임에 집중하니 어딘가를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늦어져 여유를 부릴 수 있었고 그 여유에 맞춰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꺼내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감각에 집중하니 내가 무얼 좋아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며 재미를 찾을 수 있었고 바깥사람들에 집중하니 더 많은 사람을 보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나의 필명을 정하려 했을 때 ‘필명이 나에게 의미 있는 단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 정한 이름은 ‘하루’였다. 그때 생각했던 의미는 ‘하루하루 충실히 재미있게 살아가자’였는데 그 이후로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가려고는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5일을 예민하게 살아보니 정말 하루를 충실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었다. 감각에 집중하니 나에게 집중했고 나에게 집중하니 나의 하루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한 달을, 일 년을 그렇게 계속해서 예민하게 살다 보면 내가 원했던 어른의 모습을 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일단 오늘만이라도 예민하게, ‘나의 하루’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하루 (bestwriterj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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