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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2호> 새 삶은 폐허에서 꽃 필 거야

편집위원 nope

by 연세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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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기는 믿고 거른다.”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종종 피로감에 젖어, “저기도 답이 없구나,” “그래 봤자 OO이지.”와 같은 말들을 뱉곤 한다.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한다. 나 또한 이런 말들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다. 특히 희망을 걸었던 곳에서, 혹은 내가 사랑했던 곳에서 나를 실망시킬 때의 피로감이란. 이 피로감은 종종 배신감에 뒤따라 나오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점점 내가 기댈 곳이 사라졌다. 부모도, 교수도, 과 공동체도, 교회도, 진보 정당도, 학생사회도, 심지어는 친구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새로운 공동체와 사람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거기서도 자주 비슷한 탄식을 하며 떠나게 된다. ‘그래, 어쩌겠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모든 고민을 놓고 몇 년 동안 무인도로 도망쳐 ‘잠수 타고’ 싶었다. 피로감은 견디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좋아했던 음악마저 폭력을 유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믿음에 이어 휴식과 즐거움마저 박탈당한 것 같았다. 나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의 즐거움은 언제까지 죄책감과 동행해야만 할까? 통탄으로 채워진 나날을 보내며 피로는 또 피로를 낳았다. 피로는 무한정 순환하며 나를 갉아먹었고, 나에게는 ‘나’ 대신 알 수 없는 어떤 허물만이 남은 것 같았다. 끝끝내 붙잡고 있지만 왜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게 정말 나를 위한 무엇인지 나를 죽이는 무엇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 새벽같이 일어나 바깥에서 햇빛을 맞고 미세먼지를 마시며 15시간은 걸어 다니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쓰러지듯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허물이 이미 내 피부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은 나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앞서 적은 바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금 당장 보편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거나 많은 이들에게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세상이 너무나도 안 보여서, 어쩌면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는 감각이 단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어디선가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경험과 사고의 과정을 담고 있다.


당신의 책임?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나쁜 게 더 많고, 접근하기 편하고, 무엇이 좋은지 알기가 어려워서 결국에는 좋은 걸 밀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자기가 원하는 게 없는 곳을 개인이 떠나는 결정은 너무나도 합리적이다. 뒤통수를 맞는 등이 고생을 하느니 ‘클린’한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는 것.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과연 ‘클린’한 곳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물론, 덜 나쁜 곳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방금 내가 버리고 온 그곳은 이제 어떻게 될까? 내가 희망을 찾아 쫓기듯 도망쳐서 도착한 이곳은 내가 만족할 만큼 ‘클린’할까? 언제고 다시 도망치고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만큼 많은 가능성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빻은’ 곳은 ‘빻은’ 누군가와 ‘클린’한 나 모두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단지 나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생하기 싫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의 발자취는 오히려 문제의 재발을 용이하게 하기도 한다.

물론, 이게 쫓겨난 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를 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트집 잡는 전형적인 ‘피해자 유발론’의 구조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할지언정, 책임은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이것이 명백히 ‘나쁜 사람’의 책임일까? 나는 여기서 이 악순환이 누구의 책임인지 따질 생각이 없다. 책임 소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그 인과관계가 성립한 과정을 묻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뒤통수를 맞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나는 여기서 나와 주변인들이 어떤 공동체에서 겪은 고통을 하나씩 이야기해 보며, 그 안에서 느낀 절망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당신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내 절망을 내가 돌아보는 일도, 당신이 나의 절망을 엿보는 일도 아주 고역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우선 정당부터 생각해 볼까. 직접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해 본 적은 없지만, 지지하는 정당은 있었다. 아주 거칠게 분류할 때 나는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전신이 되는 정당들을 지지했고, 투표권을 얻고 난 후 겪은 대선과 총선에서는 A당, B당, C당, D당이 후보였다. 완벽한 정당은 없다는 생각으로, 각기 다른 정당에 각기 다른 기대를 품고 나름 비판적으로 지지해 온 나였다. 그러나 이 정당들은 나에게 위안과 안심보다 실망을 안겨준 일이 많았다.

자신들의 가치라고 표명한 것을 지키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가장 크게 실망했다. 사실 이는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디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럼에도 기대는 언제나 실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A당의 대표는 장애인 위원회 발족식에서 정신장애인 혐오 발언을 내뱉었고, B당은 선거유세 과정에서 성차별적인 콘텐츠를 사용했고, C당의 운영위원장은 자신들의 가치와 배치되는 정책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으며, D당 내부에서는 성폭력 사건과 2차 피해가 발생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각각을 알게 된 때 나의 감정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도대체 누구를, 어디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비슷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믿었던 단체 E의 내부에서도 성폭력 사건과 이에 대한 은폐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나아지겠지, 이 사건으로 배우고 변하겠지, 생각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톱에 갈려 나간 신뢰에 톱밥처럼 남은 일말의 미련은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될 수 없었다.

정당과 같은 단체에서만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즐기는 문화 속에도 정치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국힙(국내 힙합)은 거른다”라는 말을 많이 봤다. 국내 힙합에는 실제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곡에 성차별과 장애인 혐오, 가난 혐오가 가득하다. 아무런 의식이 없던 시절에 듣던 노래들에도 그랬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곡도 대부분 “나는 돈 많아, 여자도 많아, 내가 돈을 이렇게 많이 써,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유명해.” 정도로 요약될 무분별한 가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돈을 펑펑 쓰는 행위를 의미하는 ‘flex’, 원뜻과 무관하게 사용되기도 한다지만 여전히 원뜻이 너무나 강한 ‘bitch’, ‘병신’ 없이는 가사를 못 쓰는 것만 같다. 그래도 좋아하던 모 래퍼의 가사에는 자기의 솔직한 내면이 많이 담겨 있었지만, 저런 단어들이 여전히 종종 쓰였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나에게 힘을 주던 가수의 노래에조차 그런 단어들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많이 듣던 어느 외국 가수의 노래를 다시 틀었다. 내가 힘들 때 나 대신 분노를 쏟아내며 나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 준 노래들을 다시 듣는데, 여기서 나는 또 좌절하고 말았다. 무능은 다리의 손상과 휠체어로 비유되고, 분노해야 하는데 순응하는 이는 “머리에 총을 맞은(bullet in ya head)” 사람이었으며, 분노의 대상에게는 성차별적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는 음악에 배신당한 것 같았다. 나의 즐거움과 기댈 구석이 사라졌고, 사실 이는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즐겁지도, 기댈 만하지도 않은 곳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좌절은 한층 더 깊어졌다.

집에서도 완전히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평소에 정치적인 문제로 전혀 다툴 일이 없던 집에서도, 부모님은 가끔 장애인 혐오가 담긴 어휘를 사용하셨다. 다행히 하루 날을 잡고 길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문제를 풀 수 있었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느꼈던 집에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들은 나에게 큰 허탈감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집들과 비교하면 문제가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집과 관련해서는 나의 경험보다도 다른 이들의 경험을 전해 듣는 것이 나에게 더욱 큰 좌절이었기에 여기서는 다른 이들의 경험도 잠시 빌려 오고자 한다.

한 친구는 아버지의 입에서 독재자 옹호 발언이 나오는 걸 듣고 말았고, 다른 한 친구는 어머니와 있을 때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는다. 그가 다니는 교회는 ‘동성애 반대’ 집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많았고, 국정 농단과 깊이 관련된 어느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사람이 목사로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교회 옮기기가, 특히 가족과 함께 다니는 곳이라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것이다. 또 어느 친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꾸미고 교회에 갔다가 이에 대해 비난을 들어야 했으며, 자신의 옷차림 등을 부모님께 ‘들킨’ 후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잊을 수 없는 한 친구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친권자들과 싸우다가 결국 집을 나와서 지냈고, 오래지 않아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슬프게도,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전혀 희귀하지 않다. 가장 믿었던, 가장 믿는, 가장 믿고 싶은 대상에게 배신당하고, 심지어 버림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세고 싶지 않을 만큼 많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런 배신을 원하지 않았다. 도대체 세상 누가 배신당하고 싶겠는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조차 나의 착각으로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현실은 더럽게 씁쓸했다. 그저 안전한 공간을 갖고 싶었고, 나를 해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었을까.


한 줄기 빛


그렇게 안개 같은 배신감과 무력함에 잠겨 있던 중에, 어디선가 희미하게 빛 한 줄기가 보였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빛. 그런데 그 빛은 멀리서 오는 게 아니었다. 안개 속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빛이 나오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어떤 당신을 발견했다.

어떤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는 A당에서 활동하는 여성이었다. 그는 청년이자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면서, 장애인 의제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고민들을 바탕으로 그는 정말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이 정당 안에서 공부하고 경쟁하고 있었다. 선거유세뿐 아니라 당원 게시판도 큰 문제였던 B당에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혐오표현이 등장하지 않도록 자정 노력을 하는 당원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당의 가치와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내부 단체로 활동하는 당원들이 있었다. C당에서는 해당 발언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들의 가치에 맞는 활동들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D당 내부에서도 당 내부의 문제와 지향점을 비판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담아 창당 준비에 한창이다.

음악에서도 그랬다. 물론 한국 힙합 안에서 노력하는 소수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그 외에도 변하는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연세》 120호에서 나는 한국 힙합 속에서, 그 전체의 분위기와 잘못된 문화에 맞서 싸우는 여성 래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흔히 ‘빻았다’고 인식되는 래퍼들 사이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며 변화를 촉구하는 여성 래퍼들이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깨닫고 이를 가사로 쓰는 이들이 생겨났다. 안개뿐이라고만 생각하던 한국 힙합에도 빛이 있었다. 심지어 늘어나고 있었다.

부모님과 집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치 않지만, 그 중에도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자식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얼마 전 방송된 EBS 다큐 프라임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1부는 성소수자 아이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였다. 아들이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뒤 아들의 인권을 위해 거리로 나선 부모가 있었고, 딸인 줄 알았던 아이가 자신이 사실 남자라고 커밍아웃을 하니 그의 법적 성별 정정과 성별위화감 해소를 위해 헌신한 부모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와 연을 끊고 지내거나 부모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성소수자의 부모’로서 모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아이가 아마 가장 듣고 싶었을 “나는 내 아이가 자랑스럽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혐오세력 앞에 당당히 섰다. 퀴어문화축제 때마다 와서 ‘동성애 반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축제 참가자들에게 “너희 부모님은 아시니?”라고 묻는 이들에게 그 부모가 여기 있다며 외쳤다. 새로운 교회들도 생겨났다. 종파를 가리지 않고, 성경 말씀에 따라 성소수자는 하느님이 창조했고, 모두가 그렇듯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생겼다. 원래는 ‘부모’도, ‘교회’도 믿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이런 변화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리고 문득, 이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이들도 헤매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 가운데에서 반짝임을 지켜내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게 버텨냈을까. 그리고 문득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들이 정당 안에서, 힙합 씬 안에서, 부모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그곳의 가치와 정면으로 맞서며 싸우는 동안 나는 무얼 했나. 물론, 어떤 고통은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가 되고, 고통이 된다. 그러나 과연 나의 고통은 그만큼의 무게였나. 고통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 부끄러움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제라도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저 사람들이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동안 나는 그들을 그냥 방치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지쳐 쓰러진다면, 나는 책임이 없다고, 설령 정말 그럴지라도,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빛이 있는 안개 속으로


그러나 나는 그 빛에서 부끄러움과 책임감, 죄책감보다 큰 희망을 찾았다. 내가 그저 거부하고 부정하고 포기한 곳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이들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을 다시 믿어 보게 되었다. “새 삶은 폐허에서 꽃필 거야”라는 말이 살로,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내팽개친 폐허를 되돌아보았다. 더는 아무도 찾지 않아 어둠만 가득한 곳. 무언가 다시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이 싫어서 동료들을 이끌고 새 절을 세우거나, 절이 싫어서 그 절을 개혁하고 있다. 절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가 없어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의 투쟁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절이 싫으면 중은 싸운다. 그렇게 그들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만들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없다면 그 빛은 다시금 어둠에 가려지고 말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막막해도, 빛나는 당신을 찾으러 그곳에 다시 갈 거라고. 설령 뒤통수를 맞더라도 도전해 보겠다고.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그럼 결국 나서지 않은 개인의 탓이냐고.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안개 속에도 사람들이 있다. 빛을 찾으러 처음 온 사람,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고도 여전히 빛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 반짝반짝 빛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감추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안개를 밝혀 보겠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작은 빛을 꺼내 놓는 사람. 그렇기에, 안개 속에도 사람이 있기에,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해결이 나의 몫이나 책임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발길을 끊으면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김초엽의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는 양극화로 절반이 폐허가 된 ‘시초지’와 모두가 평등한 ‘마을’이 공존한다. 그리고 마을의 사람들은 성인식 때 시초지로 순례를 간다. 순례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어떤 폐허 위에 세워졌는지 알게 되고, 그곳에서 여전히 고통받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분투하는 이들을 만난다. 적지 않은 수의 순례자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폐허에 남았다. 평화와 행복에 안주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대신에, 그들은 남은 이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폐허에 내던졌다. 그런 순례자들의 역사를 알고, 폐허로 떠나기로 결심한 소설의 화자는 말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마을처럼 평등한 세상, 혹은 ‘이상세계’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세계’에 산다고 해도, 그 특권을 그저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불평등 속에 사는 사람은 잃을 것이 많거나, 잃을 것이 없기에 더욱 간절하고 소중한 한 줌을 붙들고 살아가니까. 그들에게 당장 이를 내려놓고 폐허로 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새로이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인식론은 어쩌면 지금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활동가의 말마따나,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쫓겨난 자들의 정치

양창아의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이학사, 2019)의 인용구는 페이지 N에 대하여 (양, N),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생각정원, 2015)는 (É, N)으로 표기하였다.

그러한 인식론을 체화하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까? 최근에 읽은 어떤 철학자에 관한 책들에서 나는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사회철학 연구자 양창아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쫓겨난 자들의 정치”를 상상한다. 그에 따르면 “쫓겨난다는 것은 이제까지 관계 맺고 있던 사람과 장소를 잃는 경험”이다(양, 6). 나는 이를 조금 유연하게, 넓게 해석하여 어두운 곳에서 도망친 사람도, 빛을 펼쳐내고 있는 사람도, 심지어는 어둠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빛을 파묻으려는 이도 쫓겨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빛을 감추라는 어둠의 압력에 쫓겨났고, 누군가는 그 압력에 굴복하여 타인의 빛까지 억누르게 되어 양심과 자유로부터 쫓겨났다.

아까 든 예시를 다시 꺼내면, 나는 모 정당을 지지하지 않게 된 유권자도, 그 정당 안에서 분투하는 활동가도, 그 정당의 협잡꾼들도 모두 쫓겨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혹은 노동자, 혹은 여성, 혹은 성소수자, 혹은 저소득층이라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더는 그 정당을 지지할 수 없게 된 사람도 쫓겨났다. 그 안에서 분투하는 이들도 자신의 그러한 정체성이나 신념으로 인해 당내 주류에서 쫓겨나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려 하는 것이며, 협잡꾼들은 권력에 이끌려 옳은 선택을 할 자유를 버리고 서로 믿던 이들을 떠나 불신과 이익 계산의 세상으로 쫓겨났다. 다들 어디선가 쫓겨났다.

물론 나머지와 달리, 협잡꾼은 지금의 현실에서 힘을 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에 인식의 틀이 바뀐다면, 이들마저도 스스로 쫓겨났다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연대의 한복판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아렌트가 수행한 유대인의 유형화와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일갈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에도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영영 닿을 수 없는, 닿더라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이들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 나는 그들이 정말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닫는다면,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을 둘로 유형화했다. 유대인을 천시하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까지 속여서라도 ‘출세한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파브뉴(parvenu)’와 “인간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여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내쫓긴 자’”인 ‘파리아(pariah).’ 사실 파브뉴는 근본적으로 파리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파리아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기를 포기하거나 자기와 사회를 속이고 사람인 척하는 것” 중 후자를 선택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파브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가면일 뿐이다. 변화는 두 개뿐인 것처럼 보이는 선택지의 구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리아가 자신의 상처를 들춰보고 비존재의 지위 자체를 문제 삼을 때 일어난다.” 요약하자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분법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선택지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에 변화가 시작된다(양, 61~65).

파브뉴도 파리아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례로 뒷받침할 수 있다.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생각해 본다면, 파브뉴의 ‘권력’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큰 대가를 치러야만 유지되는지 알 수 있다. 큰 인기를 누리며 사람과 자본을 움직이는 아이돌 가수들은 힘을 갖고 있는 파브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은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재생산하고 강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방송 중인 <퀸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도 힘이 가득 실린 군무를 출 수 있으며, 다리가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 대신 정장을 입고 무대를 장악할 수 있다. ‘멋진’ 무대를 꾸미고 싶고, 심지어 그럴 능력마저 충분한데도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포기하고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들은 ‘아이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자유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파브뉴들의 행동은 ‘자발적 복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발성’은 우리의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인된 것에 가깝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의 이유로 습관과 나약함을 꼽았다. 물론 이는 둘 다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습관과 나약함은 장려되고 구성되기 때문이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성장하기 때문”이며, “자유를 잃으면 용기도 함께 잃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É, 88~89). 그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습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이 길드는 과정에 비유한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É, 81)

이뿐 아니다. 그는 권력자의 편에서 그를 두둔하며 자신의 몫을 챙기는 이들에게 안쓰러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권력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곧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노예가 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잡꾼’과 ‘파브뉴’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에 대해 그는 “자신의 영혼을 헌상한 대가로 의식주에는 궁핍함이 없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목숨까지 걸고 권력(자)에 헌신해야 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아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평안과 자유, 몸, 그리고 삶까지 온전히 맡기고 있는”,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간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누구보다도 비참할지 모른다(É, 116~11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죄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를 버리고 타인의 자유를 짓누른 죄는 무겁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 자신 또한 실은 태생부터 쫓겨난 자라는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각한 쫓겨난 자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신의 진실을 외치면, ‘잘 적응하면 약간의 권리를 얹어 주겠다’고 말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폭로할 수 있다(양, 65).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것과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건 명백히 다르니까. 이러한 성찰과 폭로는 오직 쫓겨난 그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파리아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자각한 파리아’에 의해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그들을 통해 파브뉴 또한 자각한 파리아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가 자신에게 이미 부여해 둔 상한선을 마주하고, 파리아들을 보며 이 사회 속에 자신을 위한 하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파브뉴도 자각한 파리아가 되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새 세상을 위한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이처럼, 쫓겨난 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 깃들어 있다. 기존의 틀을 아예 벗어나 새로운 정치체를 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정치적 자유’가 쫓겨난 자, 파리아의 가능성이며 희망이다(양, 55). 파브뉴와 파리아 사이의 선택은 ‘자유’가 아니다. 이러한 두 위치만이 선택지로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선택의 자유’ 따위는 이미 박탈당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파리아는 철저히 자신의 위치에서 두 선택지만이 놓여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의 뿌리부터 문제 삼을 때 비로소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려면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 김소연, “여행자”,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절망 속에서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을 때, 절망과 싸우며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목격했다. 모두가 죽은 듯 살아가는 곳에서 생을 펼치는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그들은 그곳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만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파리아다. 인간에게 파리아와 파브뉴의 두 선택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리아에게 파브뉴와 파리아의 선택지가 있을 뿐이다. 상승은 한없이 어렵지만, 추락은 언제든 나를 환영한다. 지금껏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하더라도, 약간 삐끗하면 우리는 언제고 추락할 수 있다. 윗자리에 마땅히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가 거기에 가는 건 단지 큰 행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의 고유하고 존중받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파리아의 자리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만약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유일한 선택지는 자각일 것이다. 타인을 동지로 만드는 것도 내가 자각해야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파리아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세계의 부조리를 겪어 내기만 하는 존재자들이 아니며, 언제든 정상적 흐름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이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세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자기 탓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자신의 다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자기 탓처럼 떠안아야 하는” 억울함이 인간 삶의 근원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억울함에 오로지 세상을 경멸하게 된다면 자각은 불가능하다. 나는 오직 파리아로 남아, 자기 혐오 속에서 끝없이 추락하게 될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경멸은 곧 그 대상에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그저 불평하고 세상을 경멸하게 된다면, 나는 그저 그런 안개 주변에서 지내며, 빛의 근처라도 갈 기회조차 저버리게 될 것이다. 빛나는 이들은 쓰러져 갈 것이다. 나는 그 안개 속에서 빛을, 희망을 찾고자 한다. 문화비평가 리베카 솔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적은 우리가 희망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행동에 나설 이유가 없다고 믿기 바란다. 희망은 당신이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선물이며 버리지 않아도 되는 힘이다. […] 희망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제, 불확실성의 광막함 속에 행동할 공간이 펼쳐진다는 전제 위에 자리 잡는다. […] 우리의 희망은 언저리의 어둠 속에 있지 무대 중앙의 환한 조명 속에 있지 않다.”


나는 안개 속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당신과 같은 쫓겨난 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정치가 더럽고 피곤하기에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행동은 분명 그들을 죽이고 더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내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경멸을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자주, 오래 세상을 경멸했으니까. 그러나 경멸 이후에 남는 건 무책임과 피로뿐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 안의 정치적 가능성을 깨닫고,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멸의 극복은 무관심의 극복으로, 무관심의 극복은 자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인의 도구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진정한 변화는 일으킬 수 없다는 자각이다. 이한열 열사 기념관 4층의 벽에는 열사가 남긴 글들이 적혀 있다.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나는 이 문장을 마음에 품는다. 새 삶이 폐허에서 꽃피리라 믿으며.


“이 세상이 나를 배반하고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결코 이 세상을 경멸하지 않을 터이다.”



편집위원 nope (writingnope@gmail.com)


참고자료


편집위원 녕, “이브에서 인간으로 – 여성 래퍼를 찾아서”, 《연세》, 120호, 2019년 여름

프리드리히 실러,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 홍성광, 민음사, 2011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심영길, 목수정, 생각정원, 2015

정창조, 『한나 아렌트, 사유의 전선들』, 두번째테제, 2019, 59쪽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설준규, 창비, 2017

오드리 로드,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박미선, 후마니타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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