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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Apr 15. 2023

<134호> 무악학사에서 살아남기

수습편집위원 야자수 (vlakd0213@yonsei.ac.kr)

 


하얀 벽에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 위에 바탕체로 '무악학사에서 살아남기'라고 적혀 있다.

이 글의 시작은 22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무악학사로 들어오면서 겪게 된 무기력한 상황부터다. 무악학사에 들어오게 되면서 20분만에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무악학사는 잠만 자고 생활은 밖에서 하는 베드타운(bedtown),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집을 나와 기숙사에 살게 된 나는 식사비용 증가로 인해 생활비가 많이 부족했다. 평소라면 집에서 해결했을 끼니를 밖에서 해결해야 했으니 그렇다. 이런 무기력한 상태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상황이 하나 있었다. 

 

여태껏 나의 ‘식사’는 항상 돈을 내야 하는 식당에서 이뤄지거나,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엄마가 해준 요리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 말이다. 기숙사에 살게 되니 식사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사 먹거나, 매점에서 컵밥을 사 먹거나, 밖에서 친구들이랑 밥을 먹고 들어오거나, 배달시켜 먹는다. 물론 기숙사 내에 조리도구와 인덕션을 갖춘 셀프키친도 있었지만, 나 혼자서 식재료를 사서 해 먹기에는 내 돈과 실천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김밥만 먹는 문동은이 될 것 같았다.  모든 끼니가 돈이 되었고, 내 지갑은 점점 얄팍해졌고, 자주 먹게 되는 음식은 양적-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친구와의 밥약까지 기피하게 되었다. 


 식사의 문제가 어느 순간부터 소비화된 삶의 영역, 외주화된 삶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물론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물가 시대를 맞아 학생들은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버티고 있다. 무악 2 학사의 에브리타임 게시판을 보면, 닭가슴살과 계란, 제로콜라를 공동 구매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공동구매니까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모인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그 음식은 방에서 혼자 먹는다. 또한 22년도 9월 7일자 시사저널에 따르면 요즘 대학생들은 플렉스 대신 ‘무지출챌린지’을 하며 “학교 식당을 이용보다는 컵라면과 컵밥을 먹는다”고 한다. 배가 채워지는 느낌이긴 하나, 영양소가 채워지지는 않는 이 기분. 


 더 맛있는 밥을 먹고 싶은데, 방법은 돈 벌기밖에 없는 걸까? 


 전남여성가족재단원장 안경주는 요리와 식사와 관련된 노동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기본 노동”이라고 말한다.이렇듯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인데 이렇게 돈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않고, 밥을 도맡아 해주는 사람 없이도 무기력해지지 않는 방법은 없는 걸까?



파트1. 소비화된, 외주화된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재생산이란 사람을 출산하는 것 이외에도 사람을 생존하게 하고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모든 과정이다. 사람을 생존하게 하는 것에는 돈 말고도 맛있고 건강한 음식 먹기, 좋은 사람들 만나기, 취미 즐기기 그리고 가시적으로 잘 안 드러나지만, 이 모든 것이 유지되려면 필수적인 집안일도 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임금노동의 영역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기를 돌볼 수 있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더 윤택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의 일들은 뒤 순서로 밀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맡기기 십상이다. 대외적으로는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며 사회적 재생산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실상은 입시 경쟁 혹은 정규직 취업 경쟁으로 숨 쉴틈조차 주지 않는다.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은 ‘고3’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일에서 쉬이 제외되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아동/청소년을 양육할 때 사회적 돌봄을 잘하는 사람으로 양육하기 보다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임금노동을 위주로 기르고-자란다. (자신의 장래 희망을 설명할 때, 우리는 주로 임금노동을 하는 직업만을 말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일상을 지키는 돌봄노동의 영역은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있다. 공짜 혹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 존재가 없으면 많은 사람이 불편을 느낄 것이다. 예컨대, 학교 건물 청소노동자가 없다면? 화장실에는 누군가의 변을 닦은 휴지가 쌓이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공용샤워실을 쓰는 무악학사도 그렇다. 청소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샤워실 배수구에는 머리카락이 엄청 쌓여있다. 그 누구도 치우려고 하지 않지만 오픈카톡 채팅방에서는 샤워실이 너무 더럽다고 호소한다. 건물관리 노동은 임금노동이지만서도,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기본 노동’을 훈련받지 않은 우리에게 그들의 노동은 비가시화된다. 이안소영은 책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에서 돌봄노동의 가치가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효율적인 시간 배치를 위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큰 규모로 키우기 위해” 국가 정책이나 개인의 삶에서 뒤 순서로 밀려났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들이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내 손으로는 하기 싫고-해본 적이 없어 하지 못하고, 남에게 돈 주고 맡기는 노릇이 되었다. 


 책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에 따르면,생태경제학자인 앙드레 고르는 인간의 노동을 타율노동, 자율노동, 자활노동으로 구분하였다. 타율노동이란 사회적 필요에 의해 명령된 경제적 합리성에 따른 임금노동을 말한다. 자율노동이란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마지막으로 자활노동이란, 살림처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임금노동 이외의 일을 말한다. 자활노동이 생존에 필요한 집안일에 가깝다면 자율노동은 취미로 하는 악기, 취미활동 모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앙드레 고르가 제시한 개념에 따라 우리의 식사 문제를 다시 범주화해보자.


 우리가 밥을 어떻게 먹나 생각해보면, ‘집에서 해 먹는 밥’(자활노동)과 ‘집 밖에서 먹는 밥’(타율노동)으로 나눌 수 있다. 집에서 해 먹는 밥은 주로 엄마들, 여성들이 도맡았던 재생산노동이다. 젠더화된 자활노동은 가부장제를 지탱하게 했다. ‘바깥일’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만, ‘집안일’은 그렇지 않기에 그 진가는 더 가려진다. 하지만 교환가치(시장에서 얼마만큼의 돈으로 교환되는지)가 0원이라고 해서 사용가치(그 상품의 실제 유용성)까지 0원은 아니다.  매일 입는 옷을 빨래하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냉장고에 있는 남은 식재료를 처리하는 고민, 설거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먼지 가득한 거실 청소, 물때가 낀 화장실 청소까지. 엄마가 전업주부가 아니고 맞벌이라 같이 자활노동을 분담한다 해도 여성들은 이중부담을 떠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요리의 질에서 차이가 나는데, 대체로 아빠와 자녀들은 간단한 요리(혹은 특별한 요리일지라도 가끔)만 하고 엄마는 ’정성스러운‘ 음식을 하는 걸 주로 목격할 수 있다. 나의 가정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 명의 자녀를 다 키우고 알바를 시작하는 중년의 엄마는 출근하는 날에도 식사를 챙겨 먹으라는 카톡 메시지를 남긴다. 밥을 먹으라는 소리를 해야만 먹는 이상한 가족 구성원들 때문에 엄마는 요리하는 시간이 끝나고도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신경을 항상 곤두세워야 했다.


 그렇다면 가족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닌 돈을 지불하고 먹는 식사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첫 번째로는 식당이 있다. 식당은 단순히 밥 먹으려고 가는 곳이 아니라, 친구/연인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공간으로도 여겨진다. 약속 장소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할 때, ‘#00맛집’을 가장 먼저 검색하는 자신을 떠올려봐라. 실제로 만나면 식사 후에 ‘카페-인생네컷, 때때로는 유명 브랜드 팝업매장’과 같은 코스로 이어진다. 친밀성의 공간은 어느새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입장하기 불가능해졌다. 물론 친해지는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이지만, 매번 밖에서 사 먹는 것이 부담이 된 고물가시대에 이 방법으로만 우정을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소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친밀성의 장에서 소외되기 쉬워진다. 다음의 문장을 보고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보자. 느긋한 주말 오후,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 약속 장소의 지역은 어디인가? 식당에서 파는 메뉴는? 신촌 근처에 살고 있다면 연남동에 위치한 덮밥집이거나, 디저트 카페 정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근데 그 장소가 김밥천국이라면? 분명 이질감 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특정한 이미지는 주로 ‘인스타그래머블’한 배경을 갖고 있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까먹은 건 아닐까.  또한 이런 단일화된 방식의 놀이문화는 돈과 공간적 의미를 소모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짐에 주목할 만하다. 공간적 의미를 소모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소비자의 입장으로서만 그 장소에 단기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그 공간에 자신이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네이버 영수증 리뷰를 작성할 정도로만 간섭한다. 이렇듯 식당은 고물가시대에 지속할 수 없는 놀이문화이기도 하고, 방문자를 단순히 ‘소비자’로서만 남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배달. 플랫폼 기술이 가속화되고 배달 가능한 매장이 많아지면서 빠른 속도로 다양한 음식을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짜장면, 족발 같은 것만 시켜 먹었다면 이제는 주변 카페에서 만드는 크로플과 같은 디저트류도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배달을 더 찬양하게 되었다. 배민/배달긱과 같은 서비스는 즉각성과 다양성이라는 편리함이 있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기존의 노동과는 다른 새로운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플랫폼 배달 노동은 자신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주문자에게 알려지기에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또한 택배기사와 달리 정해져 있는 배달 지역이 없기에 매번 가는 장소도 다르다. 자신이 이번에 배달할 곳에 사는 사람의 성격이 괴팍할지 천사일지 모르기에 항시 긴장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플랫폼 노동은 먹는 사람이야 덕분에 편하지만, 기존 노동과는 다르게 다양한 변수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위험 상태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밀키트. 밀키트는 1인가구를 겨냥해 나온 상품으로 ‘혼자사는 청년에게 따뜻한 밥’,‘만들기 어려운 요리를 손쉽게 먹을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생겼다. 밀키트는 스스로 요리를 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활노동에 포함시킬 수 있겠으나, ‘요리’의 과정의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타율노동에 더 가깝다. 모든 재료가 거의 손질되어 진공포장되어 나오기 때문에 신선한 재료를 고르고, 같은 품목이어도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을 고르는 방법을 알 수 없다. 식재료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감각, 물가를 체감하는 경제관념, 손으로 직접 칼질을 하거나 소스를 배합해보는 등의 감각은 기를 수 없다. 자활노동에 필수적인 과정들이 삭제된 채로 음식을 마주한다면, 그 음식을 붕 뜬 상태로만 접하게 된다. 웃픈 얘기지만 미국인 성인 1,000명 중 7퍼센트는 초코우유가 황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음식을 붕 뜬 상태로만 알고 있었기에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이다. 우린 어릴 적부터 밥상머리에 앉아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밥 한 톨도 남기면 안 돼! 농부 아저씨들이 땀 흘려 소중히 만든 거야!’ 하는 말이다. 농부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서도 그들의 노동과정을 인지시켜주는 좋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는 그 어떤 과정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는다. 어젯밤 마켓컬리로 주문한 마라샹궈 밀키트세트에 포장된 다양한 식재료들은 ‘다양함’을 잃은 채로 그냥 내 입안에 욱여넣어진다. 공장에서 칸칸이 길러진 돼지. 공장에서 플라스틱병에 버섯균 주입부터 성장을 거친 대량 생산된 팽이버섯(감히 적자면 필자는 여태껏 팽이버섯이 비닐하우스에서 자랄 것이라는 이상한 편견을 가져왔다). 또 밭에서 재배된 마늘은 공장에서 자동화 기계와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깐마늘이 되어 우리 앞에 편마늘로 온다. 


 물론 밀키트가 아니라 시장에서 장을 본다 해도 내 입으로 들어가는 식재료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지 못한 채로 접하게 된다면, 팽이버섯이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걸 알게 될 일은 만무하다. 그런데도 원재료 하나하나 구입해보는 경험, 그리고 그 물가의 오르내림을 살갗으로 느껴보는 경험은 세상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세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뭘까. 필자의 경험으로 얘기해보자면, 코로나가 닥친 지 1년쯤에 쌀국수 가게 주방보조로 알바하면서 고명으로 올라가는 쪽파를 너무 많이 넣는다고 사장에게 혼이 났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쪽파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뇌가 순수한 알바생은 코로나랑 쪽파값이 뭔 상관이냐고 물었고 사장은 ‘연대생이 그런 것도 모르냐’며 눈초리를 주며 친절히 설명해줬다. 원래 농산물을 재배하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못 들어와서 그랬단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대한민국 농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장은 물가의 오르내림에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그들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나처럼 요리를 붕 뜬 상태로만 접하게 되는 이유는 보통 식재료를 생산하는 장소와 소비하는 사람이 단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리’라는 단어 안에 담긴 과정은 ‘조리’라기 보단 식사 한 접시가 내 앞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하나하나 알게 되는 것에 가깝다. 


 아주 기초적인 먹기라는 행위는 식욕의 욕구를 채워주기도 하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위조차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위에 있었다. 또한 식당, 배달, 밀키트와 같은 여러 서비스 덕분에 더 다양한 요리를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충분한 돈이 없으면 먹지 못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먹이는 감각을 잃어버리게 한다. 우리는 어쩌면 소비화된 삶의 양식에만 갇히게 됐고, 스스로 사회적 재생산을 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의 울타리 밖으로 벗어난 대학생,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무자본러인 나는 점점 ‘맛있는 밥’과 ‘친구들’로 부터 고립된 자아가 되었다.



파트2. 엄마 없이, 배민 없이 스스로 밥 해 먹기

 가끔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인다. ‘경쟁에만 몰두하지 말자, 신자유주의에만 갇혀 살지 말자(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퉁쳐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단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정부의 공공성이 줄고,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걸 말한다. 예컨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원이 생기는 대신에 각종 기업이 그 땅을 나누어 가져 상가와 사무실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공공성이 부재한 현실에서 개인들은 더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시간, 능력, 자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열혈분투적인 삶을 산다)’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조차 누군가 요리한 음식, 누군가가 배달해준 음식이었다. 경쟁에만 너무 몰두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졸업하고 나서 번듯한 타율노동자가 되기 위해 학교에서 아등바등 공부하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먹는 음식조차 더 많은 이들을 타율노동자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위에 서 있었는걸.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는 사 먹는게 편하다는 걸 모두가 안다. 일하기 바쁘니까, 요리할 시간에 차라리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효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사 먹는 것, 간단히 먹는 것은 끌릴 수밖에 없는 선택지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효율적인 삶이란 뭘까? 이 또한 타율노동을 하기 위한, 혹은 자신이 타율노동을 잘 해낼 사람이라는 것을 노동시장에 입증하기 위한 삶에 치중되어있다. 아직 대학생이라면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혹자는 ‘그냥 돈을 더 벌면 되지, 그냥 배만 채우면 되지 굳이 시간을 들여 만들어 먹을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선택지를 하나 늘리고자 한다. 돈을 더 벌지 않고도, 양적-질적으로 배부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요리와 식사를 자활노동-자율노동으로 스스로 행하는 것, 내가 몸담은 집단 구성원들과 함께 각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요리-식사를 배민과 엄마 없이도 스스로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앙드레 고르는 “자율 노동은 늘리고, 타율 노동을 줄이며, 그로 인한 소득 감소는 자활노동을 늘림으로써 보충해야 한다. 타율 노동에 의해 잠식된 사람은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며, 외식이나 주문 음식, 파출부 고용 등을 통해 자활노동을 해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타율노동자’로 만든다.”라고 책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에서 밝히고 있다.


 먼저, 사회적 재생산으로서 요리하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로서만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한계를 가진다. 이는 내가 무악학사에 들어와서 마주한 무기력한 상황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내가 무기력해진 이유는 여태까지 나는 소비자로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지자 기존에 내 삶을 유지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비하지 아니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성할 방법을 몰랐다. 한 끼 식사조차 스스로 해 먹는 움직임에 익숙지 않기에, 양육자로부터 출가한 사람들은 주로 끼니를 사 먹는다. 또한 우정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조차 매번 식당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이뤄진다. 이는 곧 우리의 정체성을 자본주의 틀 안에서만 설명하게 한다. 자본주의 틀 안에서는 화폐 가치로 설명되는 것-돈을 버는 ‘생산’과 돈을 쓰는 ‘소비’-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화폐가치로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순간이 아니어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그렇다면 밥을 사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스스로 만들어 먹으라는 말인데, 혼자 밥 해 먹으려면 장 보는 돈이 더 많이 드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당연히 혼자 해 먹으라 한 적 없다. 스스로 요리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들을 적당히, 요리조리, 알잘딱깔센으로 활용해서 사회적 재생산으로서의 요리해야한다. 바로, 친구들과 공유주방을 활용한 협력적 자활노동을 하면서 말이다. 협력적 자활노동이란 사회적 재생산에 꼭 필요하지만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집안일’을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요리-식사를 한다면 비용 절감을 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있으면서도(*다 같이 요리해 먹는 만큼 돈이 엄청나게 깨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사람이라면, 파트3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후술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라.), 고물가시대에 기본 2~3만 원이 소모되는 ‘핫플식당-카페’ 코스가 아니어도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돈이 부족했던 필자와 같은 사람 말고도 다른 이들에게도 꽤 반가워할 만한 일이다. 단순히 핫플식당에 앉아 사진 좀 찍다가, 언제 재방문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도 어플에 저장해놓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공간적 의미를 소모하는 방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유주방에 자기들만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놀이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요리라는 행위가 아직 생경한 사람들에게 요리는 낯설지만 도전하고 싶은 취미로 여겨지기도 하니 그 점을 잘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두 번째로 공유지를 기반으로 행해지는 자활노동은 기존의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를 해체해보는 연습을 하게 한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엄마가 자신의 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키우려고 하는 이유가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딸이 집안일을 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라는 거다. 당신이라도 그 일을 줄여주고 싶어 하는 안쓰러운 마음은 이해가 되나, 꽤 충격적이었다. 결혼하면 집안일을 모두 여성이 도맡아 하던 시대를 살아가던 엄마는 자기 딸에게 그런 현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했지만, 그렇게 자란 젊은 여성들은 사회적 재생산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길러졌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의 다음이 너무 궁금해 내 맘대로 상상해 보았다. 그 여성은 엄마가 대신 집안일을 해준 덕분에 집안일 할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후에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 되어 돈을 많이 벌고 회사에서 존경받는 상사가 되며 하루하루 바쁜 나날들을 보낸다. 어찌저찌 만난 남성과 결혼하여 애를 낳았고, 그 집은 맞벌이라 집안일과 주중 낮에 육아를 도맡아줄 가사도우미를 고용한다. 그녀의 인생만 보면 그 엄마의 바람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가는 걸 보아 가부장제에서는 탈출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앙드레 고르 말처럼 ‘자활노동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또 다른 이들을 타율노동자로 만들게’ 되었다. 


 멋대로 상상해본 뒷이야기에 나온 삶 전부를 부정하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워킹맘들의 고충을 함부로 비난하는건 아니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과연 자활노동을 공적으로 충분히 훈련받을 기회가 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녀의 엄마가 행해왔던 자활노동은 폐쇄된 공간에서 개인만이 수행해왔던 ‘독박’이었기에 그 노동의 가치를 서로 인정해줄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이 집안일을 부끄럽게 여겨 딸에게 시키기를 그렇게 기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자활노동을 공적인 장소에서 훈련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줄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자활노동을 공동체 속에서 훈련할 기회가 있다. 생활비가 비싼 미국의 사립대에 거주하는 대학생들은 비교적 기숙사 비용이 싼 대학생 주택협동조합을 만들어 기숙사를 운영하는데, 그 운영방식을 보면 협력적 자활노동을을 찾을 수 있다. 일단 대학생 주택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는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건물을 짓기 때문에 임대주택보다 훨씬 싸다. 주택협동조합이란 비교적 싼 가격에 주택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결성한 단체이다. 협동조합에 가입할때는 일정 금액의 출자금을 내고 가입한다. 주식회사와 다르게 조합원 모두 동등한 의결권을 갖고 있어 1인당 일정 금액 이상을 내고 가입해야한다. 그 이상의 금액은 낼 수 없다. 주택협동조합의 경우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주택을 구매한다.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은 주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지만 주택협동조합의 경우는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이 워낙 고가이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임대주택이라면 임대료에 집주인 개인의 이윤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학생 주택협동조합는 집주인이랄 개인이 없기에 공동자금으로 쌓인다. 또한 관리비 절감을 위해 학생들이 집안일을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2012년도 한겨레 관련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위스콘신주 매디슨의 작은 주택협동조합은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잔디 깎기, 물품구입 같은 일을 학생들이 분담하고, 보통 주 5~6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글쓴이는 주 1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채소를 구매하는 일을 맡았다. 새 입주자를 안내해 계약하는 관리업무도 학생들이 맡는다. 학생들은 한 달에 두 차례 전체 회의를 열어 협동조합 운영 전반을 논의”한다고 한다.


 세 번째로, 단순히 식재료를 조리가 아닌 요리하게 되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요리라는 과정은 기본적으로는 음식이 어떤 영양소를 가졌는지 알고, 더 나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길러졌는지 아는 것이다. 책 『밥상혁명』에 따르면 일본은 ‘요리’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005년부터 식육기본법을 제정해 초등교육 과정에서 학교 급식에 나오는 지역 먹거리가 어떻게 재배되고 만들어지는 보게 한다. 농장방문을 포함해 먹을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가공되는지를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림1. 일본의 초등학교에서는 식육기본법에 따라 식재료 생산-가공업 종사자를 만나는 체험학습을 한다. (출처. 강양구,강이현, <밥상혁명>, 살림터, 2009, 199쪽)

 음식을 붕 뜬 상태로만 접하는 문제는 급식을 먹는 아이들이 농수산업 종사자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통상 식재료를 생산하는 장소와 소비하는 사람은 유통 단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문제가 생기는데, 지바현은 이 부딪힘의 과정을 중요시해 ‘지산지소(지역 생산품을 지역에서 소비하다)’를 학교급식에서도 실현하고 있다. 학교 급식 재료를 지역 내 농수산물 생산자와 영양사가 합의해서 납품 수를 결정한다. “지바현에서는 가지가 많이 나는데, 가지 하나를 놓고도 납품을 맡은 지역 농협과 영양사가 같이 회의한다. 이번년도는 풍작이라든지, 흉작이라든지 하는 상황을 함께 공유해서 급식에 쓸 수 있는 지역 먹을거리의 종류와 양을 결정”하는 식으로 말이다. 일본은 식육기본법을 시행하고 있을 당시, 2006년 한국에서는 (주)CJ 푸드가 위탁 급식으로 운영하던 25개의 학교에서 약 1,700명이 동시에 식중독 의심 증상이 보였다. 이후에 학교 직영법으로 바뀌긴 했지만, 일본의 식육기본법에 비하면 여전히 학교 급식과 학생들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2022년도 서울의 어느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기후급식’ 메뉴를 만들었다.국어 수행평가 시간에 기후 위기를 주제로 찬반 토론을 하다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서부터 실천이 필요하다 느껴 주 1회 페스코 급식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요리’ 과정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어쩌면 괜찮은 지구살이가 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소비자가 생산의 단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더 안전히 먹을 수 있다. ‘요리’를 직접 하다보면 평소에는 안느껴지던 수고로움을 알게 될 수도, 평소에는 안 느껴지던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혹은 평소에는 잘 넘어갔던 음식을 못 넘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회적 당위를 가진 멋진 이유 말고도 자기가 먹을 밥을 스스로 준비하고, 자기가 저지레한 것을 스스로 치워야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당연한 걸 모두가 안다.



파트3. 지금, 여기서 해볼 수 있는 협력적 자활노동은.

 이제 다시 기숙사에 입주해 양적-질적으로 괜찮은 밥을 먹지 못해 무기력해진 필자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파트 2에서 자활노동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했고 혼자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자활노동을 연습해보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다 같이 요리 해 먹는 모임은 우리 곁에 여러 모습으로 있다. 그 예시를 보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학생의 삶에 어떻게 들여 맞출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 것 중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소셜 다이닝이 있다. <피델리오>는 “남이라서 더 재미있는 낯선 사람들과의 근사한 한 끼. 편견 없는 대화를 함께하는 즐거운 소셜 다이닝” 이라는 문구를 내걸어 각종 호스트와 게스트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비슷한 형식으로 <남의 집 프로젝트>도 있다. 남의 가게 혹은 집에 가서 호스트가 주최한 프로그램에 따라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새로운 지역에서 직장을 얻어 살아가는 사회초년생들에게 나이, 직업, 성별 무관한 다양한 ‘이웃’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에 인기를 얻고 있다. 일회당 참가비용은 평균 7만원대의 가격. (정말 직장인만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엔 가장 큰 하나가 빠져있다. 자활‘노동’의 과정이 없다. 애당초 현생에 찌든 현대인들은 이 모임을 통해 자활노동을 훈련하기보다는 익명인과 함께하는 파인 다이닝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요리전문가를 호스트로 두고 있고, 게스트들은 호스트가 제공한 흔히 맛볼 수 없는 고급 음식을 먹으면서 익명인들과 대화하며 ‘힐링’을 하고 ‘새로운 삶의 자극’을 받는다. 실제 후기 댓글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 프로그램을 하게 되면서 그 시간 동안은 혼밥을 피했지만,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요리하는 방법에 익숙해지지 않아 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지 모른다. 


 직장인 말고 대학생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소셜 다이닝의 예시도 있다. 수원에 위치한 경기 기숙사는 2022년 11월 학생들의 건강한 식문화를 위해 전문 강사를 초대해 까나페와 녹두전, 단호박찜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기 기숙사 홈페이지 포토갤러리에 게시된 글은 2022년 11월 딱 한 개뿐이었고 그 전, 그 이후로 같이 만들어 먹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재미는 있었겠지만, 한번으로는 자기 밥을 꾸준히 건강하게 만들어 먹을 습관을 들이기에는 짧디짧은 시간으로 보인다. 


 그럼 일회적이지 않고, 좀 더 조직적으로 생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커뮤니티 식당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하는 부엌』의 저자 박세영은 채식 여행자로서 세계 각국의 생태 마을을 여행하며 다양한 커뮤니티 식당을 경험했다. 일본의 사토야마 커뮤니티, 남인도의 오로빌 생태 마을, 프랑스의 커뮤니티 식당 등. 전 세계에 있는 커뮤니티 식당들의 공통점은 직접 가꾼 농작물 혹은 생활협동조합에서 사 온 식재료들로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먹을 음식의 식재료 어떻게 나왔는지, 누가 어떻게 재배했는지 그 과정을 알기에 식재료들을 신뢰할 수 있다.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는 시간은 공동체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었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쉽게 연결될 수 있게 했다. 남인도의 오로빌 생태마을에는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함께 만들어 먹는 요리로 매우 친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 요리를 제안하면, 누구는 장을 봐 오고, 누구는 식탁을 차리고, 누군가는 집 안을 청소했지. 또 누군가는 음악을 고르고, 춤을 추자고 유도하는 식이었어. 이렇게 우리는 요리 시간을 즐겼고 우리의 중요한 대화는 ‘다음 식사에는 무얼 해먹을까?’ 또는 ‘누구를 초대해서 같이 먹을까?’였어. 함께한 2주 동안 한국 요리, 터키 요리, 스페인 요리, 네팔 요리, 남인도 요리, 피자 파티등 자신들의 요리를 선보이기 시작했어."(위 책의 66쪽)

 또한 프랑스에서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 커뮤니티 식당은 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도 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래의 협동조합에서는 최초 가입할 때, 조합원들이 출자금이라는 비용을 내면 단체가 공동사업을 시행할 때 더 싼 가격에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공동구매의 목적과 비슷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커뮤니티 식당은 좀 더 특별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본인이 낼 수 있는 만큼 돈을 지불하고 누구나 함께 요리하며 밥을 먹는 곳”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이는 기존에 기관으로부터 무상급식을 받던 홈리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들을 ‘일방적인 수혜자’로만 만들지 않고 함께 어울리며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공동체가 무악학사에도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협동조합 형식의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기숙사 내 동아리 정도로도 생각해도 좋다. 기숙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하고,  최초 가입시 만 원 정도를 받는다. 출자금처럼 말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가입비를 꼭 현금이 아니라도 집에서 가져온 밥솥, 접시, 감자와 같은 현물로 받아도 좋다. 자식을 기숙사로 보낸 양육자의 부-모성애를 잘 구슬려 매달 사과를 보내달라고 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모인 공동비용으로 기본 식재료들(소금, 설탕, 쌀, 간장, 고추장, 마늘,…)을 산다. 그리고 밥을 해 먹을 때마다 신촌 이마트 가서 장을 보고, 비용은 먹은 인원끼리 나눠 내는 것이다. 기본재료들만 잘 갖춰져 있으면 메인 식재료에만 지출하면 되기 때문에 그리 큰돈이 들지 않는다. 


 직접 만들어서 먹는 기쁨. 요리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 서로에게 음식을 대접해주는 경험. 자활노동을 공동체 속에서 훈련해보는 기회. 아마 이렇게 하면 기숙사가 단순히 베드타운에만 머물러있지 않을 거다. 그냥 잠깐 살다 스쳐 가는 공간이 아니라는 거다. 돈이 부족해 혼자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는게 아니라, 적은 돈으로도 친구들과 질 좋은 식사를 만들어 먹게 된다. 보통 우리는 질 좋은 생활을 나중으로 미룬다. 저녁을 만들어 먹는 생활은 안정적인 직장을 잡은 후에, 내 집 마련을 한 후에.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살만한 곳’으로 바꿔보는 시도를 해보자는 제안해본다.



마무리

 부모로부터 출가하고 기숙사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 스스로 밥을 챙겨야 한다. 엄마가 밥을 챙겨주던 미성년자 생활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내 돈 내고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계속 올라가는 물가에 매번 밖에서 밥 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식사 앞에서 무기력해진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이 글에서 젠더화된 자활노동이 지탱하고 있었던 가부장제와 공유지가 소멸한 신자유주의를 꼽았다. 첫째로 가부장제가 만든 무기력한 나.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지만, 젠더화된 자활노동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엄마 없이 내 끼니를 스스로 챙겨 먹을 수 없었다. 협력적 자활노동은 그동안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져 왔던 자활노동을 공적으로 연습하게 한다. 두 번째로 신자유주의가 만든 무기력한 나. 고물가 시대에 월세도 오르고, 식비도 오르는 마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지출챌린지’와 ‘공동구매’처럼 사 먹는데 비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는지 묻고, 또 하나의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사실 무지출챌린지와 공동구매라는 행위는 단절된 개인을 만든다. 질적으로도 괜찮은 밥을 먹으려면 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제안이 단순히 돈이 없는 이들에게만 잘 살아 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고 있다. 여태껏 화폐로 대체해왔던 그 과정을 공동체 속에서 함께 요리를 해보면서 몸으로 직접 겪어볼 필요가 있다. 혹자의 말대로 기숙사는 언젠간 떠날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곳에서 ‘잘 살아 보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도 ‘잘 살게’ 해줄 것이다.  떡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 집안일도 해본 놈이 잘한다. 자기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에서부터 잘 살아본 놈이 잘산다.



수습편집위원 야자수

vlakd021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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