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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Apr 15. 2023

<134호> 학교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수습편집위원 예인

  

연한 푸른 색 배경에 뿌연 방울들이 떠 있다. 글의 제목이 두 줄에 걸쳐 쓰여 있는데, 위에는 '학교에'가 보라색으로 아래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가 핑크색으로 쓰여 있다. 

본 글 중에 살처분 당하는 돼지 사진이 나옵니다. 등장 직전에 다시 한 번 안내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연세지 독자 여러분. 저는 이번 봄 호부터 연세지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수습 편집위원 예인입니다.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이제 막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요, 저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휴학생이거든요! 두 학기째 휴학 중이라 이제는 종종 복학 생각도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서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비건이거든요.     


비건이 뭐죠? 혹시 Begun?

비건이란 모든 동물 유래 식품 그러니까 소, 돼지, 물살이 등의 사체뿐만 아니라 닭알, 소젖까지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살이란 ‘물고기’가 ‘고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동물임을 밝힘으로써, 물고기라는 단어가 정당화하는 폭력을 멈추고 환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조금 놀라셨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계란’이나 ‘우유’까지 안 먹는 건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니까요. 그런데 닭알과 소젖을 거부한다는 것은 빵을 비롯하여 시중에 파는 대부분의 디저트나 과자류 또한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멸치육수, 각종 액젓, 동물성 조미료 등을 넣지 않고 요리하는 식당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비건 식당이나 비건 인증 제품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집 밖에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이 정도의 불편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왜 채식을 실천하는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가장 오래된 영국의 비건 단체인 ‘비건 소사이어티’의 비거니즘 정의를 빌려 독자분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비건은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거니즘은 음식, 의복 등 어떠한 용도이든지 동물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모든 형태를 배제하고 동물, 인간, 환경의 이익을 위해 동물이 없는 대체품의 개발과 사용을 촉진하는 철학이자 삶의 방식이다. 


위에서 설명하는 대로 비건은 그들의 식이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와 학대를 반대하니까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가방, 신발, 벨트는 물론이고요, 캐시미어 스웨터, 구스다운 패딩 등 동물의 털로 만든 겨울의류도 소비하지 않습니다. 동물 실험을 거친 화장품, 샴푸 등의 다양한 생활용품 또한 소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거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기후위기 등의 환경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곤 합니다. 비건을 정의하고 설명해봤는데요, 사실 글 몇 줄로 모든 것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비건이 된 계기, 지속하는 이유, 비인간동물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 등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에 의해 모든 비건은 각자의 고유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중일 테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끌고 가기 위해 제가 왜 비건이 되었고 이를 지속해서 실천하고 있는지 얘기해드리려고 합니다.          


더 이상 육식을 참지 않아도 돼! 난 ‘고기’를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으니까.

여러분은 살면서 어떤 동물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시나요?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생각해보셨나요? 여러 답변이 가능합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고요, 만약 인간도 동물임을 인지하고 계셨다면 인간이라고 답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음이 명백한 거 같기도 한데요, 저는 다른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가 식탁에서 만나온 수많은 동물입니다.

제 질문에 처음부터 동물 사체를 답으로 떠올리신 분은 없을 겁니다. 예전에는 저 또한 그랬습니다. ‘치킨’, ‘삼겹살’ 등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동물과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겁니다. 음식은 그저 맛있게 먹는 것이니까요. 육식을 즐길 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을 떠올렸던 적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랬던 제가 2020년 하반기 즈음부터 약간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육식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축산업이 심각한 환경파괴를 야기한다는, 그리고 축산업의 ‘고기 생산과정이 다소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육류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요리 하는 경우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당시 가장 좋아했던 치킨 소비를 줄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비건이라는 개념도 알고는 있었으나 도저히 실천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윤리적 문제와 환경을 위해 ‘고기’를 평생 포기한다는 건 과한 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과한 실천’을 지속하는 비건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엄격하게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떤 한 주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기도 했고 스트레스받는 시기에는 치킨을 이틀 연속으로 시켜 맘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뿌듯함과 죄책감이 오가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문장이 제 마음을 강하게 울렸습니다. 신학과 수업 중 읽었던 『여자, 성서 밖으로 나오다』라는 책의 한 부분이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양심으로 상징되는 예수의 기준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인간인가?” 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 안에서 울려 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그 소리의 요구대로 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최소한의 것이며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한 대 맞은 거 같았습니다. 내 멋대로 나의 한계를 정해놨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내가 꿈꿔왔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고자 했었는지 확인했습니다. 아니,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마음이 이 정도로 강하게 움직인 데는 제 종교적 배경이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저 날 이후로 육식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 인식의 전환은 육식을 그만둔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비거니즘과 축산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진실이 전보다 더 확연히 인지되었습니다. 아마 육식을 하는 동안에는 육식을 하는 자신을 정당화해야만 했기에 진실을 애써 부정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육식을 멈춘 후에는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비인간동물들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동물해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러 비인간동물을 만났습니다. 비인간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와는 별개의 동등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동등함에 기초한 공존을 체화해갔습니다.

제가 비건이 되기 전에는 비건이 아주 높은 수준의 윤리적 실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자신이 아는 대로 행동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동에서 앎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앎으로부터 나온 행동은 새로운 이해를 만들고 그렇게 경계가 모호해져 도저히 육식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이 제가 겪은 과정입니다.

제게 닭, 돼지, 소 등의 동물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진술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저는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치킨, 삼겹살이 제게는 ‘고기’가 아니라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간, 나와 동등한 존재의 사체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한 집에서 살고 계신 분들은 제 입장을 상상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동물이 개, 고양이, 인간 그 무엇이 되었든 그를 죽여서 먹을 수는 없을 겁니다. 설령 아사할 지경이 되어도요. 함께 산책을 나서고 몸을 쓰다듬으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 먹고. 가끔 함께함이 힘들 때도 있지만 동물 대 동물로서 시간을 보낸 존재들을 음식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음식으로 봐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로 그들을 음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저와 같은 비건들은 일반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촌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개인에게 당장 비건식을 요구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겁니다. 손해를 감수해가며 비건식을 준비할 것을 개인에게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학교라면 어떨까요? 대학은 달라야 합니다. 대학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이를 품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별, 인종, 장애 여부 등에 따라 교육받을 기회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비건과 같은 식이소수자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교내식당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단지 식당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같이 밥을 먹을 수 없기에 대부분의 모임, 행사에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배제되는 교육환경에서는 학업에 집중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연세대학교는 연세대학교 구성원이 비건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연세의 비전은 비건을 향한다!

연세대학교는 학내 구성원이 어려움을 호소하기 이전에 적극적으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고 나아가 이를 장려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의 비전이 그렇기 때문인데요. 연세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연세소개’에서 ‘VISION-YONSEI 150’와 ‘비전선언문’을 찾을 수 있는데요, 같은 내용을 글로 쓴 게 비전선언문이고 이를 요약해 이미지화한 게 VISION-YONSEI 150입니다. 그리고 연세소개 하위 항목 중 ‘교육목표’가 있습니다. 교육 목표 6가지가 모두 VISION-YONSEI 150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같은 말을 무려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연세대학교가 창립 150주년을 준비하며 세 차례나 내세우고 강조한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도전적 연구와 지식 추구                               
세계를 선도하는 연세 배움터 재창조                                                                              
탈경계 초연결 시대의 대학교육 패러다임 전환                                                                    
융합과 산학협력을 통한 글로벌 임팩트의 창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포용과 지속가능한 공존 지향                                            
한국 사회와 교육을 견인하는 선구자적 역할 수행     

 

이 중 첫 번째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도전적 연구와 지식 추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구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되어있지는 않지만, 기후위기와 전염병은 모두가 공감하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코로나19를 버텨왔고, 지난여름 폭우에 침수된 강남을 지켜봤으니까요. 저는 채식 실천이 전염병과 기후위기라는 두 가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교육이고 따라서 연세대학교가 채식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려 합니다. 연세대학교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를 교육 목표로 정한 것이라면, 문제해결을 위한 ‘도전적 연구’와 ‘지식 추구’에 앞서 채식이라는 쉬운 실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당면한 첫 번째 문제: 전염병

코로나19 이전에도 여러 질병이 인류를 괴롭혀 왔습니다. 대다수가 잊었을 사스부터 메르스, 에볼라 등 많은 질병이 사회를 뒤흔들어왔고 질병의 이같이 꾸준한 발생은 자연스레 다음 질병을 준비하게 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앞서 말씀드린 질병이 모두 동물 매개 감염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물이 코로나 19의 숙주라는 사실은 이미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천산갑, 뱀, 밍크 등 연구진에 따라 다른 종을 가리키긴 하지만 적어도 동물을 코로나19의 원인으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코로나19만이 아닙니다. 예전 메르스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낙타와 접촉한 사람을 위험군으로 분류하는 등 질병의 원인을 동물과의 접촉에서 찾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야생동물을 먹거나 접촉하는 일은 흔치 않기에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끼는 것 외에는 일상적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위생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은 이미 감염병이 발생하고 나서의 문제이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채식 실천이 동물 매개 감염병을 예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함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채식이 감염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식이 감염병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인간과 접촉이 없던 야생동물을 먹는 것은 당연하고 축산동물을 통한 육식까지도 감염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건데요,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육류소비량의 가파른 증가는 축산동물에게 필요한 공간과 곡물 양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방목지나 농경지가 확대되고 이는 심각한 환경파괴를 야기합니다. 여러 동식물이 살아가며 생태계를 이루고 이를 통해 자원을 축적해온 자연이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여러 야생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도록 몰아붙입니다. 바이오매스 개념을 통하면 이 상황을 보다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오매스란 생명체를 개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중량으로 파악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수백만 명의 개미보다 고래 한 명의 바이오매스가 더 크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인간 동물도 인간과 같이 하나의 목숨을 가진 존재이므로 이 글에서는 ‘마리’라는 단위 대신 ‘명’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량이 클수록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따라서 바이오매스를 통해 생물량을 파악하면 어떤 종이 생태계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포유동물의 바이오매스 중 야생 포유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인간이 32%, 축산동물은 무려 64%에 달하는데요, 인간과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 생명이 지구의 96%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10만 년 전에는 2,000만 톤이었고 바로 100년 전까지만 해도 1,000만 톤에 달했던 야생 포유류 바이오매스는 현재 300만 톤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 급감에는 단순 개체 수 감소뿐 아니라 대량 멸종도 동반됩니다. 이처럼 급격하게 기이해진 생태계 구성은 수많은 위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 절멸의 과정에서 아직 코로나19만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유엔환경계획에서 ‘Preventing The Next Pandemic'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다음 팬데믹을 예방할 방법을 알리기 위한 보고서인데요, 이 보고서에서는 동물 단백질에 대한 수요 증가를 동물 매개 감염병의 주요 원인 중 첫 번째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더 이상 기존 인간 중심의 공중보건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 비인간동물, 환경 이 세 가지를 통합해서 고려할 때만 모두가 건강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곧 살처분 당하는 돼지 사진이 등장합니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로서 전염병에 관해 얘기해봤는데요,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의 전염병입니다. 이러한 병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전염되지 않기에 그 심각성이 주로 경제적 측면에 한해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절대 지금처럼 사소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축산동물은 전염병 앞에서 살처분이라는 지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왼쪽)비닐을 씌운 구덩이에 수십 명의 돼지가 모여있고 남은 돼지도 인간에 손에 밀어 넣어지고 있다. (오른쪽)적재함이 기울어진 트럭에서 돼지들이 구덩이로 뒤엉켜 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열거해보겠습니다. 2010년 구제역 사태 때는 350만 명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었습니다. 2014~2015년 겨울에는 약 2,000만 명이 2016~2017년 겨울에는 약 3,300만 명이 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되었습니다. 살처분에는 환경오염, 살처분 노동자가 겪는 트라우마 등의 문제도 함께 존재하나 살처분 대상인 축산동물의 입장은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굴착기나 덤프트럭과 같은 장비들로 밀어 넣어져 서로에게 깔려 죽습니다. 운 좋게 깔려 죽지 않은 경우 인간이 주입한 가스에 의해 질식사합니다. 흙으로 덮어진 이후까지 죽지 못하고 공포 속에서 천천히 죽어간 이가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지난 2월 중순 강원도 양양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해 돼지 2만여 명이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이름으로 대량학살 당했습니다. 끔찍한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당면한 두번째 문제: 기후위기

기후위기 해결책으로서의 채식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축산업이 기후위기의 원인임은 앞선 전염병 얘기에서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전 세계 포유동물 중 96%가 인간과 축산 동물일 정도로 기이해진 지구에서 기후 위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 것입니다. 2006년 세계식량농업기구에서 발행한 보고서 ‘축산업의 긴 그림자’에서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8%가 축산업에서 발생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지구온난화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알려진 교통수단보다 높은 수치로 축산업이 지닌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2007년 보고서는 축산업이 전체 탄소 배출량의 10~12%를 차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축산업이 기후위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는 연구 주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축산물품질평가원이 발간한 보고서는 축산업이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축산업의 영향을 기존 연구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평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FAO나 IPCC의 연구가 완전무결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막대한 농업 생산물을 축산업의 수요가 감당하고 있는 만큼, 축산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산업, 정부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은 자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비영리민간단체의 연구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뉴스퀘스트>에서 전한 2021년 발간된 Climate Healers의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의 87%가 축산업과 관련되어있습니다. 기존 연구가 메탄의 영향을 과소평가했기에 그 점을 다시 계산하니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 같은 기사에서 전한 2009년 월드워치연구소에서 발간한 연구에선 축산업이 온실가스 배출량의 51%를 차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연구를 소개했습니다만 이러한 결과들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 세계 육류 소비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산동물의 분뇨는 지금도 새로운 호수를 만들고 있고 산림은 계속 불타 훼손되고 있습니다.  

축산업뿐만이 아닙니다. 수산업도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를 야기합니다. 태평양에 거대 쓰레기 섬이 있다는 사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쓰레기 섬이란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류에 의해서 모여 마치 섬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태평양에 있는 한 쓰레기 섬은 남한 면적 16배 크기에 달합니다. 네덜란드 비영리 환경단체 오션클린업이 해당 쓰레기 섬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쓰레기 섬의 80% 이상이 그물과 부표 등 어업 폐기물이었습니다.  해양 쓰레기의 절대다수가 수산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 해 5만 톤의 쓰레기가 해양으로 유입된다는데 독자 여러분들은 그 양이 상상이 되실 지 궁금합니다.

해양 쓰레기는 여러 문제를 낳지만 해양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입니다. 다양한 생물들이 그들의 먹이와 해양 쓰레기를 구분하지 못하여 죽어갑니다. 해양생물이 살아가면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그 몸 안에 탄소를 저장하는데, 해양생태계가 파괴되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고 결국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해양보호단체 ‘그레이터 패럴론스 협회’가 발표한 고래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고래는 한 명당 평균 33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래는 자기가 직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 외에도 이로운 작용을 합니다. 고래의 배설물로 성장하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해양생태계에 필요한 산소량의 50% 정도를 생산하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의 약 40%를 제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래는 여러 생물과 상호작용하며 평생에 걸쳐 탄소를 저장합니다. 삶이 다하면 그 사체는 밑으로 가라앉아 거대한 탄소 저장고가 됩니다. 그러나 고래는 고래사냥과 환경파괴 등으로 많은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고래 개체 수가 고래사냥이 시작되기 전 만큼 회복된다면 연간 약 17억 톤의 탄소를 포집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형 세단 한 대가 연간 2만 5,000km를 주행했다고 가정했을 때 1년에 약 3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하는데, 기후위기를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해양생태계의 보존, 즉 수산업의 존속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채식 실천을 통해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로 기후위기를 지목했고 축산업과 수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봤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대학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면 학령인구 감소 이전에 해수면 상승으로 대학이 소멸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바닷바람이 붑니다.



공존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육식

연세대학교의 비전 중 제가 주목한 또 한 가지는 ‘지속 가능한 공존 지향’입니다. 연세대학교가 공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공존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육식을 하는 한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공존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공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는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함’으로 공존이라는 한자어를 풀어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공존으로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입니다. 육식을 할 경우 이 두 가지 의미의 공존이 모두 불가능합니다.

먼저 서로 도울 수 없습니다. 비인간동물을 학대하고 죽인 후 인간은 ‘음식’을 얻지만, 이는 인간의 일방적인 착취이지 비인간동물이 도움을 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비인간동물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축산동물에게 사료를 먹이든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소독을 하든, 그들의 삶을 돕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위는 결국 그들을 죽여 먹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물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대다수의 사람은 살아있는 돼지를 직접 보지 못합니다. 돼지가 태어나서 살찌워지는 양돈장이나 잔인하게 죽임당하는 도살장이 사람 사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이러한 물리적 거리는 언어와 이미지를 거치면서 더욱 멀어져 각각은 결국 함께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 숨 쉬는 비인간동물은 인간 곁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가운데)도살장 앞에 도착한 트럭 위 돼지 한 명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공개 구조된 돼지 새벽이다. 새벽이 생추어리에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


왼쪽 그림은 한돈자조금 관리위원회 인스타그램에서 사용된 이미지입니다. 옷을 입은 파란 머리카락의 돼지가 한 손에는 돼지 사체 조각이 올라간 접시를 다른 한 손에는 이를 굽기 위한 집게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돼지는 인간의 손 같은 신체 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 무엇도 쥘 수 없습니다. 접시 위에는 돼지의 기다란 사체 조각 세 개가 하트모양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비인간동물의 존재를 지우는 역할을 합니다. 반인반수의 괴생명체를 마치 실제 돼지인 것처럼, 그것도 자신의 살점을 즐겁게 내어주는 동물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이 이미지와 같은 돼지는 없습니다. 돼지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가져야만 육식이 가능하기에, 그래서 존재할 뿐인 이미지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나머지 두 사진과 같은 실제 돼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만약 돼지에게서 온기를 느끼고 음식을 나눠 먹은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 돼지라는 동물을 조우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돼지를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함께 존재한다면 도저히 육식을 할 수 없고, 육식을 한다면 왜곡된 이미지만 가진 채로 먹어 치우기 때문에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공존하지 않을 때 육식은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연세대학교가 내세운 비전이 비거니즘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 해결’과 ‘지속 가능한 공존 지향’ 모두 육식을 할 경우 이루기 힘든 비전이었습니다. 연세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까요? 나아가 자신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연세대는 어디쯤 와 있나요?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어느 정도로 채식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학내 채식 선택권 보장은 이전부터 제기되어왔던 문제입니다. 2021년 9월 연세춘추는 ““우린 어디서 밥 먹을 수 있나요?”...소외되는 식이 소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건, 알레르기, 할랄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식이 소수자와 이들을 위한 대안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54대 총학<Flow>에서 신촌  캠 스위츠 매장에 여러 채식 메뉴를 도입했고 56대 총학<Switch>는 학내 카페에 디카페인 메뉴와 유당 제거 우유 옵션 도입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수요 부족과 재정 문제로 많은 시도가 좌절되어왔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기사에서는 2020년 신촌캠 맛나샘에 3~4가지 비건 메뉴가 도입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전했습니다.

해당 기사 이후 일 년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점검해보려 합니다. 저는 휴학 중이라 개인적으로 급하게 확인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런데도 확인해보려 합니다. 앞서 밝힌 대로 연세대학교는 채식을 적극 권장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봄 학기 신촌캠퍼스에서 살아갈 모든 비건 구성원의 권리이니까요.


맛나샘

먼저 학생회관 지하 1층에 위치한 맛나샘부터 방문해보았습니다. 기계를 통해 주문할 수 있었는데 비건 표시가 된 메뉴는 없었고, 비건 옵션이 가능해 보이는 메뉴는 순두부찌개 정도였습니다. 확인을 위해 계산대 근처를 둘러보니 취식 정보안내문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특정 식품의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 식당 관리자에게 문의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문의해달라는 말에 비건 옵션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식당 관리자가 어느 분인지 알 수 없었고 찾을 수도 없어서 식당 이용 시간이 끝나 일을 마친 직원분이 나타날 때까지 먹지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운영 시간이 끝나고 20분 정도 지났을 때 즈음 다행히 지나가던 식당 영양사님께 문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건은 맛나샘에서 만든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맛나샘의 음식 중 현재 비건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고 하셨고, 비건 옵션이 가능하냐는 질문에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체급식의 특성상 한 그릇에만 동물성 조미료를 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고 덧붙여 그런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맛나샘이라는 공간에서 비건이 식사를 아예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핫볼과 소반에서 만드는 음식은 먹을 수 없었지만 맛나샘엔 비건 라면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건 라면을 이용해보았습니다. 비건 라면도 다른 음식과 같이 기계로 주문하는데, 라면을 끓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이용해 직접 끓여 먹어야 하기에 기계에서 인쇄된 종이를 갖고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소반 운영시간엔 소반에서 운영시간이 아닐 때는 스위츠에서 라면을 직접 수령해 식당 내 기계로 끓여 먹어야 합니다. 가격은 3,000원이었고, 제공되는 라면은 농심 야채라면이었습니다.



고를샘

다음은 학생회관 1층에 위치한 고를샘입니다. 고를샘은 카운터에 주문받는 분이 계셨는데 카운터 뒤로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식품 알레르기 있으신 분 채식주의자이신 분들은 카운터나 주방에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채식주의자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부풀었고, 곧바로 카운터 직원분께 어떤 메뉴가 비건식으로 가능한지 문의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모든 음식이 가능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메뉴든 요청하면 동물성 재료를 빼고 요리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안내는 비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비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고를샘 메뉴 중에는 제육 고추장 크림 스파게티가 있습니다. 정해놓은 비건 옵션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이 메뉴 또한 가능하다는 말인데, 제육 고추장 크림 스파게티에서 동물성 재료를 제외하면 고추장 스파게티가 됩니다. 같은 가격을 주고서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요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카운터 직원분의 “뭐든지 비건 옵션으로 요리해주겠다.”라는 말은 비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토소스 스파게티 중 가장 저렴한 아마뜨리치아나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베이컨이 들어가는 요리인데 베이컨을 빼고 야채를 더 많이 넣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가격은 4,900원으로 양도 적지 않고 맛있었습니다. 다만 요리가 시작되기 전에 요리하는 곳으로 빨리 번호표를 들고 가서 채식으로 요리해주실 것을 말씀드려야 하는 과정은 있었습니다. 주문하는 곳에서 요리하는 곳으로 비건 옵션임을 바로 전달하는 체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도 부를샘, 어울샘을 방문했습니다만  비건을 위해 마련된 음식은 없었습니다. 부를샘에 있는 18가지 메뉴 중 단 하나도 비건 옵션이 가능하지 않았고 어울샘은 뷔페 형식이었으나 육류로 된 음식을 제외하면 한 두 가지 반찬만 남았습니다. 이마저도 비건식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여 실질적으로는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맛나샘의 비건 라면과 고를샘의 토마토 파스타 하나를 제외하고는 학교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연세(延:끌 연 世:세상 세)는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채식 선택권의 보장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늘어난 외국인 유학생과 채식동아리 등 학내 구성원의 요구에 따라 2010년부터 비건식이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해외 대학에서는 이미 비건식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2016년 학내 모든 케이터링 서비스 식당의 메뉴에서 반추 동물을 제거했습니다. 채식 선택권의 보장을 넘어서 육식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식을 제한하는 흐름은 대학 밖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도시 하를럼에서는 육류를 기후 위기 유발 물품으로 규정하고 2024년부터 공공장소에서 육류 광고를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자유롭게 사고 팔리는   음식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한국에도 조금 더디지만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교 급식에서 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경상남도교육청, 서울특별시교육청, 울산광역시 교육청 등 다수의 교육청에서 채식 급식의 날을 시행하여 육류 소비를 줄이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시에서는 2021년 채식 조례를 제정해 채식 환경을 조성하고 있고 울산광역시교육청에서는 2020년 10월부터 채식급식선택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채식급식선택권이란 한 달에 한두 번 시행되는 채식 급식의 날과 무관하게 항시 채식 급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육식을 줄이는 것과 개인의 신념을 보장하는 것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연세대학교는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거로 보입니다. 현재 우리 대학의 교내식당은 채식으로의 전환은커녕 육류가 주재료가 아닌 음식을 찾기 힘듭니다. 이런 환경에서 비건인 구성원들은 매 끼니 소외되며 힘겨운 학교생활을 거듭합니다.  그렇기에 교내식당은 단순히 학생들에게 물리적으로 가까운 ‘교내’ 식당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거리로 인한 독점적 지위를 무책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식비를 아껴야 하는 사람을 위해,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그리고 비건과 같은 식이 소수자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교내식당은 항상 닫혀있는 식당일 뿐입니다. 분명 닫혀있는 식당인데 다른 사람들은 웃으며 이용하는, 이런 식당은 차별 아닐까요? 차별 식당을 닫고 모두를 위한 식당을 열길 바랍니다. 시대의 흐름에 질질 끌려가는 연세대학교가 아닌, 세상을 이끄는 연세(延世)대학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게 연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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