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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Nov 04. 2023

<136호>고기를 먹는 건 분명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편집위원 예인


하얀경이 연하게 고기아이콘이 패턴으로 들어가 있다. '세미나 1 고기를 먹는건 분명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라고 써져있다.


1. 가장 만연해 있는 동시에 가장 숨겨져 있는 폭력     

 여러 죽음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과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교사들 그리고 수천 명이 숨지고 실종된 모로코 지진. 죽음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이지만, 죽음이라는 그 하나의 공통점으로 인해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으로까지 느껴진다. 이러한 재난을 마주한 개인은 슬픔, 두려움, 무력감 등 저마다의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연이은 죽음에 비교적 무덤덤하게(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변화하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에는 감정적으로 조금 무디다는 뜻이다) 반응한다. 바로 축산업의 폭력적인 현실을 목격하고 이를 철폐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축산물 안전 관리시스템의 도축실적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대한민국에서 도축된 소는 1,014,686마리이다. 돼지는 소보다 약 20배 많은 18,556,215마리이고, 닭은 돼지보다 약 50배 많은 1,108,341,603마리가 작년 한 해 도축되었다. 대한민국에서만 매일 약 삼백만 명(命)이 죽임당하는 셈이다. 사실 이 숫자도 모든 죽음을 포함하지는 않는데, 물에서 사는 동물들의 죽음은 소, 돼지, 닭보다 훨씬 많아서 정확히 집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축산업을 반대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인간이 아닌 동물(비인간동물)과 인간이 어떤 면에서 동일하다고 믿는다. 또한 그 동일성을 배제하고 단지 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인간동물을 차별(종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을 대상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축산업이 비인간동물을 대상으로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들에게는 매일 수백만의 비인간동물이 죽임당하는 현실이 마치 매일 수백만의 인간이 죽는 것과 다르지 않게 다가온다는 것이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축산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무뎌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10.29 참사가 있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은 무렵, 필자는 축산업에 반대하고 동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10.29 참사를 얘기하려고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공간을 휘감은 무거운 공기가 자연스레 그 모임을 10.29 참사에 대한 대화로 이끌었다. 모든 사람이 슬퍼하고 그 원인에 대해 분노를 표했으나 일반적인 흐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해당 참사가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는 얘기다. 축산농가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해당 농가로부터 일정 범위에 있는 동물들은 병에 걸렸는지와 무관하게 살처분된다. 살처분은 땅을 파 만든 좁고 깊은 구덩이에 동물들을 밀어 넣은 후 질식시켜 매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구덩이의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은 동물, 예컨대 돼지가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서로에게 부대껴 마치 이족보행을 하는 동물처럼 서게 되고 그대로 서로에게 눌려 압사당한다. 이러한 현실에 이미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그 끔찍한 10.29 참사가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분명한 차이점도 많다. 그중 하나는 살처분의 경우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가가 보상금까지 줘가며 계획한 참사라는 점이다. 13년 전에 가장 큰 살처분이 있었는데, 2010년 11월부터 2011년 4월 사이에만 약 353만 명이 짓눌리고 질식한 채로 땅에 묻혔다.     

 도축시설에서 도축되면 ‘실적’이 되고 자연재해나 전염병으로 죽으면 ‘손실’이 되기에 비인간동물의 죽음과 고통 그 자체는 언제나 숨겨진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지는 정답이 없다. 다만 어떠한 점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축산업이라는 차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모두 이 부정의함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장 만연해 있으나 숨겨진 폭력인 축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힘을 쏟아야 할 문제이지만 이 점 외에도 문제가 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폭력이 다른 폭력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축산업의 폭력을 직면할 때, 단순히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폭력이 종차별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암캐’라는 표현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개의 암컷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전적으로 쓰일 때조차 문제가 있는 표현이지만 ‘암캐’가 인간 여성을 지칭할 땐 더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 쓰임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성들은 여성을 암캐에 비유함으로써 여성이 성적으로 수동적이며 주체성이 결여된 존재라고 상상한다. 여성이라면 자신에게 반드시 성적으로 복종하길 바라는 욕망이 투사된 은유다. 이 잘못된 상상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인식적인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사전적인 의미로 ‘암캐’가 쓰이는 것 또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개를 학대하는 인간은 인간 여성을 ‘암캐’라고 부를 때 욕망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개에게서 원하기 때문이다. “복종하지 않는 개는 필요가 없다.”든지 “한 번 문 개는 죽여야 한다.”든지 인간이 개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여성을 ‘암캐’로 칭할 때 갖는 관념과 동일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비인간동물에 대한 폭력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며 비인간동물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종차별에 근거한 축산업은 그 죽음의 규모로 보아 가장 거대한 폭력이며, 가장 거대한 폭력임에도 계속 성장하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잘 숨겨진 폭력이다. 또한 이 폭력은 비인간동물에게로 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 문단에서 미처 다 논하지 못하였으나, 여성, 장애인, 특정 인종과 민족 등 수많은 약자를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세편집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생각을 듣고자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을 감상하는 세미나를 갖게 되었다.                                                    


2. 다큐멘터리 <도미니언> 시청 세미나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의 포스터이다. 검은 배경에 송아지 한 마리가 철장 같은 바닥에 앉아서 정면을 보고 있고 송아지 밑에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인 'DOMINION'이 적혀 있다.

 <도미니언>은 호주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주로 호주의 농장과 도살장 안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보안을 뚫어내고 이런 영상을 찍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질 만큼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부의 잔혹함은 드론으로 촬영한 공장의 전경과 연결되며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일인지 느끼게 한다.

 영상은 보는 사람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축산업의 모든 과정이 그렇다. 동물을 강제로 임신시켜 새끼를 낳게 하고 합법적으로 마취 없이 이를 뽑거나 꼬리를 자르고 약한 개체는 바닥에 내리쳐 강제로 도태시키고 죽은 동물과 산 동물이 뒤엉켜 지내고 서로의 시체를 먹고 분뇨에 빠져 죽고. 도살되는 순간만큼은 인도적이리라 기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의식이 있는 채로 목이 잘리기도 하고 뜨거운 물에 익사하기도 한다. ‘인도적’으로 도살하기 위한 규정은 무시되기 일쑤다. 축산업의 목적은 ‘공장’에서 ‘제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이지 생산성을 떨어뜨려 가며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내용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치겠다. 지금부터는 다큐멘터리를 연세편집위원회에서 함께 시청한 후 나눈 감상이다. 대화가 오간다기보다 다양한 감상을 나누고 생각해 볼 점을 찾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화자를 특정하지 않고 내용을 나열하듯이 정리했다. 영상을 보지 않아도 글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은 없으나 가능하면 시청한 후 글을 읽기를 권한다. 총 두 시간 정도 소요되며 영상을 보는 데에 다양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으므로 영상 시작부터 22분까지만 시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유튜브에 'Dominion'을 검색하면 무료로 볼 수 있다.      


<간단하게 소감을 나눠봅시다. 영상이 어땠나요?>      


진짜 아무 생각이..

     

지금도 사실 좀 어리둥절해요.

     

되게 좀 충격적이고. 뭔가 대충은 상상했는데, 그 상상보다 더 잔인하고 또 이제 생명체가 아니라 완전히 그냥 물건 대하듯이 하거나 또 살아있는, 고통을 느끼는 존재한테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걸 보니까 좀 되게 저도 멍해지는 것 같아요. 이럴 수 있나 싶기도 하고. 너무 잔인했어요.

      

 위 이야기처럼 화면 속 광경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보기 힘든 영상에 누군가는 눈을 감기도 다른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기도 할 정도다. 영상이 단지 잔인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스레 먹어온 음식이 사실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는 것. 상상은 했지만, 상상보다 더 당혹스러운 현실은 생각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영상에서) 병아리들 나올 때, 저희가 일반적으로 되게 귀엽거나 이런 사람들을 삐약이라고 부르잖아요. 근데 저는 왜 저 병아리들이 하나도 귀여워 보이지 않았는지 저렇게 있을 때. 모순을 많이 느낀 거 같아요. 

    

그리고 호주 하면 소들이 ‘호주 청정우’라고 많이들 하니까, 초원에서 막 뛰어놀고 그럴 거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소들도 봤어요. 직접 호주에 가서. 근데 그때 가이드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호주에서도 사육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영상에서 보다시피, 방목을 하는 게 아니라. 

     

 영상을 본 몇몇 편집위원은 미디어를 통해 마주하는 동물과 영상 속 동물이 처한 현실의 괴리를 느꼈다. 태어나자마자 산 채로 갈리거나 가스에 질식해 죽는 막대한 수의 수평아리들은 당연히 귀여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드넓은 초원에서 유유히 풀을 뜯을 것만 같던 ‘호주 청정우’가 사실 강제로 뿔과 고환이 잘리고, 좁고 황량한 환경에서 살찌워지며, 끔찍한 방식에 저항하다 도살당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하는 라쿤 ‘로켓’에 대한 얘기였다.   

   

로켓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과정을 담은 (이야기) 이런 거랑 약간 비슷하거든요. 근데 그런 영화나 애니메이션이나 그런 데서 동물을 등장시킬 때 만약에 그게 돼지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고요. 그러면 약간 거부감이 들 수 있었을 거 같아요. 말하는 돼지? 막, 이러면서. 그 영화 속에서는 이제 조그마한 너구리 귀여운 아가들을 한 케이지 안에 넣어놓고 이제 로켓이 될 그 친구만 이렇게 뽑아가는 그런 장면이 있거든요. 가져가는데 그게 만약에 새끼 돼지였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그게 뭔가 상상이 잘 안되더라고요. 우리가 돼지는 뭔가 오물 혹은 뚱뚱하다 밥을 많이 먹는다. 더럽다. 그런 재현에만, 그런 표현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말하는 라쿤은 괜찮은데 말하는 돼지에는 거부감이 든다. 이는 물론 익숙한 재현이 아니다. 그러나 단지 익숙하지 않아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하는 라쿤 또한 전혀 익숙하지 않다. 라쿤과 돼지 사이엔 큰 간격이 있다. 바로 돼지만이 ‘식용 동물’이라는 점이다. 우화에선 돼지가 자연스레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기 돼지 삼 형제는 집도 짓는다. 그러나 실존하는 배우가 등장하며 우리를 몰입시키는 영화에서 난데없이 돼지가 인간의 동료로 등장할 수는 없다. 돼지는 고기이지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돼지 앞에선 우리가 먹어오던 삼겹살을 감히 먹을 수 없다. 반려견 옆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만히 먹혀야 할 음식이 우리의 언어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며, 따라서 위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옥자>에서처럼 돼지를 구조하는 것이 핵심 소재이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배경을 설정하지 않는 한 돼지를 동료로 맞이하는 재현은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 담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던진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인간이 육식을 한다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는데,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지 함께 얘기해 보고 싶어요.>     


신촌에만 가봐도 고깃집이 진짜 많잖아요... 그런 고깃집들이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는 건 사람이 동물을 섭취한다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쨌든 지금 모습으로 진화해 온 거잖아요. 어릴 때 저와 지금의 저도 엄청 다를 거고, 끊임없이 한 사람이든 한 종이든 계속 변화해 나갈 텐데, 이 변화하는 것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되게 중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다큐에서도 방금 봤지만,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너무 많은 죽음이 용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 어떠한 자연스러움에 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그 자연스러움에 반했다는 이유로 많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변화하는 자연스러움에, 운 좋게, 이 시대에 내가 잘 타고 태어나서, 그 자연스러움에 속해서 나는 죽음을 면했지만, 그 자연스러움에 속하지 않는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는 게, 저는 그게 싫어요. 

     

처음에 저는 내레이션이 되게 인상 깊었거든요. 몇 년 전만 해도 농가가 되게 많았는데 수가 줄어들었다. 근데 (사육) 양은 더 늘어나고. 저는 이 영상을 보는 내내 이 영상 자체가 되게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껴진 게, 아까도 말했던 것 같이 저에게 있어 자연스러움은... 그냥 안 봐서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보니까 부자연스러워졌는데...

     

 위에서 언급된 편집위원의 얘기처럼 한 개체든 한 종이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양식을 마치 불변의 진리로 여기곤 한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원래 그랬던 것은 없고 모든 건 변화해 왔다. 특히 인간의 생활양식은 많은 경우 저절로 변화한(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인간이 변화시켜 온 것이다. 육식도 마찬가지이다. 육식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육식을 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믿음은 타당한가? 정말로 고기를 안 먹을 수는 없는 걸까? 인간과 유전적으로 유사한 동물인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중 오랑우탄과 고릴라는 채식을 하는(초식성) 동물이고 침팬지는 한때 채식을 한다고 알려졌을 만큼 육식의 비율이 낮다. 영장류 중 오직 인간만이 육식 없이 살 수 없다는 믿음 속에서 매 끼니 고기를 먹는다. 대한민국에서 고기가 식단의 필수 요소가 된 지는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의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약 10배 증가했다. 자연스러운 것이란 지배적인 것일 뿐이다. 

 세미나 내용은 여기까지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해 준 모든 편집위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이어지는 내용은 세미나 바깥의 얘기다. 축산업을 주제로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가졌던 고민과 감정을 진솔하게 풀어 보았다.


3.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134호에 이어 이번 136호에서도 결국 축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 달라졌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137호에서 쓸 글 역시 같은 소재로 글을 쓸 예정이다. 이 정도 되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축산업 얘기를 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으로 보일 듯한데, 그렇지 않다. 난 진심으로 더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축산업에 관해 얘기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끔찍한 현실을 확인해야 하는 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더라도, 글을 쓰면서 다시금 비인간동물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실감한다. 거대한 폭력을 마주할 때 긍정적인 감정을 갖긴 어렵다. 희망보단 무력감이 나를 괴롭힌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와같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내 눈앞에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발생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해자로 지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축산업의 폭력을 이야기하는 일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실은 폭력의 결과물임을 드러낸다. ‘육식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축산업에 관해 설명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이 가해자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이 설명이 구체적일수록, 사람들은 심지어 공격이나 강요로 느끼기도 한다. 다른 정치적 문제를 이야기할 때와 비교하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안을 떠올려 보자. 어떤 것이든 괜찮다. 대개는 일상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거나 혹은 그 영향을 단번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축산업을 지적하는 것은 다른 정치적 문제와 달리, 하루 세 번의 매우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행위가 폭력이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게 되면 내가 당연히 먹어오던 음식을 더 이상 먹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고, 타당하지만 실천하기는 매우 힘든 요구 앞에서 사람들은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비건으로 살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구체적 반응을 예로 들어 이 이야기를 좀 더 설명해 보려 한다. 상냥한 사람들은 비건 앞에서 육식을 할 때 사과하곤 한다. 이는 분명 상냥하고 배려심이 있는 행위이지만, 본질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동물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식을 하면서 눈앞의 비건에게 사과하는 경우, ‘비인간동물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육식’이 ‘비건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의 문제’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타인의 불쾌함을 고려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비건에게 사과해야 하는 행위로서의 육식은, 반대로 생각하면 비건 앞만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 행위가 된다. 비건에게 사과함으로써 사람들은 비건 앞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육식을 할 수 있게 되며, 결국 비인간 동물에 대한 가해자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손쉽게 멀어질 수 있다. 

 한때는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도록 변화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때가 있었다. 육식은 나에게 사과를 할 일이 아니라, 비인간동물을 향한 폭력이고 멈추어야 할 일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축산업이 왜 문제인지 자세히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방어적으로 반응했고, 많은 경우 다툼이 생겼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 앞에서 축산업에 관해 설명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비건을 취향의 문제로 축소하고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방식의 소통에 익숙해졌다. “식물은 안 불쌍하냐?”나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같은 질문에 “내가 별나서 그렇다.”든지 “사실 혼자 있을 때 몰래 고기 먹는다.”라고 답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산업을 비판하는 세미나를 기획했다. 우리 대학과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글을 써야 하는 연세편집위원회의 구성원이라면 축산업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숨겨진 폭력을 확인하는 일은 무한한 확장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인간동물에 대한 폭력이 어떤 구조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다른 소수자를 향한 폭력을 인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연세편집위원회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가 동료 편집위원분들에게 닿았길 소망한다.

 앞으로도 <연세>에서 축산업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조금 질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하게 죽어가는 존재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연세>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폭력을 확인하고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고기를 안 먹을 수는 없는데....”라는 반응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 또한 20년 넘게 육식을 즐겨왔다. 당장 육식을 멈추라는 요구를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신의 일상이 어떤 구조 위에서 가능했는지 되돌아보고 자기만의 실천을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실천 방법은 이 글을 읽는 독자 수만큼 다양하다. 일주에 한 끼씩 채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집에서 요리할 때 고기를 주재료로 쓰지 않는 방식으로 실천할 수도 있다. 혹은 신촌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비건 옵션이 있는 ‘뉴욕 비앤씨’나 ‘호탕 마라탕’ 같은 식당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육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채식주의자로 살 결심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동물 없이 다채로운 재료로 김밥을 싸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이 즐거운 여정에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하길 기대하며 이번 세미나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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