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의 57년 역사를 톺아보며/기고자 김현서,전연서
이 글은 2023년 1학기 <역사인류학> 수업의 기말 보고서 제출을 목적으로 쓰여졌으며, 재편집을 거쳤다. 비록 연세지 편집위원이었던 적은 없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연세」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해왔기에 기고를 요청받았다. 조사는 ‘독자/편집위원 인터뷰’와 ‘역대 「연세」 문헌조사’를 두 축으로 진행했다. 인터뷰와 문헌조사를 병행하며 인터뷰에서 언급된 내용을 실제 「연세」에서 찾고, 「연세」의 내용을 바탕으로 인터뷰의 질문을 구성하거나 과거 독자와의 인터뷰에서 공감대를 찾으려고 했다. 인터뷰 대상은 「연세」 편집장과 편집위원, 「연세」 독자, 타교지의 편집위원 등 총 7명으로 구성됐다. 또한 「연세」의 편집실(학생회관 311호)에 방문하여 그곳에 보관된 역대 실물 「연세」와 편집위원회의 날적이 ‘R-노트’를 함께 살펴보았다. 또한 기말 보고서에는 세번째 질문으로 ’교지’라는 글쓰기 공동체의 의미와 기능을 알아보기 위해 과거/현재 편집위원들에게 그 의미를 물어봄으로써 답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이번 기고에서는 지면 부족때문에 다루지 못하고, 더불어 136호 전체가 또 하나의 증언이라고 여겨 다루지 않음을 밝힌다.
캠퍼스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일반 책보다 얇고 작은 크기에 한 손에 들어오는 것, 계절마다 새로운 소식을 담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바로 연세대학교 중앙교지 「연세」이다. 「연세」는 1966년에 창간되어 5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역사에 비해 「연세」의 변화와 역사에 주목한 작업은 미흡하다. 2014년 99호까지의 기획물들을 편집한 100호 특집과 96년 발행된 44호의 <서른 살의 ‘연세’의 자화상> 정도가 「연세」의 역사를 다룬 작업물이다. 「연세」는 어느 단과대에도 소속되지 않고 편집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출판물로서 기획부터 발간까지 편집위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비교적 편집위원들의 문제의식을 자유롭게 표출해왔다. 시간적 범위를 확장한다면 「연세」에는 66년부터 올해까지 편집위원들의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다. 따라서 「연세」의 역사를 톺아보는 것은 57년간의 편집위원들의 목소리, 또는 편집위원의 글을 빌려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더 나아가 당시 대학생들과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연세」의 역사를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연세」의 역사를 되짚는 것도 의미 있지만 오늘날 「연세」의 위치와 역할을 짚는 것도 의미 있다. SNS, 유튜브, 개인잡지 등 교지가 아니어도 학생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은 많아졌고 필자와 독자의 구분은 흐려졌다. 이에 맞춰 「연세」도 브런치와 SNS 계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관심과 독자층은 과거보다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전히 편집실에는 글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글 쓰고 함께 고치는 편집위원들이 있다. 글을 전시할 공간도, 여유도 많아진 이 시대에 이들은 왜 함께 ‘교지’라는 플랫폼에 모였는지, 그들에게 교지와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연세」의 역사를 톺아보면서 글쓰기 공동체의 함의까지를 탐색해보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Q1. 「연세」는 무엇을 이야기해왔는가? 글의 형식은 어떻게 달라져왔는가?
Q2. 학생은 「연세」와 어떻게 만나는가? 「연세」를 둘러싼 학내 환경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연세」내부의 역사를 다룬다. 1호부터 134호까지의 내용과 주제 변화를 보며 편집위원들이 「연세」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본다. 독자들과 인터뷰에서 과거 「연세」는 학술적인 글을 모아둔 학술지와 같았고, 현재의 것보다 두꺼웠다는 답변을 들었다. 따라서 주제의 변화 외에도 「연세」 외관적인 특징(두께, 디자인, 목차)의 변화에도 주목하여 「연세」의 역사를 추적했다. 또한 내용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글이 만들어지는 ‘배경’에 주목할 것이다. 글은 외부와 절연된 상태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사정과 당시 현실의 모습, 권력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실제 「연세」도 발행 기구와 주기에 따라 성격이 달라졌으며 시대의 요구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곤 했다. 오늘날 「연세」가 독립적인 계간지의 모습을 갖게 된 과정에 주목하며 「연세」의 변화를 알아볼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연세」를 둘러싼 외부의 변화, 즉 글의 교환·유통 방식과 대학 담론의 재구성 과정에 집중한다. 90년대까지 「연세」는 학생 자치 출판물로서 학보통을 통해 타대학에 보내지고, 학생들은 서로의 출판물을 읽어보며 생각을 공유했다. 편집위원들은 내부에서 세미나와 피드백을 통해 의견을 교류하거나 편집실에 있는 날적이에 두 장이 넘는 글을 작성하며 생각을 털어놓았다. 「연세」는 발행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캠퍼스 안팎으로 교환되며 편집위원들과 학내 구성원 간 소통과 담론의 장을 구성했기 때문에 「연세」 발행 이후의 교환 과정과 학생사회 및 학내 언론의 연성화 과정에 주목해보았다.
<인터뷰이 표>
1)편집위원A/연세대 20학번/「연세」 133호~134호 편집위원
2)편집위원 B/연세대 21학번/「연세」 131호~134호 편집위원, 134호 편집장
3)편집위원 C/연세대 22학번/ <연희관 015B> 16호~18호 편집위원
4)편집위원 D/연세대 15학번/「연세」 120~124호 편집위원. 121호 편집장
5)독자 E/연세대 98학번/「두 입술」 4호~6호 편집위원, 공과대학 소속
6)독자 F/연세대 95학번
7)독자 G/서울대 94학번
이 장에서는 「연세」의 조직과 주제를 다룬다. 1966년부터 2023년까지 「연세」를 발행한 조직과 역사를 살피고 「연세」의 내용과 구조의 변화를 살필 것이다. 글은 환경과 절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인 시대가 당면한 문제와 필자의 위치성, 출판 기술의 발전 정도, 플랫폼에 영향을 받는다. 「연세」가 무엇을 말해왔는지는 결국 「연세」가 위치한 시대와 상황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중첩된다. 「연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함께 추적하며 연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가고자 한다.
Q. 「연세」 조직과 발행 방식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연세는 66년 1호부터 75년 9호까지 총학생회 산하에서 발행되었다. 이후 75년 6월, ‘학도호국단시행령’에 의해 총학생회가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이 대학생의 대표기관이 되자 10호부터 16호까지 학도호국단 산하에서 발행된다. 83년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른 총학생회 부활과 함께 「연세」는 독자적인 상설 편집기구인 연세 편집위원회로 이관되어 지금까지 그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본래 「연세」는 1년 단위로 발행됐지만 학생운동의 주체가 확대되고, 88년 전교 학생으로부터 교지대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계간지화되었다.「연세」의 계간지화는 독자와 소통을 활발히 하여 교지의 대중화를 일궈내려는 시도였다. 편집위원회 체제가 된 83년부터 1년에 2번으로 발행을 늘려오다가 90년부터 본격적인 계간지화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93년 계간지화 실패 후, 98년에서야 다시 계간지화에 성공하였으나 안정적인 발행을 1년 이상 지속시키지 못했다. 2005년 「연세」는 학교 측의 발간 축소 요구라는 위기를 넘어 2009년에 완전한 계간화를 달성한다. 2021년 코로나로 인해 축소 발행되어 글의 개수가 10개 미만으로 줄었지만, 계간지라는 특징을 포기하지 않았고 2023년 현재까지 총 134개의 교지를 발행했다.
Q. 「연세」는 시대마다 어떤 문제의식을 드러내 왔는가?
「연세」는 중앙교지로서 66년부터 현재까지 학교 안과 밖의 다양한 문제를 글로 표출해왔다. 「연세」의 발행 주체와 방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로 이어진다. 총학생회 산하의 초창기 「연세」는 대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특집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학교로부터 자유로웠다. 1호의 두 번째 특집인 <단절의 변증법>은 대학의 어제와 미래를 진단하는 특집으로 대학이 우연적 산물이라는 내용과 무용한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또한 5호의 <대학 행정에의 제언>은 장학제도, 커리큘럼 등 연세대학교의 행정 문제를 매섭게 꼬집는다. 하지만 호국단으로 교지 업무가 이전되면서 편집위원들의 자율권은 훼손됐고 지도교수가 개별 글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1호의 경우 <학도호국단의 연세얼 구현의 의미>을 기획하여 호국단의 연세얼 지향 운동의 의의를 설명했는데, 「연세」의 기관지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기존의 「연세」가 총학생회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도 총학생회의 공과를 평가하는 비평을 함께 실으면서 학생회에 대한 견제 역할을 했었다면, 총학생회 평가가 학도호국단 사업보고로 대체되면서 학생조직에 대한 견제자로서 역할이 훼손되었다. ‘보고’라는 명칭처럼 호국단의 사업과 취지를 소개하고 예산 내역을 게시할 뿐, 호국단에 대한 평가는 배제되어 있다.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총학생회장은 사단장으로 불렸고, 이런 체제에서 「연세」의 정치색은 점차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지, 학보 제대로 나오는 게 없다. 자문 맡은 지도교수는 검열관 역할, 툭하면 문제 있다 가위질’라는 74년 기사를 통해 발행 주체 변화에 따른 내용 변화를 추측할 수 있다.
기관지이자 종합학술지로서의 「연세」의 정체성은 독자성이 보장된 편집위원회 체제에서 종합학술지로 편향되어갔다. 여전히 90년대 이전 「연세」는 학술적인 글을 모은 종합학술지의 정체성이 강했다. 「연세」는 ‘함께 토론할 수 있는 학술적 장을 만들고자’, ‘지성인으로서 예리한 비평안으로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모색을 위해’ 창간되었다. 60년대의 대학은 오늘날처럼 학회, 동아리 같은 학술적 논의공간이 부족했고 학생들의 의견은 단대 학회를 통해서만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연세」도 연세인 전체를 대변하는 정기간행물이 되어, ‘연세인의 대표’라는 거대한 대표성을 등에 업고 6~70년대 한국 사회에 의견을 피력해야 했다. 따라서 「연세」 초창기의 글들은 주로 거대한 대상(한국, 사회, 청년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었으며 ‘지성인으로서’, ‘한국은’, ‘연세대학교는’ 같은 광범위한 어휘를 주체로 사용했다. 주요 기획을 정리한 표를 참고하면 6~70년대 「연세」가 한국, 한국인, 연세대학교, 동양 등 거시적인 대상에 주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글은 에세이보다는 전문가와 교수가 작성한 규격화되고 학술적인 글이었다.
70년대에 한정하여 표를 보면 ‘대학과 대학생’ 진단에 관한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0년대의 「연세」가 지식보급을 최우선으로 학내 구성원에게 지식을 전달하려고 했다면, 70년대의 「연세」는 급속한 산업 발전과 도시화로 한국이 소위 근대를 경험하던 시기에 엘리트 기관의 역할과 지식인의 책무에 주목했고, 대학과 대학생을 진단하는 글이 하나의 추세가 되었다. 하지만 근대화로 발생한 빈곤, 노동, 인권 문제들이 80년대 사회 운동과 연결되면서 80년대 「연세」는 학생들의 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학생운동, 조직 운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초기 「연세」에서 광범위한 소재외에 주목할 지점은 글의 전개 방식이다. 거대한 소재를 수정주의, 종속이론 같은 거시 담론으로 확장하거나 개념 정의, 이론 나열로 논지를 이어나간다. 예를 들어 7호의 <대학초년병 그 생활과 전망>은 대학생의 자아형성의 의미를 밝히고, 자아형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상과 입학 후 직면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다룬다. 이 특집은 총 7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1편 <자아형성, 그 철학적 방법>에서는 프로이드의 욕망이론을 사용하여 ‘자아’에 대한 확고한 개념정의를 시도한다. 필자는 자아의 철학적 개념을 확고하게 정의내림으로써 자아형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1편 이후 글들은 괴리 속에서 대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비판적 관점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특집의 글들이 전반적인 짜임새를 갖게 된다. 이때 「연세」의 글은 개인의 경험과 일상보다는 집단과 사회, 권력구조로부터 논의를 시작했고 교수들과 동문, 연구원의 논문이 다수였기 때문에 학술적인 어휘로 가득 차있었다. 이런 특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서, 학술잡지, 진보 출판물이 보수 정권에 의해 탄압받는 상황에서 지식의 공백을 채워야 할 교지의 위치와도 관련 있다.
그럼에도 읽기에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연세」는 점점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다채롭고 쉬운 글들을 발행했다. 또한 기존의 글이 거대 이론과 지식 전달에 충실하여 학교 밖에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연세」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캠퍼스의 경험하는 일상과 학내 행사에 주목했다.
동시에 80년대 「연세」는 학생운동의 교과서이자 변혁운동의 지침서였다. 84년 총학생회가 부활하며 학생운동은 확대되었고, 6월 항쟁으로 학생운동의 대중적 지지 기반이 생겨났다. 언론·출판을 통제하고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려던 시기에 독자적인 편집위원회가 발간하는 「연세」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 창구였다. 시대의 요구에 맞춰 「연세」는 사회비평과 혁명 이론들은 써내려갔다. 「연세」의 이론과 사상은 운동권 학생들의 지침이 되었다. 학생운동이 주체가 확대되면서 「연세」의 인기도 학내 운동권 학생에서 전국 운동권 학생으로 확대됐다. 44호에서는 80년대 후반의 「연세」의 위치를 ‘전국 집회가 연세대에서 개최되었는데, 편집실은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연세」를 구하기 위해 들리는 것으로 북적였다.’, ‘편집위원들은 언론이 선전·선동의 역할을 맡고 있음에 동의하고 교지제작이 하나의 운동방식으로 여겼다, 집회참여 만큼 교지제작을 통한 조직 활동이 편집위원들에게 중요한 몫이었다.’고 표현했다. 학생 운동계에서 「연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학생들의 관심에 부응하듯 80년대 「연세」의 대부분의 글은 ‘변혁, 전환, 해방, 실천’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세」가 대중의 관심을 계속해서 독점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96년 연대 사태를 전후로 학생 운동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으며, 대중들은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91년 총선과 92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패배하며 사회주의 위기가 도래했고 혁명이론은 설득력을 잃어갔다. 문민정부의 탄생은 대중들에게 학생운동을 유별난 것으로 취급하는 계기가 되었고, 대중문화 보급은 학생운동이 후순위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운동이 설득력도, 구심점도, 지지도 잃어가는 상황에서 「연세」는 대중화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다.
「연세」의 대중화에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먼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식기반을 전파하고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 독자층을 확대하는 움직임이다. 「연세」는 독립 기구를 설립하여 상부기관의 검열을 피하고자 했으며 발행 일자를 학생운동 시즌으로 맞추어 학생들의 접근성을 높이려고 했다. 두 번째 흐름은 학생들의 구심점과 교지의 독자성이 소실되던 90년대에 진행됐다. 짚고 넘어갈 부분은 80년대 「연세」가 학생운동이라는 교집합으로 ‘모든’ 학생들을 단결시킨 건 아니라는 점이다. 80년대에도 학생운동에 회의적인 개인들이 있었으며 「연세」도 문학마당, 좌담회, 앙케이트를 통해 비운동권 이슈와 학내 이슈들을 충실히 다루었다. 다만 90년대와 비교하면 선동성의 정도와 비중에서 차이가 있었다. 80년대 「연세」가 선동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어려움 없이 전자에 비중을 둘 수 있었다면, 90년대 「연세」는 대중성의 필요를 간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출판물 제한 조치가 사라지고 시중에는 원론 서적과 영화, 시사 등 한 분야에 특화된 잡지가 유통되면서 교지의 독점적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모든 학우들에게 교지 대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연세」는 2만 연세인에게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글은 소비되는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기에 「연세」도 대중 친화적으로 바뀌어갔다. 소재의 규모는 일상적인 경험과 구체적인 사례로 줄어들었고, 현학적으로 느껴졌던 학술적인 용어와 문체는 독자의 이해도를 고려해 수정되었다. 그때까지도 논문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지만 학부생의 논문을 적극적으로 받고 학생들의 기고로 이루어진 기획이나 학부생의 지식 향상을 위한 연구노트 기획도 시도했다. 32호에서는 일기와 수필 형식의 ‘90 농활 일지’를 핵심 기획으로 내세우며 경직된 전개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연세」 대중화의 또 다른 방식은 계간지화였다. 계간지화와 대중화의 노력은 23호 ‘여는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편집위원들의 계간지화에 대한 열망은 실제 32호부터 이어지는 연세 ‘형식’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변화는 다음 ‘형식의 역사’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계간을 준비하며:
“교지가 변화된 시기에 맞게 자기변신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교지는 주로 학생 운동 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장이었고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나 원전을 비롯한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며, 변혁이론을 다루는 간행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제 교지는 더 실천적으로 학우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이론의 나열만으로 지면을 채우던 종전의 양식을 지양하고, 실제 현실 사건 하나에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을 노력하고 있다. 종전 교지 분량보다 감소해도 잦은 횟수로 발간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간지화는 시사성 있는 내용과 학내 문제에 깊이 있는 접근과 실천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자주 찾아가서 교지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높이며 개방된 방식으로 교지를 만들 수 있다.” (23호 여는 글)
「연세」에서 학생운동과 변혁이 차지하던 부분은 소수자, 일상의 정치화, 대중문화 등 새로운 주제로 채워지고 노동, 여성, 대학문화 등 예전부터 언급됐던 주제가 더욱 부각되며 메워졌다. 이런 「연세」의 변화에 ‘쾌락적이고 소비적인 90년대 대학문화의 증거’라는 부정적인 평이 있었지만 「연세」는 점차 대학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일상에 다가갔다. 97년 이후 「연세」는 겨울 호마다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의 일 년을 평가하는 비평을 게재했으며 추상적인 담론을 소재로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일상 속 감각, 대중문화의 재현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0년대부터 현재까지 「연세」는 ‘파편화된 사회에서 교지의 필요성’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사실 교지의 필요성과 대학생 연대 의식의 소멸 문제는 「연세」 초창기부터 꾸준히 제기되던 주제였다. 당장 1호 <단절의 변증법>에서 대학생 연대 의식의 소멸과 위기를 다루고 있으며 44호 <연세 30주년 기념>에서는 90년대 「연세」의 핵심과제로 「연세」대표성 실현을 고르고, ‘선정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시대에 맞는 위치를 찾아온 과정이 「연세」의 역사’라고 설명한다. ‘학생사회의 부재, 연대의식의 소멸, 교지 무용론’은 「연세」가 창간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끓어오르던 쟁점인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연세」는 온라인 출판 플랫폼의 확대, 온라인 커뮤니티로의 편향과 공론장 소멸이라는 외적 요인과 함께 그 존재 가치부터 심각하게 흔들리는 상황이다. 2015년 폐간된 서울대의 <관악>을 비롯하여 타대학의 교지는 폐간되거나 편집위원 지원자 수가 급감하여 발행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교지의 소비층과 학생회의 인원은 꾸준히 줄어들었고, 학생 자치 활동에 대한 대학생들의 인식이 변하며 교지는 비판의 대상을 넘어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블로그, 브런치 등 온라인 플랫폼과 1인 출판의 대중화는 필자로의 문턱을 낮춘다. 「연세」의 기획을 정리한 표를 참고하면 75호 <대학언론이 대학언론의 위기를 말하다>, 96호 <연세를 부탁합니다>, 99호 <대학언론의 현주소>, 109호 <대학언론 기획>, 113호 <미디어 기획> 등 대학언론과 교지를 소재로 한 핵심 기획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교지의 위기는 대학 출판물을 다룬 특정 기획의 증가 외에도 학생참여를 강조하거나 학생사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증가했다는 것과 대학생의 탈정치화를 다루는 글들이 증가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000년대에 눈에 띄는 내용의 변화는 「연세」가 일상과 개인에 주목하며 내용이 파편화됐다는 것이다. 개인의 경험을 사회학적, 정치학적,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시도는 9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일상을 사회로 확장하지 않은 채 생각할 지점과 여운을 남겨두고 끝내는 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회구조적 분석이 또 하나의 「연세」의 도그마가 된 상황에서 이를 깨뜨리는 파격적인 신호일 수 있다. 개인의 이야기가 사회로, 집단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 개인의 고백으로 끝을 맺으면서 파편화된 사회에서 그 자체만으로 공감대를 얻으려는 것이다.7호에서 자아형성을 환경과의 조화라는 통일된 설명으로 풀어나갔다면 오늘날의 「연세」에서는 필자의 자아형성 경험, 실패담을 고백함으로써 비슷한 경험을 한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Q. 「연세」의 소수자 글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개인에 대한 주목은 특수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의 「연세」는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탈북민 등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 개체에게 집중하고 있다. 100호 특집에서 「연세」를 중앙교지 중에서 가장 소수자 감수성에 민감한 언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연세」가 소수자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대중화 노선을 택했던 90년대 이후이다. 1호의 <여학생 특집>과 2호의 <여학생을 위한 공백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글을 볼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 남녀공학인 연세대를 다니는 여학생의 경험을 수필로 기록한 것으로 캠퍼스 내 여성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이는 대학 내 여학생수가 적은 현실적인 이유와도 관련 있다. 노동운동이 지면을 비워준 이후 「연세」에는 여성주의, 페미니즘, 여성해방 등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고 논단에서 여성주의 논문을 포함하는 것을 넘어 ‘여성’이라는 개별 영역을 만들어 여성이 주제가 되는 글을 꾸준히 기재하기도 했다. 44호에서는 장애인 인권, 환경 등 새로운 영역을 별도로 신설하여 연세의 주제 다양화 의지를 보여준다. 93호 <퀴어 퍼레이드 4인 4색>은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여 퀴어 퍼레이드를 다각도로 서술하고 있고, 89호에서는 편집위원의 이야기를 담은 <교회 다니는 게이 이야기>를 싣는 것처럼 점차 「연세」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충실히, 더욱 가까이서 대변해왔다. 특히 여성, 노동자, 장애인은 2010년대 이후 매 호 한번 이상 등장하는 대표적인 주제이다.
Q. 연세의 형식과 구조는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연세」가 1년에 한번 발행됐을 때는 400페이지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논문이 다수였기 때문에 「연세」를 읽기 위해서는 집중력과 긴 호흡이 필요했다. 1년에 2번 발행됐을 때는 200~300페이지로 분량이 줄어들었으며 안정적으로 계간지화를 성공한 2000년대 이후에는 100 페이지에서 60 페이지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내용의 역사’에서 언급했듯이 초창기 「연세」는 학술지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특집은 현재의학내기획보다 학술적 글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한 호에 2 개의 특집이 있었는데 특별 기고나 취재 글 또한 외부에서 의뢰한 논문이 다수였다. 이 당시 편집위원들에게 글을 쓰는 것 외에 「연세」에 적합한 논문 기준을 선정하는 일은 중요한 업무였다.
「연세」는 시기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1~2편의 특집, 교수논단, 학생논단, 서평과 문화 비평, 현장 르포, 문학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초창기 「연세」는 목차와 글을 구분하는 내지 없이 글을 배치했기 때문에 가독성과 통일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연세」 규격화 작업이 진행된다. 10호부터 머리말, 여는 글, 드리는 글 등 다양하게 불리던 글을 권두언으로 통일하고 이후 권두시, 축사, 발간사를 함께 배치하여 통일성을 높였다. 표지 뒤에 바로 본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촌의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과 연세대를 상징하는 독수리 사진을 속표지로 넣어 넣어 연세인의 대표 출판물이라는 「연세」의 상징성을 부각한다. 글 순서도 ‘권두 논문 > 특집 1 > 기획기사 또는 앙케이트, 좌담회 > 특집 2 > 교수논문, 학생논문’으로 고정하고 후반부에 포토에세이, 학생기고란, 연세 문학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배치했다. 마지막 장에 학도호국단 사업보고를 배치했는데, 이는 이후 연세 편집위원회 체제에서 총학생회 비평을 꾸준히 게재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이 외에도 호국단 체제 「연세」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내지를 추가하고 글꼴과 문단 모양을 비슷하게 하여 정기 발행물로서 「연세」의 통일성을 만들었다.
체계화 작업은 23호 짜임글 시도로 이어진다. 86년 발행된 23호는 특집에 해당하던 글들을 ‘짜임글’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기획글이나 특집을 구성하는 논문에 짜임글 1, 2, 3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기존 「연세」는 특집의 필요성과 특집을 구성하는 개별 글을 소개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가 여러 글을 읽으며 공통의 문제의식과 연관성을 찾아야만 했다. 호국단 체제에서 「연세」의 통일성을 만들었더라도 내부의 글들의 유기성까지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3호부터 짜임글의 배치 이유와 「연세」가 해당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당위성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독서를 돕는다. 짜임글 구조는 글의 밀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27호의 경우, 통일을 소재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통일 문제의 사적구조>, <전제조건을 통해서 본 통일의 여건 조성>, <통일운동의 대중적 활성화를 위한 방법론적 시도>, <80년대 북한의 주요 동향과 정책 방향>이라는 5개의 짜임글 있고, 개별 글의 역할과 필요성을 설명하는 단락이 존재한다. 5개의 글은 순서대로 ‘통일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 ‘현재 지배층이 통일의 주체를 정부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 ‘민중의 통일 의지를 높일 수 있는 작업이 통일 여건 조성이라는 점’, ‘통일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산되기 위해서 통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하며 ‘한반도 분단과 대중의 참여’라는 핵심 주장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는다.
90년대 「연세」는 학생운동 외에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자 환경, 여성, 일상의 정치, 장애인 등 새로운 분야를 신설했다. 학내 사건과 사안을 다루는 <연세, 연세인> 기획을 신설하여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구체적인 연세대의 현실을 교지에 담고자 했다. 독자의 비평을 담는 R노트와 비평에 답하는 Re: R노트를 기획하여 소통창구를 열었고, 91호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위원을 선발하고 독자모임을 열어 피드백 지연이라는 계간지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독자층 감소로 R노트의 정기적 기고가 어려워지자 R노트를 폐지하고 독자모임을 속기록을 다음 호에 개제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연세」가 독자와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연세」의 베리어프리화로 이어졌다. 2019년 가을 발행된 121호는 YIRB와 협업하여 ‘듣는 교지’를 제작했는데, 이는 장애인 권리에 대한 글을 싣는 것을 넘어 넓은 정보 접근권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모습이다.
Q. 형식의 파편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선 ‘내용의 역사’에서 2010년대 이후 「연세」가 주제의 파편화 현상을 보인다고 언급했다. 이런 모습은 「연세」의 목차와 구성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109호의 <공생>, 129호의 <위기>, 130호의 <경계>는 하나의 추상적인 키워드 아래에 개별 글들을 엮어 특집화한 것이다. 과거 「연세」가 특정한 문제의식을 먼저 두고 관련 논문과 취재 기사를 배치했다면 오늘날의 「연세」는 편집위원들이 쓰고 싶은 글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교차점을 찾고 이를 추상적인 단어나 포괄적인 표현으로 묶어내려고 한다. 이런 글의 모음이 해당 호의 핵심 기획이 되며 학내기획이 사라지거나 비중이 줄어드는 모습이 나타난다. 일부 독자들의 「연세」의 ‘학내 언론’으로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내용의 파편화는 형식의 파편화로 드러나고, 이는 학생들의 공감을 얻을 공통 주제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연세」의 파편화를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만 해석하기에 한계가 있다.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수긍하는 사회에서 「연세」가 학생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통일될 수 없는 것, 다양성과 분절, 파편화된 상태’ 그대로를 드러내며 독자들의 이해를 얻으려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 호에 우리가 뭘 쓸까에 대해서 큰 주제를 잡고 이야기하기보다 각자 쓰고 싶은 것과 쓸 수 있는 것을 먼저 던지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완성된 문장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들고 와서 피드백을 주고받아요. 사실 이때까지도 아직 주제가 확정 안 되기도 해요. 중구난방인 글들을 어떻게든 목차를 짜야 하는데, 얘네를 어떻게든 맞춰야 하는데, 그게 사실 제일 힘들었어요.”(편집위원 D)
이 장에서는 「연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다시 말해 학내에서 「연세」를 비롯한 학내 언론이 유통·교환되어온 방식과 글과 담론이 오갔던 경로, 학내 언론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변화, 199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걸쳐온 학생사회와 학내 언론의 연성화 과정을 다룬다. 「연세」의 내용과 형식 변화는 그것을 둘러싼 학내 환경의 변화와 따로 떼어볼 수 없다. 학내 학생과 각 단과대의 건물들, 그 안에 놓인 학보통, 당대의 사회적 사건들과 깊숙이 맞닿아 있는 「연세」는 그들과의 관계망을 통해 학생사회 안팎에서 변화해온 무수한 담론을 포착하고, 수용하며 비틀어낸 기록의 산물이다. 그것이 우리가 「연세」의 역사와 그것이 놓여온 환경의 변화를 추적하는 이유다.
지난 5월 간 1990년대 중후반에 연세대와 서울대에 재학한 독자 3인을 인터뷰한 바 있다. 이에 90년대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대학 내에서 학내 언론을 비롯한 ‘글’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유통되었으며 당시의 재학생들이 어떻게 담론을 주고 받고 구축해갔는지를 살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인터넷이 대학교와 연구소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개별 가정에서의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아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카페’와 ‘PC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만큼, 당시는 교지나 학교 신문 등 지면으로 쓰인 글이 유일한 매체로 두드러졌던 때였다. 학보부터 우편·엽서까지의 글이라는 매체를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싣고 날랐다. 그들은 매체로서의 글쓰기와 글 읽기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F는 연세대 국문과 95학번으로, 당시 과에서 학기마다 발간된 신문이 있었음을 회상했고, G는 서울대 신방과 94학번으로 「학회평론」과 같은 학회 계간지를 비롯해 지면 형태로 발간된 글을 주고받고 이를 함께 보며 논의하던 학내의 모습을 언급했다.
“이런 학생들이 출간한 매체들이 학생사회의 커뮤니케이션에…. 미디어로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기는 해요. 아까 신문도 교환하고 이런 것처럼. 확실히 선거 운동하면 서울대 선거운동 자료집이 우리 과방에 돌아다니고 막 그랬었어요.”
(독자 F)
“내가 아는 걸로는 「학회평론」이 있었고 그러면서 이제 서로 교류를 하다 보니까 뭔가 교지에서 봤던 것들에 대한 얘기도 서로 하고 좀 공유를 하고.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메일을 쓰고 했던 시절이 아니니까 이제 서로 복사해서 나눠 갖기도 하고. 보통은 학회를 한다고 하면은 어디 신문의 내용 무슨 찌라시 내용 우리가 발간한 책들 이런 것들을 다 복사해서 이렇게 쌓아놓고서는 얘기하는 식이었었거든. 거기 자료에 다른 서울대나 연대의 교지가 들어갈 수 있고.” (독자 G)
또한 E는 90년대 중후반 학내에서 글이 교환·유통되었던 풍경을 ‘학보통’의 존재로 설명한다. 이 장에서는 당대의 풍경을 보다 현장감 있고 생생하게 그리고자 인용구의 분량이 길어지더라도 인포먼트들의 언급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오고자 했다.
“그때 기억나는 게 문과대 건물 지금 외솔관 1층에 학보통이라고 있었는데 학보통이 각 과별로 이렇게 학년별로 우편함 같은 거였거든요. 피전홀(pigeon hole) 같은 그런 건데 거기 보면은 타 학교 친구들이 보내준 신문이 꽂혀 있었어요. 저도 보내주기도 하고. 그래서 신문을 이렇게 딱 접어가지고 하여튼 이렇게 또 조그마하게 이렇게 세로로 접어서 싸는 용지도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무슨 띠 같은 걸로 이렇게 싸가지고 거기다 이제 써가지고 친구들 학교로 보내주고 친구들도 우리 학교로 보내주고 그래서 학보통에 보면 여러 학생들이 서로 주고받은 타 학교의 그 신문들이 꽂혀 있었던 게 생각이 나요. 다 읽었어요.” (독자 F)
“학보통이라고 불렀었는데 각 학과 학년별로 학보통이 있었고 거기에 교지가 들었을 수도 있고 그 신문이 들었을 수도 있고 나한테 온 편지가 들었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여전히 편지를 쓰던 시절이에요. 편지도 쓰고 엽서도 쓰고. 삐삐 고지서도 들어있고. 뭐 하여튼 그러니까 개개인에게 피전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과 학년별로 하나씩 있었어요. (..) 그래서 월요일에 학교 오면은 이제 그 학보통에 나한테 온 거 없나 확인해 보고.” (독자 F)
학내 건물마다 학과, 학년별로 구분된 ‘학보통’이 존재했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학보와 학교 신문, 교지, 우편물을 주고받았다. 학보통은 각종 학내외 발간물과 우편물을 주고받는 일종의 우체통으로, 학생들은 학내의 발간물만이 아니라 타 대학의 발간물을 학보통을 통해 함께 주고받았다. 이와 더불어 각 대학의 발간물은 학교 앞 독립서점을 통해 유통되기도 했다. G는 연세대 인근 독립서점 ‘오늘의 책’, 서울대 인근 독립서점 ‘그날이 오면’의 사례를 들며 ‘연세대에 데모하러 갈 때마다 ‘오늘의 책’을 들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세춘추」가 항상 꽂혀 있었다’고 언급했다. 90년대 중후반 학생들의 소통과 담론 형성은 발간된 신문·서적 형태의 글만이 아니라 학과 과방, 동아리방, 편집실 등 학내 공동체별 공용 공간에 배치된 ‘날적이’, ‘R-노트’ 등 매일의 일상과 단상을 공유하는 기록장을 통해서도 구성됐다.
“나는 내 학부 때 과에 사람의 소리라고 그랬었어. 우리가 그 일기장을. 그래서 그 사람의 소리도 한 내가 아는 것까지만 해도 한 50권 정도 (분량이) 됐었거든. 그 당시에 이미. 그래서 그거 쓸 때도… 나도 엄청 정말 간절하게 썼던 것 같아. 한편에서 그 안에서 논쟁도 했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제 그 펼쳐보면 계속 싸우고 있는 거지. 근데 그걸 진짜 정말 진지하게 막 썼거든.” (독자 G)
“많이 썼죠. 날적이는 그냥 뭐 이것저것 아무거나 써도 되는 거여 가지고 뭐 약간 자유 게시판 같은 거. 요즘에. 딱 그런 기분.” (독자 F)
필자들은 지난 5월 23일 연세지 편집실(학생회관 311호)에 방문하여 편집실의 구성을 살피고 그곳에 보관된 기록물들을 살펴본 바 있다. 이때 1989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작성된 ‘R-노트’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 ‘R-노트’를 통해서는 일상의 일들, 짧은 단상부터 ‘종교의 기능과 의미’ 등을 논쟁하는 두어장 분량의 글들이 오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은 노트에 직접 손글씨로 작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중간중간 교환학생을 떠난 편집위원의 엽서, 시위에 참여하다 투옥 생활을 하게 된 편집위원의 손편지, 이외의 타자기로 인쇄된 편지지가 함께 붙여져 있기도 했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은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이 발돋움하며 그 이전의 대학 담론을 공고히 구축한 민주화와 노동이라는 두 의제로부터 환경·평화·여성·문화운동 등 다양한 주제로 사회 운동이 갈라져 나오는 시기였다. 신사회운동은 이전의 전통적 노동운동과는 달리 자아실현, 인권 증진이라는 가치를 지향했고, 이는 전통 좌파적 접근으로부터 개량적인 부르주아 사회운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연세」도 이러한 신사회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했다.
“그 당시에는 다 대학 학생회가 전부 운동권이었잖아요. 다 운동권이었고 대학에 들어온 그리고 87년의 여진 같은 게 남아 있던 시절이어서 뭐랄까, 대학에 들어오면은 운동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를 희생해서라도 이제 그 나라를 위해서 뭔가 민주화를 위해서 뭔가 해야 되고 이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게 90년대 초반에 이제 사회가 변하거든요. 사회가 90년대 초반에 변하면서 그 소비사회로 우리가 이제 전 변하게 되고 소비라든가 아니면은 개성이라든가 그리고 자유주의라든가 이런 개인의 그런 가치 그런 운동이라든가 민주화라든가 그런 대의 이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가 되게 이제 발현될 수 있는 그런 토양 같은 게 마련되는 것 같거든요. (..) 그래서 우리나라 사회가 이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회운동의 시대가 되었다고들 얘기를 해요.” (독자 F)
“90년대 문화 운동의 붐이 이제 일어났던 거지. 그게 특히 연대에서는 페미니즘 하고 같이 더 이렇게 폭발력을 가지게 됐던 것이고 그래서 그 문화 운동의 붐 속에서 예를 들면 내가 했었던 영화 동아리도 이제 등장을 했었던 거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또 반동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지. 반동 계략. 그러니까는 이제 과거에 이제 혁명이라는 것을 디폴트로 놨던… 어떤 계급 민족 문제 이런 걸 디폴트로 놨던 분위기에서 봤을 때는 문화라는 건 너무도 소프트한 거야. 너무 말랑말랑한 거고 그래서 이제 그거를 굉장히 이제 참 의심의 눈으로 보는 선배들도 있기는 했었어요.” (독자 G)
“약간 뭐라고 해야 되지, 계몽시키려는 글. 근데 ‘교지는 더 이상 그런 거에 적합하지 않은 플랫폼이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도 있지만 교지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지금 그런 글이 들어온다 해도 교지에 실을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위원 B)
“말랑말랑한 글쓰기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미 많이 ‘탈 정치화됐다’라고 생각하고 나조차도 그 정치에 그렇게 많이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만약에 내가 윤석열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면 못 쓸 것 같은 느낌? 뭔가 구심점이라는 게 저조차도 많이 없는 것 같고. 근데 그렇다고 우리가 쓴 글이 다 다른 얘기를 하고 있냐라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편집위원 A)
신사회운동의 발돋움은 ‘말랑말랑한’, ‘소프트한’이라는 표현과 같이 연성화된 학생사회와 학내 언론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국내 주요 저널리즘 연구에서도 뉴스의 연성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때의 연성화 개념은 공통적으로 수용되는 정의가 없고 조금씩 그 내용이 다르게 구성되는데, 많은 학자들이 뉴스 주제의 측면에서 문화, 연예, 오락 및 생활 관련 뉴스를 연성뉴스로 분류하고 있다. 이 글에서 사용한 연성화의 개념은 주제의 오락화보다도 신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한 대학 담론의 단일한 민주화 의제로부터의 창발과 갈라짐(diverge)을 의미한다. 민주화 의제로부터 갈라져 나온 글들은 개인의 영역과 더 가까이 맞닿은 주제를 다수 포함한다. 후첨할 ‘「연세」의 주요 학내기획 연표’를 보면 1999년 겨울에 발행된 53호의 ‘월경 페스티벌’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하는 제목의 여성주의 운동 특집부터 주제의 연성화가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57호에서 다룬 ‘군대’를 소재로 한 기획과 65호의 ‘학내 도서관’과 ‘생태주의’를 소재로 한 기획 등 그 이후로 기획에서 다루는 주제가 민주화, 학내 운동, 학생사회라는 영역에서 톡 튀어나온 일상·환경·젠더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진다. 오늘날의 「연세」는 기획 기사만이 아니라 편집위원 개인의 글들도 이러한 주제의 연성화를 반영한다. 가장 최근에 발행된 134호의 경우 ‘먹고 사는 문제와 그밖의 일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고, 편집위원들은 그 안에서 학내 기숙사에서 먹고사는 문제(<무악학사에서 살아남기>), 학내 식당의 비건 메뉴 확보 현실(<학교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등의 생활과 맞닿은 글을 작성한 바 있다.
편집위원들은 시대의 문제와 자신의 고민을 표출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동시에 특정한 사건과 일상을 지면에 남겨두기 위해 펜을 든다. 「연세」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연세 1호부터 135호까지 정리하면서 당대 대학생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한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장 「연세」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교지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조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연세」가 쌓아둔 총학생회 평은 학생사회의 변화를, 특집과 기획은 캠퍼스 안팎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연고전을 개편할 때, 학내 노동자 앞에서 고민할 때 우리는 과거 「연세」를 펼쳐 선배들의 지혜를 빌릴 수도, 실패담으로부터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연세」에 기록된 수필과 에세이를 통해 ‘사람 사는 건 똑같구나.’라고 과거의 선배들에게 공감할 수도 있고, 연세마당과 문학마당을 보며 과거의 문학적 감수성에 취하거나 취향 존중의 영역으로 남길 수도 있다. 「연세」는 발행 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물로서 존재 가치를 이어나간다.
“한 권의 책은 그 책의 쓰인 시대의 삶과 논리를 표현하는 시대의 산물이자 또, 그 당대의 논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인식의 기반과 실천논리를 마련해주는 바탕이다.”
(연세 20호, <닫힌사회의 출판문화> 84년 가을)
「연세」는 ‘1호, 2호, 3호’처럼 개별체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연세」라는 이름 아래 묶인 연세대학교와 학생들의 기록이다. 20호에서 책을 한 시대와 그 이전, 이후를 연결하는 존재로 설명한 것처럼 「연세」의 존재 자체는 시대를 잇는 기록이 된다.
「연세」를 펴내는 글쓰기 공동체가 갖는 또 하나의 함의는 거대 담론에 ‘깊숙한 낙서’를 ‘계속해서’ 새기는 작업이다. 오늘날의 「연세」는 전복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언어를 다시 쓰는 과정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연세」는 민주화로부터 갈라져 나온, 개인의 일상과 경험을 어루만지는 다채로운 주제 의식에 감응하고, 편집위원들은 서로가 가진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만 두지 않는다. 이들은 함께 글을 쓰는 작업을 통해 문제화의 과정을 공동의 영역으로 길어올리며 주류의 담론에 낙서를 새기는 작업을 이어간다. 이들이 기꺼이 이행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배타적 입장을 거부하고 부차적인 것을 표현하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성의 논리가 아닌 몸의 논리, 감각의 논리를 배제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공존할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연세」는 1966년부터의 학내 풍경과 담론을 기록해내면서도 이에 개인화되어온 문제의식을 공공의 영역으로 새겨왔다.
“전 사실 학내에서 하는 많은 활동이 실효성보다는 끊이지 않고 이어간다는 데 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간에 사실 이게 대학이라는 공간이 오랫동안 다니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 이제 제일 문제는 인수인계라는 건데 그런 어떤 기존에 하던 사업들 중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거는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일단 해야 된다. 나중에도 할 수 있어야 되니까 그냥 계속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죠.” (편집위원 D)
「연세」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기록과 발화의 작업이 이 글을 위한 조사를 가능케 만들었다. 「연세」는 앞으로도 이만 연세인의 이야기를 파고들고 주류 담론에 금을 내는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주변으로 뭉뚱그려진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 들을 준비를 마쳤는지에 대한 검토와 성찰을 수행하는 인류학의 과제와도 닮아있다. 앞으로 편집위원들이 서로에 더해 독자들에게 어떻게 더욱 깊숙이 새겨낼지를 숙고하는 일은 창간호부터 134호를 지나며 「연세」의 앞에 오랜 시간 남아 논의되어온, 또한 논의될 과제이다.
앞서 「연세」를 ‘깊숙한 낙서’로 표현한 것은 ‘R-노트’에 붙여진 편집위원 ‘강철새잎’의 옥중 편지 내용을 빌린 것이다. 그의 편지는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연세」 교지 공동체와, 그들과 함께 「연세」에 글을 남기는 작업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잘 드러낸다. 이에 2001년 5월 18일에 작성된 그의 편지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내가 나가면 이 독방에는 어떤 공안수가 들어올까? 방 한쪽 벽에 되어 있는 낙서들-‘불패의 애국대오’, ‘노동해방’ 등의 무수히 많은 낙서들-은 내가 들어오기 전에 거쳐갔던 공안수들이 적어놓고 간 것이겠지. 난 굳게 믿는다…. 연세지 또한 무수히 많은 낙서들 중 하나가 되겠지만, 철장 속의 유의미한 낙서가 될 꺼라고. 그래서 난 빨리 너희 곁에 가서, 깊숙한 낙서 새기기에 힘을 합치고 싶구나….”
- 논문
김수이, 2014, 「공동체, 나눔, 글쓰기 2 - 공동체의 ‘나눔’의 양상과 ‘글쓰기공동체’를 중심으로」, 한국문예창작 제13권 제2호.
안미현, 2009, 「여성적 글쓰기의 특성과 가능성」, 사고와표현.
조화순 외 2인, 2012, 「포털 뉴스의 연성화와 의제설정의 탐색」, 정보화정책 제19권 제3호.
- 단행본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 기사
연세춘추,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오늘의 책’」, 2000.11.27.
(http://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09)
경향신문, 「(28)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2015.10.13.
(https://m.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510132300025#c2b )
- 기타 자료
전길남, 2011, 「초기 한국 인터넷 역사 (1982년~2004년)」, 한국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