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제이
지난 몇 달간 대선을 둘러싼 이야기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정치 갈등과 불신이 심각하다는 한국이지만 그래도 대선 유세가 시작되면 각자 지지하는 후보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 감돌곤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나이, 성별,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뽑을 사람 없는’ 대선이라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후보들의 정책과 행보를 지켜봤을 때, 누구도 5년 동안 나라를 맡길 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는 의미다.
20대 여성 유권자인 본인 또한 다음 대통령에 거는 기대가 적었다. 양당 후보의 공약을 아무리 뜯어봐도 평소 내가 여성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선 후보들이 여성의 정치적 요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인 만큼 공약에서 간간이 여성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구색만 갖췄을 뿐 그 정책들로 인해 내가 경험하고 있는 차별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향후 5년간 여성차별, 혐오, 성별갈등을 정당화하는 안티 페미니즘이 공론장에서 득세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특히 거대양당 대선후보의 공약과 행보는 안티 페미니즘에 정치적 결속력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안티 페미니즘 세력은 한국 사회에 여성 혐오와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정치 공론장에서 여성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직장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도 여성에게 위협을 가한다. 모든 시민을 대변하여 갈등을 봉합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섰다는 대선후보들이 오히려 혐오를 정당화하는 셈이다.
취업을 앞둔 청년 여성으로서, 정치에 가장 바라는 것은 노동시장 내 여성차별 관행의 해결이다. 직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자원은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노동소득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와 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여주는 주된 지표로 사용되는 이유다. 각종 기사, 통계, 가족과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면 채용 성차별과 경력단절이 내 이야기가 될까 봐 걱정하게 된다. 특히 우리 엄마는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밝혔을 때 이따금 “여자는 선생이나 공무원이 최고”라고 대꾸하곤 했다. 그 말뜻은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은 일반 기업보다 육아 휴직을 써도 해고당할 우려가 적으며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기 때문에 육아와 가사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여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와 공무원이 내 적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가정보다는 내 꿈이 중요한 나에게 엄마의 말은 당황스럽고 서운하게 들릴 따름이었다. 또 교사, 공무원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근무하는 여성에게 실례되는 말이라고 느꼈다. 그 말을 몇 번 듣고 나서는 부모님에게 구체적인 진로 계획을 밝히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직장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일을 그만두거나 휴직하고 가사와 육아에 집중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존재한다. 지난 2019년 한국의 중위소득 기준 남녀 임금 차이는 32.5%로 OECD 최고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맞벌이 가정에서 돌봄 공백이 생겼을 때 대부분 소득이 낮은 여성이 직장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여성이 돌봄과 가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관념이 존속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엄마는 내가 4~5살이었을 무렵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엄마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해 부동산 사무소를 개업했다. 4년제 공대를 나온 엄마의 전공, 전에 다니던 회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케어하고, 사무실 일도 해내야 했던 엄마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했다.
이런 경험을 단순히 과거의 일 혹은 개인의 사례로 치부하기엔 현재도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많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시간당 여성임금은 15,372원으로 남성 22,086원의 69.6%에 그쳤다. 여성 임금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중은 45%로 남성보다 약 1.5배 높았다. 여성 고위직 비율도 20%대로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남성 합격자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남성 지원자의 서류 전형 평가 점수를 높이고,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낮추는 기업들의 성차별 채용 관행 또한 보도된 바 있다.[1]
사회적으로 직장이 갖는 의미는 크다. 어떤 직장을 갖는지에 따라 경제 사정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제권이 있다면 가정의 중대사에 본인의 의견을 더 강하게 개진할 수 있다. 직장을 통한 경제적 수입은 삶 전반에서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이어가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또 청년에게 직장은 자아실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자신이 흥미와 적성을 느끼는 직업을 갖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청년기의 매우 중요한 목표로 여겨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의 고용 보장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한다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이 수행해왔던 어머니의 역할과 상징적 의미는 고용차별의 주된 원인이어왔다. 지난 2019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만 20세 이상 기혼 남녀 중 여성이 가사 노동에 할애하는 시간은 일 187분으로 남성 54분에 비해 132분 더 길었다. 이러한 통계에 대해서, 남성의 노동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가사부담을 덜 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부 중 남성이 외벌이를 하는 경우 여성이 가사에 쓰는 시간은 341분으로 남성 53분에 비해 273분 길었던 반면, 여성이 외벌이하는 경우 남성 119분에 비해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156분으로 오히려 더 길었다.[2]
여성만이 유급 노동을 하는 가정에서도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은 여전히 돌봄은 여성의 몫이어야 하며, 남성이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심지어 열등하다는 인식이 존재함을 뒷받침한다. 육아를 비롯한 돌봄 노동은 여성의 의무로 여겨지며, 직장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느라 이 의무를 게을리하는 여성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남편의 아침밥을 차리지 않았다며 질타받거나, ‘엄마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못 할 짓이기에 직장을 쉬라고 유·무언의 압박을 당하기도 한다. 여성이 사회와 가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순종적인 양육자로서 봉사하기를 바라며, 이를 거부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가부장제적 관습이 존속하고 있다. 이는 여성을 남성이 보호하고 이끌어줘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여성혐오와 맞물려 여성을 일자리로부터 배제하고 가정에 묶어 놓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처럼 여성 혐오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배태하는 구조 그 자체다.
채용 과정 및 직장에서의 차별은 여성차별의 한 가지 모습일 뿐이다. 여성들은 일상에서의 관계와 대화, 심지어는 온라인 공간에서도 성별을 이유로 한 혐오, 차별,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청년 여성에게 절실한 것은 이러한 차별로부터 안전할 권리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 기저의 여성 혐오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문제인 양 배제되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은 있지만 여성차별을 매우 한정적으로 정의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정책 또한 명쾌하지 못하거나 차별적이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공약 자체보다도 그 공약이 도출된 과정이다. 선거의 전과정에서 정치인의 행보와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보가 차별, 혐오적 발화를 하거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차별과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은 대표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남성의 임금 및 고용형태 격차가 직종 차이로 인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건설⋅제조업 분야 등 소위 ‘힘든 일’에 종사하는 것을 기피하기에 성별 소득 격차는 여성들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는 논리다. 이들은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노동시장에서 여성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남성의 정당한 몫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20~29세를 대상으로 대학 졸업 직후 소득을 측정했을 때, 대학 졸업 2년 이내의 20대 대졸 여성 노동자의 소득은 같은 대학, 같은 전공 남성에 비해 19.8% 적었다. 이때 농림어업, 광업, 제조업, 건설업 취업자를 제외하여도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3] 역차별 주장과 달리 여성이 험한 일을 꺼려서 평균 임금이 적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같은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같은 분야에 취직하더라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결혼과 출산 이전 시기에도 이 같은 격차가 관찰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더 적은 임금을 받게 되는 노골적인 차별이 노동 시장에 존재한다. 역차별을 주장하는 자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고 있으며,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무임승차자, 혐오세력 등으로 낙인 찍고 있다.
국민의 힘 대선 공약과 후보의 행보는 이처럼 여성혐오적인 역차별 주장을 그대로 정책화했다. 여성 관련 정책은 ▲여성가족부 폐지 ▲성년 여성 대상 자궁 및 유방 정기 검진 실시 ▲난임 시술 지원 강화 ▲산모 및 신생아 건강관리 바우처 및 서비스 제공 ▲가정양육수당 인상 ▲초등돌봄교실 제도 보강 ▲육아휴직 1년에서 1년 6개월로 연장 ▲스토킹∙데이트폭력 피해자 보호 ▲성폭력과 무고죄 처별 강화 등이 있다. 스토킹·데이트폭력과 관련한 사안은 다루고 있지만, 많은 공약이 출산과 육아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국민의 힘 공약은 여성에 관한 정책은 출산과 육아를 부분적으로 보조하는 정책에 한정해 제시하면서, 남성의 독점적 혜택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성이 출산과 돌봄노동을 담당해야 한다는 여성에 대한 도구적 관념이 여성차별의 원인 중 하나라는 맥락을 고려했을 때, 여성 정책을 이러한 분야에 한정하는 것은 차별을 해소하기보다 강화할 우려가 있다.
국민의 힘 후보와 대표자들은 그간의 행보로써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20대 청년 중 이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은 남성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칭하는 20대 남성이 실제로 그들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언론은 온라인을 허브로 남성 ‘역차별’ 담론을 주도해가는 이들을 마치 20대 남성 전체의 뜻인 양 대변하며 갈등을 조장한다.
특히 여성가족부(아래 여가부) 폐지 공약은 여성에 대한 혐오 및 역차별로 일컬어지는 맹목적 적대감을 그대로 반영했다. 여가부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 기획 및 평가, 청소년 보호 및 지원, 가족 정책 기획,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 및 보호 등 필수적인 업무를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후보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여성 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지원도 함께 하는’ 양성평등 가족부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고용평등, 삶과 신체,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 안전할 권리 등 다방면에 걸친 여성정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가운데 여성가족부가 폐지된다면 성평등 문화가 역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여성가족부의 업무는 여성정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윤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했던 싱글파파에 대한 지원은 여가부의 업무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여가부의 존재가 남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언설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배제하기 위한 전략이거나, 맹목적인 여성혐오로 인해 날조된 것에 가깝다.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는 이처럼 편향적인 대선 공약에 대해 20대 여성의 정치적 어젠다가 명확하지 않아 정책으로 실현하기 어렵다는 궤변으로 변명했다.[4] 하지만 그가 신봉하고 있는 ‘20대 남성의 어젠다’야말로 명쾌하지 않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남성차별을 없애자는 것인데, 이들의 어젠다는 사실상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와 백래시로 구성되어 있다. 불법촬영, 직장 내 성폭력을 비롯해 일상에 만연한 젠더 폭력으로부터 여성이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남성이라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당하여 불쾌하다거나, 노동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목소리에 대해서 오히려 남성이라서 차별당했다는 식이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차별당하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빈약하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여성 유권자가 느끼는 위협은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프레임화하여 배제하고, 20대 남성을 위시한 안티 페미니스트들은 마치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정치적 공론장에 모셔오고 있다. 대선 정국에서 오가는 담론 뿐 아니라 그 배경과 맥락도 매우 여성혐오적이다.
여성이 불안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유세 과정에서 여성 유권자를 배제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후보는 다양한 분야의 사회 문제를 논하는 유튜브 채널인 ‘씨리얼’과 ‘닷페이스’ 출연을 협의했다. 그러나 이 후보 캠프에서 해당 채널들이 편향된 페미니즘 성향의 채널이라며 촬영 취소를 주장했다. 후에 이 후보는 ‘닷페이스’ 촬영을 진행하였지만, ‘씨리얼’ 채널 출연은 끝내 불발되었다. ‘씨리얼’은 여성만을 대변하는 채널이 아니라 장애인, 탈가정 청소년, 영케어러, 기초생활수급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를 인터뷰하는 채널이다. 이 후보 캠프는 채널에 대한 사실과 관계없이 반페미니즘적 여론에 편승하여 해당 채널과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채널이 전하는 메시지에 동참하는 유권자 또한 배제하였다. 이처럼 대선에서 안티페미니즘은 과대대표되는 반면 페미니즘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안타깝게도 ‘역차별’을 핵심으로 한 여성혐오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정치는 이번 대선을 전후로 그 영향력을 크게 강화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주도해 나가는 집단으로 ‘20대 대학생 남성’을 주목한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존재하던 주장들을 대선 유세에 끌어와 이용하고 있는 주체는 사실 기성세대 정치인들이다. 기성세대 보수 남성 정치인과 청년 보수 남성 유권자의 역설적 시너지를 표심 공략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이번 대선에서 청년 보수 남성 유권자의 과대대표 현상은 국가주의 패러다임의 재생산으로 분석할 수 있다.
양당 후보가 내놓은 공약들과 이들의 행보는 매우 가부장⋅국가주의적이다. 통념상 사회 정책은 시민의 삶을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4대 보험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복지정책 대부분이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대기업과 핵심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부 주도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될 당시 제조업 중심 산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산업재해 발생률이 높아졌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64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통과시켰다. 고용보험 또한 구조조정을 합법화하며 이에 대한 보상 및 사후조치 용도로 만들어졌다. 복지는 ‘어려운 사람’, 혹은 모든 시민의 권리를 위한 것이라는 당위와 달리, 한국에서 복지는 정반대로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만 제공되어왔다.
남성은 군인으로서, 산업역군으로서, 법조인, 관료 등 엘리트로서 안보와 산업화를 주도했다. 국가는 각종 정책을 통해 이들을 우대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중장년 남성 정치인들은 앞으로 국가에 기여하고, 또 정치권력을 넘겨줄 후계자로서 남성을 지목하고 있다.[5] 20대 안티 페미니즘 세력의 ‘어젠다’는 놀랄만큼 중장년 보수 정치인들의 목소리와 닮아있다. “국가에 의무를 다하고 나서 권리를 주장하라”거나,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부각하여 분업을 정당화하고 남성의 능력과 기여를 강조하는 식이다.
국가가 모든 여력을 ‘성장’을 위해 투입하는 가운데 여성과 남성의 쓸모는 달랐다. 성장지상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회 구성원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일단 성장하고 나서 분배하자”는 성장지상주의에서 사회의 모든 여력은 국가를 위해 동원되었던 반면, 국가가 개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복지는 공백상태였다. 여성은 복지의 공백을 무급돌봄노동과 비정규 임금 노동으로 채워왔다. 가부장이 유급노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밥과 빨래를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다. 남성이 유급노동에 대한 접근을 독점하며 권력을 획득하는 동안 여성은 이를 뒷바라지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여자는 약하다,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보여주듯 이 시기 여성은 주체성과 가능성을 빼앗기고 희생과 차별로 점철된 ‘어머니’라는 이름만을 부여받았다. 이 같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여성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은 매우 컸다.[6] 교육과 출세의 기회, 복지혜택으로부터 배제당하였고, 남성들이 사회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혐오와 차별, 폭력을 당해도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여성 유권자로서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바란다. 성별을 이유로 돌봄제공자이자 산업예비군의 역할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미래에 대한 온전한 선택권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또한 직장과 가정을 비롯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받고자 한다. 양당 대선 후보들 또한 청년 여성 유권자들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지난 해 8월 기자회견에서 OECD 최고 수준의 성별임금격차, 채용 성차별, 일터에서의 성희롱∙성폭력, 경력단절, 독박돌봄, 고용위기 등 여성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 후보는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젠더폭력, 고용, 성과 재생산 건강권 4가지 영역에서 여성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발언했다. 구체적으로 출산휴가, 육아휴직 자동 등록제를 실시하고, 디지털 성범죄 대응책을 보강하며 일터에서의 성폭력과 고용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도록 하고 생리대와 난임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였다.[7]
하지만 여전히 저출생 문제의 관계자로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양당은 공통적으로 각종 휴직 및 지원금 확대, 아동 돌봄 서비스 확충, 초등학교 하교 시간 연장 등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와 관계된 복지를 보강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워킹’맘’으로서 여성의 출산 및 돌봄 부담을 줄여 저출생을 막겠다는 것이 양당 후보들의 목표다.
이러한 공약에는 여성이 지는 돌봄 부담을 국가가 부분적으로 지원하여 저출생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가임기 여성이 경력 단절을 우려하여 비혼, 비출산을 선택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또 외벌이 가정의 경우 증가하고 있는 양육비를 부담하기 어렵다. 양당의 공약은 여성차별의 철폐 자체보다 출산율을 증가시키거나 최소한 감소 추세를 늦추는 것에 더 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여성의 재생산권, 육아를 제외한 다른 젠더 의제에 대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된다.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 또한 경력단절과 관련된 측면만을 다룸으로써, 문제의 또 다른 원인인 여성혐오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돌봄 부담을 남성이 동등하게 부담하도록 하기보다는 돌봄을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 중 일부를 국가가 지원하도록 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국민의 힘은 육아휴직을 남녀 모두 1년에서 1년 6개월로 연장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2018년 전체 육아휴직자의 남성 비율은 17%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돌봄 부담이 여성에게 쏠려 있는 상황에서 육아 휴직을 연장한다면 여성의 경력단절이 6개월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월 30만 원의 양육수당 또한 남녀차별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육아를 보조해주는 역할에 가깝다. 경력단절 이전에 여성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워킹맘’에 대한 지원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돌봄노동을 하는 남성, 돌봄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처럼 남성을 생계부양자이자 가장으로, 여성을 양육자로 도구화하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 패러다임에서 남녀차별을 완전히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차별이 정당화되는 논리 구조를 부수기 위해서는 시민권 패러다임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동안 사회정책을 논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은 경제 성장에 쓸모가 있는지 여부였다. 그 밖에 소수자를 위한 복지정책들은 어김없이 예산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없다며 기각되거나, 정치인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계류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성장 신화를 되풀이하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이 불행하다면 성장의 의미는 없다. 애초에 더 이상 예전만큼의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성장지상주의와 선성장후분배주의에서 벗어나, 시민의 권리를 위한 정책을 논할 때다.
몇몇 야당은 이 같은 시민권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먼저 국민 대신 ‘시민’이라는 표현으로 유권자들을 지칭한다.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시민을 지지하고 결속하는 공통적 기반이자 시민이기에 당연한 권리로서 사회정책을 제공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부각하는 표현으로 읽힌다. 이들의 입안과 공약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먼저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여성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시정하고자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른 목적을 위해 차별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차별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대처해나가야 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받고 있는 부분을 선언적으로 인정받고 더 나아가 법적 대응이 가능하다면 더욱 다양한 차별을 논하고 맞서 싸울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주4일 근무 공약은 성장을 위해 모든 인적 자원을 총동원하고자 했던 성장주의에서 벗어날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률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주거를 같이하면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시민동반자법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으로만 가족을 정의했던 가부장제적 제도의 완화를 꾀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이 뽑을 사람 없는 대선이었던 것은 누구도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가 봉착한 한계를 넘어설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평등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시화되었고, 시민들은 일상에서 박탈감, 위기감, 경쟁의식, 분노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성은 생계부양자이자 산업역군, 엘리트 등 가부장으로서 지위를 더는 유지하기 어렵다. 20대 남성 중 일부는 이러한 분노를 표출할 대상으로서 청년 여성을 지목해왔다. 특히 가부장제적 역할 수행을 거부하는 여성, 즉 ‘페미’를 골라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며 성토한다. 이번 대선에서 정치인들은 정치의 무능과 불평등을 은폐하고, 낡은 국가주의 패러다임을 존속하기 위해 또다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이익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평등이 자신의 몫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조건부가 아닌 평등과 시민권이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국가의 성장과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 국가를 위해 노동자, 임산부, 주부, 군인 등으로 희생해야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이용해 누군가의 권리와 요구를 묵살하며 이를 공정하다고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1] “국민은행 채용서 '성차별' 정황…남성에 서류점수 특혜”, <연합뉴스>, 2018년 3월 21일.
[2] “혼인상태별 및 맞벌이상태별 가사노동시간”, <e-나라지표>, 2020년 11월 5일.
[3] 김창환, 오병돈, 「경력단절 이전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 『한국사회학』, 제53호, 2019, 167~204쪽.
[4] “20대 여성, 어젠다 형성 뒤처지고 구호만”, <오마이뉴스>, 2022년 1월 20일.
[5] “문제는 ‘남성 역차별’ 아니라 ‘남성의 역공’이다”, <한겨레>, 2021년 4월 25일.
[6] “정치인들, 남녀 갈라치는 역사적 중범죄…청년층 뭉쳐 싸워야”, <경향신문>, 2022년 1월 18일.
[7] “이재명·이낙연 ‘성평등 공약’ 여심 잡을까”, <경향신문>, 2021년 8월 16일.
수습편집위원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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