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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Mar 26. 2022

<130호>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것들

수습편집위원 김마치

주황색 배경에 초록색과 흰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람의 상체가 중앙에 위치해 있다. 얼굴은 푸른색 모자이크로 가려져있으며 그 위에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것들이라고 쓰여있다



S.E.S.와 에스파의 같은 ‘꿈’?


MZ 세대 트렌드로 세상이 시끄럽다. MZ 세대 트렌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어느 날, MZ 세대의 대표격인 걸그룹 에스파가 S.E.S.의 노래인 <Dreams Come True>를 리메이크했다는 기사를 봤다. 새로운 세대의 영한 에너지와 감성이 담겼다는 평이었다. 기사 아래의 댓글에는 사실 S.E.S.도 MZ 세대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내가 MZ 세대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지게 된 시점이다. MZ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에 출생한 밀레니얼(M)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0대부터 30대까지를 아우르는 세대이다. 음, 너무 범위가 넓지 않나? 내가 느끼기에 S.E.S.와 에스파는 엄연히 세대가 다르다. 아이돌 1세대인 S.E.S.와 4세대인 에스파가 알고보면 같은 세대라니, 세대 격차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싶다. 실제로 현재 MZ 세대에 해당하는 한국인은 약 170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에 가깝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세대로 묶는다는 것에, 나는 단어 자체가 게으르고 성의 없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 아닌 걱정도 들었다. S.E.S.와 에스파가 20여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부르는 <Dreams Come True>에서 그들이 꾸는 꿈은 같을 리가 없다.



청년의 발췌된 이름: MZ 세대


몇십 년이 뭉뚱그려진 MZ 세대는 늘 어떤 특징을 지녔다고 정의 내려지곤 한다. 포털사이트의 시사상식 사전에 등재된 MZ 세대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 세대는 모바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최신 트렌드와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인다. MZ 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상품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특징을 보이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나 특별한 메시지를 담은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미닝아웃’ 소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 세대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가격보다는 취향을 중시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아 ‘플렉스’ 문화와 명품 소비가 여느 세대보다 익숙하다는 특징도 있다…… (중략)[1]


사회가 바라본 MZ 세대의 모습에서, 나이로 따지면 MZ 세대의 한복판에 있는 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쉬이 보인다. 예를 들어 '모바일을 우선적으로 사용'한다니. 모바일이 나온 시기를 생각해 보면  Z세대에서도 ZZ에 가까운 특징을 MZ 세대 전체에 갖다 붙여놓은 듯싶어 짐짓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격보다는 취향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는 말에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주변 대부분 대학생들만 보더라도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취향과 편의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커녕, 1000원, 아니 100원이라도 싼 것들을 찾아 헤매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이 맨투맨이나 바지를 최저가로 사지 못했을 때, 그리고 커피, 햄버거, 아이스크림 값이 3, 400원씩 오른다는 뉴스를 봤을 때 내뱉는 안타까움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취향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 돈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겠는가. 이들은 대개 경제적 배경에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소득 분위가 아주 높은 사람들일 터다. 소득 분위가 높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이런 소수의 청년들이 전체 청년을 대표한다고 보기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나온 ‘MZ 세대의 특징’으로 포장된 그 누군가의 특징이 세대 전체의 특징으로서 자리 잡는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세대에 이름이 붙여졌을 때, 이름을 부르고 그 세대의 특징을 규정하는 이들은 늘 다른 세대이다. MZ 세대 없는 MZ 세대론, 청년 없는 청년 담론이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 어떠한 유행어가 만들어졌을 때, 언론과 매체, 그리고 정계에서는 그 단어가 한물 지난 게 아닌가 싶을 때까지 단물을 뺀다. 특히 다수를 간단히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는 세대와 관련된 단어가 그렇다. 청년층은 늘 이전 세대와는 구별되는 새 이름으로 호명되며, 타자화되고 분석되는 일을 반복해서 겪는다.


요즘도 한국 정계엔 청년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청년을 호명하기 위한 용어로 'MZ'라는 단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호출된다. 그러나 단어가 보여주는 건 청년이 가진 여러 이미지 중 단면일 뿐이다. ‘MㅏZㅏ요 토크’ 나 ‘민지야 부탁해’처럼 2030을 노린 영(young) 한 정책을 위해 소비될 뿐이다. 이런 정책들이 정작 청년들 사이에서는 영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반복된다. 청년의 특징 중 필요한 부분만 발췌되어 쓰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확실한 건 MZ 세대와 청년이 쓰일 때의 용도는 거의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앞서 나온 특징들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었듯이, MZ 세대는 소비성향을 강조하는 때에 주로 사용되는데 이때 보통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민지야 부탁해’는 왜 꼭 ‘민지’여야만 했을까? 또, 비건 제품이 뜬다는 이야기에선, MZ 세대, 특히 20대 여성들이 열광한다는 문장이 달려 나온다. 여기에서 비건 제품이 왜 유행하게 되었는지 등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비건이 정치적인 실천이라는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MZ 세대라는 단어를 제외할 때,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란 어떤 존재일까. 소비주체로서의 MZ 세대와 달리 정치 주체로서의 청년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성이자 대졸자이며 중산층 이상이다. 정치와 언론은 이들의 위기에 돋보기를 갖다 대고, 그 문제를 파고든다. 반면, 남성, 대졸자, 중산층이 아닌 이들의 어려움은 쉽게 지나쳐진다. 언론과 정치는 마치 골라 뽑기를 하듯, 청년 세대의 널찍한 범주 안의 일부를 의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호명한다. 그러나 그 호명에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에 대한 공감, 진짜 청년의 삶에 대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을 받든 받지 않든, 결과적으로 어떤 문제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청년 문제의 현실적인 상황이다. 정치와 언론은 종종 청년이 큰 곤경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다. 정당들은 청년 실업, 출산율에 대해 말을 얹고, 청년 노동자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근본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하지 않는다. 언론이 청년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가 MZ 세대를 부를 때에 기대하는 발랄함과는 영 딴판이다. 이에 청년인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겠냐는 질문을 던지다가도 일단 노력이나 더 해보자는 자기검열적 해결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가 필요에 따라 명명하는 청년이란 존재는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뿌옇다. 그렇기에 모두가 청년을 부를 때 정작 그 사이에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다.


n년 차 청년인 나의 삶도 누군가의 호명과 큰 연관이 없게 느껴진다. 누군가 특정한 청년층을 지목했을 때 그 범주 안에 포함되어 큰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스펙트럼 내에서 흘러가듯 살아가는 나조차도, 사회가 청년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왠지 그에 부응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사회가 청년층의 실업률을 문제로 지적할 때, 이미 구직에 목마른 나를 괜히 더 다급하게 하는 것 말이다. 사회가 취업률을 지속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청년이란 마땅히 공부 또는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이 어떻게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청년들에게 종종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청년이기에 마땅히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부하며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가 정해준 시기에, 그 시기에 하기로 약속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취업을 하지 않고도 내 삶의 그래프를 양의 기울기로 이어 나가기엔 넉넉한 가정에 살고 있지 않으며, 이왕 초중고를 나와 대학교까지 졸업할 예정이니 그에 걸맞은 자아실현 계기를 마련하고 싶을 뿐이다.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청년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그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고 할 때, 청년 주체로서의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공감받고 있다고 느낀 적도,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변화에 대해 진심으로 기대해 본 적도 아직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이 말하는, 정치가 청년에게 내미는 손은 내 앞으로 실효성 있게 다가온 적이 없다. 아니, 그저 그 손을 내가 보지 못한 것일까?



청년의 푸르지 않은 진짜 얼굴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주체성을 잃은 듯하지만 창창한 나이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 여겨지는 청년들. 그러나 내가 아는 진짜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통해 본, 또는 전해 들은 청년은 마치 카메라 보정 앱으로 찍은 얼굴처럼 원래 얼굴과 닮은 듯 이질적이다. 창창함이 과도하게 강조된 청년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원래 얼굴, 아니 나의 진짜 얼굴이 뭔지 알고 싶어졌다. 일단,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하면 나오는 청년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청년]
-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 상세 설명: 대한민국에서 2020년 8월 5일부터 시행된 청년 기본법은 만 19세 이상 만 34세 이하인 사람을 청년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때에 신체와 정신이 왕성히 발달하며 청년기는 자아실현의 적기라고 불린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나이대를 불문하고 어떠한 어감을 표현하기 위해 비유적으로도 활용된다.


사실 청년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청년이란 단어는 1910년대 새롭게 부상한 유행어로, 이전에는 소년과 청년이라는 용어의 구분도 엄밀하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소년이 1900년대의 어휘였다면 1910년 이후의 유행어는 청년이었다. 청년기의 젊은이, 특히 젊은 남성을 뜻하는 '청년'이라는 단어는 전통 사회의 안정성이 흔들렸던 191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자고 할 때 으레 앞세워졌다. 그 당시의 청년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MZ 세대와 같은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만들어진 청년의 이미지에 대한 기대감이 21세기까지 이어져온 셈이다.[2]


청년이란 단어가 세기를 거쳐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386 세대, X 세대, Z세대 등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나 세대, 특히 청년층에 대한 호명이 존재했고, 늘 단일화할 수 없는 집단을 단일화하는 어떠한 이미지가 생겨났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국가주의적 배경 아래, 여전히 청년이 산업역군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갖는 이미지는 일관적이다. 창창함, 에너지 그리고 넘치는 패기. 청년을 앞에 붙인 정책, 영화 제목 등이 우리 사회엔 넘쳐난다. 청년과 아무 연관이 없더라도 청년을 수식어로 쓰는 상호도 있다.[3] 그런 만큼 청년은 등장 이래 늘 새로움을 상징해왔다.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단절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내세우는 것은 청년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애초에 기성세대와의 분리가 청년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는 청년은 종종 과대 대표된다. 정당에서 어떤 정책을 펼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에 들어설 때, 또, 누군가를 정치 인사로 소개할 때 중년, 노년, 청소년이라는 단어보다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과대 대표된 청년은 정치 행사의 마스코트처럼 내세워지지만 결론적으로, 평균 나이가 높은 정당에 청년의 젊은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소비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 대표라 불리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1985년생으로 올해 38살이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정치인이 '상대적으로 젊다'라는 이유로 나와 같은 세대로 묶인다니 어리둥절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우리 사회에 비친 청년의 초상과 그리 가까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왜곡된 시선으로나마 공론장에 자주 등장하는 게 어디냐는 자기 위안을 애써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청년에 주어진 수많은 관심과 기회, 그리고 자유가 오히려 내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때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사실이다. 자신들이 과대 대표되었다는 걸 깨달은 청년이 느끼게 되는 감정은 꽤 머쓱한 것이다. 앞서 말한 청년 기본법이 제정되었을 때 정부는 청년의 날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 행사에서 카메라가 비친 것은 청년들이 아닌 정치 인사들 뿐이었고, 청년 없는 청년의 날 행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늘 주인공은 따로 있는 상황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청년에게 내미는 손의 정체로 돌아가 보자. 물론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의 눈에 밟히는 게 이해야 간다. 청년들이 삶에 대한 고민과 모색으로 이리저리 정착하지 못하는 것을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물가에 애 내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기는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매체에 비친 기성세대는 늘 청년을 ‘보살펴’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타자화된 청년은 꽤나 취약하고 도와주고 싶은 모양새이다.  이러한 시선에는 청년이라면 마땅히 에너지 넘치고, 창창하며 미래 지향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단정이 선행한다. 하지만 청년이 무조건 창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청년에게 창창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개인에게 그러한 수식을 한다면, 특히 누군가 나에게 창창하다는 말을 한다면 참 부담스럽고 어색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창하다는 건 앞길이 멀어서 아득하다는 뜻이다. 나아갈 길을 멀리 보기에는 우리 인생의 가시거리는 너무 짧다. 미래를 계획하기엔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만을 하기에도 벅찬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이러한 삶에서 넘치는 패기를 갖추기란 쉽지 않다. 사실 청년이란 특별한 집단이 아니다. 청년은 젊다는 나이만으로 생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창창하기 이전에 그저 비교적 어린 나이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목소리가 지워진 청년들을 위해.


이처럼 우리 시대 청년의 실상은 사회의 기대와 걱정과는 다르다. 각자 처한 문제는 청년 개개인만큼 다양하다. 나이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청년을 단일한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나이의 청년이라도 각자 겪고 있는 문제가 다르며 그에 대한 해결 방법 또한 제각각이다.


현시점에서 청년은 고용, 주거, 부채 등 전반에 걸쳐 다양한 생존 문제를 갖고 있다. 청년 실업자는 2021년 12월 기준 23만 9천 명이며, 취업 준비를 위해 대학 졸업을 유예하는 청년의 비중은 졸업 유예 경험이 있는 청년 중 47.2%를 차지했다. 또, 무주택자가 많은 20·30대 청년층의 부채 규모가 전세자금 대출을 중심으로 1년 새 10% 넘게 급증하며 다른 연령층의 부채 증가 속도를 두 배 가까이 앞질렀다.[4] 이러한 사회 속에서 청년들 사이의 교육, 고용관계, 그리고 소득 등의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또, 그 격차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렇기에 이렇게나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청년들을 누군가가 대표한다는 말은 거창하고 공허하게 느껴진다.[5] 청년 내의 계층 격차는 이렇게나 심각한데, 이를 대표하는 청년의 모습은 늘 단편적이다. 그렇기에 늘 소외된 청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청년에게 손을 내밀겠다는 국회는 청년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21대 국회의 평균 나이는 54.9세이다. 나이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남녀 성비는 8:2, SKY, 이른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의 고학력자가 3명 중 한 명 꼴이며, 직업 정치인은 77%에 달한다.[6]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서 한쪽으로 쏠린 국회가 다양한 배경의 국민을 대변할 수 있는지 우려가 된다. 늘 1등으로만 살아온 기득권만이 모여있는 국회는 소외된 청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하기 힘들 테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2021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40대 미만 청년의원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로 조사됐다고 한다. 40세 미만 청년 유권자가 3분의 1에 달하는 현재, 의원은 오직 13명, 비율로 따지면 4.3%에 불과하다는데, 이는 청년이 청년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나가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7] 위기를 목도한 주체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조가 우리 사회가 마주한 위기의 본질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청년이 직접 발화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가 한 세대를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하며 동질성을 강조하는 순간 수많은 개별의 존재들은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개별의 존재를 잃어버린 청년은 원래의 색을 잃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존재들이 내는 목소리들을 온전히 들어주어야만 한다. 누구의 목소리로도 대변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있다.  



청년팔이 사회를 떠나서.


청년의 빛깔과 성격은 규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청년을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하는, 그러나 특정하게 누가 책임질지는 정해지지 않은 비주체적인 존재로 묘사하거나, 푸른빛의 청년다움을 갖춘 주체로만 바라보면 곤란하다. 청년은 보살펴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이용되는 존재가 아니다. 청년 세대라는 단어 속에 청년을 규정하고, 그 단어를 파는(sell) 사회보다는 청년을 위한, 그리고 청년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청년은 하나의 층이 아니다. 청년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분류 없는 호명은 과대 대표된 청년을 이용하고자 하는 스토리텔링 식 청년팔이에 불과하다. 청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환경이 필요하다. 그들이 스스로를 대변할 수 있는, 청년이라는 단어 대신 청년 안에 있는 각계각층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새로이 나타나길 바란다. 그러한 단어들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다양한 청년이 원하는 우리 사회와 환경의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청년이지만 청년은 내가 될 수 없듯, ‘청년’이란 단어는 수 많은 ‘청년들’의 면면들을 덮고있다. 청년이라는 단어 아래엔 우리들의 진짜 이름이 있다.




추신


세상은 늘 이상적인 청년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그의 노력과 열정을 예찬한다. 이상적인 청년을 본 누군가가 노력을 게을리할 때, 또는 이상적인 모델로 가는 과정을 걷지 않을 때, 그는 불안해한다. 아니, 세상이 그를 불안해한다. 하지만 모두가 노력만으로 그 이상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멋진 삶은 태어나자마자 그의 품으로 뚝 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피나는 발버둥을 치고 나서야 주어졌을 수도 있다.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기 위한 방법과 기준은 각자 다르다. 만족스러운 삶은커녕 당장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급급한 청년도 많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세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청년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고 다양한 청년들이 살아가는 이곳에서 어떻게 모두가 그 모든 조건을 갖출 수 있을까. 이번 생이 처음인 우리 모두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정해 놓은 틀에 본인을 억지로 넣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틀에 딱 맞지 않는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이 더 노력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의 모습은 나름대로 우리에게 주어졌던 삶의 매 순간에 치열하게 적응하며 만들어낸 모습이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색깔과 모양의 가치를 본인만은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하도록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나 스스로뿐이니까. 우리는 지금 이 모습대로 괜찮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 그리고 그 청년들 중 하나인 나 자신을 위해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본다.   




[1] MZ 세대,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2] [3040 칼럼] 한국 사회 청년과 그들의 미래, 인천일보, 2021.12.13

[3] [김성희 기자의 ‘Trend Maker’(2) | 한경민 청년다방 대표] 주식 반토막, 10억 잃은 경단녀의 사업 성공기, 중앙일보, 2017.3.22

[4] 2030청년 부채규모, 전셋값 폭등 영향에 12.8% 급증, 경향신문, 2021.09.24

[5] [청년의 삶을 바꿀 청년기본법②] 청년의, 청년을 위한, 청년에 의한, 투데이신문, 2021.12.28

[6] [팩트체크] SKY 나온 55세 남자들…21대 국회 300명 스펙 보니, 한국경제, 2020.05.29

[7] 청년 국회의원 비율 4.3%…OECD 국가 중 한국이 꼴찌, news 1,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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