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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Sep 17. 2019

<121호> 우리 안의 합법만능주의

'법대로'의 나태함에 대하여  -편집위원 이해일

 법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칙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법을 만들고, 이를 공정하게 집행하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법이 무조건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법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 바뀌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 또한 결국 사람이며, 이로 인해 언제나 해석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물론 각종 절차와 법, 이를 지키는 준법정신은 사회가 운영되고 유지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회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격화되거나 법에 저촉되려 하면 ‘성숙한 시민의식을 훼손하는 행위’로 취급하고, 그 메시지를 무시해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절차를 지켜야지”, “너무 과격해”와 같은 비난과 함께 말이다. 이런 흐름은 당연히 캠퍼스에도 스며들어 연세 안에 ‘합법만능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법을 어기면 다 나빠?

 지난 5월 교내의 한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총여학생회가 주관하는 세미나 포스터를 찢거나 버리고, 이를 인증하는 행위가 마치 유행처럼 번졌던 것이다. 이들은 구겨진 포스터를 쓰레기통에 넣은 사진이나 포스터가 찢어져 나간 흔적 사진 등을 올리며 포스터 훼손을 인증했다. 이 글들은 대부분 10개 이상의 추천을 받아 ‘HOT 게시판’에 올랐고, “1기숙사 게시판도 부탁한다”와 같은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제기하거나 우려를 표하는 댓글들에 대해서는 각종 비난과 반박이 이어졌다. 이 중 “어차피 허가 도장이 없다.”, 그리고 “게시판이 아닌 곳에 붙어있으니 상관없다.”는 반박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허가 도장은 실제로는 있었으나 어두운 색의 포스터여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학내에 게시된 여러 대자보 또한 계속해서 유실되거나 훼손됐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환영하는 대자보를 게시한 ‘연세대학교 여성주의자 재학생 네트워크’는 2주 사이에 네 번의 대자보 도난 사건을 겪으며 아래와 같은 웃지 못할 인쇄물을 붙이기도 했다. 대자보를 붙일 때 게시판이 아닌 곳에 붙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유실을 각오하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대자보 분실 사건이 잦아지고 있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자보를 훼손하는 행동은 어떤 이유에서건 옳지 못하거나 최소한 ‘찌질한’ 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목소리를 훼손하고 틀어막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알다시피 다수결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막는 폭력이 될 위험성이 다분한 도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사회가 이런 아슬아슬한 곡예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다수결 이전에 구성원들의 충분한 토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개진될 수 있어야 함은 두말할 것 없다. ‘평등한 공론장’은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필수다. 따라서 타인의 의견을 정당한 이유 없이 막거나 훼손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발언권이 없거나 약한 이들의 최후의 목소리는 종종 법과 절차에 저촉되며 터져 나오곤 한다. 공론장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입’이나 ‘점거’는 대표가 없거나 대표체제에서 배제를 경험한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강제로 들리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적극적 위반행동’으로서, 자기 삶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에 자신은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자기 삶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직접 자기 삶의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대자보가 마치 게릴라전을 하듯 붙게 되는 이유도 대자보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의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고발이나 폭로의 성격을 가지는 대자보의 경우 피해자가 피해를 알리고 구제받을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되어 있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때 나붙는다. 

 학교 당국이나 이사회같이 개인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권력을 소유한 상대를 고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 총학생회는 이사회의 밀실 총장선거를 비판하며 “재단 이사회는 밀실 총장 선출 중단하고, 전 과정에 학생 참여 보장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그런데 학교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학교의 허가 도장을 받아 게시판에 붙여야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구조와 맥락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법을 어기면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더 심하게는 ‘법을 어겼으면 해쳐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시로 성 판매로 내몰린 청소년들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들은 포주가 있는 등의 명확한 강요의 증거가 없는 경우 ‘피해 청소년’이 아닌 ‘대상 청소년’으로 분류되어 구매자와 함께 처벌받는다. 문제는 이를 이용해 성 구매자들이 빈번히 욕설이나 폭행, 협박을 자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범죄자’로 보는 사회의 시선은 해당 청소년들의 재활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취약 계층 청소년들이 성매매로 빠지기 쉬운 사회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불법’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이들이 ‘범법자’라는 사실에만 집중한 결과다. 

 청소년의 성매매로 유입은 결코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성 판매를 경험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처음 성매매를 하게 된 이유(복수 응답)로 ‘잘 곳이 없어서’가 35.0%로 가장 많았고 ‘돈을 준다는 유혹에 의해서’가 32.0%로 두 번째였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청소년 대상 성매매 혹은 유사 성매매의 절대 다수는 1:1 조건만남인데, 대부분 스마트폰 채팅 앱이나 인터넷 카페/채팅을 매개로 한다. 이 때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청소년 성 매수를 제안하는 남성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용돈’, ‘가능’, ‘조건’ 순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조사 대상이었던 청소년 중  90.3%가 ‘성매매를 좋아서 하는 또래 친구들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누군가의 존재를 ‘합법’과 ‘불법’으로 나누어 취급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지난 6월 25일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기자 브리핑에서 일부 장애인 단체를 ‘비법정단체’라고 지칭해 물의를 빚었다. 이 발언은 복지부 장관이 다섯 개의 소위 ‘법정단체’들의 의견을 브리핑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 단체는 장애인 등급제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를 ‘과도한 의견 표출’이라고 표현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법정단체’의 기준인 사단법인 허가가 복지부의 권한이라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복지부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단체에만 법정단체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된다. 복지부가 법정단체와 비법정단체를 나누고, 이 분류에 따라 각 장애인단체들의 목소리 자체에 중요도 차등을 두고 있는 셈이다 .      

 법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 무조건 나쁜가? 불법을 저질렀다면 보호하지 않아도 되며, 절차를 밟지 않은 목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는가? 법을 어겼다면 해치거나 훼손해도 되는가? 이 질문들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연세인은 많지 않으리라 믿지만, 찢어진 포스터와 대자보들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법만 안 어기면 다 괜찮아?

 지난 5월 17일 응원단은 아카라카에 가수 *코를 초청했다. 이는 즉각 비판을 받았는데, 그가 가수 정*영의 불법촬영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심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코는 모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정*영의 핸드폰을 ‘황금폰’이라고 지칭하며 정*영의 집에 놀러 가면 몇 시간 동안 그 핸드폰만 본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정*영의 상습적인 불법촬영 범죄가 드러나면서, *코가 해당 불법촬영영상들을 시청하고 정*영의 범죄를 방관한 것 아니냐는 의혹들이 제기되었다. 직접적인 증거나 신고가 없었으므로 그가 직접 수사를 받거나 구속이 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의 불법촬영물 문제에는, 불법촬영물을 ‘국산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죄의식 없이 소비하고 그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그런 걸 좀 볼 수도 있지’ 정도로 치부되는 이 ‘분위기’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불법촬영물을 방조했다는 의심이 드는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대학 축제에서 학생들의 열광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광경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불법촬영물 범죄 시스템이 작동하는 모습의 축소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응원단의 경솔함에 대한 비판이 한풀 꺾이자 “승*처럼 구속을 당한 것도 아닌데”, “연락처만 봤다지 않냐”, 그리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왜 안 지키냐”는 옹호가 시작되었다.

 이때 언급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대한 인식은 조금 의아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근본적인 이유는 고문이다. 과거 규문주의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인정받기 가장 쉬운 방법은 자백이었다. 규문주의란 법원이 스스로 소송 절차를 개시하여 심리하고 재판하는 원칙을 말한다. 재판의 진행이 법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며 과거 수사권·기소권·사법권 모두가 왕의 권한이었던 것이 그 예시다. 때문에자백을 얻어내고자 고문이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를 막기 위해 ‘유죄 확정 전까지는 수사기관이 피고인을 일반 시민처럼 대우하며 수사기관이 유죄의 증거를 찾도록 한 것’이 무죄 추정의 원칙의 배경이다. 다시 말해 무죄 추정의 원칙은 국가와 같은 권력 기관이 시민 개인을 대하는 데 있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이지 ‘모든 사회적 판단을 중단시키는 원칙’이 아니다. 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의 배경과 목적은 지워진 채 ‘무죄’와 ‘추정’, 그리고 ‘원칙’이라는 단어에 집중한 나머지 *코 초청 사건에 있어서도 “법정에서 밝혀지기 전까지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마라!”처럼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득 몇 달 전 우연히 에브리타임에서 ‘몰카 보는 게 왜 범죄냐’는 글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떠올랐다. 불법촬영물을 보는 이도 공범이라는 캠페인에 대해 반박하는 이 글은 불법촬영과 관련한 법조문을 제시하고 있었다. 법조문에 불법촬영물을 ‘보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범죄가 아닌데, 왜 공범이라고 하느냐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불법촬영물을 클릭하고 다운받는 소비 행위가 촬영과 유포에 유인을 제공하는 맥락을 무시하고 ‘불법이냐, 아니냐’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불법촬영이라는 단어를 외면하고 ‘일반인 야동’이나 ‘국산야동’, ‘몰카’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도 어쩌면 ‘내가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외면하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것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주객을 전도하여 어떤 행위가 ‘나쁜 행위인지’를 ‘처벌받았는지’로, 또 ‘얼마나 나쁜지’를 ‘얼마나 처벌받았는지’로 판단하는 실수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폭력의 경우 ‘남녀 사이의 일’, ‘사랑싸움’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제대로 수사되거나 처벌되지 못해왔던 범죄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처럼 실재하는 범죄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을 때, ‘법이 아직 부족하구나’와 같은 문제의식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죄라잖아!”로 끝나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보아왔다.

 응원단이 *코를 부른 문제도 마찬가지다. *코 섭외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자보들은 입을 모아 응원단의 결정이 불법촬영범죄 방조가 커리어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가해할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더불어, 일상적으로 불법촬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여성 구성원들이 고려되지 않은 반쪽짜리 축제라는 점,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청소년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학의 축제로서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코가 범죄자냐 아니냐?’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축제를 이끄는 응원단의, 나아가 대학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기도 했고,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우리의 안일한 시선을 꼬집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응원단은 이에 대해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았고, 무죄 추정의 원칙… 범죄자는 아니지 않느냐… 열심히 하던데… 와 같은 말들과 함께 논의는 종료되고 말았다.  



                        

법대로 해가 뭐가 문제야?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라는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리스토크라시란 Juris-(사법권)과 -cracy(통치)의 합성어로 사회를 통치하는 모든 기재가 전부 사법 영역에 빨려 들어가는 현상을 말한다. 사법통치, 사법권 강화 현상, 사법적극주의, 정치의 사법화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법치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사법이 확장되어 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사법의 영역이 비대해지거나 모든 문제의 만능 해결 열쇠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리스토크라시가 제기하는 화두다. 연세대학교 남형두 교수는 대표적인 주리스토크라시 현상으로 조*남 화투 그림 사건을 든다. 

 조*남 화투 그림 사건은 화가 조*남이 다른 화가 두 명을 고용하여 작품의 일부나 전부를 그리게 했음이 알려지면서 사기 혐의로 기소당한 사건이다. 조영남은 그림의 아이디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이며 대리 작가를 고용하는 것 또한 미술계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대리 작가 측은 터무니없는 인건비를 문제 삼았고, 일부 구매자들은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해 제대로 고지받지 못한 점을 들어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대예술과 저자성”, “미학과 저작권”과 같이 소중한 논의들이 예술계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제를 단기간의 수사나 재판 절차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 다룬 지난 5월의 연세대학교 안의 사건들이 모두 주리스토크라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법대로’의 영역에 민‧형사 재판 과정뿐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위법 여부로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면 법과 절차를 외의 다른 논의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현상은 왜 문제인가? 모든 걸 ‘법대로’ 하면 안 되는 걸까?      

 남형두 교수는 “자치를 잃은 곳에 법치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법치는 민주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원칙이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사회는 법으로 도덕을 강제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덴마크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법정’ 최저임금 제도가 없다. 하지만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 간의 교섭을 통해 20달러라는 최저임금을 결정했으며 이를 자발적으로 지키고 있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우리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0달러’라는 기준 자체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규칙으로 스스로를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 발생했을 생산적이고 치열한 논의 과정이다. 덴마크라고 해서 임금의 하한선을 정하는 것이 사용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이 왜 나오지 않았겠는가. 다만 정해진 법정 최저임금을 보고 ‘누구에게 유리한지’를 갑론을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거리로 내몰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어떤 범죄나 일탈행동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물론 해당 일탈자를 교정하고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일탈행동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응당 그 이유를 고민하고 토론하며 근본적인 예방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최근 미투 운동을 통해 사회적 주목을 받은 ‘위력으로 인한 성폭력’의 경우 또한 특정한 ‘나쁜 사람’이 문제라고 하기 어렵다. 성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 남성의 성욕에 대한 그릇된 인식,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 대상화 등 무수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때로는 유교 문화와, 때로는 군사주의와 교묘하게 얽히며 오랜 시간 뿌리 내려 온 우리 사회의 성차별은 성폭력이라는 범죄를 등한시하는 사회를 낳았다. 

 김재희 변호사(김재희 법률사무소 대표)는 “현재 우리나라는 어디까지가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체부위인지, 어느 정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인지 사회적 기준이나 법률안이 정립돼있지 않은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로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서 일어나 증거 확보가 어려운 성폭력 범죄는 특히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무혐의 처분이 잦다. 하지만 법정에서 범죄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고발한 이를 ‘꽃뱀’으로 몰거나 무고죄로 고소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이 폭력인가’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래서 걔가 가해자래?”, “걔가 피해자가 맞대?”라는 질문에 갇히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법대로 해!”는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풍부한 담론과 이를 통한 성장을 “그래서 범죄냐 아니냐?”에 매몰시키고 만다. 우리는 “경찰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치의 힘으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역할을 ‘무고한 피해 호소인’으로 국한하고 ‘나쁜 놈’을 찾아 축출하는 데 집중한다면 해당 공동체에서는 언제고 다시 같은 범죄가 재발할 수 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스스로 내부의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성폭력 범죄도 대학이나 직장에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기만 하면 법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삶에서 사건이 주는 고통은 확연하게 옅어질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해당 공동체는 사과문 작성이나 교육 수강 명령과 같이 법정보다 다양하고 효과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전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다. 서로 치열히 논쟁하고,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의 뼈를 깎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어야 할 테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범죄냐 아니냐’를 넘어 우리가 속한 사회가 한 층 성장하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법대로’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법은 절대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법은 겉으로는 보편성의 외피를 걸치고 있지만 뜯어보면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크랙 코카인’의 소지와 복용을 처벌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크랙 코카인 30g에 대한 형량이 코카인 3,000g과 같았기 때문에 거의 동일한 효과와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량이 100배나 차이 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코카인은 주로 백인 사회에서, 저렴한 크랙 코카인은 흑인과 라틴 아메리칸 사회에서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2010년에 ‘Fair Sentencing Act’가 제정되며 형량 비율이 18 대 1로 나아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100 대 1의 형량 차이를 유지했다.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뿐 아니라 집행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법인류학자인 콘리(Conley)와 오바(O'barr)는 연구를 통해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힘 있는 말’과 ‘힘없는 말’, 그리고 ‘규칙 지향적’ 언어와 ‘관계 지향적’ 언어로 유형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힘있는 말: 직설적이고 간결

힘 없는 말: 머뭇거림, 공손한 표현, 의문형 등을 자주 사용


규칙지향적: 사회가 법적 규칙에 의한 개인 간의 계약 관계로 구서오디어 있다고 봄. 법정에서 법적 쟁점에 맞추어 생각하고 진술하기 유리.

관계지향적: 사회가 관계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봄. 사람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이로 인해 “저 사람이 저를 괴롭혔어요!”와 같이 다소 법정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발화를 하기도 함.


 연구에 따르면 고학력자, 화이트칼라 직종 종사자, 남성 등 사회적 권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힘 있는 말과 규칙 지향적 언어를 사용하는 반면 저학력자, 빈곤층, (특히 저학력) 여성, 노동계층으로 갈수록 힘없는 말과 관계 지향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콘리와 오바가 중요하게 지적한 것은 이런 언어 사용의 차이가 사실 판단자인 배심원들의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차이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는 방식이 달라지며, 그에 따라 법정에서 유리해지거나 불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법이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이야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법의 과정이 언제나 객관적이며 논리적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에브리타임 여론이 총여학생회가 총여학생회실을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는 초법적인 접근을 한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총투표 결과가 이러하니 절차에 따라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야 한다”라며 절차만을 따져 이야기하던 여론이 말이다. 하지만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는 그 이름이 ‘폐지’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회칙 삭제’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지 않고 단체의 ‘해산’일 경우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이 되어 투표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당시 중앙운영위원회 회의 회의록에도 여러 번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총여학생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공간을 나가야 한다는 이들은 이러한 총투표 과정은 무시한 채 ‘폐지’라는 총투표 안건의 이름과 절차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회관의 공간을 받는 근거는 상당히 다양하다. 대부분의 동아리는 총동아리연합회 소속이라는 근거로, 또 예비군 연합회의 경우는 향토예비군법을 근거로 학생회관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회관의 공간을 배정받는 절차에는 편의, 가치, 법과 같이 다양한 연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학생회관 공간 배정의 다양한 근거들은 무시한 채 ‘아무튼 폐지(해산)됐으니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대로 해!”는 결국에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냥 법대로, 법대로 하다 보면 법이 보호하고 있는 이들만 유리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올 해 상반기 연세대학교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고하고 고민하지 않은 채로 그저 ‘합법이냐 아니냐’에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사고와 판단마저 사치가 된 무한 경쟁 사회에서, ‘법대로’라는 편리한 사고의 프로세스의 유혹은 달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것이 항상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문제 해결 방식일까? 잠시 멈춰 스스로 생각해볼 때다.


편집위원 이해일(dlgodlf00@gmail.com)





참고문헌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101쪽.

닷페이스, “성매매에 유입된 청소년이 듣는 말 [H.I.M. #2 어떤 질문]” [동영상], 2019.12.21.

국가인권위원회, 아동 청소년 성매매 환경 및 인권실태조사, 2016.

“[마침] 청소년 성을 사는 ‘35세 한국남성’... 왜 근절되지 않나”, SBS NEWS, 2019.06.27.

“전장연‧한자협, ‘비법정단체 망언’한 5개 장애단체에 공개 답변 요구”, 비마이너, 2019.07.05.

“아카라카, 지코 섭외를 둘러싼 논란”, 연세춘추, 2019.05.27.

“[영상뉴스] ‘김경수의 법률톡톡’ 무죄추정,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경향신문, 2019.02.18.

남형두. (2016). 법과 예술 - 조영남 사건으로 본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한국정보법학회. 정보법학, 20(2), 31-68. 

“[배영대의 지성과 산책-남형두 연세대 교수 인터뷰] 천경자·이우환·조영남 사건… '문화예술의 사법화'”, 중앙일보, 2016.11.08.

“무혐의는 ‘무죄’가 아닙니다”, 여성신문, 2017.01.16.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60쪽, 61쪽.

조유진, 『헌법사용설명서』, 이학사, 2012, 84쪽.

William M. O'Barr, (1982), Linguistic Evidence: Language, Power, and Strategy in the Courtroom, Academic Press.

John M. Conley and William M. O'barr, (1990) Rules versus Relationship: The Ethnograohy of Legal Discourse, Univ.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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