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하루
위로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서적 인터파크 사이트 기준 3,462건, 서점 베스트 셀러 칸을 차지하고 있는 위로 컨셉의 감성 책들, ‘캐릭터 시리즈’, 넘치는 SNS 감성 글귀 등. 지금 우리는 위로에 중독된 것 아닐까?
[위로라는 이름의 상품]
몇 년 전부터 많이 나온 것인지 많이 찾게 된 것인지 위로라는 말을 내세워 팔리는 상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반응이 시들해질 즈음 캐릭터를 삽화로 넣은 책들이 생겼다. 그러자 다시 위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이든지 치유될 것이라는 감성 에세이, 어느 스님의 자기 계발서, 캐릭터를 앞세워 감성적인 문구들을 나열해 놓은 책, 다친 마음을 위로해주겠다는 방송과 토크쇼, 음악, 위로를 주제로 한 여행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 불행한 사회는 약을 만든다. 위로, 훈계, 비법 전수, 질책 등 다양한 약제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이 형성된다.” 불행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회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탓한 모양이다. 자기 마음을 치료해보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위로 상품 열풍은 더욱 가속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괜찮아지면 불행한 사회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듯하다. 감성이나 위로에 초점을 맞춘 책들은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서점에는 감성 에세이만 진열해두는 장소가 따로 생겨났다. SNS에서 짧은 감성 글귀를 올리던 계정들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상욱 시인과 글배우 작가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SNS에 올린 글들을 바탕으로 한 책을 출간하고 그에 관한 강연을 진행했다. 위로를 키워드로 한 토크쇼들은 순식간에 티켓이 매진되고, 힐링이나 위로를 주제로 진행하는 템플 스테이 등의 프로그램은 TV 방영과 함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위로라는 상품은 잘 팔려 갔다.
다양한 상품들과 함께 위로의 이름으로 흥행한 것은 감성 글귀들이었다. SNS가 발달하고 사람들은 긴 글보다는 간단하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짧은 글들을 선호했다. 그 후 #감성글귀가 달린 게시물들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런 글 중에는 유명인의 말을 인용하거나 영화에서 나온 대사이거나 자신이 창작한 글 등이 있다. 사진과 함께 짧게 쓰인 글은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으며 인기를 누렸고 그 글들을 올린 사람은 소위 ‘SNS 스타’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감성 글귀는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최근 SNS에서 볼 수 있는 감성 글귀는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에서도 볼 수 있다. 생명의 다리는 자살 방지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오히려 사진을 찍는 명소로 유명해졌다.
나는 최근에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위를 걸은 적이 있다. 그 다리를 걸으며 적혀 있는 글귀를 천천히 읽었다. 유명 인사들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적혀 있었다. 자신이 인생에서 겪은 일을 적은 진지한 느낌의 글도 있고 “수영 잘해요?”와 같이 장난스러운 느낌의 글도 있었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적었을까? 과연 그들은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고자 진심을 담아, 포기를 생각하고 이 다리를 찾아온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 하며 글을 썼을까? 그 글들을 채택한 사람이나 쓴 사람이나 그저 겉이 번지르르한 글, 감성적인 글들만 고르고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글들을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하니 글에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질소만 가득 들어 있는 과자 포장지 같았다.
마포대교에서의 자살률은 ‘생명의 다리’가 지어진 해인 2012년에는 줄었지만 2013년부터는 오히려 증가했다. 마포대교에서 발생한 투신시도 건수는 2013년에 총 93건으로 생명의 다리가 설치된 해인 2012년의 15건과 비교했을 때 6배 이상 는 것, 2014년에는 128건으로 12년에 비해 훨씬 많아진 것을 보면 감성 글귀가 소용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글귀를 작성한 사람들은 추신수(야구선수), 하정우(영화배우), 이효리(가수), 조수미(성악가), 허영만(만화가) 등과 같이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라 위로가 공감되지 않는다’, ‘적혀 있는 글귀들이 너무 추상적이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고 했다.
[위로 중독]
“헬조선,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한국이다. 현재 대한민국 청년들은 자신의 조국을 이렇게 부른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 더하여 집과 경력까지 포기한 오포세대, 더 나아가 희망-취미와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칠포세대, 그리고 이제는 N가지를 포기한 N포세대이다. 더 이상 포기할 항목을 셀 수 없어 N으로 표기해버린 현실 앞에 청년들은 “헬조선!”을 부르짖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201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제상황의 악화, 1인 가구와 인구 노령화로 인한 돌봄의 기회의 상실, 사회에 대한 비관론의 확산, 실제적 힐링 상품에 대한 욕구의 증가 등이 우리 사회의 힐링에 대한 필요를 증가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위로에 중독되어 있다. 뉴스와 신문이 청년 실업, 입시 문제, 전셋값 폭등과 같은 키워드로 가득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베스트 셀러 칸을 차지하고 있던 책들은 노력하면 된다고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던 자기계발서에서 노력해서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당신은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감성 에세이로 바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청춘이니까 아파도 된다”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임을 세상도 인정한 것은 아닐까?
한때는 나도 위로 중독에 빠진 적이 있다.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나에게 위로를 건네던 그 친구가 바로 생각났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라는 생각보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힐링, 공감을 키워드로 하는 감성 글귀를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놓기도 했고 서점에 가면 감성 에세이가 놓인 자리를 서성이며 어떤 책이 또 있을지 찾고 읽었다. 출처를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평생의 행복을 시작하는 거야”나 “이제 그만 애써도 괜찮아. 충분히 힘들었잖아.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잠시만 그대로 있어”와 같은 글을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기분만 좋아지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하지 않는 감성 글귀에 취해 나도 저런 말을 해줘야지 생각했다. 상황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지쳤으니 그만 노력하라는 적당한 합리화를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내 앞에 닥친 문제들을 방관했다. 이렇게 나도 위로 아닌 위로에 서서히 중독되어 갔다.
위로에 중독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이유로 자신의 현재 문제를 덮어서 잠시 보이지 않게 하기 쉬운 방법이라는 것과 나의 마음, 정신을 탓할 때 마음을 치유해 줄 것 같은 위로들을 접하면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입시 기간 나에게 일어난 많은 문제 중 하나였던 성적이나 가족과의 소통 문제 등에 대해 나는 대부분 나의 정신 상태를 탓했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나 입시 방식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말이다. 물론 어느 측면에서는 나를 탓하는 것이 맞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완전히 그 문제의 원인이 내게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위로를 받으면 뭐든,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본질적인 문제에, 그 원인에 다가가지 않으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서민 박사는 “외국 같으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을 하면서 위안을 받겠지만, 정신과에 관한 편견이 높은 한국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힐링’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겼으리라.” 라고 위로의 중독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위로에 너무 의존하면 문제가 되는 걸까? 위로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내부의 문제로만 여긴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입시나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이 상위 몇 퍼센트에 들어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노력했다’라고 보는 사회에서 자신의 성취 여부를 그 체계, 구조, 사람들의 인식, 자신의 경험,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간절함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N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헬조선이지만 마음만 괜찮으면 되는 것일까?
마음만 괜찮으면 되는 것일까?
마음만 괜찮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위로라는 이름의 폭력_ 우아한 폭력]
힘든 일을 누군가와 공유할 때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해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 준비를 하며 나는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기대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그해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재수하면서 나에 대한 불신은 커졌고 삶의 의미를 잃었었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나의 슬픔과 내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고 위로를 들었다. “네가 힘든 것 다 이해해. 그래도 같이 살아가자.”라고 말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점차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있었고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로가 많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상처가 된 위로도 있다. 나의 지인들을 만나 각자 자신이 요즘 힘든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때였다. 그날 나는 맡은 일들에 관한 부담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나의 지인은 나에게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너보다 힘든 사람 더 많아.”라는 말을 했다. 그 지인은 나에게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주며 도움을 주었던 선생님이었다. 나는 더 아파졌다. 그 이후 위로에 나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위로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위로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는 말은 아주 많다. “다 지나갈 거야”, “나는 이런 일로 힘들다고 하는 사람 이해가 안 간다.”, “잊고 살아야지”,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이런 말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싶어서 시작했던 대화에서 상처를 더 받게 된 일들이 있다.
대화를 나눌 때나 책을 읽을 때 위로의 의도를 가진 말들이 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위계질서에서 나온 연민을 바탕으로 위로를 했기 때문이다.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떤 감성 에세이를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그 책은 베스트 셀러 순위에도 있었고 드라마에도 나와 인기를 누렸던 책이었다. 그 책의 앞부분을 읽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기분이 나빠졌다. 글쓴이가 자신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오만하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직접 나와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 나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너는 이런 감정이지? 나는 알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너희들도 나의 글들로 위로받고 나처럼 다른 이들을 위로해 줄 만큼 위대해질 것이야.’라고 말이다. 위로 받기는커녕 감정만 상했고, 금방 책을 덮은 후 그 작가의 책을 다시는 읽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모두 힘들다. 나 역시 힘들었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고 노력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당신들은 나의 인생을 참고하라. 내가 응원(힐링)해 주겠다." 강신주 박사는 과거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위와 같이 시청자에게 특유의 위압적이며 호통치는 말투로 훈수를 두었다. 이 발언도 자신은 인생 선배로 많은 것을 경험하며 다양한 지식을 얻었고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나은 길로 인도해주겠다는 우월감으로 한 위로로 볼 수 있다. 또한, 위계질서가 발생한 상태에서 위로를 건네는 경우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위로를 받는 사람의 고통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고 남과 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기준대로 평가, 비교하여 위로한다. 이런 발언들이 다른 이에게 힐링의 효과를 줄 수 있을까?
가끔은 정의 그대로를 위한 목적보다는 위로를 건네는 자신을 위해 하는 위로도 있다. 자신이 멋지다는 느낌, 우월하다는 느낌, 타인을 위한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말이다. 어쩌면 내가 위로 중독에 빠지고 위로에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주려 감성 글귀들을 찾아본 것도 이러한 종류의 위로로 볼 수 있다. 이때의 위로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가 있다.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 하고 싶어서 하는 위로가 아닌 분위기상, 느낌상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위로도 이런 위로에 속한다. 비교, 평가, 위계질서, 이기심이 위로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고 이러한 위로들이 상처를 만들어낸다.
나에게 그 당시 힘들었던 일들이 모두 지나고 나서는 잘못된 위로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힘들었던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더 힘들어졌다. 안 듣는 것이 더 나았을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위로가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떤 위로]
친구와 가족, 선생님과 같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듣는 위로는 정말 치유가 되기도 한다. 진실한 위로일 경우 말이다. 그들이 나를 생각해준 마음, 말할 때까지 고민해준 시간, 그리고 분위기 덕분일까? 따뜻한 분위기에서 서로를 위해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내 곁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힘을 얻으며 말이다.
그러나 사회가 나에게 위로를 건넬 때는 그만큼의 효과가 없다.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위로의 내용을 담은 책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다양한 표현을 가진 위로의 말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중 하나는 걸리겠지”의 생각을 쓴 듯하다. 가족이나 친구와 달리 작가는 독자 개개인에게 집중하여 그들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없다. 특히 최근에 나온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와 ‘나의 곁에 있어 달라는’ 갈기 없는 사자의 책 같은 경우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독자 한 명이 처한 상황의 개별성,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깊이 고민하고 건네는 위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흔히들 하는 어디에나 맞을 이야기를 늘어놓아 하나 마나 한 그럴싸한 따뜻한 문장들로 ‘해결’하려 한다. ‘당신은 문제가 있고, 그 문제는 얼른 해결해야 하니 이런 이쁜 문장을 주겠다, 얼른 감정을 처리해버려라’ 하는 것 같다. 감성을 자극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위로에 마취되어 그저 만족하고 끝나면 안 된다. 위로로 만족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위로 열풍이 은폐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가야 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단적으로 청년 세대에게는 포기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고작 위로의 말로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어쩌면 말이란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의 무게가 무겁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말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을 비추어서 말했듯이 위로라는 것이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위로를 건넬 때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억지로 덮고 나아가기를 바라지 말고 그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잘 살아가기를 바라며 표현의 중요성을 알고 신중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직접 힘든 일이 지나갈 것이라고 강요하기보다 그 사람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아픔에 공감해주고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거나 기다려주는 것, 살아갈 힘을 주는 것과 함께 실질적 도움이 필요하다.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사람마다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위로의 말만 할 때라면 그 위로의 말이 실질적 도움을 가리는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위로에서도 개인적 위로에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진정성이 필요하다. N 가지나 포기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만 괜찮으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좋은 말, 멋있는 말, 감성적인 말로 던져주는 위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왜 힘든지를 그 원인을 함께 파악하고 함께 해결하는 방향의 진실한 위로가 필요하다. 마음을 넘어 위로가 필요했던 상황을 함께 해결하는 사회적 위로가 되기를, 마음도 상황도 괜찮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위로는 진통제이다, 수술 전에 처방된 진통제. 이 진통제에서 어느 시기가 되면 깨어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읽을 때는 밑줄을 박박 그어도 정작 책을 덮으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힐링은 그래서 덧없고, 힐링과 관련된 자기계발서가 베스트 셀러 상위권을 독식하는 우리나라가 덧없다. 힐링이 기승을 부릴수록 우리 사회가 더 병들어가는 것은 힐링이 제대로 된 치유책이 아니라는 방증일 터, 어서 빨리 힐링의 시대가 지나가고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으면 좋겠다.”
하루(bestwriterjung@gmail.com)
<참고 자료>
논문
정연득. (2016). 피로사회에서의 마음돌봄. 장신논단, 48(4), 253-279.
서민. (2014). 힐링이여, 가라!. 시민과세계, (24), 246-257.
그 외
“ '철학자' 강신주, 그가 불편한 이유”, 오마이뉴스, 2014.02.06.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캠페인 2년…"자살율 늘었다 왜"”, 뉴시스, 2016.12.28.
“[청년칼럼] 살기 힘들다고 한국을 뜰 것인가?”, 뉴데일리, 2019.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