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비탈 엮음, 편집위원 전원 참여
많은 영화가 스크린을 휩쓸고 있는 2019년이다. 그중에서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연세대학교의 유례없는 관심을 받았다. 봉준호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다녔다는 이유로 신촌 일대와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곳곳에는 일제히 그를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걸렸다.
“당신의 자취에 연세가 있음이 자랑스럽습니다.”
“가장 연세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자랑스러운 연세인! 봉준호 동문”
“칸을 누빈 자랑스러운 연세 독수리”
“봉봉봉자로 시작하는 말은~♬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나 연대 나온 남자야~”
이 영화는 정말 다양한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이 현학적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요리 콘텐츠를 만드는 유튜버들은 영화에 나온 “채끝 짜파구리” 레시피를 만들어서 올렸다. 눈만 가려진 영화 포스터나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등의 대사가 사방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다.
그러나 봉준호,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한 배우의 인터뷰가 재조명되면서 봉준호 감독을 비판하고, 그에게 실망하는 이들도 생겼다. 이처럼 영화 외적인 논란들도 많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갑론을박도 상당했다. 지하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과 매우 왜곡했다는 평이 공존하고, 계급 문제를 잘 그려냈다는 평과 적나라한 가난 혐오가 드러났다는 평이 공존했다. 영화 안팎의 이런 논란들은 영화가 언제나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기에 한 편의 영화도 사실 여러 개의 영화임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와도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위원들의 다양한 시선을 담아내기에 <기생충>은 아주 적절한 영화다. 이제 《연세》의 편집위원들과 함께 기생충들을 만나볼 시간이다.
기택(송강호)네는 반지하에 사는 전원 백수 가족이다. 장남 기우(최우식)는 명문대생 친구 민혁(박서준)에게 세계적인 IT 기업 CEO인 박 사장(이선균)의 딸 다혜(현승민)의 과외선생 자리를 넘겨받고, 일련의 사기 행각을 통해 기우의 동생 기정(박소담), 아버지 기택, 어머니 충숙(장혜진)까지 박 사장 집에 취직하게 된다.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 기택 가족이 자기 집 행세를 하는 사이 기택 가족은 저택의 숨겨진 깊은 계단 아래와 그곳의 거주자 근세(박명훈)를 발견하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이때 박 사장 가족은 폭우로 캠핑을 취소하고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기택네 가족이 상황을 급하게 수습하는 사이, 기택네 반지하 집은 폭우에 침수된다.
다음날 기우는 수석을 들고 저택의 지하실로 내려가는데, 지하에 갇혀 있던 근세가 기우의 머리를 수석으로 내리친다. 이어진 칼부림 이후 그는 사망하고, 기택은 박 사장을 찌르고 사라진다. 한 달 후, 기우와 충숙은 사기행각과 살해 혐의에 대해 집행유예를 받고, 기정은 사망했으며, 기택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우는 옛 박 사장네 집에서 기택이 기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견한다. 기택은 그 집 지하에 숨어 살고 있었다. 기우는 반지하 집에 머물며 돈을 아주 많이 벌어 그 집을 매입하고 기택을 구출할 꿈을 꾼다.
“봉준호 '기생충', 황금종려상...韓영화 100년史 쾌거(종합)”
“"심사위원 만장일치"...봉준호, 황금종려상 품다”
“기생충, 한국영화 탄생 100년 만에 황금종려상 안기다”
난리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과 매체에서는 매일같이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에 대해 이야기했다. 칸 진출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는 와중에 칸에서 황금 종려상 수상까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내 주변에서도 기대에 차서 그 영화를 볼 거라는 사람이 많았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서 “영화를 보면 기분이 찝찝해”, “뭔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영화관을 나오더라”, “찜찜한 기분이 들게 하니 아침에 보면 안 될 것 같아” 등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런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는 이야기까지도 들었다. 내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든 것인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넷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지인들은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영화를 본 나도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빠’, ‘찜찜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중충해서 그런가? 마냥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그런가? 나름대로 스릴러여서 그런가? 그냥 영화의 분위기가 내 스타일이 아니었나 보다 싶었다. 그래도 ‘아! 영화 잘 봤다.’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이렇게 끝났다. 아니, 이렇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영화를 가지고 더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기생충>은 상위 계층과 하위계층의 삶의 모습을 대비하여 드러낸다. 맥주를 먹는 사람들과 양주를 먹는 사람들, 폭우로 인해 구호 물품으로 들어온 옷을 주워입는 사람들과 드레스룸에 들어가 수십 벌의 옷 중 골라 입는 사람들, 창문이 바깥세상의 바닥과 붙어있는 집에 사는 사람들과 창문이 하나의 벽만큼 설치된 집에 사는 사람들. 이처럼 집과 삶의 모습 등의 차이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며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세상에, 그곳에선 그런 일이 있었구나, 뉴스를 보듯이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싶다.” <기생충>을 본 후 읽은 책에서 나온 말이다. 맥락은 달랐지만, 이 문장을 읽으니 기생충을 본 사람들, 그리고 내가 생각났다. 이 문장처럼 상관이 없다는 듯 살고 싶을 것이다. 귀찮고 쓸모없는 아우성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기우네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자신을 봤지만, 노력해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까지 변화하지 않았기에, 기우네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이야기라 생각이 들어 소리를 내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고 세상이다. 나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아! 영화 잘 봤다”로 끝나면 안 되지 않을까?
흔히 좋은 냄새는 따로 향기라고 칭한다. 우리가 ‘냄새가 난다’고 표현할 때 그 냄새는 보통 좋지 않은 냄새다. 영화 <기생충>은 우리에게 ‘냄새’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선을 넘은, “행주 삶는 냄새” 인지, “가끔 지하철 탈 때 맡는 냄새”인지 모를. “무말랭이 쉰내” 같기도 한 그 냄새 말이다.
냄새는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냄새가 나면 피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말은 ‘냄새나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다. 잠깐, 여기서 생각해보자. 냄새는 누구의 것인가?
가난은 냄새가 난다. 푹푹 찌는 여름에 에어컨은커녕 변변찮은 선풍기도 틀지 못하고 버텨야 하는 이들에겐 냄새가 난다. 장마철에 옷을 뽀송뽀송하게 해주는 건조기 없이 빨래를 널어야 하는 이들의 옷에선 냄새가 난다. 집이 너무 지하에 있는 탓에, 하수도가 역류하고 곰팡이가 피는 집에서는 냄새가 난다.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며칠이고 제대로 씻지 못한 이들에게서는 냄새가 난다. <기생충>에서 기우 가족이 아무리 겉모습을 감쪽같이 속여도 ‘반지하 냄새’는 속일 수 없던 것처럼 말이다. 가난은, 냄새를 통제할 수 없게 만든다. 냄새는 곧 계급의 반영이다.
하지만 정말 냄새가 나야만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맡을 수 없는 가상의 냄새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피부색을 이유로 냄새난다고 ‘우기는’ 경우를 겪어봤다며 “얼굴 색깔이 냄새”라고 말한다.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가 버스에서 당한 “너 어디서 왔어. 이 냄새 나는 새끼야”라는 인종차별이 벌금 100만 원짜리 ‘모욕죄’로 인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성에게는 ‘자궁 냄새’와 ‘김치 냄새’가 나고, 동성애자는 ‘더럽고 게이/레즈 냄새가 나며’, 지방 고위 공무원이 장애인에게 ‘냄새나서 싫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한국이다.
소수자는 냄새가 난다고 낙인찍힌다. 사회가 혐오하고 배제하는 ‘악취’는 언제나 소수자의 것이다. 수많은 혐오 표현들은 소수자를 특정한 냄새와 연관 짓는다. 설령 냄새가 나지 않더라도, 나는 그냥 냄새나는 사람인 것이다.
냄새는 특히나 개인의 문제라고 축소되기 일쑤다. 냄새가 개인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냄새는 개인의 노력 여하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냄새는 물론, ‘가짜’ 냄새는 더더욱. 냄새를 소수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저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냄새와 지독히도 연관된 사회의 차별과 병폐를, 네 탓이라며 외면해서는 안 된다.
위 리뷰는 네이버 영화 <기생충> 섹션에서 세 번째로 많은 공감을 받은 리뷰다. 이처럼 ‘냄새’는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을 다층화한다. 누구는 박사장의 입장에서 “그 이상한 냄새 뭔지 알 것 같다”고 말하고, 누구는 기택의 입장에서 “지겹도록 맡았던 반지하 냄새”를 떠올렸을 것이다. 혹자는 그 누구에도 이입하지 못하고, “봉준호가 반지하에서 안 살아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비판한다. 누구에게는 이상한 냄새지만, 누구에게는 삶의 냄새다. 누구에게는 그조차 부러운 냄새다. 같은 냄새를 맡아도 이입하는 입장이 다르다. 영화 <기생충>이 불편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나의 상황에 따라서, 내가 이입하는 인물이 달라진다는 것. 영화를 보며 나의 계급적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영화는 누군가 사는 현실을 스크린에 옮겼고, 한국 사회의 계급은 <기생충>을 통해 적나라하게 전시되었다. 영화는, 나의 가난을 팔고, 너의 서러움을 팔았다. 수많은 이들은 영화를 보며 과거의 혹은 현재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 형편이 박사장네만큼은 아니지만, 기우네보다는 나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어떤 냄새가 나는가. 진정으로 그것은 누구의 냄새인가. 당신의 ‘다행스러움’이 혹시 그렇게라도 내 삶을 위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가.
모두 지하의 냄새를 혐오한다. 반지하에서 벗어나려는 이는 자신이 지하의 삶과 같은 냄새로 묶이는 순간, 그러니까,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 코 막은 이를 죽여 버릴 정도로 그 냄새를 혐오하게 된다. 잠시 상류층을 연기하다가 반지하로 돌아오고, 빈 저택에서 술판을 벌이다가 우습게 도망가는 등 영화 속 인물들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폭우는 경치고, 누군가에게 폭우는 피난이다.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양쪽 모두 불행해졌지만, 누군가는 고상하게 불행하고, 누군가는 더럽게 불행하다. 푸른 마당과 테라스가 있는 저택의 삶과 취객의 오줌이 쏟아지는 반지하의 삶에 불행의 무게는 같을 수 없다. 그게 불평등이다.
지하에는 어떤 희망도 없고, 반지하에는 헛된 희망뿐이다. 반지하가 지하의 삶을, 지하가 반지하의 삶을, 그리고 이제 반지하가 지상의 삶을 무너뜨리는 난장판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건 집이다. 집은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고, 욕망의 대상이며, 모든 참사가 담긴 공간이다. 충분하지만 누구도 나누지 않는 공간이다. 사모님과 가정부가 앉은 식탁에는 여덟 개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그 둘을 뺀 등장인물은 여덟이다.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잘 살고자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강자가 되고자 한다. 임대료를 규제하기보다 건물주가 되길 원하잖아. 그게 상승의 욕망이야.
재물운과 합격운을 가져온다던 수석으로 머리를 맞고 확인사살까지 당한 기우는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런 무거운 돌로 두 번이나 머리를 맞아 피를 가득 흘렸는데 대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확인사살과 피 웅덩이는 병상에서 눈을 뜬 게 기우가 아니라 수석임을 분명히 알리기 위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제 수석의 화신, 상승의 욕망 그 자체다. 그를 집어삼킨 수석은 맑은 강에서 안식을 취한다. 돌은 물을 만났을 때 가장 온전히, 아름답게 빛난다. 기우는 더욱 확고하게 성공과 저택이라는 미몽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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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난장판 속에서 지상과 지하는 한 번도 대화하지 못했다. 기생하는 지하의 귀신이 냉장고의 음식을 꺼내 먹으러 올라와 지상의 아이와 마주했을 때 지상의 아이는 발작을 일으켰다. 이는 지상의 트라우마이자 저택의 괴담이 되었다. 지하의 언어는 그저 고장 난 전등일 뿐이다. 어쩌면 지하의 언어를 이해할지도 모르는 지상의 인간도 그게 언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고장 난 전등 따위에 진지하게 관심 가지는 이는 지상에 없다. 맞다. 탈출구는 없다.
아무런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짜파구리에 채끝이 들어가는 정도의 변화 말고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탈출구는 없다. 그래, 그게 전부다. 인간은 계속 자기 몸만 챙기며 집을 옮기고 집을 욕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탈출구는 없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머리 칸’의 점령이 아닌 열차의 탈출을 이야기했다. 꾹 잠긴 문을 폭탄으로 터뜨리고 열차라는 체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비록 바깥의 세상이 고작 실낱같은 새싹 하나를 희망 삼아 의존해야 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설국열차>에서는 수평적 이미지의 열차와 혁명의 열망이라도 보여주었지만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끊임없이 절망적인 수직성을 보여준다. 그는 마치 카를 마르크스처럼, 계급이 너무 깊이 박혀 있는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계급이 철폐된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말이 곧 계급에 대한 고민을 놓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영화는 ‘계단을 올라야만 하는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민하지 않는 이들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나는 건 수석, 그 상승의 욕망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환하고 굳건히 살아있는 건 저택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하실의 주인만 바뀐다. 탈출구는 없다.
어느 학자는 차별받는 이들에 관한 연구에서 지하실의 비유를 사용한다. 한 사람 정도만 올라올 수 있는 구멍을 위에서 뚫어주었기에, 지하실에서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은 올라가지만 결국 지하실에는 누군가가 남겨진다. 하지만 <기생충>을, 한국을 보라.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사람조차 없다. 상승은 환상이다. 탈출구는 없다. 이 영화는 상승을 요구하는 구조 자체를 부수지 않는다면 어떠한 노력도 의미가 없다는 비관으로 혁명을 촉구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탈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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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군데군데 젖어 있고, 낮이라 꺼진 가로등 아래에는 물건이나 채소를 늘어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 색감이 흐리고 낡은 헐렁한 셔츠나 과하게 화려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티셔츠를 입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과 길거리 음식점에서 나오는 돼지고기 굽는 냄새, 길바닥 하수구의 냄새. 화장실 옆자리의 할아버지에게서는 소주 냄새가 났다. 백수는 많았지만 여유로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몇 거리에는 얇은 비닐 한 겹을 천장 삼은 시장이 있었고, 폭우가 쏟아지면 허겁지겁 자리를 정리해야 하는 점포가 가득했다. 구름이 많았다. 7월 23일 화요일, 저녁 7시 41분, 서울시 은평구 어느 골목, 영화관이 있는 오래된 백화점 바깥의 풍경이었다.
영화 <기생충>을 관람한 이후 내가 가장 의아했던 점은 ‘이 영화 이후 어떻게 사회가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며 내 앞에 있던 커플 중 남자는 “야 진짜 이래서 사람 믿으면 안 돼”라는 감상평을 내렸다.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박사장과 연교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감상평이 참 얕다고 코웃음을 치면서도, 어딘가 부글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자취방의 퀴퀴한 냄새와 에어컨 전기세를 저울질하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날 과외를 하겠다고 대치동까지 갔다 지쳐 돌아온 참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느 영화관에서 칼부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지하 인생에 한 자락의 공감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나의 앞에도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학비와 약간의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자녀로서 나의 안락한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내 ‘흠,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가 위태로워지니까 우린 좀 더불어 살아야지’ 같은 다소 엘리트주의에 찌든 생각으로 넘어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보고 조금 멈칫했다. 하지만 곧 이어폰을 꽂고 쓸쓸한 노래나 들으며 잠깐 나를 휩쌌던 강력한 분노를 급히 지워버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었다고 했을 때 나는 다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 중에 분노와 절망을 느낀 이들이 최소한 반은 넘을 텐데, 어째서 이 사회가 이렇게 조용할 수 있지? 폭동이든 혁명이든, 어떤 난리라도 나지 않고?
나는 과외생과 국어 수업을 하다가 문득, 나름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날의 지문은 김승옥의 단편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었다. 교과서가 해석하는 이 작품의 주제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무력감’이었고 모든 기출문제는 오로지 이 한 주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로 옳지 않은 것은?’이라는 문제의 정답은 ‘④ 긴장감’이다. 파편화된 현대인들의 무력함을 보여줘야 하므로 긴장감 같은 정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쉬운 문제다. 하지만 작품 초반에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안’이 화자인 ‘나’에게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며 “이를테면…… 데모도…….”라고 운을 뗐다가 삼켜버리는 대목에서 내가 느낀 긴장감은 묵살해야 했다. 1964년은 박정희 정권 초기, 선술집에서 처음 만난 또래의 청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슬며시 상대를 떠봐야만 했으리라는 ‘내 생각’은, 문제를 푸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교과서와 참고서는 소설 밖의 시대와 사회를 보려는 우리의 고개를 최선을 다해 책으로 도로 처박으며 오로지 ‘작품 내부’만을 분석할 것을 요구했다.
<기생충>이 이슈화되면서 유튜브에 넘쳐나던 ‘영화 기생충 해석’, ‘기생충 숨은 의미’와 같은 콘텐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난무하는 ‘채끝 짜파구리 레시피’ 동영상도.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말했듯 꽤나 ‘명징’한 영화였던 <기생충>은 관중의 감정을 복잡하게 만들지언정 상징이나 의미가 그리 꽁꽁 숨겨진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메시지를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던짐으로써 영화를 보는 이에게 모종의 감정이나 욕구를 자극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던진 불편함을 애써 무시하며 영화 안의 상징과 해석을 뒤지며 작품의 ‘내부’만을 샅샅이 훑고 있다.
내가 ‘이 모든 현상이 국어교육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우리가 불편함을 마주하는 데에 너무나 서툴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작품이 던지는 불편한 사회적 메시지를 외면하고 그저 상징과 해석을 찾아 침전하는 방법을 너무 오래 체득해왔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왔던 오랜 습관이건,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건 말이다. 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상을 타자 온 백양로와 신촌 거리에 봉준호 감독을 칭찬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렇게까지 하고 정작 그의 작품을 스크린 안에 가둬버리는 것은 웃기다. 이 영화를 죽은 작품으로 만들지 살아있는 작품으로 만들지는 우리의 몫이다. 세상에는 분명 외면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냄새나고 불쾌한 구석이 있다. 어쩌면 ‘구석’ 정도가 아니라 지하 전체에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스크린 밖의 불편함을 마주해야 한다.
<기생충>을 직접 보기 전에 화제가 된 상황부터, 영화 속의 디테일, 그리고 디테일을 넘어 이 영화가 자리하는 지금-여기 대한민국이라는 장소의 맥락에 이르기까지. 편집위원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크게 보면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영화를 그저 잘 만든 영화, 황금종려상을 받은 천만 영화, 연세대를 빛낸 영화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의 “핫 샷”이 떠오른다. <기생충>의 ‘계단’이 <블랙 미러>에서는 오디션이었고, 주인공은 그 오디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기 위해 무대에 선다. 그러나 구조의 부역자들은 주인공이 암담한 현실을 고발하는 처절한 호소마저 “가장 진심 어린 무대(the most heartfelt thing on the stage)”로, ‘멋진 퍼포먼스’로 포섭해 버린다. 사람들은 이 호소에 공감하기도 하고,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저 부역자의 말에 넘어가서 주인공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데에 만족한다. <기생충>을 단지 그 정도로, 자랑스러운 오락 정도로 여긴다면 우리도 현실을 그저 둔감하게 웃어넘기게 될지 모른다.
“아! 영화 잘 봤다”로 끝나도 괜찮을까. 그저 누군가의 냄새를 당연히 더럽게 여기는 것은 괜찮을까. 자신이 어떤 인물에게 왜 이입했는지 반추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이 영화가 자리한 맥락을 읽지 않고 그저 퍼즐 맞추기 놀이로 소비해도 괜찮을까. 봉준호 감독도 <기생충>이 계급 문제를 다루는 영화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다. 영화 속에서 부자는 악마가 아니었다. 반지하와 지하의 사람들은 사기를 치고 음식을 훔쳤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이 모든 사건에 대해 ‘빈자’들을 탓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반지하의 모자가 집행유예를 받은 것은 비록 사기행각 자체가 유죄일지라도 그들 개인의 잘못은 아니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부자가 곧 악마가 아니듯, 지하의 귀신도, 반지하의 사기범도 곧 악마는 아니다. 집행유예는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그들을 벌하지 말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보라는 의미였을 테다. 이 영화는 ‘빈자’ 개인들이 아닌, ‘계단’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영화가 나왔는데도 왜, 사람들은 채끝 짜파구리와 수석에만 열을 올리는 것일까. 우리에게 <기생충>은 머리로 찧어 대는 모스 부호였나, 아니면 그저 신기하게 고장 난 전등이었나. 우리는 그 ‘기생충’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아니면 131분짜리 오락을 즐기고 나온 것일까.
비탈 (beetlope@gmail.com)
- 위키 백과의 <기생충> 줄거리
- “봉준호 '기생충', 황금종려상...韓영화 100년史 쾌거(종합)”, YTN, 2019.05.26
- “"심사위원 만장일치"...봉준호, 황금종려상 품다”, YTN. 2019.05.26
- 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141쪽
- “당신의 눈이 냄새 맡는다”, 한겨레, 2013.08.13
- “인도인 교수 인종차별 사건, 그 후 8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7.03.20
- “여성이라 겪은 차별 남성이라 낯뜨거운 순간들”, 여성신문, 2017.12.02
- “'김치녀·호모'…"성소수자 95%·여성 84% 온라인혐오 피해"”, 연합뉴스, 2017.02.19
- “여성승객 단톡방 성희롱 논란…’동성애-페미니즘 비하까지’”, 탑스타뉴스, 2019.07.04
- “"장애인, 냄새나 싫어"…비하발언 군청 복지팀장 징계”, 뉴스원, 2018.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