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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화

<123호> 어느 오타쿠의 고백

10년차 오타쿠도 자아성찰이란 걸 하는 모양입니다 -수습편집위원 차지

by 연세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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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타쿠다. 1년에 보는 만화가 수십 가지가 되며, 카톡 배경 음악은 일본 노래이고 핸드폰에는 총천연색의 머리칼을 한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하는 리듬 게임이 깔려 있다.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 노벨 등 서브 컬처 전반에 얕게든 깊게든 빠져 본 경험이 있어 누군가 그들의 제목을 언급하면 흠칫하며 은근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정도이니 나 정도면 누가 봐도 오타쿠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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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이런 게임을 한다.

[사진 설명] 모바일 리듬 게임 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페스티벌의 로딩 이미지.

(사진설명 시작. 푸른 잔디밭에 파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소녀 9명이 반원형으로 손을 잡고 누워 있다. 인물들은 모두 애니메이션풍의 그림으로 큰 눈과 작은 코, 각기 비슷한 얼굴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물들의 머리색은 왼쪽부터 보라색, 노란색, 베이지색, 주황색, 남색, 빨간색, 검은색, 갈색, 주황색이다. 눈색은 마찬가지로 왼쪽부터 청록색, 하늘색, 노란색, 파란색, 금색, 보라색, 빨간색, 자주색, 노란색이다. 사진의 중앙에는 일본어로 게임의 제목이 쓰여 있다.)


오타쿠만큼 그 용례가 많은 단어도 없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신체적 매력이 전무하고 일제 문화에 과몰입한 폐인들을 일컫는 멸칭으로 쓰이는 반면, 최근에는 너도 나도 OO덕이라 자칭하며 자신의 관심사를 뽐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에서 오타쿠 문화의 존재감은 커졌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키덜트 문화나 연예인의 덕밍아웃은 이미 낯설지 않다. 오타쿠의 자조 섞인 유머가 유행하거나 그 커뮤니티 내에서만 소비되던 밈이 양지로 올라오는 등 인터넷에서 오타쿠 문화가 차지하는 자리는 결코 작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 알던 오타쿠 밈이 양지에 고개를 내민 것을 볼 때면 마냥 반갑지 않다. 선구자로서의 자부심 따위가 느껴지기는커녕,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물건을 볼 때처럼 찝찝하다. 서브컬처라는 미명 아래 애써 모른 척했던 오타쿠 문화의 수많은 병폐가 대낮의 햇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 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덕질은 방구석에서 혼자 하는 취미라고 생각하기 쉽다. 공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작품만” 즐기는 경우는 드물다. 작품에 대한 애정에 겨워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보면 기존의 오타쿠 커뮤니티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기 마련이다. 소비자들의 2차 창작은 공식 콘텐츠만큼이나 오타쿠 문화의 핵심적인 축이며,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해서 즐기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나 역시 적극적으로 2차 창작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그 커뮤니티에 한 발은 디디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오타쿠 문화의 여러 속성을 주로 비판의 양식을 빌려 소개하겠지만, 이 글이 당장 오타쿠 문화를 뒤엎자는 청원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나 역시 오타쿠 문화의 오랜 구성원이며, 도덕과 효능의 잣대에 따라 문화를 개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저 오타쿠로 살아온 오랜 경력에 비추어 그 문화에 대한 단상을 글에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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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 앉아 투니버스를 보고,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춰 보던 시절부터 나는 오타쿠 꿈나무로서의 자질을 착실히 갖춰 나가고 있었다. 마법 주문부터 등장인물의 생일, 부모님 직업, 엑스트라의 이름까지 내용을 따라가는데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설정을 달달 외우고 나의 방대한 지식에 알량한 자부심을 느꼈다. 수많은 새싹 오타쿠가 그러하듯 나 역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반에 한두 명씩 꼭 있다는 ‘그림 그리는 애’가 바로 나였다. 스프링 종합장을 학교에 들고 다니며 부탁하는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주로 왕눈이 캐릭터나 포켓몬 풍의 괴수들–을 그려주며 보람을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무려 한 학기 동안 연재하던 만화가 있었을 정도니 그림과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밀한 취향을 넘어서 나의 사회적 정체성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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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이런 만화를 보고 종합장에 따라 그렸다.

[사진 설명] 애니메이션 로젠메이든 트로이멘트의 포스터 이미지.

(사진설명 시작. 사진 앞에 3명의 인물, 그 뒤로는 2명의 인물이 있다. 앞 줄 중앙에 붉은 드레스와 모자를 쓰고 높은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금발벽안의 소녀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있다. 인물 왼쪽에는 바이올린을 키고 초록색 머리를 아래로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있다. 중앙 인물의 오른쪽에는 갈색 머리에 레이스를 얹은 서양풍 두건을 쓰고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를 한 소녀의 옆 모습이 있다. 이 세 인물 뒤로는 비례에 맞지 않게 큰 사이즈로 표현된 소녀 두 명이 있다. 뒷줄 오른쪽 소녀는 옅은 보라색 머리를 반묶음으로 양쪽으로 올렸고 그보다 더 짙은 보라색 옷을 입고 있다. 오른쪽 눈에는 보라색 장미가 얹혀진 안대를 꼈고, 왼손은 위협하듯 자수정으로 만든 검을 들고 있다. 뒷줄 왼쪽에는 검은 옷과 검은 머리띠를 한 백발의 소녀가 차분하게 한 손으로 검을 들고 있다. 자주색 눈은 앞줄 인물들을 내려다 보는 듯 하다.)



마법소녀물을 너무 열심히 봤던 탓일까? 어느새 나는 오로지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2차원 인물에만 흥미를 느끼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친구들이 차츰 아이돌과 인터넷 소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나는 현실의 연예인에 흥미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만화 속 인물의 뚜렷하다 못해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오색찬란한 머리 색에 비하면 현실의 인물은 창백해 보이기만 했다.


이러한 관심사 차이가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무렵이다. 외롭진 않았다. 사람보다 캐릭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소수이지만 언제나 존재했고, 당시 중학생들 사이에는 오타쿠라고 무시하는 문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들과의 대화에 섞이기 위해 2PM 멤버들의 이름을 외울 때면 조금 서럽긴 했다. 고등학교에 가선 공부 이외의 부분에 관대한 분위기 덕에 유유히 덕질을 계속했다. 초등학생 때처럼 치켜세워주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 종합장에 그린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 나눠 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모의고사 뒷면의 커다란 여백에 만화 속 등장인물 총 104명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도 간혹 느껴지는 담임 선생님의 그윽한 웃음 외에는 별 제지가 없었다.

많은 청소년 오타쿠들이 성인이 되길 고대한다. 대개 대도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한다거나, 알바해서 번 돈으로 지출을 늘리고 싶다든가, 공부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덕질을 하고 싶다든가 등의 이유다. 나는 수험생 시절에도 자제력 없이 만화를 봐댄 탓에 입시가 끝났다고 당장 해방감을 느낄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성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짜릿한 일이었다. 내 경우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숙원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빠가 쓰시던 와콤 타블렛을 받아 와서 팬카페에 직접 그린 그림을 올렸을 때의 짜릿함이란! 비록 액정 타블렛이 아니라 손과 시선이 따로 놀았지만 이면지에만 그리던 그림을 세련되게 색칠하고 편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웠다. 내 덕생의 황금기가 펼쳐진 이유에는 서울로 통학하게 된 덕도 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오타쿠 문화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각종 행사와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팝업스토어부터 홍대 근처의 애니메이션 카페들까지 서울은 별천지였다. 이런 곳들에 들리는 건 내게 예나 지금이나 학기 중의 큰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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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만화엔 내향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북미나 지역을 막론하고 오타쿠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닮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만화를 좋아하면 절로 어둑한 정념에 물드는 것인지, 애초에 만화를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자조적 정서를 공유한다. 이 ‘자조적 정서’를 설명하기 위해선 다소 오글 거리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오타쿠는 스스로를 주류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결핍된 존재라 여긴다. 그들의 유쾌함을 동경하면서도 평생 가지지 못할 무언가로 여기며 쓸쓸해한다. ‘오타쿠 취미를 즐기면서도 공부와 인간 관계도 번듯한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되는 경우도 있으나[1], 자신의 오타쿠성을 배덕한 무언가로 여긴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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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오타쿠의 대단함을 설파하는 오타쿠도 있다. 다시는 오타쿠를 무시하지 마라.

[사진 설명] 인터넷 게시판의 베스트 댓글의 캡처본.

(사진설명 시작. 추천 수 5590, 비추천 수 1104개의 베스트 댓글의 사진이다. 댓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덕의 대단함 1. 우리는 필독도서 50권의 제목조차 외우지 못하지만 그들은 수백 개의 애니 이름을 외움. 2. 우리는 국어 다음으로 오래 배운 언어인 영어에 쩔쩔 매지만 그들은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씀. 3. 우리는 게임이나 취미생활을 할 때 만원 단위의 돈을 쓰기 힘들지만 그들의 피규어, 라노벨은 하나하나가 몇만원. 4. 그들 중 대부분은 그림을 잘 그림. 5. 그들은 흔히 안여돼, 파오후의 이미지이지만 실제로 코스프레를 하는 분들을 보면 엄청난 미남 미녀들이 많음. 6. 우리는 아무리 재미 있는 영화도 3번 이상 보러 가지 않지만 그들은 극장판이 상영하면 매주차의 특전을 모으기 위해 6~7번을 봄. 자 이래도 오덕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물론 자조라고는 하나 그것만은 아니다. 과한 듯한 자학의 아래를 들추면 긍지가 있다. 오타쿠는 마냥 치욕스러운 낙인이 아니다. 많은 오타쿠들은 자신의 오타쿠 다움을 기꺼워한다. 굳이 오타쿠임을 밝힐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내가 오타쿠요 떠드는 일을 볼 때면 낯이 뜨거울 정도다. 취향은 소득도, 국가 자격증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취향에 대한 자긍심은 부나 학식에 대한 그것만큼이나 뚜렷하다. 주류에서 몇 발짝 벗어나 있는 희귀한 문화를 즐긴다는 사실이 마냥 치욕이었다면 ‘마이너부심’이라는 말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다. 유튜브의 클래식 음악 동영상의 댓글창이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신이 무려 헨델의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을 기특해해달라는 댓글로 가득 차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오타쿠 또한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는 체 할 수 있는 얘기만 나오면 “아 일반인들은 잘 모르시던데 아시는구나!”하며 뿌듯한 내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오타쿠들의 지적 허영을 꾸짖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지독한 자조와 자긍심에서 비롯된 계급의식에 대하여 다루려 한다.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듣기만 해도 붉은 깃발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면 당신의 직관은 옳다. 계급의식은 마르크스가 만든 개념이다. 계급의 성원이 그 계급에 소속함으로써 갖는 사회의식을 바로 계급의식이라고 하는데, 오타쿠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설명하는데 제격인 개념이다. 많은 오타쿠들은 자신을 주류에서 완전히 유리된 집단으로 생각하길 좋아한다. 대비는 언제나 효과적인 도식이다. 망상과 현실, 음울함과 쾌활함, 비정상과 정상,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오타쿠와 일반인. 오타쿠라는 개념이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그 반대급부의 개념이 생겨나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음탕하고 주변적인 자신이 있다면 명랑하고 중심적인 네가 있다. 당연하게도 음침한 ‘나’는 유쾌한 ‘너’에 비해 낮은 서열을 차지한다. 그러나 오타쿠인 ‘나’에게도 나름의 긍지가 있다. 오타쿠의 열등한 위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사고방식의 특이점이다.

이러한 계급의식이 비단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나만 해도 오타쿠 친구들과 그룹을 이뤄 어울려 다니던 시절에는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감수성에 기반한 기묘한 동지 의식을 느낀 일이 있다. 우리가 오타쿠라는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정작 우리 자신들 밖에 없었건만, 우습게도 우린 오타쿠라는 깃발 아래 똘똘 뭉쳐 우정을 다졌다.

구분 짓고 명명하는 일이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고작 취미의 다름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야말로 오타쿠적 유치함을 드러낸다. 계급의식의 문제는 유치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타쿠들은 주변성을 내세워 모든 사유로부터 기권한다. ‘정상인’들이 시사적인 문제로 가타부타하는 동안 근본부터 글러 먹은 자신들은 모든 성찰로부터 면제되었으니 덕질이나 하면 그만이라고 자랑스레 떠든다. 아이돌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알리려고 24시간 음원 스트리밍을 돌릴 때 오타쿠들은 인터넷의 변방에 숨어 자신들의 불온한 대화를 온갖 은어와 축약어로 숨긴다. 아이돌 팬들이 팬덤의 이름을 걸고 아동 복지 단체에 기부를 할 때 오타쿠들은 ‘우린 원래 이런 종족’이라며 최소한의 도덕적 고려조차 허영으로 치부한다. 여론을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쓰는 아이돌 팬덤 문화가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 시선에 쿨하게 반응하는 것을 넘어 자성하는 목소리조차 자신의 즐거움에 찬 물을 끼얹는다며 면박을 주는 분위기는 확실히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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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과몰입은 오타쿠를 찌질하고 혐오스러운 군상으로 만드는 제1의 원인이다. 엄연히 실존하는 연예인에 열광하는 사람마저 자신과 접점 하나 없는 인물을 좋아한다며 빠순이라 조롱받기 일수인데, 애착의 대상이 심지어 허구이기까지 하다면 그 우스꽝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010년 예능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하여 캐릭터와 결혼했다고 주장, 이후 오타쿠의 대명사가 된 오덕페이트가 이런 류의 스테레오타입의 대표주자 격이다. (2017년 기준으로 이 분은 공갈 및 부당이득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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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많은 오타쿠들에게 애니메이션은 취미 이상의 가치관이다.

[사진 설명]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의 캡처본.

(사진설명 시작. 가장 위의 댓글에는 '???? 그래도 이런 글은 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쓰여 있다. 그 밑의 첫 번째 답댓글의 내용은 '까놓고 한국에서 충무공은 성역 맞다고 봅니다만'이다. 그 밑으 두 번째 답댓글엔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이순신의 업적은 엄밀이 수백년 전의 일입니다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거지 우리를 구한게 아니에요 오히려 현대에 와서 따지면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구한 시로(에미야 시로라는 애니메이션 주인공)가 더 영웅일수도 있죠'라고 맞춤법에 맞지 않게 쓰여 있다.)


과몰입은 진지함을 전제로 한다. 오타쿠 커뮤니티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청소년들이 자주 보이는 비장한 태도는 놀림거리를 찾는 이들에게 적절한 표적이 된다. 일본 만화의 주인공은 대체로 미성년자나 젊은 성인이다. 과감한 데포르메가 특징적인 미국 카툰과 달리, 일본 만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수려하고 진중하게 표현된다. 색감은 마냥 밝지 않고 배경 또한 일본 소도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사실적이다. 오로지 재패니메이션만이 지하철과 육교와 같은 공공 인프라를 그토록 시적으로 표현한다. 애니메이션 속 일본 학교는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 기시감을 느끼게끔 한다. 연출 또한 영화처럼 묵직하다. 주인공의 어깨는 온 세상의 고민을 떠안은 양 무겁고, 드높은 이상이나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불나방처럼 목숨을 내던진다. 이 모두가 청소년이 진지하게 몰입하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이다. 흔히 말하는 중2병 오타쿠는 주로 이런 장르를 통해 양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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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문화의 정수는 여기에 있다. 서사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쏟아 내어 소비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지를 챙기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작품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즐기는 것 이상으로, 표층에 드러난 서사 저편에 저자들이 설정한 ‘진실’이 있다고 믿게 된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공식 콘텐츠에서 슬쩍 암시한 내용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이런저런 해석과 뒷이야기를 내놓는 게 오타쿠식 감상법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러한 습성에 능통한 제작사들은 일부러 의뭉스러운 장면과 설정을 잔뜩 넣어 팬들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즐기도록 부채질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타쿠 문화는 근대 문학보다 고대의 신화를 닮았다. 어느 하나 확실하게 정해진 바 없이 전승에 따라 해석이 전부 다른 신화처럼 오타쿠 세계에 정석적인 감상이란 없다. 인물의 키가 162cm라는 사소한 사실은 절대불변의 진리지만 인물이 누굴 좋아하는지,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상상하기 나름이다. 팬들은 몽유병 환자처럼 실재와 망상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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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들켰을 때 수치스러운 오타쿠 취향의 대명사는 많은 남자들에겐 미소녀물, 여자들에겐 BL이 되겠다. 이 둘의 특이점은 예상 소비자층과 동일한 성별의 캐릭터가 서사에서 배제되고[3], 인물들 사이의 모든 관계가 성애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간에 대한 관찰에 기반하기보다 철저히 이성의 시각으로 환상을 덧칠한 역할을 연기한다. 같은 미소녀물이나 BL물 안에서도 개별 작품 간의 완성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작품성의 높고 낮음을 떠나 이들의 소재와 내용은 여전히 일반인의 기준에서 의아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 정서에 대한 이러한 무신경은 오타쿠 문화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 산업과는 달리, 일본 서브컬쳐는 정치적 올바르지 못함의 결정체다. 모든 예술 작품이 사회적 이슈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재패니메이션은 소수자 인권에 무신경함을 넘어서 캐릭터의 극단적 비인간화로 주제 의식을 대체하는 지경이다. 예전에는 소수의 하드코어 팬층을 겨냥한 작품들에만 해당되었던 문제점은 점차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의 문제점이 되었다.


대부분 미성년자인 등장인물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옷을 입고 유혹적인 포즈를 취한다. 분명 일본인이란 설정의 인물들의 이목구비는 영락없는 서양인이다. 배경이 학교라면 말하는 중간중간 외국어 추임새를 넣는 금발머리 백인-일본인 혼혈 내지 백인 여학생이 감초 같이 등장한다. 위 모두가 모두 하나 같이 빼빼 말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뿐인가? 가슴이 크면 크다고, 작으면 작다고 부끄러워하는 장면은 이제 클리셰 수준이고, 인물 간의 대화 장면에서 뜬금없이 여성 캐릭터의 허벅지를 훑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상기한 요인들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성년자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어딘가 음습한 장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 많은 부분에서 그 편견은 사실이다. 소위 ‘미소녀물’으로 통칭되는 작품들은 일본 만화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점점 커지는 중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성향 장르를 많이 즐겨왔기 때문에 이 문제점을 뼈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영롱한 머리 색과 얼굴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눈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이 어색하게 팔을 휘두르며 뛰거나 다리를 모을 때, 과장되게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할 때마다 이질감이 들었다. 나부터 그들을 주변에 있을 법한 소녀라기보다 현실의 여자와도, 남자와도, 무엇보다 사람과도 닮지 않은 존재라고 여기게 됐다. 허구의 인물을 대상화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게다가 이건 대중문화라 부르기도 뭣한 서브컬처다. 애당초 서브컬처는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에서 보기엔 곤란한 모든 걸 일컫는 말 아니었던가! 오히려 이러한 음지 문화를 불온하다며 배척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욕망의 표현을 금기시하여 성엄숙주의를 조장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타쿠 문화의 성적 대상화는 단순히 캐릭터의 엉덩이와 가슴을 부각하는 수준을 이미 오래전에 넘어서 인간의 성격적 특징과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 꼬리표를 붙여 유형화하고 이를 ‘모에’하다며 얼굴을 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대 시장을 가진 현대 예술의 한 갈래로서 오타쿠 문화를 인정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극단적 비인간화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대상화의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부재가 있다. 편의점과 교실, 횡단보도 등 일상의 풍경은 사진을 찍어 놓은 듯 완벽히 재현하면서 정작 인물에 한해서는 현실의 인간을 재현하려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인간과 동떨어질수록 오타쿠들의 기이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제작사들은 앞다투어 비현실적인 인물상을 내놓고 있다.


대중예술의 가치를 쉽게 대중성과 작품성으로 요약하자면, 최근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두 전선에서 후퇴하는 중이다. 예상 소비자층은 더 협소해지고, 예술성은 선정성으로 대체되었다. 단지 우울한 오타쿠의 기우가 아니다. 시장의 호황과 반대로 제작사들은 조용히 도산해 가고 있다. 어느 연출가의 한탄처럼, 많은 팬들은 재패니메이션이 “조용히 멸망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4]”있다.

흔히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명작이라 꼽히는 작품들은 1990년대, 2000년대, 길게 봐도 10년 전에 나온 것들이다. 최근에 제작된 작품들 중 어느 것도 그만큼의 대중적 성공을 누리진 못했다. 다수의 라이트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원피스, 나루토와 같은 작품들이 벌써 20년 전에 연재를 시작한 작품임을 생각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미 오래전에 대중적 정서와 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규모나 작품성에 있어 팽창하던 90년대의 오타쿠들은 어엿한 상부 문화로서 자리 잡은 재패니메이션을 꿈꿨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명성에 비해 턱 없이 열악한 노동 여건[5]과 자금 규모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 비결은 정교한 그림과 심오한 주제 의식에 있다. 철저히 대중성을 무기 삼아 온 가족이 볼만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온 미국에 비하면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사람들이 디즈니 영화에선 기대할 수 없었던 어른 다움을 재패니메이션은 제공했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관용구대로 음지 문화가 양지화되기는커녕 양지 문화가 음지화 되는 과정이 벌써 십수 년째 진행 중이다.


최근 10년 간 이러한 문제점은 심화되어 왔다. 이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저출생으로 인해 아동청소년의 수가 줄어 그 집단을 크게 염두에 둘 필요가 줄어들었다. 인구 구조의 거대한 변화로 인해 시장은 박리다매형 수익 구조에서 소수의 하드코어 마니아들의 지갑에 의존하는 시장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일본의 장기 불황 탓에 제작사들이 안전한 수익만을 추구하게 된 탓도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그 존재감에 비해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 전체의 1년 매출이 넥슨의 그것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만성적인 경기 침체 상황에서 제작사들은 괜히 예전처럼 공들여 SF나 판타지를 만들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수다만 떨어도 귀여운 주인공들이 서사의 빈약함을 가리는 식의 작품만 양산하길 택한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깊고 넓으며, 아무리 최근에 오타쿠 타깃의 서사를 남발하여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들 여전히 다른 장르에 대한 수요도 건재하다. 미소녀물이나 BL을 좋아하는 독자라고 해서 그 둘을 대놓고 표방한 작품들만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화도 어엿한 예술의 일종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덕질을 해오던 사람의 입장에선 이 모든 상황이 침몰하고 있는 배와 같이 느껴진다. 오타쿠 문화의 이상 징후에 마냥 눈을 돌려 옛 향수에 빠져 있기엔 이 시장은 너무 빨리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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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인터넷 오타쿠 커뮤니티에 첫 발을 디딜 적의 당혹스러움을 기억한다. 나와 비슷하게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기대했지만, 자조와 선정성이 넘쳐나는 랜선 문화의 첫인상은 좋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그 세계의 문법에 노련해졌다. 그 방식대로 깔깔대는 법을 배웠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그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너무 오래전부터 만화를 좋아한 탓에 오타쿠라는 정체성에 꽤 도취되어 있었다.

내가 오타쿠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대단치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종이 속 여자들이 작품에서, 그리고 독자들 사이에서 받는 부당한 취급을 견디기 어려워지지만 않았어도 난 지금까지 열심히 모른 체했을 것이다. 나는 아마 계속 만화를 볼 것이다. 철저히 남성의 시선에서 고안된 여성 캐릭터들을 여전히 좋아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우스워하는 비장한 태도는 어렸던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오타쿠란 사실이 뭐 자랑이냐고 일갈을 하면서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주제만 나오면 솔깃해서 한 마디라도 얹으려고 달려든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예민함을 추억하며 익숙함이 내 시야를 가리지 않길 기원한다.





수습편집위원 차지_avril11th@naver.com



[1] 우등생 출신 웹툰 작가 seri도 이러한 고민을 진지하게 다뤘다. 그녀의 자전적 만화를 보고 싶다면 https://blog.naver.com/schan1205/220023195151에 방문해보자.

[2] 김현유. (2017 01.17). “7년 만에 '오덕페이트 십덕후'가 전국에 다시 충격을 주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3] 윤재식. (2017.04.21). “"남자 따윈 필요 없어!"…'미소녀 동물원'에 어서오세요”. 머니투데이.

[4] 성년월드 흑과장. (2018.03.09). “장밋빛 ‘쿨 저팬’의 이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어두운 현실”. ㅍㅍㅅㅅ.

[5] 한기성. (2017.02.05). “'너의 이름은.' 흥행돌풍 속 일본의 영화산업규모 들여다보니”. 프레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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