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뇽뇽
나에게 ‘교회’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은 유치부 시절 암송대회에서 아쉽게 2등을 차지했던 순간이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나 성실한 교회 청소년으로 중고등부 회장까지 지냈던 나에게 신앙이란, 어릴 적부터 나의 삶과 가치관 그 자체였다. 학교 친구들보다 먼저 만난 또래 집단이 교회 친구들이었고 부모님의 교육 기준 역시 오로지 성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부족했을 때도 여전히 예배 시간에는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고, 수련회와 기도를 통해 다시 신앙심을 회복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청년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와서 페미니즘을 만나 여성차별과 폭력의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고 온 세상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과 교회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원칙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여성의 주체성과 성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주일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정확히는 찝찝하고 긴장됐다. 언제 차별적인 발언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목사님이 창조 질서를 언급하며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인 위계나 차이점을 강조할 때면 어느새 머릿속으로 100분 토론을 벌이느라 시간이 한참 지나있기도 했다. 선교단체의 형들이 “ㅇㅇ이 이런 것도 불편한가?”라고 말할 때 하하 호호 웃어넘겨야 하는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하지만 나는 기독교를, 내가 믿는 예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의 성격과 가치관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에서 형성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을 믿기로 작정했고 예수가 이 땅에 남긴 진리가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목사나 선교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어도 나 또한 예수와 하나님이 살라고 하는 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여러 차례 드렸다.
그런 나에게 남겨진 문제는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충돌이었고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교회 문화의 가부장적 면모도 너무 맞는 말이었지만, 페미니즘에 예수가 말하는 천국의 그림이 없다면 그 역시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었다. 이 글은 그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을 담은 글이다.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내 속에서 끊임없이 맞부딪히다가 다행히 끝내 서로가 화합하고 협력하는 길을 찾았다. 페미니즘은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깊이 고민한 적 없던 주제인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하게 했고, 그 고민을 갖고 성경을 파헤치니 ‘밭에 감추인 보화’ 페미니즘이 드러나게 되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의 삶을 살라 명령하는 글이 아닌 “이런 고민을 해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글로 읽히기를 바란다. 교회 안팎에서 필자와 같은 고민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관습적으로 믿어왔던 신앙에 다시 질문 던지는 이가 적지 않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없고 어디부터 고민해야 할지조차 어렵기만 함을 잘 알기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가 여기에 있다는 그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다. 더불어 페미니즘에 막연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 글이 교회 안의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미투 사건이 고발될 때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세력이다. 페미니즘은 인본주의 사상이다.”라고 발언하는 목사들이 나오고, 개신교와 천주교 너나 할 것 없이 잊을 만하면 ‘낙태/동성애/이슬람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페미니즘과 기독교가 서로를 비판하는 것은 익히 봐 왔지만 둘 사이의 갈등의 양상이 어떠한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은 기독교 역시 종교이기에 신의 뜻과 신도(인간)의 뜻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에 담겨 있는 핵심 교리와 성경이 기록된 시기에 신도들이 축적한 ‘기독교 문화’가 혼재된 기독교를 경험한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비판이지만 성경에 합치되기도 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사회현상을 비판함에도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를 들면 전자는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당시 신학자들이 중세 교회의 관습을 비판했던 것, 후자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이 노예제 폐지 반대의 근거로 성경 말씀을 인용했던 것들이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복잡한 면모를 잘 생각하며 페미니즘과의 충돌을 살펴보자.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복음주의(개신교 신학)를 간단히 설명할 수 없듯이 페미니즘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 지만,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하려는 사상이자 정치 운동이라 폭넓게 정의할 수 있다. 지난 인류의 역사는 남성이 가정과 사회의 주인이 되는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억압받았던 여성의 보편적 권리와 실질적 권리들을 얻고자 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이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과 재산권을 비롯해 성폭력과 임금 차별 해소 등 여성의 권리 증진에 크게 기여해왔고, 우리나라도 호주제 폐지, 가정폭력 특별법 제정, 미투 운동 등이 한국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진행된 바 있다.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바라본 기독교는 여성 혐오(여성에 대한 모든 배제와 차별)의 주역이자 개혁의 대상이다. 2000년 전에 쓰인 성경을 행위규범으로 삼는 데다가 그를 바탕으로 한 교회 문화는 여성을 목사와 같은 교역자로 바라보지 않고 남성의 연애/결혼 대상으로만 삼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페미니스트들을 그야말로 ‘시험 들게’ 한다. 이처럼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지점들을 필자의 경험과 더불어 소개한다.
① 성별 이분법적 문화
생물학적 성을 남성과 여성 둘만으로 나누고 각자의 성 역할을 강조하는 성별 이분법은 어디에나 만연하지만,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편견이 많이 없어진 현재에도 교회는 지독한 이분법이 자리한다. 화장과 긴 머리라는 미적 영역을 벗어나더라도 목회·행정·주차관리는 모두 남성들의 업무이고 식당 봉사는 모두 여성들의 업무이다. 더불어 여전히 육아와 가사는 여성의 의무로 인식되는지라 아이를 보느라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어머니며 많은 여성이 출산 후 교회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교회 내의 돌봄은 어떠한가. 새벽 기도와 송구영신(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12월 31일 교회에 모여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예배를 드린다)을 비롯해 교회 내 어르신을 찾아뵙는 역할도 여성에게 오롯이 집중된다. 청소년 시기 역시 힘을 쓰는 일은 오롯이 형제들이 해야 할 일로 취급돼 여성은 어릴 적부터 보호받는 위치에 남겨진다. 이러한 문화는 성경의 ‘돕는 배필’, ‘현숙한 여인’,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 등의 구절들이 정당화하고 재생산한 바가 크다. 지난주에 다녀온 기독교인의 결혼식에서도 “남편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데 힘쓰고 아내는 돕는 배필로서 신랑을 잘 섬기고”라는 주례사를 들어야만 했다.
모순적인 것은 성경과 교회가 상정하는 여성에는 순종적 여성상과 더불어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걸림돌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형제들이 시험에 든다.”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교회 자매가 있을까? 여름 수련회가 다가올 때쯤이면 자매들은 짧은 바지나 몸에 붙는 옷을 입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이유는 형제들에게 성적 유혹이 되어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짧은 옷을 입고 싶은 건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은 죄의 본성이라고 덧붙이며 말이다. 이는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2차 가해로 손쉽게 이어지는 논리이며, 더 본질적으로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자 폭력이다. 심지어 ‘시험 듦’의 기준이 교회나 사역자 개인마다 달라서 바다에 가서 수영복을 입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교회 리더에게 게시물을 내리라는 메시지를 받거나, 심한 곳은 전도사가 종아리만 보여도 단정하지 못한 차림이라고 경고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는 그들이 여성을 정죄(죄가 있다고 단정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정죄함을 받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맥락으로 사용된다. 예수님은 분명 남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삶을 명령하셨지만, 용서와 사랑을 빙자한 알맹이 없는 정죄함이 자주 행해진다.) 하는 데에 명백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의 책임은 일절 언급하지 않으며 ‘아무튼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더불어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한 설교는 이러한 인식을 공고화한다. 예를 들면 요셉을 유혹하려 했던 보디발의 아내와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해 이방 여인들과 동침하는 본문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그러니 남성 청년분들은 먼저 나서서 조심해야 합니다. 성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동행하거나 식사하지 않아요.” 언뜻 보면 달라진 것 같지만 훈계의 주체만 옮겨졌을 뿐 여전히 여성을 성적인 유혹이자 남성이 죄를 짓게 하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은 똑같은 발언이다. 흔히 ‘펜스룰’로 통용되는 이 논리는 여성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성폭력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성경적 옷차림에 대해 강의하는 유튜브 영상(왼쪽 책 읽는 사자, 오른쪽 FEAR OF GOD)>
[사진 설명 시작] 유튜브 섬네일과 본영상을 캡처한 사진 2개가 있다. 왼쪽 사진은 유튜버 ‘책읽는사자’의 영상 섬네일로 ‘여자 크리스천의 일상적 패션에 관하여_ft.국가적 음란’이라는 글자에 배경으로 유튜버의 강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오른쪽 사진은 유튜버 ‘FEAR OF GOD’의 영상 캡처로 유튜버가 앉아서 말하는 배경 사진 위로 ‘예수님을 향한 순정함 순결 정절 지조 절개’라는 자막이 화면 가득 띄워져 있다. [사진 설명 끝]
마지막으로 여성에 대한 모든 권고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상냥하고 고분고분한 자매(여성 신도)만을 ‘참 자매’라고 부르니, ‘개념녀’와 ‘김치녀’의 구분이 만들어 내는 경계 짓기 현상이 교회에서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위 사진 속 남성 유튜버들은 ‘음란하고 이기적인’ 여성들을 비난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여성의 행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사역자와 성도의 껄끄러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절을 드러내는 옷매무새를 한 여성은 없었다.”, “사탄이 역사하는 틈을 준다.” 등의 발언으로 성경을 내세우며 여성을 악마화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코디’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라.” 정도인데, 이 역시 이미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외모 평가를 용인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예쁜 자매’에 대한 칭송만이 맴도는 결과를 만들 뿐이다. 외모와 미용에 대한 가르침이 여성만을 향하는 것도 문제지만 여성에게 강요되는 ‘여자다운’ 미적 기준에 대한 비판 없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들 예뻐요.”라고만 하는 말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② 남성 중심적 의사 결정 구조
앞서 설명한 성별 이분법적 문화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크게 일조하는 것은 모든 의사 결정 권력이 남성에게 집중되어있는 현실이다. 남성이 모든 의사 결정을 전담하고 있기에 여성은 주방과 카페로 내몰릴 수밖에 없고, 여성 목사나 동역자가 없기 때문에 여성은 아내이자 남성적 시선의 대상 그 이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 교단은 1년마다 최고의결기구인 총회를 열어 교단과 교단에 속한 교회들의 주요 이슈를 논의·처리한다. 여기에 참석하는 목사 또는 장로를 총대라 하는데 가장 세력이 큰 예장합동은 여성 목사의 안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2019년 총회에는 여성 총대가 없었다.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도 여성 총대 비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어릴 적 어른 예배에서 목사님들이 안수(목사 임명)받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양복을 빼입은 전도사님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안수를 주는 담임 목사님과 축복 기도를 해주는 장로들 모두 남성들이었던 기억이 난다. 여성의 등장은 목사님의 가정을 소개할 때, 그들이 남편의 사역을 (무급으로) 도와 신자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사모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성 리더십을 허용하지 않는 성경의 근거로는 디모데 전서 2장 11~12절이 자주 언급되는데, “여자는 일체의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구절이다. 직관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평등권에 위배되는 말이지만 해당 구절은 교회에서 여성차별의 강력한 근거이자 ‘교리’로 작용한다. 이렇게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 문화에서 설교와 교회 행정에 여성주의적 가치나 여성의 입장이 반영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교회 내 여성 리더십 부족은 청소년 세대에서부터 나타나는 현상으로 교회 밖인 초등학교 반장 선출보다 성차별이 심하다. 예를 들면 중고등부의 회장과 찬양인도자는 항상 남성으로 세워지는 식이다. 필자가 속했던 대학생 선교단체도 전국 대표는 언제나 SKY 출신 군필 남성이었고 전국 대표 임명식 자리에 선 여성의 비율은 고작 20%였다. 캠퍼스 역시 대표는 남성 부대표는 여성임이 ‘국룰’이었고, 왜 여성이 대표를 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지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고려해서 추천한 거야.”라는 말뿐이었다. 지위와 서열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왜 여성에게 그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여성 리더십 부재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 리더를 길러내지도 않으면서, 여성 리더에 대한 편견과 낯섦에 사로잡혀 남성집단의 권력을 단단히 하는 교회 공동체의 경로 의존적 의사 결정이다.
이러한 여성 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인 교회의 현실 속에서 페미니스트 기독교인은 설 자리를 잃는다. 모태신앙으로 속한 교회에서 20년을 나고 자랐다고 해도, 주변 교회 사람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착하다 할지라도 느껴지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몇 가지 담아보고자 한다.
① 답답함과 피로감
글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찝찝함을 비롯한 감정들로, 주로 직접적인 차별적 언행이나 행위를 보고 들었을 때 느껴진다. 분명 불편한 발언인데 정확히 그 지점을 짚어낼 수 없을 만큼 교묘하거나, 혹은 짚어낼 수 있어도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일. 어쩌다 용기 내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한다거나 성경 구절을 읽어주며 제기된 비판점을 단순화할 때는 ‘아 그냥 참고 넘어갈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들이 쌓이다 보면 교회에서 멀어지고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이 편해진다. 예배당이 나의 안식처가 아닌 전쟁터가 되기 때문이다.
② 부담스러움
앞선 예시 이외에도 많은 청년이 기성 교회에 거부감을 가지는 부분이 있다. 워낙 친밀감을 강조하다 보니 주변에서 나의 삶에 들어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느끼는 부담스러움은 페미니스트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온 교회가 혹은 리더와 사역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알고 있으며 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분명 나의 담당 리더에게만 긴밀하게 이야기했는데. 또는 페이스북에 글을 공유한 다음 날이면 전도사님이 요즘 잘 지내냐고 연락이 온다든가, 관련한 이슈를 ‘순수한 얼굴로’ 물어보며 ‘그런데 나는 말이야…’가 이어지는 식이다. 제일 큰 문제는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 나를 위해 나보다 더 걱정스럽게 기도해주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그 친절이 나를 ‘전환’ 또는 ‘회개’ 시키기 위함이니 은밀한 낙인과 기묘한 폭력이 매주 몸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③ 흔들리는 자아정체성
이러한 모든 상황의 종착지에는 내 속에서 자아가 흔들리는 감정이 있다. 손쉬운 문제가 제시되어도 다른 이들이 모두 오답을 말하면 누구든지 심히 고민한다는 심리실험을 아는가? 만약 다른 이들이 나와 친밀한 사람들이라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갈등은 이보다 더 어렵다. 만약 정말로 페미니즘이 성경에 반하는 행위나 사상이라면 기독교인이 이에 동참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혹은 매주 설교를 통해 (무엇이 진짜 죄인지에 대한 이해가 갖춰지기도 전에) ‘죄를 짓지 말라’라는 말에 노출된 사람에게 ‘내가 죄를 짓고 있다.’라는 감정은, 하나님이 나를 버린다거나 지금이라도 당장 내 발밑에 지옥행 구덩이가 열릴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또한 페미니즘 운동 자체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격론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러링 혹은 성 소수자 이슈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교회나 성경을 마주할 때면 이곳에도 저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데 없다는 데서 오는 고립감, 주류 신학과 교단이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탓에 내 고민을 신학적으로도 풀어낼 수도 없는 막막함 역시 매번 커다랗게 다가온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교회는 세상의 악함을 탓하거나 ‘가나안 성도(교회를 떠났지만, 신앙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의 나약함을 탓한다. 자신들의 문화에 너무 젖어있는 나머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사랑으로 다가가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본질적인 반성이나 교회 권력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오히려 남아 있는 이유는 자의보다 타의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내게 주는 지혜와 하나님의 천국이 그려내는 정의에 매료되어 있다면,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의 삶이 가능함을 함께 이야기하고 또 고민하고 싶다.
이제 전환점을 돌아 기독교가 어떻게 페미니즘과 화합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자. 나에게 페미니즘은 제목의 유명한 찬송가 ‘주의 자비가 내려와’처럼 하늘의 선물이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하늘의 진리와 성경의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많은 20대 청년이 그러하듯이 필자 역시 2016년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게 되고 이것이 옳다 결심했다. 사회에서는 호주제 철폐 운동 때 그랬듯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과격한 방식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즘을 배척했다. 하지만 여러 글을 읽고 수업에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배우니 페미니즘은 차별과 폭력을 없애고자 하는 운동이자 학문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느낀 것은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러 사회개혁 운동이 성경이 말하는 행위규범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이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태복음 18장 8절)”
성경에는 ‘언어적 성폭력과 가스라이팅도 범죄이다.’라고 적혀져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위의 말씀처럼 다른 이에 대한 범죄에 엄격한 잣대를 보여주셨다. 본문의 ‘다른 이’는 맥락상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따르는 순전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내 삶에 끌어올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현직 검사 미투 사건에 예수의 말씀을 적용해보자. 안태근 검사가 진정 예수를 믿었다면 해야 하는 일은 대형교회에서 자신을 해명하는 일이 아닌 자신의 손과 발을 찍어서 내버리는 일이었어야 했다. 설령 위 말씀이 진짜로 손을 찍어 버리라는 말이 아닌 죄에 대한 엄정성을 말한다고 해도, 한국 교회는 그 말씀에 따라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돌렸어야 했다. 더불어 위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인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너의 눈을 빼어버려라”라는 구절은 이전까지 나에게 큰 효용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에서 ‘시선 강간’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말씀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성경이 요구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셨다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하나라는 보편적 명제는, 페미니즘을 통해서 여성의 평등한 사회참여와 온갖 폭력에서의 해방으로 이 땅에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혹여나 “개인이 경험한 바대로 자신의 신앙을 확정하는 것은 주의해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한다면, 좋은 질문이다! 많은 크리스천 페미니스트 자매 형제들이 쌓아온 운동과 학문의 역사가 이미 기독 페미니즘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무엇이든 하나님의 진리를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과연 성경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신학적 관점에서 짧게 살피고자 한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오류나 오점이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문장을 참-거짓으로 판별한다면? 기독교 신학자 중 다수는 성경에 적힌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함을 주장하기에 서슴없이 T(진실)라고 답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기록이며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으로 쓰였고, 예수님도 성경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문자 주의적 해석의 예로는 해산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멍에이기 때문에 무통 주사를 맞을 수 없고, 당 대표가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 불교 예법을 거부하고, 우주 만물이 7일 만에 창조되어 지구의 나이는 약 1만 년이며, 남성이 남성과 관계하는 것이 죄라는 식이다. 남성이 땀을 흘려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어디서든 에어컨이 세차게 돌아간다는 이중잣대를 차치하고서라도 문자 주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제1의 성경 해석 원칙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성경 역시 문화적 맥락(Context) 속에서 쓰인 글(Text)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쓴 글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시편이 오랜 세월에 걸친 선택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것, 누가복음의 저자는 서두에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은 성경이 가진 인간적인 특성을 말해준다. 마치 신적 존재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2000년 전 문화를 살아내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이러한 성경의 양면적 특성을 김근주 교수는 ‘진리 자체’와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로 말하고 백소영 교수는 베를 짜는 작업의 ‘경줄과 위줄’에 대입시킨다. 복음은 보편성/초월성을 가져 어느 시대 누구에게도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성경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시대와 인간의 한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일관된 메시지를 우리가 내디디고 사는 땅에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기만 해도, 이전까지 우리를 얽매였던 낡은 조문들의 정죄함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성경 해석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합치에 기여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우리가 혐오 발언이라 생각했고 많은 이가 진리라 말했던 구절들이 사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통용된 표현이자 문화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설사 기독교 공동체의 규칙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맥락과 당시의 맥락은 2000년의 괴리가 존재한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던 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죄를 유발하는 대상물이었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굴레는 그저 곁가지에 불과함이 선포되었다. 이제 우리는 여성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텍스트에는 얽매이지 않되 성경이 말하는 ‘진리 자체’와 ‘경줄’은 단단히 붙잡는 삶의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차별적인 텍스트는 당시 사회 문화의 반영일 뿐이고 페미니즘적 비판이 성경을 향하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떠한 길을 따라 살아야 할까. 크리스천이 살아가야 할 삶이 페미니즘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맞닿아 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제목에 쓰인 성경 구절은 우리 대학교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구이지만, 사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학문으로서의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해당 구절의 전체 맥락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1~32절)”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는 어려운 학식을 쌓아 고매해지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의 말에 ‘머물러’ 그의 삶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는 삶에 있다. 그리고 예수가 말하는 진리 역시 다른 사람들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위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성경 구절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앞서 언급한 ‘진리 자체’와 ‘복음으로서의 경줄’은 이미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사도 바울이 밝힌 바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먼저이고 이웃을 사랑함이 나중이라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범위를 정할 수 있는 선택적인 사랑도 아니다. 동성애는 성경에 죄라고 나와 있으니,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은 사랑하되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 아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손수 빚으신 존재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다. 존재를 욕심과 더러움으로 취급하는 눈은 이미 돌을 던질 준비를 마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사랑의 영에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덧붙이지 말자. 진리를 아는 우리는 자유로워지며 다른 이를 자유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에는 ‘국가적 정의’가 있다. 50년을 주기로 땅의 소유권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 제도, 권력을 이용해 백성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은 이가 그 포도밭에 버려져 개들에 주검이 찢긴 심판, 그리고 다니엘이 바빌론의 왕에게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한 일 (각각 레위기 25장, 열왕기상 21장과 열왕기하 9장, 다니엘 4장) 등을 보면 구약의 하나님 역시 가난하고 무죄한 자의 편에 서셨음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명령은 개인이 아닌 나라와 민족 전체에 임한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선한 행실과 구원 여부에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국가적 수준의 선악을 판단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는 성경에 담긴 인간적 편견을 걷어내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를 면밀하게 살펴보아도 페미니즘이 성경에 부합함을 보여준다. 성폭력이 없는 사회, 여성의 노동이 제대로 보장받는 사회,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짓밟히고 죽임당하지 않는 사회를 하나님 역시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성경책에서 고개를 들어 우리가 사는 현실에 좀 더 집중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와 기독교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넘친다.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단체 ‘믿는 페미’의 달밤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나,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나,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크리스천이라서 교회 안의 페미니즘을 도전했다기보다, 페미니스트로서 서 있던 위치가 교회였고 그 교회 역시 타파해야 할 가부장적 모습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반드시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으로 살라고, 죽기를 각오하고서라도 자신의 사명을 담당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으로 사는 당신이 세상 둘도 없는 ‘귀한 존재’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한국 사회를 과거로 회귀시키기 위해 날뛰고 있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기독교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는 그러라고 한 적 없다.”라고 외칠 사람들이 필요하다. 전광훈 목사처럼 탁한 목소리만으로 미약한 논리를 채워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이들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불타는 마음으로 행진하며 인권단체와 진보정당을 무찌르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진실은 퍼져나가야 한다. 자그마한 촛불이 집 안을 훤히 밝히고 소금이 바다를 짜게 하듯이 가부장제의 확산을 막는 이들이 필요하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수로보니게 여인(마가복음 7장 27~28절)’으로 알려진 이 구절에 담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치고자 예수를 찾아와 간청했지만, 예수는 그녀를 무시하고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줌이 옳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말을 던졌다.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이 주 대상이었지, 이방인에게 열려있지 않았음을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주님께 반항하며 요청했고, 예수님은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대답하셨다. 이 이야기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예수의 차별적 언행을 의문점으로 남겨둔 채, 여인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믿음에 집중한다. 하지만 몇 번을 읽어봐도 여인이 예수와 싸우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예수에게 처절하게 매달려 구원을 타협해 낸 여인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감격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감명 깊은 것은 인종차별주의의 벽, 성차별주의의 벽, 예수의 거절로 인한 절망의 벽 앞에서 돌아서지 않고 그 벽을 부숴버린 여인의 강인함이었다. 결국에 예수는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고 딸은 귀신에게서 해방된다. 그녀는 딸과 함께 차별의 벽을 넘어선 이들에게 주어지는 해방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그녀는 이방인 선교를 담당한 바울보다도 더 일찍 하나님의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구원 계획을 깨닫고서 그 미래를 앞당겨 얻어냈다. 페미니스트 크리스천 역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흔들리지만, 결코 예수와 멀어지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주님이 세상을 통치하면 나타날 모습을 하루라도 더 빨리 이 땅에 이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으로 사는 지금 내 모습이 불안하고 계속된 자기모순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무척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예수님은 그 길을 이미 걸으셨고 지금도 수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그 길에 함께 서 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왕으로부터 도망쳐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한다. 그런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다가와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다음 여정을 위한 떡 한 점과 물 한 병을 건네신다. 그 후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도착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난한 순간 뒤에 찾아오는 치유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비슷한 고민을 겪고 있는 이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페미니스트 크리스천이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며, 긴 여정을 위한 성령을 가득 부어 주실 테니.
뇽뇽 (yonseiji@yonsei.ac.kr)
참고자료
- 페미니즘의 역사, 페미니즘과 관련된 주요 이슈 등 더 자세한 사항은 <페미위키>를 참고
- [영상] 교단 총회가 뭐길래|2019년 주요 장로교단 총회”, 뉴스앤조이, 2019.09.20
- 페미위키, (2020), URL : www.femiwiki.com/w/시선강간
- 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성서유니온선교회, 2017.
-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뉴스앤조이, 2018.
- 마태복음 5:48, 22:37, 로마서 7:6, 13:8, 갈라디아서 5:14
- “하나님은 성소수자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도요!”, 한겨레, 2019.08.09.
- 평화교회연구소, 『이 여인을 보라』, 도서출판 평화교회연구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