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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Dec 16. 2019

<122호>총학비평을 시도하는 글: 학생회란 무엇인가?

제54대 총학생회 비평 -편집위원 이해일


2019년 4월 당선된 제54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Flow>는 햇수로 4년이나 되는 비상대책위원회 기간 끝에 마침내 선출된 총학생회다. 16학번 이후로 ‘총학생회를 본 적 없는 학번’이 세 차례 입학한 뒤다. 그런 이유로 <Flow>는 그 전의 총학생회들과 달리 자신이 ‘어떤 총학생회인지’ 이 전에 ‘총학생회란 무엇인지’부터 보여줘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과연 <Flow>는 이것을 잘 해냈을까? 그러나 이 비평은 이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만다. 어떤 총학생회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비교군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비교할 만한 총학생회가 없다. 4년 전의 총학생회와 지금의 총학생회를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잘했고 못했고를 따질 수는 없다. 아니 그 전에, 보여줘야 한다는 그 ‘총학생회란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Flow>의 메시지, ‘총학생회란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

무엇보다 <Flow>는 ‘총학생회란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Flow>는 당선 이후 총 230개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올렸고 그중 약 17.4%인 40개가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할인/추첨 이벤트와 관련되어 있었다. 나머지 190개 중에서 76개는 무악 대동제, 아카라카, 연고전 등 소위 ‘달력사업’이라고 불리는 행사 운영과 관련된 게시글이다. 비대위는 이미 각 단과대 학생회를 책임지고 있는 단과대 회장단으로 이루어진 중운위가 총학생회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각 단과대의 업무가 과중한 와중에 총학생회 업무를 분담하게 되므로 최소한의 운영을 위한 업무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외부 업체 제휴, 그리고 학내 행사들을 최대한 활발하게 추진, 홍보했다는 것이 비대위와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물론 제휴 이벤트와 원활한 행사 진행이 한 학생회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하지만 이는 오랜 공백 끝에 당선된 총학생회의 불가피한 전략이다. 총학생회의 의미와 쓸모를 학생들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손쉽게 체감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과 같은 ‘탈정치’의 시대에 총학생회의 존재감을 가장 확실하면서도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비상대책위원회 당시보다 더 많은 복리후생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여러 번 반복된 선거 파행으로 인해 학생회란 무언가 시끄럽고 머리 아픈 주제로만 여겨졌던 환경에서 학생회가 최소한 나에게 어떤 ‘이득’이 된다는 감각을 심어주는 일이 급선무였던 것도 사실이다. 

<Flow>는 이 일을 꽤 잘 해내기도 했다. <Flow>는 약속대로 학식에 마라탕을 도입하고, 트레비앙 두유 옵션 추가를 확정했다. 비록 <Flow>의 임기 중에 결정된 일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염원했던 ‘계절학기 재수강 허용’을 발 빠르게 안내하기도 했다. 또한 임기 초 ‘글로벌기초교육학부(이하 GBED)’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담회를 열었다. 연세대학교는 2019학년도 1학기부터 글로벌인재대학 아래 ‘글로벌기초교육학부(GBED)’를 신설하고, 모든 외국인 학생들이 일반학과로 입학했더라도 1년 간 GBED에서 한국어와 기초교육과정을 이수하게 했다. 문제는 GBED의 등록금이 높아 같은 학과로 입학했더라도 외국인 학생만 더 높은 등록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Flow>는 법률자문과 간담회 등을 진행했고 등록금 인상분 반환이 결정되었다. <Flow>는 결국 법률 자문을 통해 등록금 인상분 반환 결정을 이끌어냈다. 또한 이러한 활동 내용을 학생들이 알기 쉬운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Flow>는 총학생회의 활동을 홍보할 때마다 웹자보나 카드 뉴스의 우측에 선거 공약 카테고리를 넣어 계속 상기시켰다. 비록 별 것 아니게 보일 수 있는 작은 변화지만 학생들이 총학생회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고, 선거 기간 공표한 공약을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지 체감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도 많은 학생회가 이러한 형식을 차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Flow>는 ‘이득이 되는 학생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 이상’? 

이 아쉬움이란, ‘안전하고 확실한’ 학생회 홍보 전략을 구사한 <Flow>가 언제나 ‘안전하고 확실’했다는 데에서 온다. <Flow>는 임기 동안 ‘이미’ 구성원 다수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고 어떤 학생들의 반발도 사지 않을 것 같은 사안에만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Flow>는 임기 초에 GBED 등록금 인상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도모했다. 얼마 전에는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의 수업 중 성희롱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비난에 대해 이례적으로 총학생회 차원의 입장을 표명했다. 발 빠르게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 사건 학생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 연대 의사를 전달했고, 학교 본부의 징계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책위의 ‘류석춘 교수 규탄 집회’ 홍보 글을 총학생회 페이지에 공유하기도 했다. 재수강 3회 제한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제19대 총장 선출 과정에 적극적으로 질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연세정신과 인권> 수업 필수 취소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학교는 당초 2020년부터 졸업 필수 과목으로 운영하기로 한 <연세정신과 인권> 수업을 지난 19일 갑작스럽게 선택으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는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정문 앞에서 스피커를 동원한 시위를 벌이고 무차별 민원 공격을 지속해온 보수 기독교 단체의 압박에 굴복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됐다. 학생들에게 필수화 취소 소식이 공지되기도 전에 보수 기독교 단체 책임자에게 먼저 문자로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연세정신과 인권 수업 필수 과목 지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입장문을 내고 공동행동에 나섰으나 총학생회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공대위 관계자에 따르면 “총학생회 페이스북 메시지는 닫혀있고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총학생회는 장애 학생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방어막이 되지 못했다. 우리 학교 응원단은 정기 연고전에서 계속해서 장애 학생석 방향으로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자 했다. 이에 장애인권위원회(이하 장인위)는 “소리에 더욱 민감한 청각장애 학생들에게 스피커 앞자리는 치명적”이라며 스피커 크기나 위치를 조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응원단은 음향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총학생회는 논의 테이블을 운영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문제는 합동 장애인석을 고려대학교 응원단이 맡게 되자 간단하게 해결됐다. 스피커를 장애 학생들의 반대쪽으로 향하게 하고 음향 사각지대에는 작은 보조 스피커를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 응원단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총학생회는 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Flow>가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사안을 나누는 경계는 명확했다. 모두가 환영할 만한 사안에는 개입하고, 그렇지 않은 사안에는 멀찍이 거리를 뒀다. 이 ‘모두’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의 존재는 고려되지 못했다. 학생이라면 굳이 반대하지 않을 등록금 인상 취소, 그 이유가 여성주의든 민족주의든 두터운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는 일본군 ‘위안부’ 망언, 연세대생이라면 모두가 염원하는 재수강 3회 제한 폐지. 그러나 조금의 잡음이라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거나 다수 학생의 혜택이 조금이라도 축소될 가능성이 있는 일에는 일절 기계적 중립을 지켰다. 류석춘 교수 성희롱 사태와 관련해서도 사실 적극적인 액션은 보여주지 않았다. 지지한다는 말만 했을 뿐 입장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총학생회 공식 페이스북의 메신저는 닫혀 있었고 10월 10일 진행된 <류석춘 교수 파면 촉구 집회>에서도 총학생회의 발언이나 공개적인 지지, 혹은 깃발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학생회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미 완벽히 만들어진 합의만을 이행한다면 학생회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학생회가 없어도 저절로 되었을 일’, ‘알아서 생겼을 여론’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고민해야만 학생회의 존재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저 더 많은 할인 이벤트와 제휴를 주기 위해서라면 그걸 하는 이를 굳이 투표를 통해 선출할 이유가 없다. ‘학생복지위원회’나 ‘생협학생위원회’도 제휴 할인을 구하거나 학생 식당을 개선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Flow>는 다소 소극적이었고 고민이 없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학생회란 무엇인가?

우리가 총학생회를 비평하기 전에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래서 총학생회가 원래는 어떠해야 하냐’는 문제다. 원래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특정한 총학생회가 과연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총학생회가 ‘어떠해야 하냐’보다도 더 문제인 것은 총학생회란 ‘무엇이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학 학생회는 아주 애매하고 곤란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의 학생회 또한 ‘도대체, 대학의 학생회란 무엇인가?’라는 의문 위에 서 있다.

우리 학교 총학생회칙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본교 학생(연세인)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한국 사회와 연세대학교에서 진보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대중 조직이다. 총학생회는 대중 조직이라는 성격에 따라 연세인 모두를 자기 회원으로 하며 연세인의 의사에 따라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총학생회는 한국사회와 연세대학교에 온존하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억압에 맞서 싸우며 연세인의 제반 권리를 옹호하고 주체적이며 창발적인 요구를 실현시킬 의무를 갖는다. 모든 연세인과 총학생회 간부들은 총학생회를 보다 대중화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진보적 이념… 대중 조직… 창발적인 요구… 총학생회가 이런 조직이라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대학의 총학생회가 70~80년대 민주화운동, 그리고 그 중심의 학생운동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총학생회가 있기 전에는 ‘학도호국단’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1949년 정부 주도로 중앙학도호국단 산하에 조직된 단체로 ‘반공사상교육을 실시’하며 ‘투철한 민족의식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때문에 학도호국단을 ‘준 군사 어용조직’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4·19 혁명의 성공으로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해체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잠시 사라지고 ‘ㅇㅇ대학(교) 학생회’라는 익숙한 이름이 붙여진 학생자치기구가 생겼다. 

그러나 1975년에 문교부에서 주관하여 학도호국단창설계획을 발표하면서 학도호국단이 재발족 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다시 해체되었다.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그동안 억눌려왔던 여러 자치활동과 시민단체 활동이 꽃피면서 학생자치 또한 활발해졌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대학 총학생회가 시작되었다. 학생자치단체로서 ‘ㅇㅇ대학(교) 학생회’를 원하던 움직임의 중심에는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셈이다. 탄생 배경을 알고 위의 회칙 전문을 보면 조금 더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다시 말해 30년 전 대학의 지향점은 민주화였고, 총학생회는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늘날의 학생회가 정치 운동의 엔진 역할을 하는 조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학생회의 역할과 책임이란 시대에 따라 입체적으로 달라진다.


70~80년대 학생회가 저항과 운동의 선봉으로 서도록 요구받았던 이유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요구되었던 책임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 대학 진학률을 29.6%이다. 80년대에는 30%대로 증가하지만 60-70%대인 요즘에 비하면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당시로써 꽤 특별하고 막중한 책임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대학생들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금지되었던 책들을 번역하고 배포했으며 농촌과 공장 등지로 숨어들어가 ‘교육’을 담당했다. 당시 대학생은 소위 ‘지식인’, 하다못해 ‘세미’ 지식인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러한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학생에게 70~80년대와 같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대학생의 본분은 고등학생과 마찬가지로 ‘공부’이다. 착실한 공부를 마친 후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한 사람 분의 GDP를 생산하고, 고작해야 두 명이 결혼하여 최소 두 명의 아이를 낳을 책임이 요구될 뿐이다. 물론 이 요구사항이 쉽거나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 사회에서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해내는 것은 갈수록 어렵고 팍팍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우리가 진출할 사회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을 기대받은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학 입시 면접을 볼 때 정도...?


사진1. 학교에 수많은 취업, 채용홍보, 채용 박람회 홍보 현수막 사진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학생회가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 지점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대학생에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길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사고는 ‘지양되고’ 있다.



정치적이지 않은 학생회?

바야흐로 탈정치의 시대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캠퍼스일지 모른다. 검찰개혁을 이끌 법무부 장관으로 조국이 내정되면서 그의 자질에 대한 비판이 뜨거웠다. 조국이 그의 딸과 관련하여 입학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에 대해 서울대와 고려대, 그리고 연세대 안에서 열린 시위들은 앞다투어 “정치색을 철저히 배제하겠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 세력의 개입이 없는 ‘순수함’을 내세우며 해당 학교 재학이나 졸업 여부를 검사하는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어떻게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 대학생들이 인식하는 ‘정치적임’이란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민주화라는 가시적이고 거시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학생회는, 거시 담론이 사라진 시대를 맞아 새로운 책임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학생회가 택한 길은 바로 ‘대학생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당사자성을 가지는 문제, 다시 말해 기숙사나 등록금 문제, 혹은 학교의 직접적인 학생 권리 침해에 대응하는 문제들 말이다. 더불어 선거본부들은 거창하게 느껴지는 ‘정치적’인 의제들을 배제하고 학생들의 생활에 표면적인 이득을 주는 데 집중한 복지정책의 비율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를 인지한 연세대학교의 학생회들 또한 이 흐름을 충실히 따라 변신을 꾀했다. 우리 학교에서 그 시작을 성공적으로 끊은 것은 제53대 학생회 <Collabo>였다. <Collabo>는 전대 학생회가 국정화 교과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것을 비판하며 모든 사업을 투표에 부쳐 찬반을 물은 뒤 시행하는 ‘정책투표제’를 들고나왔다. 총학생회가 특정한 입장을 전혀 가지지 않고 무조건 학생 과반수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Flow> 또한 정책자료집의 첫 페이지 ‘기조’에서 “현재의 학생회 구조는 30여 년간 바뀐 시대의 흐름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고 평가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학생회”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가 아니라 ‘대학생의 문제’에 집중하는 학생회, 이것이 바로 최근 몇 년간 이어져 온 학생회 트렌드였다.

문제는 이 ‘대학생의 문제’의 범위와 개념이다. 대학생의 ‘당사자 운동’으로 시작했던 ‘대학생의 문제’의 개념은 갈수록 더 좁아지고 좁아져 학생회의 역할을 ‘학생복지위원회’ 정도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학생사회는 현재 어떤 문제에 대하여 ‘A라는 의견을 가진 선거본부’와 ‘B라는 의견을 가진 선거본부’ 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문제를 언급하는 선거본부’와 ‘언급하지 않는 선거본부’ 중에서 선택하는 상황에 있다. 그리고 이때 대학생의 주거권, 교육권, 노동권, 의사결정 참여 등을 언급하는 일이 ‘정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외면받으면서 학생회의 의제들은 ‘모두의 환영을 받을 일’로만 국한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울대학교의 제61대 총학생회 <내일>의 정책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학생 식당에서 볶음밥을 시켰을 때 ‘짬뽕 국물’이 나오게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대학생의 문제’는 좁아지고 좁아져서 결국 짬뽕 국물만 해졌고, 마라탕만 해졌다. 

 이에 대해 “요즘 애들은 글쎄 이렇답니다!” 하는 말들이 이러쿵저러쿵 많지만, 사실 이렇게 된 건 대학생들이 나태하거나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다. 사회는 대학생에게 ‘한 사람분의 GDP를 생산할 것’ 혹은 기껏해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보다는 많은 GDP를 생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한 사람 몫’을 해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소위 청년 체감실업률이라 불리는 확장실업률은 지난 4월 25.2%로 측정되었다. 체감실업률에는 주 근로시간 36시간 미만 취업자 중 추가 취업을 희망하는 자, 비경제활동인구 중 4주간 구직활동은 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취업이 불가능했던 자, 4주간 구직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취업을 희망한 자 등이 포함된다. 가장 넓은 범위의 고용보조지표로 이들을 모두 실업자라 단정하는 건 어렵다. 어쨌거나 한국 청년 4명 중 한 명이 추가적인 채용을 원하거나 구직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과 학자들은 세계적으로 1981년부터 1996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배부른 소리로 느껴지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정치적’이라는 표현이 멸칭이 된 데는 경제적인 이유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 자체의 탓도 있다. 한국 원내 정치는 오랫동안 간편한 색깔론에 기대 왔으며 그 틀에 들어가지 않는 문제들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해왔다. 모든 문제를 ‘반공’ 이데올로기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청년의 사정 같은 것은 그다지 표를 모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반공주의의 이분법이 지나간 후에는 다른 이유로 정치가 외면받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 후보자들이 가지고 나온 공약들을 보면 도무지 여당과 야당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정당은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집단’이 본질이다. 정당 간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며 유권자는 자신이 동의하는 의견을 가진 정당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원내 정당들은 자신만의 일관된 주장을 가지고 있다기보단 무엇이든 간에 표를 끌어모을 수 있는 주장을 그때그때 내세운다. 정치의 목적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권력 확보 수단일 뿐인 상황에서, 가뜩이나 기존의 원내 정치 의제들에 공감하지 않는 청년층이 ‘정치’를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과연 2019년의 대학생들은 정말로, 정치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정치 

‘노오오오력’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지 오래됐다. ‘노력’을 과장되게 강조하며 읽는 신조어다. 이 단어는 청년이 처한 모든 문제에 “노력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기성세대의 해결책을 비꼬는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얌전히 졸업하여 한 사람 분의 GDP, 그리고 두 명 이상의 인구를 생산’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 ‘소확행’과 ‘탕진잼’이 유행하는 현상을 보며 젊은이들이 야망 없고 대책 없다 말하는 이들은 ‘꼰대’ 호칭을 피하기 힘들다. 우리는 우리가 기성세대와는 다른 우리만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내 정치에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는 일부조차도 원내 정치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의제 자체가 기성 정치인의 관심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정치에 활발히 참여하는 청년들의 관심사는 여성주의, 환경, 성 소수자, 비거니즘 등인 경우가 많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는 최근 UN 기후정상회의 연설에서 "당신들이 헛된 말로 제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다"며 세계 지도자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음을 규탄했다.

 최근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는 밈(meme) “OK, boomer”는 소위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기성세대를 비꼬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밈이란 우리나라의 ‘짤방’과 비슷한 뜻으로 온라인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상황을 웃긴 사진과 멘트로 대신하는 이미지 파일을 말한다. 뉴질랜드 의회에서 20대 여성 의원인 클로에 스와브릭(25)이 자신의 연설 도중 야유를 보내는 기성세대 의원들에게 “OK, boomer”라고 말하고 무시한 데서 비롯됐다. 이 밈은 인터넷 공간뿐 아니라 티셔츠나 머그잔 등으로 제작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2. 검은 글씨로 ‘OK, Boomer’가 크게 적혀있는 하얀 머그컵


자신의 일상적인 욕망을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오늘날 대학에 다니고 있는 우리의 특수한 요구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 요구들이 ‘정치’에 포섭되지 않거나, 기존에 만들어진 정치판의 이분법에 구겨 넣어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점은 학생사회 또한 이 지진한 원내 정당의 이분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운동권-비권, 협력-투쟁, 복지-‘정치’와 같은 이분법은 편리하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들은 단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선거운동본부를 깎아내리는 데만 사용되고 학생사회가 처한 현실이나 해결해야 할 일상의 문제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공천 파동’이니 ‘표밭’이니 하는 기성 정치에 우리가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정치공학적인 전략만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진영이나 당파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의견을 겨루는 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핵심에 우리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누군가는 신촌의 높은 월세에 불만을 표한다. 누군가는 듣고 싶었던 수업이 열리지 않아 실망했고, 누군가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트레비앙에 텀블러를 가지고 갔으며, 또 누군가는 맛나샘에 새로 도입된 비건 라면을 주문했다. 오늘도 중앙도서관 앞과 학생회관 로비 기둥에는 저마다 다양한 대자보들이 붙는다. 다만 이 모든 몸짓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졸업과 함께 잊힐 뿐이다.

우리가 처한 문제 중 많은 것들이 대학생 개인이 해결하기 어렵거나 해결에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이 몸짓들을 계속해서 포착하고, 증폭시키며, 모아서 의미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이지 않은 학생회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를 만들 학생회가 필요하다.




간식행사를 넘어서

(이 부제목은 2019.11.6-17 서울시립미술관 SeMA창고에서 진행된 전시명 ‘간식행사를 넘어서 -2010년대 대학 총학생회 아카이브’에서 따왔다.)

지난 11월 9일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 ‘청년허브’에서는 <총학생회 2020년대에도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간담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는 하인혜 한국 대학 학생사회 평론가, 신민준 전 홍익대학교 제52대 총학생회장, 황지수 현 숙명여자대학교 제51대 총학생회장 등이 패널로 참석하여 2010년대 총학생회들의 활동을 돌아보고, 거시 담론이 사라진 시대의 총학생회 비전에 대하여 토론했다. 패널들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학생회 하기’에 대해 자조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비록 대부분의 학생회가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2020년대에도 학생회가 학생사회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길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2020년대에도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학생사회를 뾰로롱 바꾸는 마법의 주문은 아닐지라도, ‘학생회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래서 ‘학생회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방향을 제시해본다.

우선, 이상하게 사회보다도 더 보수적일 때가 있는 학생회의 운영에 변화가 필요하다. 갈수록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소수의 ‘대표자’로 대표하는 것이 행정적 공백과 정책적 소외를 만들 수밖에 없다. 정부와 지자체들도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거버넌스(Governance)’에 주목하고 있다. 거버넌스란 대표가 아닌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의제를 다룰 수 있도록 정부 행정을 열린 구조로 운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책을 만들거나 집행할 때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간담회 등을 운영하거나 적극적으로는 당사자들이 직접 정책을 만들도록 한다. 다양한 이슈의 당사자가 될 잠재성을 가진 시민들이 언제든 자유롭게 모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고 네트워킹을 하는 일들도 거버넌스에 포함된다. 비슷한 상황이 학생사회에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 갈수록 캠퍼스의 문제들 또한 너무나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Flow>와 <Catch> 모두 후보가 학생사회와 학내 이슈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강조했다. 그러나 몇몇 ‘엘리트 대표자’가 학생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는 끝났다. 학생들은 학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총학생회를 찾아가기보다는 사안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나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대책위원회’, ‘~모임’, ‘~네트워크’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학생회는 학생운동 시절처럼 스스로 선봉에 나서 모두를 ‘이끌’ 것이 아니라 각 사안을 가장 잘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는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때로는 이런 학생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게는 간담회를 열고 공간을 제공하는 방법부터 크게는 총학생회의 이름으로 연대하고 총학생회의 집행력으로 적극적으로 사안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복지’로 이룰 수 있는 ‘복지’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학생의 주거 문제나 우리 학교의 반복되는 교육권 침해 문제 등은 분명히 연세인의 일상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단순히 식당에 새로운 메뉴를 도입하거나 새로운 어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미시적인 복지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대학생 개인이 해결하기 어렵고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오히려 총학생회의 손길이 더욱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복지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뿅” 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복지는 언제나 ‘정당한 몫을 위한 싸움’을 동반하며 이것은 캠퍼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싸움은 학교 본부에 투쟁하는 일일 수도 있고, 설득과 협의를 거치는 일일 수도 있다. ‘학교 본부와 협의하는 비권’과 ‘학교 본부에 투쟁하는 운동권’과 같은 낡고 비현실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본질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학의 학생회는 대학생의 문제에 집중하되 학교 밖의 존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제 ‘대학생의 특수한 책임’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는 데에 ‘사회 구성원 한 사람분의 책임’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오늘날 대학생은 특수한 지위라기보다는 미래에 어떤 지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과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를 바꾸어 말하면, 대학생이란 자신이 앞으로 ‘무언가’가 되어 나가게 될 사회에 대해 누구보다 폭넓게 질문하고 참여할 수 있는 셈이다. 학생회가 ‘대학생의 문제’를 외치며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변화에 집중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정문에서 북문까지, 그리고 서문에서 동문까지의 안에 갇혀서는 어떤 ‘대학생의 문제’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지난 11월 6일 제55대 학생회 선거의 정책자료집이 공개되었다. <Flow>의 뒤를 이을 총학생회를 뽑는 이번 선거는 <Mate> 선거운동본부의 단선으로 치러진다. 정책자료집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교내 익명 커뮤니티 게시글에는 “그래도 총학 없는 것보단 있는 게 간식이 더 나음”이라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았다.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삶에 다소의 이득을 줄 수 있다는 <Flow>의 메시지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된 모양이다. 자, 이제 우리는 총학생회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간식행사를 넘어서 말이다.




편집위원 이해일(dlgodlf00@gmail.com)




[참고문헌]

1. “그들에게 축제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연세춘추, 2019.09.22.

2. 먼지, 「응원단,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 연세편집위원회, 《연세》, 121호, 2019년 가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웹사이트], ‘학도호국단’ 항목. 

4. “대학 배지? 그런 것도 있어?”, 《시사IN》, 2012.01.18.

5. “내년 대학진학률 24%선”, 중앙일보, 1987.05.12.

6. ““순수성 훼손 말라, 정치색 OUT”… 서울대·고려대, ‘조국 딸 논란’ 촛불집회”, 조선일보, 2019.08.23.

7. “그레타 툰베리: 기후 변화를 놓고 세계 정상들과 한 판 붙은 10대”, BBC Korea, 2019.09.28.

8. “Teens use ‘Ok, boomer’ to fire back at older generations’ criticism”, NBCNews, 2019.10.29.

9. “여기 저기서 말하는 거버넌스, 과연 무엇인가?”, 오마이뉴스,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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