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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Dec 27. 2019

<122호>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축제 준비한 이야기 / 기고자 김윤진



    내가 기획하게 된 인권축제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로 다가가지 않길, 항상 염려하며 축제를 준비했다. 축제를 기획하는 긴 과정 동안 나의 날카로움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아파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내가 아직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축제에서 누군가가 소외되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했다. 설령 악의가 없을지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아버렸다.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어 평생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는 요즘이었고 갑작스럽게 큰 책임을 떠안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던 때였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계속되는 백래시[1]에 나는 압도되어 버렸다. 어리바리한 신입생이었던 나에게 총여학생회 재개편과 폐지가 논의되던 작년의 캠퍼스는 현실이된 악몽처럼 느껴진다. 그 당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에 시달렸다. 에브리타임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던 익명의 인신공격들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 그 타깃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백양로를 지나다니는 남자들이 다 총투표를 찬성했을 것 같았고, 내가 가진 가치관이 버거웠다. 아직도 슬픔은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고, 난 최악을 가정할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여성주의자가 된 채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두는 생각


    다행히 제3회 인권축제 <-EVER!>는 축제의 목표를 달성했다. <-EVER!>의 전신인 제2회 인권축제 <다시만난세계>로 인해 촉발된 은하선 연사 초청 사건, 총여학생회 재개편 움직임 그리고 총여학생회의 회칙 삭제 사건까지. 그리고 익명 커뮤니티에 범람하던 혐오 발언들, 그로 인해 상처받고 곁을 떠나던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 내 백래시로 인해 제2회 인권축제 때 참가한 단위 중 많은 인권단체들이 사라지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경[2]에 이르렀었다. 학내 인권 운동과 그 움직임이 둔화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체감하고 있었으나, 학내 인권단체에게 실질적으로 참여 의사를 묻는 과정에서 나는 그 숫자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축제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활동하는 친구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리로 만드는 것이 이번 축제의 목표였다. 사람들이 축제가 열리는 백양로를 갸우뚱하며 지나가기도 했지만, 나는 이 소소하지만 중요한 목표는 달성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아쉬움과 반성, 그리고 학내에서 인권을 이야기하는 축제의 기획단장으로서 느낀 부끄러움은 여전히 내게 고여있다. 물론, 내가 앞으로 활동을 하는데 이와 같은 소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이 우울하면서 부끄러운 생각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글로 남겨두려고 한다.


 


조심스러운 시작


    “그래도 2019년이 가기 전에, 축제를 다시 한번 해야 하지 않겠어?” 단순한 의무감에 의해 인권축제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작년 인권축제를 기점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학내 대부분의 인권단체, 동아리에게 축제 참여 요청 메일을 보냈다. 예산과 인력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항상 우여곡절이 있었던 <PRISM>에서의 활동을 떠올리면, 무모한 것은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의연하게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작년에 참가했지만, 지금은 활동을 중지한 상태이거나 없어진 인권단체들도 존재했다. 학내 인권단체들과 사람들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는 가시적인 위기감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작년만큼 단위별로 비용을 넉넉히 지원해주지도 못하고, <PRISM>이 참여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여론의 타격을 입을까 주저하는 단위들도 많았다. 학생회 단위의 경우가 대부분 그러했다. 선출직으로서 사람들의 선을 넘은 비난과 조롱을 감내하면서 축제에 참여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단체를 이끄는 실질 인력이 너무 적어서, 이미 업무 과중 상태라 참여를 못 하겠다는 단위도 있었다. 그런 점이 날 씁쓸하게 했지만, 너무도 이해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나와 함께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으려고 노력했다. 작년 축제처럼 혐오 세력과 마찰이 빚어지고, 교내에 큰 파장이 또다시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도, 함께 하겠다 나서준 사람들이었다. 


달갑지 않은 마찰


    학내 인권단체들이 뭉쳐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 인권센터는 ‘인권문화축제’라는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7월 말 인권센터가 축제 개인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재학생 전체에게 발송했고, 그제야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비슷한 축제가 비슷한 시기에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인권센터와 축제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학교의 도움 없이 동아리, 학생회들끼리 축제를 여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학교와의 마찰로 인해 인권축제가 두 개로 쪼개지게 되었을 때, 학내 인권단체들이 앞으로 가지게 될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엄연히 연세대학교라는 거점을 가지고 활동하는 단체들인 만큼, 학교의 원활한 협조는 단체의 지속성과 활발함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무리 학생자치를 존중하고 그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선은 언제든 넘을 수 있다. 인권단체의 장소 대관이나, 지도교수 선임 문제에 관여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단과대 학생회 회장을 만나서 소속 동아리의 인준을 철회하라 회유할 수도 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이분화된 축제가 시간이 지나서도 지금의 형태를 가질까 걱정스러웠다. 우리 때문에 제4회 인권축제, 제5회 인권축제가 학교와 분리되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제3회 인권축제 기획단인 우리의 판단이었다. 교내에서 인권운동을 할 때, 학교는 협조를 구할 대상이지 배척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이유로 학교로 대표되는 인권센터와 웬만하면 축제를 같이하고 싶었다. 더불어 비용과 행정 업무 처리에서는 인권센터의 편의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여러 번 인권센터장, 인권센터 조교, ‘인권문화축제’를 기획하는 인권센터 산하의 학생위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인권센터와 의견충돌이 생겼던 큰 지점은 각 단체의 행보에 대한 검열이었다. 인권센터 측에서는 우리가 만든 기획안 상으로 소수자, 약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축제를 개최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인권센터장은 “총여에서 주최한 행사(제2회 인권축제)에서의 논란처럼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면 섣불리 그런 접근을 하기보다, 온건하게 가급적 많은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센터는 작년 총여에서 주최한 인권축제처럼 어떤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들에겐 학내 대다수의 공감과 온건을 끌어내는 시작이 ‘축제 기획안의 검열’이었다. 


    처음 인권센터 조교는 나에게 제30대 총여학생회 <PRISM>의 축제 부스 기획안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며 검열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에서 조교는 “모든 참여 단위의 기획안을 확인해야 하며, 모든 단체가 현재 총여의 상황을 옹호하는 견해를 축제에 내놓을 시에 축제를 같이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 <PRISM>의 경우는 신변상의 위협을 우려해 부스제에 참가하지 않고 전시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전시의 내용도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기보다는 총여학생회의 역사를 되짚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참여 단위의 기획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한 단체를 콕 집어 검열한다는 말은 나에게 위험하게 다가왔다. 검토 혹은 검열을 통해 각 단체가 기획한 프로그램 전반을 엎어버리거나 취소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인권센터에 위임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은 나에게 작년 은하선 연사 초청 사건을 은연중에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인권축제를 준비하는 기획단에 속한 9개의 인권단체의 검열을 허용해주라는 인권센터의 선전포고는 너무도 위험한 동거처럼 느껴졌다. 


    검열은 곧 탄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기획단 모두 이견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인권센터의 ‘인권문화축제’와는 별개로 인권축제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마지막 면담 자리에서 축제를 같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거절 의사를 표했을 때 인권센터의 반응은 예상했던 바와 같이 싱거웠다. 내 입장에선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나 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진 것 같아 속이 굉장히 쓰라렸다. 


     


신경 쓰이는 자잘한 업무


    그 뒤로도 축제를 위해 굉장히 사서 고생을 했다. 목에 피켓을 하나 걸고 홍대와 이태원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제 공연자를 구하기도 했고, 신촌 주변 상권을 돌면서 후원 요청서와 기획안을 뿌렸다. 상권 중에서도 비건 음식이 가능한 식당을 찾기 위해 이대, 합정, 홍대까지 다녔다. 인천 퀴어 문화 축제까지 찾아가서 축제 때 부스를 차려줄 단체를 물색하기도 했다. 또한 기업 후원과 학외 인권단체 섭외를 위해 메일을 100개 넘게 썼다. 그냥 재밌게 노는 대학 축제 같았으면 내키는 대로 기업과 단체들에 연락을 했겠지만, 인권 축제이다 보니 기업들의 경영윤리나 단체의 성격까지 고려를 해야 했고 더욱 후원을 받기가 까다로웠다. 


    더군다나 후원금이 모이지 않아서 축제 2주 전까지 최종 예산안을 확정 짓지 못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 축제를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백양로와 언더우드기념도서관 앞뜰 대관을 위해 한 달 넘게 준비를 했음에도 일주일 전에야 겨우겨우 대관이 완료됐었다. 일개 학생으로서 학교 측의 신속한 행정업무를 바라기엔 문턱이 너무 높았다. 공간 대관을 위해서는 지도교수의 동의가 필요하나, 우리는 당연히 지도교수가 없기 때문에 교수님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또한, 기획단은 여러 동아리, 학생회들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모호해 다른 행사보다 더 절차가 복잡했다. 다른 학생회였다면 학생복지처에 공문 하나 보내면 끝날 일이었으나, 우리는 학생복지처에 기획안을 제출하고 지도교수 동의서를 작성해야 했으며, 소속 직원과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일일이 해명(?)하는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별거 아닌 일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자잘한 잡음들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괴롭혔고, 그 때문에 아주 답답하고 예민한 상태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학교 측에서 공간 대관을 끝까지 안 해준다면 백양로 앞을 무단으로 점거해 축제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누가 징계를 받을지 생각도 했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풍성한 축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쓰여야 하는 나의 에너지는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바랐던 축제의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축제를 준비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정신없이 두 달여 동안 축제 기획을 했었다. 인권축제니까 다양한 권리들이 다뤄지길 바랐고, 축제에서 보이지 않는 의제들이 최대한 적을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 축제의 테마가 인권인 만큼, 축제 안에서까지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고, 한정적으로 다뤄지는 의제들 속에서 다른 것들이 숨겨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 일들은 내가 학교에 다니는 내내 진절머리나게 경험을 하고, 저항했던 것이었기에 내가 만들어나가는 축제에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제3회 인권축제 <-EVER!> 부스제 참여 단위와 프로그램 소개 표


     나 또한 너무도 부족한 인간이기에 내가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존재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모두 축제의 장에 함께 있었으면 했다. 또한, 축제가 재밌길 원했다. 강연이나 포럼도 재밌지만, 생동감 넘치고 활기찬 축제를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평소에 이야기하지 않던 것들을 서로 대화하는 자리가 되면서도, 축제를 준비하는 우리가 재밌는 행사를 만들려고 했다. 만드는 사람이 재밌어야 참여하는 사람도 재밌을 것이고,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인권을 가깝게 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권 운동 하는 사람들은 항상 고난을 겪고, 매일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깨부수고 싶었다. 우리들이 유쾌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축제 참여자들이 어렵고 진중하다고 생각하는 인권이 조금 더 쉽고 활기차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했다. 더불어, 작년부터 너무나 힘든 가시밭길을 걷던 인권단체들과 친구들이 진정으로 이번만큼은, 마음 놓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었다.




    ↑ 부스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사람 두 명이 알바상담소 부스에서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스 앞에는 ‘일할 때 이것만은 꼭 지켜요! 알기 쉬운 노동법 Q&A’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탁자 위에 ‘임금, 근로계약, 산업재해, 근로시간’이 적힌 돌림판이 올라가 있다.


     


축제 당일 느꼈던 감정들


    9월 30일 오전 7시, 나는 축제에 쓰일 물품들을 실어 용달에 옮겨야 했다. 그리고 개회사에 쓰일 모니터를 대여하기 위해 합정을 들렀다. 오전 10시에 축제 시작인데 아침부터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오전 12시가 다 되어서 국제캠퍼스에 도착했다. 학교가 신촌-송도로 이원화되는 바람에 운송비, 천막비 등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했고, 거리도 무진장 멀어서 아침에 속으로 엄청 욕을 해댔다. 


    우리 축제는 기본적으로 부스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권단체들이 주제를 가지고 부스를 세우고, 부스에서 팸플릿에 도장을 찍어준다. 안내 부스에서는 도장의 개수에 따라 솜사탕을 만들어 주거나, 뽑기를 해서 상품을 준다. 뽑기를 하면 식사권이나 콘돔을 선물로 드리는데, 식사권이 모두 신촌 주변 상권이라 국제캠퍼스 참가자들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여서 문의를 받았을 때 엄청나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권을 뽑으신 분들이 계실 때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가 아무리 팸플릿을 만들 때 고심하고, 국제캠퍼스에도 부스를 다양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결국은 진짜 그곳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생각했다.




↑ 제3회 인권축제 <-EVER!>의 이튿날 전경. 백양로 오른쪽 보도블록에 부스들이 쭉 들어서 있고 사람들이 부스를 참여하는 모습. 백양로 가운데 잔디 길 위에 축제 부스에 대해서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 옆에는 퀴어 굿즈 <라온>의 부스가 보이고, 무지개색 두건을 둘러쓴 강아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 뒤로는 어렴풋이 노동법에 관한 선간판이 보인다. 


 


    축제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학내 노동조합에 방문하려고 시도했으나, 힘에 부쳐서 찾아뵙지 못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 휴게 공간 이슈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었고, 우리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했다. 그래서 축제를 같이 할 수 있었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해 굉장히 아쉬웠다. 10월 2일, 축제 기획단 부스에서 재실을 하는 와중에 학내 청소노동자들께서 학생회관 앞 계단에 모여 집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했다. 백양로를 거닐 때마다 빨갛고 하얀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종종 보곤 했지만, 찰나의 호기심만 가진 채로 무심히 지나갔었다. 그때의 내가 지나쳤던 그 현수막 속의 사람들이 청소 용역업체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인터넷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연세대 청소노동자’, ‘코비’, ‘노조’와 같은 단어를 검색해서 관련 기사는 단 한 건도 찾을 수가 없었고, 빨간 조끼를 입은 청소노동자 사이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련의 부끄러움이 한차례 밀려왔다.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학교에서 인권 축제를 기획하고 있는 내가 학내 청소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학보에 기사 하나 없었고, 학생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 그중에서 내가 관심이 없었다는 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연대 발언 신청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집회는 한 시간 남짓 동안 이어지다 끝이 났다. 


    알찬 축제를 만들기 위해 밖으로 인권단체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나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무심했다는 사실에 많이 반성했다. 10월 1일에는 ‘인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집회가 있었다. 인권축제 기획단인 우리는 학생회관 앞에 설치한 무대와 음향 장치를 집회 주최 측에게 빌려줬었다. 이틀 연속으로 판이하게 분위기가 다른 집회에 참석하고, 경험했다. 학생들이 주축으로 이뤄진 집회, 취재하러 온 꽤 많은 기자와 다뤄지지 않는 집회. 무엇이 더 중요하다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기억에 남는 아쉬움


    축제가 하루하루 끝날 때마다 피드백 회의를 진행했다. 온종일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기에 모두 피곤했지만, 매일 회의를 한 덕분에 다음날은 더 발전된 축제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부스제가 작년보다 더 알차진 것과 같이 긍정적인 점도 많았지만, 개선 사항 중에 가장 공감 갔고, 축제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인권영화제였다. 인권영화제 같은 경우는, 영화 주제를 인권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선정하고, 간식과 함께 영화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평소에 영화상영회를 진행하는 방식대로 공간을 대관하고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리어프리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권축제에서 진행한 모든 행사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획이 되길 바랐는데 배리어프리를 고려하지 못해 씁쓸했다. 영화를 상영했던 공간도 앞자리를 제외하곤 계단식이라 휠체어가 이동할 수 없었고, 수어 통역과 더빙, 자막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영화를 딱 하나만 상영하더라도 학생회관 앞에서 모든 것을 갖추고 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이 외에도 홍보의 부족, 기획단 체계의 부실함 등이 주요한 개선 사항이었다. 이번 제3회 인권축제 기획단 중에선 작년 제2회 기획단원이었던 사람이 나 혼자였지만, 한 명이라도 이어졌기 때문에 작년에 느꼈던 아쉬움을 조금은 개선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내년에도 이번에 같이 한 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축제를 기획했으면, 우리가 했던 피드백과 기획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렇게 누군가는 졸업하고, 누군가 입학해서 새로이 축제를 기획하게 되더라도 재작년보다, 작년보다 더 인권축제다운 축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내년에도 또 축제 기획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축제가 끝난 지 한 달 정도 지난 이 시점에서도 난 더욱 발전된 인권축제를 상상하고 있다. 아마 연세지 기고를 통해 다음 대에 어느 정도 우리의 생각이 전달될 수 있다고 믿기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내년 축제가 기대된다.




한 달 전을 기억하며


    인권센터가 진행한 행사를 봤을 때는 굉장히 통쾌했었다. 센터 측의 목표가 무색하게도, 일반 학우들에게 인권이 와닿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비가 살짝 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제3회 인권축제는 내년을 기약하며 잘 마무리되었다. 축제를 기획하는 과정이 나에겐 약간 암담했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고, 아쉬운 일은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부끄러워하는 나를 다독인다.


    만약 제4회 인권축제를 준비하러 누군가 조언을 구하러 날 찾아온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섣불리 ‘열심히 해라.’ 혹은 ‘하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축제를 준비하는 동안 축제는 내 전부였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길을 걸을 때에도 항상 ‘축제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만을 고민했다.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고, 스펙으로도 남지 않는 이 일을 감히 추천해줄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들과 경험이 남았다.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얻었고,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지 알게되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짤막한 인생에서 한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내 앞으로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우리 학교를 선택한 점, 입학하자마자 총여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점이 나의 현재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나는 학내 여성주의자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우리가 학교를 바꾸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당신이 내가 느낀 감정에 공감하고, 위안을 얻길 바란다.


     


축제 진행 타임라인 


7/20 교내 인권단체들의 연대로서 제3회 인권축제 기획단이 꾸려짐.

7/22 0차 전체 기획단 회의 진행.

7/29 인권센터 주관의 인권문화제의 기획단원 모집 공고가 게시됨. 인권센터 조교와 연락.

7/30 인권센터장과 인권센터 조교, 제2회•제3회 인권축제 기획단장이 면담을 진행. 제3회 인권축제 기획단 1차 긴급회의 진행.

8/1 인권문화제를 기획하는 주체인 인권센터 학생위원(=앰버서더) 와 연락.

8/5 앰버서더와 회의.

8/6 1차 전체 기획단 회의, 인권센터ㆍ앰버서더와 면담, 인권센터의 인권문화제와 별개로 제3회 인권축제를 하기로 함.

8/14 2차 전체 기획단 회의와 사전 세미나를 진행

8/28 사전 세미나 진행

8/29 3차 전체 기획단 회의 진행

9/6 1차 대표자 회의 진행

9/9 4차 전체 기획단 회의 진행

9/18 2차 대표자 회의 진행

9/25 5차 전체 기획단 회의 진행

9/29 축제 최종 점검 회의 진행

9/30 연세대학교 제3회 인권축제 <-EVER!> 국제캠퍼스에서 진행

10/1~10/2 연세대학교 제3회 인권축제 <-EVER!> 신촌캠퍼스에서 진행





                 


[1] 사회 변화, 진보에 대한 대중의 반발. 페미니즘을 향한 학내 비난 여론, 폭력적인 움직임을 일컫는 용도로 사용했다.

[2] 2018년, 2019년 활동중단 인권단체 현황 비교 표






기고자 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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