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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3. 2020

<124호> 온라인 공간을 다루는 《연세》의 자세

편집위원 이해일



들어가며

    작년 여름 121호의 편집이 막바지이던 어느 날, <그런 소녀는 없다>를 쓴 편집위원이 단체 카톡방에 도움을 청했다. 당시 그 편집위원은 미성년자를 성적 대상화한 베스킨라빈스 광고를 계기로 ‘소녀’라는 사회적 환상에 대한 글을 쓰던 중이었다. 그는 “논의한 대로 광고 모델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성희롱 발언을 캡처해서 넣었는데, 어디까지 모자이크를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해당 광고가 성적인 함의가 없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그 광고로 촉발된 익명의 성희롱 글이 다수 존재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캡처를 삽입했다. 그러나 막상 ‘어디까지’ 실어야 할지는 잠시 갑론을박을 거쳐야 했다.

    연세지는 이 외에도 지속해서 온라인 공간의 혐오발언과 이를 기반으로 자라나는 혐오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119호 <총여 폐지, 생산적인 절망 그 끝에서>와 121호 <우리 안의 합법만능주의>는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벌어진 혐오발언을 지적했다. 121호 <I’m doing this for you, superstar>는 여성 서사 작품에 대한 악플을, <그런 소녀는 없다>는 미성년자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이루어지는 익명 커뮤니티를 언급했다. 이 글들은 공통적으로 몇몇 대표적인 혐오발언 캡처와 함께 문제 제기를 전개한다. 문제적 게시글의 예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고,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직접 보여주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조금 게으르진 않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그동안 기성 언론의 보도 방식에 여러 번 분통을 터뜨렸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보도(“의사 꿈꾸던 대학생…”),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게 하는 보도(“피해자 중 연예인도 있는 것으로 밝혀져”), 성폭행 사건에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단 보도(“만취한 20대 여교사 몸 속…”)까지…… 이제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리면 언론들이 어떤 부적절한 보도를 쏟아낼지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학내 언론인 데다 계간지로서 조금 느린 호흡의 글을 추구하는 연세지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즉각적 파급력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익명 커뮤니티의 행태를 다뤄오면서도 우리에게 충격적이고 문제적인 발언을 보도할 때를 위한 일관된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 부끄러웠다. 

     그러던 중 미국 데이터&소사이어티 연구소에서 발표한 미디어 보고서 <The Oxygen of Amplification>을 읽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를 배경으로 인터넷 공간의 차별과 혐오가 전통 미디어의 보도를 매개로 성장한 과정을 짚고 있다. 저자 휘트니 필립스는 인터넷 공간을 보도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잘못된 보도가 어떤 부작용을 만드는지, 그래서 뉴스 미디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탐구한다. 연세지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가 온라인 공간을 다룰 때의 자세를 고민해보고자 하여 이 글을 쓴다.



증폭할 것인가 증폭하지 않을 것인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진 일을 남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터넷에서 확산하고 있는 무언가 나쁜 일을 보도하고자 하는 언론인은 마치 불운의 징조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재난영화 도입부의 엑스트라1이 된 기분을 느낀다. 아무리 공공연한 현상이더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기류’나 ‘분위기’를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피드 아래로 밀려나고 매일 새로운 농담이 생겨나는 사이버 공간은 두말할 것이 없다. 이때 보도자는 다루고자 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게시글이나 이미지를 직접 증거로 제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인터넷에 말과 사진은 쏟아지고, 그중에 지금 벌어지는 일을 잘 보여주는 데다 독자의 눈길까지 끌 수 있을 만한 재료를 구하는 건 간단하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 보도는 나쁜 일을 알리고, 경고를 하기 위한 선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현상을 비판하고 관심을 촉구하려는 보도가 오히려 혐오발언에 힘을 주고 소수자에 대한 괴롭힘을 심화시키는 문제 말이다.

    이와 같은 문제가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미국 사회에서 발생했다. 2016년 전후로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an’과 ‘에잇챈8chan’을 기반하여 ‘밈meme’이나 ‘트롤링trolling’이라는 이름으로 확산되는 백인우월주의 농담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포챈은 우리나라의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처럼 여러 주제의 보드board로 이루어진 대형 익명 커뮤니티로 대부분의 인터넷 농담이나 밈의 생산 공장이다. 이곳에서 유행하는 은어나 이미지는 몇 단계의 전달을 거쳐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이 보다 양지에 있는 SNS까지 옮겨온다. 문제는 이 중에 교묘하게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가짜 뉴스를 담고 있는 이미지나 농담이 함께 섞여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웃긴 밈’으로 여겨지고, 또 금방 사라진다.

    트롤링이란 처음에는 온라인상에서 타깃을 정하여 도발하다가 그가 분노나 좌절 같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 비웃으며(이를 lurz라고 부른다) 사라지는 장난을 의미했다. 당한 사람은 격한 논쟁을 벌이다가도 이들이 갑자기 웃으며 사라지면 ‘아, 트롤들이잖아.’ 하며 허탈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트롤링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갈수록 넓어져서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하는 행동부터 안티 페미니즘 발언, 그리고 모순적으로 페미니즘 발언까지도 일컫게 됐다. 우리나라로 넘어온 ‘트롤링’은 특히 게임에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을 의미한다. 본래 뜻과는 많이 멀어진 모습이다. 이처럼 트롤링은 모든 걸 의미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차별적인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냥 트롤링일 뿐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냐!”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의 차별과 혐오는 밈과 트롤링이라는 가면을 쓴 채 조금씩 더 격렬해지고 널리 퍼졌다.

    저널리스트들은 사이버 공간의 혐오발언과 괴롭힘을 비판적 어조로 보도함으로써 대중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경고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를 키워주었고, 그들을 집결 시켜 세력화하고 말았다. 필립스는 이 현상이 가시화된 단적인 예로 ‘Deplorables’와 ‘개구리 페페’ 사건을 보여준다.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운동본부는 사이버상의 ‘대안우파’들과 트럼프의 관계를 공격하고자 했다. 미국에서 대안우파는 2010년 백인우월주의자인 리처드 스펜서가 ‘Alternative Right(번역━대안 우파)’라는 웹사이트를 만든 이후로 사이버 상에서 극우, 백인우월주의자, 남성권 운동가, 트롤, 반페미니스트주의자, 반이민운동가, 그리고 단순히 인터넷 밈을 즐기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집단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되어왔다. 

    클린턴은 연설에서 대안우파를 공화당을 지지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라고 프레이밍하며 “일군의 한심한 사람들(basket of deplorables)”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자신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신나게 스스로를 ‘deplorables’라고 부르며 각종 밈을 생산했다. ‘못 말리는 우리!’ 정도의 느낌으로 의미를 재전유 한 것이다. 또한 클린턴 캠프는 트럼프와 대안우파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구리 페페 캐릭터가 사이버 공간에서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는 기사를 포스팅했다. 정체가 모호하던 대안우파는 ‘deplorables’라는 구심점을 통해 스스로를 정체화하면서 비로소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 개구리 페페라는 마스코트까지 앞세우고 말이다. 

    물론 클린턴 캠프의 노력은 ‘대안우파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고 트럼프가 그 세력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였다. 그 노력이 불러일으킨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클린턴이 강조하고 기자들이 크게 부각하는 바람에 그들은 하나의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비치면서 전국 무대에 등장하게 되”고 말았다. 원래 극우 미디어들은 극성 지지자들에게는 영향력이 있었지만 미국 전체의 담론을 바꿀 힘까지는 없었다. 필립스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같은 주류 매체가 그들의 신호를 증폭해준 덕에 메시지를 전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익명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개구리 페페를 언급하는 클린턴 캠프를 젊은이들의 별것 아닌 밈을 확대 해석하는 나이 든 음모론자로 그리며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너희들이 개구리페페를 그렇게 해석한다면, 정말 그렇게 써주지”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페페를 자신들의 마스코트로 삼았다. 실제로 개구리 페페가 익명 커뮤니티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즐겨 사용되긴 했지만 말이다. 허깨비를 좇는 바보가 되는 일과 자신이 비판하려던 집단을 오히려 단단하게 하는 일, 사이버상의 기류를 보도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 두 가지가 모두 일어난 셈이다.  

    사이버상의 차별과 혐오를 증폭하는 기성 언론의 보도는 이 외에도 여러 부작용을 지닌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모방’이다. 보도한 것과 비슷한 허위정보나 사이버 집단 괴롭힘(Cyber bullying)을 모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허위 정보가 한번 주류 미디어를 타고 반복해 보도되어 원하는 효과를 얻는 모습을 보고 나면 비슷한 효과나 관심을 노리는 사람들은 쉽게 유사한 거짓말을 만들어 허위 정보를 증폭시킬 수 있다. 또한 주류 미디어의 보도는 단순히 해로운 사상이나 발언을 ‘증폭’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정당한 하나의 담론처럼 보이게 하고, 그런 시각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생겨날 위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이버상의 자극적인 발언을 증폭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의를 막고 대화를 단순화한다. 예를 들어 기자들은 선거기간 동안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다층적인 논의나 토론이 자극적인 네오나치의 행태에 대한 보도로 대체됐다고 설명했다.

    분명 미국의 저널리스트들도 자신의 보도가 불러올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보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를 보도하고 경고하지 않으면 유해한 이데올로기가 성장하고 편견에 찬 사람들에게 문화의 많은 부분을 내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로 생각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면 주목을 받을 때까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과격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언론인은 나쁘고 위험한 정보를 정정하고 대중을 교육할 의무가 있기도 하다. 이는 언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증폭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기자는 자신이 보도하지 않았을 때 자칫 온라인 커뮤니티의 생태계를 잘 모르거나 경험이 적은 누군가가 이를 잘못 보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고 밝혔다. 결국 ‘증폭할 것인가 증폭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들

     하지만 저널리스트가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일을 빠르고 자극적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단순히 기자 개개인의 판단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언론 구조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The Oxygen of Amplification>이 지적하는 미국 언론의 구조적 문제들은 놀랍게도 (놀랍지 않게도?) 우리나라 언론의 현실과 그대로 겹쳐진다.

     첫 번째는 언론의 정보 전달 의무가 잘못 작동하는 문제다. 정보 전달의 의무는 민주주의에서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 몹시 중요한 덕목이지만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 여론 조작을 매우 용이하게 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허위 정보나 혐오 발언을 퍼뜨리고자 하는 이들은 ‘반복 보도’를 이용해 언론의 정보 전달 의무를 악용한다. 소위 ‘우라까이’라고 하는 것은 타 매체를 베껴 쓰기나 취재 없이 보도자료를 받아쓰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같은 내용의 기사가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게 만든다. A매체에서 보도했다는 사실로 인한 신뢰로 B매체는 검증 없이 이를 반복하고 A, B매체에서 보도했다는 사실로 인한 신뢰는 C, D, F… 등의 매체가 이를 검증 없이 보도하게 한다. 따라서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자 하는 사람은 딱 하나의 매체만 타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크게 지자 극우 유튜버들은 ‘4.15 선거 부정설’을 제기했다. 이들은 인천, 경기, 서울의 주요 지역구에서 여당과 야당 후보의 득표율이 모두 똑같다거나 계수기를 해킹해서 득표수를 조작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21대 총선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여러 매체가 ‘팩트체크’ 코너를 마련해 유튜버들이 제시하는 잘못된 득표 수치를 정정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선거 조작 방식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바람직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령이 투표했다?... 끊이지 않는 선거조작 음모론”, “대전서도 투표조작 의혹… 유권자들, 투표함 증거보전 신청”, “민경욱 의원, ‘관악구갑에서도 선거조작 증거 찾았다’” 등,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적는 기사나 헤드라인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주류 미디어의 보도를 허위 정보 유포자들이 다시 가져다 허위 정보의 근거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선거 조작 음모론이 식지 않자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미래통합당 측에서도 특별위원회의 구성을 검토하겠다고 태도를 바꾸었다. 이처럼 허위 정보를 강화해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는 과정에 주류 미디어의 보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계적 중립’은 언론의 정보전달 의무를 잘못 작동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필립스는 보고서에서 이를 ‘잘못된 등가성’이라고 표현한다. 기자들은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이로 인해 기자들은 어떠한 보도를 할 때 꼭 어디에라도 그 반대 의견을 함께 제시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때 층위가 전혀 같지 않은 주장이 단순히 ‘반대 의견이다’라는 이유로 그럴듯한 논리인 것처럼 인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가 공익과 민주주의에 해가 된다는 의견에 대해 ‘자유로운 나라에서 백인우월주의자가 되는 것도 자유다’라는 것은 사실 동등한 논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선거기간 동안 백인우월주의를 우려하는 기사마다 이와 같은 반대주장이 흔히 등장했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백인들이 유색인종 커뮤니티에 대한 혐오발언을 정당화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며, 흑인이나 히스패닉의 발언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이처럼 보도할 가치가 없거나 비인간적인 주장에 보도할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주장과 동등한 플랫폼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논의의 여지가 없는 극단주의적 발언도 엄연한 하나의 의견으로 주류에 편입된다.

    또한 필립스는 기자들의 ‘노동’에서도 문제를 찾고 있다. 필립스는 기자들에게 과도한 양의 기사, 혹은 일정한 양의 ‘좋아요’를 받는 과제가 할당되고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기자가 ‘단독’과 ‘특종’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단독과 특종 기사가 사내 평가와 승진에 크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언론이 더 이상 청중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기능을 독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급에 실패할 경우 취재 자체를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 기자는 기존의 관행을 따라 단독과 특종을 남발하게 된다. 할당량 이상의 기사를, 최대한 많은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가장 자극적으로 써야만 하는 환경에서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자극적인 사건들을 날 것으로 기사화하는 건 유혹적인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 취재에 시간과 돈이 거의 들지 않는 데다 어느 정도의 격렬한 반응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의 뿌리에는 바로 ‘트래픽’이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모든 콘텐츠를 클릭, 좋아요의 형태로 측정하게 하고 이를 상품화한다. 언론 또한 전례 없이 트래픽의 부담에 묶이게 됐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플랫폼에서 최대한 많은 독자들의 (어떤 것이든지)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보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충분한 검증과 숙고 없이 무조건 빠르고 자극적인 기사를 낼 수밖에 없다. 언론 민주화 운동으로 유명한 언론인 김중배는 ‘김중배 선언’이라 불리는 퇴임사에서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권력인 자본”이 언론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퇴임사는 1991년의 것이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익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언론 구조 문제는 이제 분석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흔한 이야기다.

    연세지는 매 호 서지 정보 페이지에도 적듯이 “외부적인 지도나 검열 없이 학생들 스스로 편집권을 가지고 기획부터, 인쇄, 배포까지 책임지는 자율, 독립 언론”이다. 그러나 연세지 또한 자율경비가 ‘자율’이 되어 예산이 급감한 이후로 광고를 통해 인쇄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동문의 도움으로 광고를 싣기 때문에 광고주의 압박은 전무한 편이다. 그러나 어쨌든 광고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광고를 따내지 못하면 위기를 맞는다는 의미다. 교지편집위원회는 매 호를 발행할 때마다 한두 부를 광고주에게 배송한다. 광고가 제대로 들어갔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약 언젠가 광고를 실었던 기업이 연세지의 내용을 이유로 다음 호부터 광고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름의 자존심으로 당장 글을 수정하거나 내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뒤로 어떤 글을 쓸지 결정할 때마다 잃어버린 광고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The Oxygen of Amplification>도 이렇다 할 뾰족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를 지적한다면 저자는 아마도 “그걸 알면 내가 이렇고 있겠냐?”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언론에 드리운 거대한 트래픽과 돈의 그림자를 걷어낼 방법을 이야기하려면 새로운 글, 아니 책 한 편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대신에 그는 보고서의 3부에서 언론이 직면한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그는 언론 구조와 체질을 바꾸는 과제가 ‘숲’이라면 이는 ‘나무’에 해당하는 해결책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우리도 적절한 보도준칙을 가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 파트기도 하다.




남길 것인가 남기지 않을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학 교지의 위상은 옛날 같지 않아서 《연세》의 보도를 통해 혐오 발언이 ‘증폭’되는 효과는 크지 않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온라인보다는 지면 배포를 중심으로 하는 《연세》의 특성상 익명 커뮤니티가 우리를 타깃으로 허위 정보나 혐오 발언을 생산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보도 윤리에서 비껴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연세지는 대학 교지의 ‘아카이빙’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비록 당장 굉장한 여론 형성 효과를 가지지 않더라도, 2020년의 대학생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 캠퍼스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는지를 남겨놓는 일 말이다. 많은 분석들이 ‘Y세대’니 ‘밀레니얼 세대’니 하는 단어로 일군의 사람을 뚝딱 묶어 내기를 좋아한다. 물론 여기엔 분석의 용이함도 있고 어느 정도 유의미한 시대별 특성을 읽어내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층적인 개인들의 목소리는 쉽게 뭉뚱그려져 사라지고 만다. 연세지는 이 캠퍼스에 도착하고 떠나는 수많은 대학생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옮기고 담는 역할을 한다. 

    물론 오늘의 캠퍼스는 연세춘추, 공식 보도자료, 총학생회 공지사항 등에도 남는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어떤 아카이빙도 전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다.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가 75.92%의 찬성으로 폐지되었습니다.”, “2019년 인권축제는 인권센터와 인권축제기획단의 의견 차이로 두 주최가 따로 개최하였습니다.”, “류석춘은 ‘위안부는 매춘’이라는 망언으로 정직 1개월을 받았습니다.”라는 기록은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어떤 목소리들이 있었고, 어떤 권력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서지 정보 페이지에서 또 우리는 “대학 사회와 소수자, 청년 문제 등”에 대해 풀어낸다고 쓰고 있다. 연세지는 공식적인 기록들 반대편에 서서 이 캠퍼스에서 억압받고 패배하는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는 매체다.

    우리는 ‘증폭할 것인가 증폭하지 않을 것인가?’ 보다는 ‘남길 것인가 남기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직면한 셈이다. 연세지의 그간의 익명 커뮤니티 보도를 돌아보며, 애써 남기지 않아도 됐을 것을 굳이 날 것으로 남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한다. 어떠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과거에 이런 폭력이 있었다’라는 사실은 훗날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 사람에게 조언과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합리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예컨대 성구매를 옹호하며 “창녀는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근거를 드는 이들이 있다. ‘그런 역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현대에 발생하는 폭력을 합리화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혐오 발언이나 이미지가 글의 소재가 되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숙의하고 정제된 형태로 제시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The Oxygen of Amplification> 3부의 가이드라인은 이 문제를 먼저 겪고 절감한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이 어떻게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자극적인 일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향력을 키워주지 않는 방식으로 보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기도 하다. 이 중 연세지가 참고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을 고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먼저 ‘보도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보고서에서는 3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는 해당 문제가 티핑포인트를 넘었는지, 다시 말해 해당 커뮤니티의 밖까지 확대됐는지를 생각해본다. 만약에 이를 보도하지 않으면 없어질 문제라면 보도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사회적 이익을 따져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긍정적 이익을 가져올 것인지,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 수 있을지 등등을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는 반대로 이 보도의 해악을 따져봐야 한다. 혹시 누군가 인용된 인물을 찾아내어 공격하거나 보도된 행위를 모방할 가능성 등이 그 해악이 될 수 있다.

     만약에 이 모든 기준을 고려한 뒤 해당 내용을 연세지에 남기기로 결정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 것 주의해야 한다. 


• 폭력적인 공격은 전염성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사이버 공간의 폭력이나 혐오를 다루는 경우에도 자살, 총기 난사, 테러 공격 보도 준칙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진 폭력이라고 해서 물리적 폭력에 비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 특정한 온라인 공격이나 발언에 참여한 사람들을 막연한 집단명사(EX-‘트롤들’, ‘대안우파 세력’, ‘일베’)를 사용하지 말고 가능한 한 그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혐오집단이 실제보다 더 크고 강력하고 똘똘 뭉친 집단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 행위도 최대한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행위 집단은 너무나 유동적으로 바뀌어 특정하기 어렵더라도 행위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트롤링’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온라인 스토킹, 폭력적 여성혐오와 같은 확실한 묘사를 해야 한다.

• 특정 차별이나 혐오에 사용된 밈 이미지를 직접 싣는 데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문제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고, 쉽게 검색되고, 오래 남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 부득이하게 이미지를 보여줘야 할 때는 이미지의 맥락이나 기사의 일부를 보여주는 정보를 캡션으로 포함시켜 해당 이미지가 다시 사용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괴롭힘이나 차별 발언을 다룰 때는 정체성에 기반한 폭력의 역사, 그리고 거기에 맞서 싸워온 운동의 역사를 성실하게 살펴야 한다. 그 문제와 수십 년 동안 싸워온 사람들과 집단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채 담론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 온라인 괴롭힘의 가해자들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프레임은 피해야 한다. 비슷한 행동이 계속해서 관심을 받을 수 있다. 

• 가해자들의 가족, 취미, 장래희망 따위의 개인적 세부사항이 보도 가치가 있는지 계산해봐야 한다. 

• 익명 커뮤니티나 집단에 대한 보도가 그곳에 새로운 참여자를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 가해자의 말을 반드시 직접 인용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유리하게 해석할 시간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 “어떤 것이 인터넷에 존재한다”고 단순히 지적하기보다는 그것이 존재하게 된 과정과 역학에 초점을 맞추는 프레임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해당 커뮤니티가 어떻게 작동하고 그게 왜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지와 같은 설명도 포함한다.

• 소셜 미디어 포스트를 몇 개 뽑아서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소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온라인의 혐오 발언이나 괴롭힘을 지면에 ‘무조건 남기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만큼이나 개개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사이버 세계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될 것이다. 미국의 범죄 소설의 대가인 제프리 디버는 서스펜스 · 범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아이나 동물을 해치지 않고 성폭행도 다루지 않으며, 책에서 대부분의 폭력 장면은 카메라 밖에서 벌어지도록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디버의 소설이 지루하다거나 흐름이 끊긴다고 느끼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날 것의 폭력을 보여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보도자가 아무리 정의로운 동기로 쓴 글이라도 자신의 글이 항상 자신의 의도대로 활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학내 언론의 기자들은 이 내용을 남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남기기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남겨야 할지를 계속해서 치열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과연 이 글이 오늘의 캠퍼스 혹은 대한민국 사회의 어느 측면을 이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가이드라인을 이용하면 폭력적인 언어를 불필요하게 지면에 남기거나 그러한 발언을 하는 이들이 실제보다 강력하게 묘사되는 현상을 피할 수 있다. 연세지가 앞으로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고 책임감 있는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미시적인 해결책이다. 이 가이드라인을 숙지해 연세지에서 쓰는 글 하나하나에 고민을 더할 수는 있으나 크고 작은 모든 언론은 (아주 작은 학내 언론까지도) 언론의 기능을 퇴색시키는 구조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고, 결국 대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마치며

    이 글은 더 나은 연세지를 고민하고자 쓴 글이지만 우리나라 언론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꼭 온라인 공간을 글로 옮기는 일에만 국한되는 문제와 해결책이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에 등장하는 많은 문제의식과 원인, 그리고 해결책은 작은 대학 교지에 대한 제언으로는 다소 거창할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학 언론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연세지를 거쳐 가는 많은 편집위원 중에서는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들, 최소한 평생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를 비롯하여) 참 많았다. 연세지를 거쳐가는 우리가 이 글의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더 나은 언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120호에서 편집위원 봄은 “회사 내부의 시스템이 기자들로 하여금 취재 관행을 성찰하게 할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거나 경영이 저널리즘을 압도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구조 전반을 뒤흔드는 작업뿐 아니라 여전히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자 개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나는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와 기자 개개인의 도덕성을 강력히 규탄해가면서, 내가 기자가 된다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알바를 계속하기 위해서 술자리에서 성희롱 발언을 웃어 넘긴 날,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고발하지 못한 날, 그런 날들을 몇 번 겪으며 나는 슬그머니 자신감이 사라졌다. 나라고 ‘기레기’를 ‘기레기’일 수밖에 없게 만든 시스템과 압박 앞에서 그리 쉽게 굳건치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남겨두기로 했다. 내가 언젠가 휘고 꺾였을 때, 이 글이 떠오르면 부끄러워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연세지에 ‘남김’으로써 연세지를 거쳐가는 우리 하나 하나가 책임감 있게 펜을 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구조에 균열을 내는 개인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편집위원 이해일(dlgodlf00@gmail.com)






참고문헌

[1] 휘트니 필립스, 「The Oxygen of Amplification」, 데이터&소사이어티 연구소, 2019.

[2] 수습편집위원 봄, 「언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연세편집위원회, 《연세》, 120호.

[3] 제프리 디버, 「스킨 컬렉터」, 유소영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7,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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