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지긍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이렇게 잘 들었던 시대가 또 있을까? 어느새 불어온 MBTI 열풍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TV 예능 <놀면 뭐 하니>에서 싹쓰리 멤버 유재석, 이효리, 비 세 명이 MBTI를 검사할 정도에 다다랐으니, MBTI는 인터넷상의 유행을 벗어나 대중문화에 안착했다. 글을 진행하기 앞서 MBTI라는 이름만 들어보고 자세히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단한 소개를 준비했다.
MBTI는 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줄임말로,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만든 성격유형 검사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성격 이론을 기반으로 총 16가지 유형을 나눴다. 16개의 성격유형은 각각 4가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외향 (Extroversion) – 내향 (Introversion), 현실(Sensing) – 직관 (iNtuition), 사고(Thinking) – 감정(Feeling), 판단(Judging) – 인식 (Perceiving) 중 각각 한 가지를 조합하면 자신의 성격 유형이 된다.
자신의 MBTI를 알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제공되는 검사를 진행하면 된다. 약 90개 문항에 답을 하면 결과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는 ENTJ 유형인데, 별칭은 “대담한 통솔자”다. 이렇게 찾은 네 가지 알파벳을 기반으로 인터넷에 쏟아 넘치는 설명을 읽어보면 된다. 참고로 인터넷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검사(16 Personality)는 공인된 MBTI 검사가 아니다. 해당 사이트 영문판 소개를 살펴보면 MBTI와 빅파이브(Big 5) 성격유형 이론을 합쳐 만든 검사라고 한다. 검사 결과 끝에는 -A 혹은 -T가 붙어있는데, 이는 MBTI에는 없는 글자다. 이는 빅파이브 성격유형에서 신경성을 지칭하는데, 신경성은 일상 속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얼마나 빈번하게 경험하는지 결정하는 요소를 뜻한다. -A는 비교적 스트레스 상황을 덜 느끼는 편이고 -T는 그 반대다. 공식적인 MBTI 검사는 유료로 진행된다. 굳이 유료 검사를 받아야할 필요 없이 참고용으로 확인하면 된다.
[사진1] ENTJ빙고가 있는 사진이다. 총 25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펑크록 좋아함. 논쟁할 땐 인성 내려놓음. 저절로 리더가 됨. 한다면 무조건 함. 한 가지에 집중 가능. 관심 받는거 좋음. 말도 안되는 목표 있음. 강한 자기 주장. 내 안목에 자부심 있음. 대립각 자주 세움. 슈퍼솔직. 사회병폐를 개혁하고 싶어함. ENTJ. 생각이 많음. "죽기 전에 죽이면 됨". 어리석은 짓들 안 봐줌. 변화좋아. 감정적 공감 서툼. 전부 다 아니면 암것도 없음. 효율과 사랑에 빠짐. 충동적 결정. 고양이형 인간. 경쟁을 하면 이겨야지. 계획은 차근차근. 생각을 혼잣말로 함.
참고로 필자는 펑크록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위에 있는 빙고에는 없지만 여러 콘텐츠를 찾아보다가 참 즐거웠던 순간이 있다. 바로 지하철을 탈 때 빠른 환승 칸을 확인하고 타는가에 대한 논쟁을 볼 때였다. 필자는 무조건 빠른 환승 칸에 탄다. 급하게 타느라 다른 칸에 탔다면 되도록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물론 모두가 이럴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댓글을 달고 서로 공감하는 걸 보니 괜히 의기양양해졌다. 그렇지! 당연히 빠른 환승 칸에 타야 하는 거 아니야? 동시에 이런 특성이 ENTJ라는 결과가 나온 사람들끼리 공유한다니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글을 함께 읽은 ENTJ 편집위원은 환승 칸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 성격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 독특한 특성을 이야기하는 일이 새로운 유행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혈액형 성격이 있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찾는데, 학교에도 혈액형별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있었다. 혈액형별 성격은 굳이 논박할 필요도 없는 유사 과학이다. (A형이라고 할 때마다 소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소심하지 않은 마음으로 난 소심하지 않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증거는 대부분이 자신의 혈액형을 안다는 점이다. 같은 혈액형인 친구에게만 물병을 빌려주던 알 수 없는 규칙은 모두가 자신의 혈액형을 안다는 전제하에 성립된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요소로 성격을 설명하는 도구는 혈액형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사주와 타로가 있다. 보통 사주와 타로는 미래를 점치는 도구로 쓰이지만, 개인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도 쓰인다. 사주와 타로 모두 태어난 날짜로 그 사람의 성격을 유형화해서 이야기한다. 사주는 년, 월, 일, 시에 부여된 육십 간지를 통해 정해진 글자가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본다. 타로는 생년월일을 더하여 성격에 해당하는 숫자를 찾아 타로 카드와 연결한다. 사주나 타로 모두 미래를 점치고, 태어난 시각이라는 우연한 요소를 기반으로 하므로 혈액형처럼 유사과학 혹은 미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촌에 넘치는 사주와 타로 집이 사람들의 관심을 증명한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반대로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흥미를 넘어 과몰입으로 이어지는 대상이 이러한 성격유형이다. 비교적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MBTI부터 이제 거의 사장된 혈액형별 유형까지 사람들은 꾸준히 성격에 대한 궁금증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심리테스트를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리기도 했다. 그저 재미있는 유행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성격유형 과몰입 대표 격인 필자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너, 글쓰는 거 좋아하지?
한참 명리에 관심이 많던 엄마 덕분에 한의사 선생님까지 내 사주를 알게 되었다. 그 뒤로 혼자 한의원에 간 날, 선생님은 차트에 적혀있던 내 사주를 보더니 다짜고짜 물으셨다.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지?” 아니 이건 드라마 셜록에서 나오던 장면 아니던가. 정말 사주 글자 여덟 개만 보고 맞췄다니 정말이지 신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추측할 만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나도 사주를 좋아하도록 엄마가 선생님께 미리 귀띔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건 아닐 테다. 그 정도면 선생님은 연기를 업으로 삼으셨어야 한다. 그 후 한마디를 더 하셨는데, 내 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주에서 간에 해당하는 글자가 하나뿐인데 그게 겨우 나를 버티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곰처럼 술 마시다 간 망치지 말고 잘 간수하라고 하셨다. 그제야 갑자기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니 간이 안 좋아지면 모든 건강이 무너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물론 내가 술 좋아하고, 누군가 권하면 안 빼고 마시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신기한 마음 반 불신의 마음 반으로 한의원을 나섰다. 무섭게도 이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내 머리를 맴돈다. 술을 연달아 마신 주말이 지나 쓰린 위와 지친 간을 붙잡고 그때 그 말을 떠올려 본다.
이런 식으로 타인이 내 성격/특성이라고 건넨 말이 정말 내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포러 효과’ 혹은 ‘바넘 효과’라고 한다. 1949년 포러(Bertram Forer)는 실험을 진행했다. 대학생을 모아 두고 성격 검사를 실시했다. 모두에게 같은 결과지를 주고 얼마나 자신에게 해당하는지 묻자 대부분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답을 했다. MBTI 결과는 해당 실험처럼 모두에게 들어맞을 만한 애매모호한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세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결과를 읽고 나면 나와 맞지 않는 내용이 하나 이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MBTI가 꽤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그건 애초에 심리 검사가 나를 맞추는 것이 ‘신기한’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맞추지 못한 내용보다 맞힌 내용에 집중이 되고 그걸 기억하게 된다. 동시에 이 과정 자체가 나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된다. 이건 맞고 저건 아니고, 이러쿵저러쿵. MBTI를 느끼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에 대해 맞는 내용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맞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넘기면 된다.
세상에 유노윤호도 ENTJ라고?
그렇다! 가장 해로운 벌레는 대충. 열정의 아이콘 유노윤호는 필자와 같은 ENTJ다. MBTI가 같으니 똑같이 열심히 살면 좋으련만, 내 삶은 유노윤호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나와 유노윤호는 왜 이렇게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내 숨겨진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MBC 관찰 예능 <나혼자산다>에 나온 유노윤호는 콘서트 리허설도하고, 복싱장도 가고, 빨래를 개며 공포영화도 본다. 그의 하루는 열정 넘치는 계획대로 흘러간다. 그의 열정을 완성하는 것은 역시 계획이다. 24시간을 차곡차곡 보내는 그는 계획을 중시하는 J(판단)형이다.
P와 J는 다른 글자와 달리 칼 융의 이론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MBTI를 만드는 과정에서 추가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P와 J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그래서 판단(J)과 인식(P)이라는 모호한 단어보다는 계획(J)과 무계획/융통(P)으로 통한다. J유형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질서를 중시한다. 반면 P유형의 사람들은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P와 J로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 타당한지 논의하는 고루한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리고 다시 유노윤호로 돌아가 보자.
필자도 계획성은 엄청나다. 중학교 때부터 쓴 다이어리에는 계획이 빼곡하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게으르고 체력이 부족하다는 점. 그래서 쉬는 날에는 쉬는 계획을 세운다. ‘오후 두 시까지 침대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고 누워있다가, 두 시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면 <킬링이브> 시즌 3 에피소드 2개를 봐야지. 그리고 다시 누워서…’ 그러니 J(판단)형은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하다는 말은 틀렸다. 단지 계획적으로 게으른가, 무계획적으로 게으른가, 그게 차이점이다.
MBTI가 같다고 같은 성격일 리가 만무하다. MBTI 속 네 글자 외에도 삶을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MBTI 결과와 함께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잠시 뿌듯함을 느껴본다.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미란다 편집장은 ENTJ 인물로 자주 거론된다. 그걸 보며 잠시 궁극의 멋을 가진 편집장이 된 나를 떠올려본다. 그런데 어느 날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들었다. 스윙스도 ENTJ란다. 조금 곤란하다. 스윙스를 좋아하는 분에겐 사과드린다. 나는 스윙스가 썩 좋진 않다.
이러면 아무도 너 안 좋아해
아마 MBTI에서 가장 많은 콘텐츠가 파생된 부분은 T와 F의 차이일 테다. 유명한 예시는 “나 우울해서 화분 샀어.” 혹은 “나 피곤해서 드라이 샴푸로 머리 감았어.”다. 이에 대한 반응을 MBTI 유형별로 나누어 이야기를 하는데, T(사고)와 F(감정) 중 어느 쪽인가에 따라 반응이 결정된다고 본다. T에 해당하는 사람은 사실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화분’과 ‘드라이 샴푸’와 같은 정보에 집중한다. 반면 F에 해당하는 사람은 ‘우울해서’와 ‘피곤해서’와 같은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중시한다. 그래서 반응이 ‘무슨 화분 샀어?”와 “왜 우울해?”로 나뉜다고 한다.
[사진2] '이러면 아무도 너 안 좋아해'라는 질문에 대한 T와 F의 반응 차이를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T는 보라색 머리 캐릭터가 '지랄시나이데'라는 말을 하고 있다. F는 세서미 스트리트 캐릭터 엘모가 우주를 배경으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있다.
[사진3] MBTI글자에 대한 짧은 해석이 있다. E는 인싸, I는 아싸 S는 이타적 N은 이기적, T는 주관뚜렷 F는 남눈치봄 P는 게으름 J는 계획적임이라는 내용이다.
필자는 상황에 따라 긴 머리 친구와 엘모 사이를 오간다. 충분한 근거만 있다면, 엘모처럼 우주를 유영하게 되는 건 순식간이다. MBTI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바코드가 아니다. 우리는 사고(T)와 감정(F) 사이 넓은 스펙트럼을 오고 가는 중이다. 융은 한쪽 기능만 쓰는 사람은 없다고 보았다. 단지 일생에 걸쳐 주로 쓰는 기능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한 기능만 쓰는 사람은 다른 기능을 억압하니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니 투박하고도 폭력적인 이분법으로 나눈 MBTI는 깔끔하게 무시하면 된다. 어느 한 유형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이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MBTI는 현시대 속 이상적 자아상을 목표로 삼도록 유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MBTI는 내 반대쪽을 바라보도록 돕는다. 나의 에너지가 온통 바깥으로 쏠려 있다면 내면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계획 없이 살 수 없다면 내 속에 억압된 융통성을 끄집어 내보려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나와 다른 타인도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필자는 무계획을 계획하는 법을 배우려 노력 중이다. 그 속에서 오는 새로운 편안함과 예상치 못한 만남이 즐겁다. 내 여정에 MBTI가 필수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무관하지도 않다. MBTI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MBTI 노래도 나왔네
M BTI가 도대체 뭐길래 혈액형보다 더 신뢰해?
B 타민보다 더 상큼한 너를 위해 나의 성향을 알아볼게
T 티리티티 팃팃티디 서로를 아니깐 더 즐겁다!
I 아이 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박문치 – MBTI (with 박문치유니버스)
이제 하다 하다 노래까지 나왔다. 들어보지는 않았다. MBTI에서 파생된 콘텐츠는 지금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영화 주인공 MBTI를 분석하고, MBTI별 여행지를 추천하고, MBTI별 연봉 자료도 있으며 MBTI별 궁합도 본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이들에겐 최적의 콘텐츠다. 어디에든 MBTI를 적용할 수 있다. 덕분에 MBTI는 적당한 유흥거리 정도로 느껴진다. MBTI유형별 가장 못견디는 순간은? MBTI 유형별 인터넷에서 쇼핑하는 방식은? 끝도 없이 쏟아지는 글들을 한번 보고 낄낄 웃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MBTI 노래를 만든 분께 한 마디는 남기고 싶다. 적어도 나에게 MBTI는 혈액형보다 낫다.
MBTI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주위 친구들에게 이래저래 많이도 물었다. 그들의 유형은 무엇인지, MBTI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캐묻고 화분이나 드라이 샴푸 예시도 여기저기 시험해봤다. 비과학적이라거나 과몰입한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았지만, 나에겐 긍정적인 경험이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했던 순간은 MBTI를 계기로 내밀한 감정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다. 이상하게도 MBTI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숨겨둔 마음속 이야기로 이어졌다. 어렵게 느껴지던 나를 표현하는 일이 MBTI라는 공통의 도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어쩌면 사회가 일시 정지 상태에 접어든 이 시점에 우리는 자신을 살펴볼 여유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은 재미로 찾아본 MBTI일지 몰라도 그 시선 끝에는 나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