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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화

<127호> 동등한 의존을 위하여

편집위원 유랑

by 연세편집위원회
insta1_7.jpg 빨간색 원 안에 "에필로그" "동등한 의존을 위하여" "편집위원 유랑"이라고 적혀 있다. 원 바깥에는 빨간색 폭죽 내용물이 산개해 있다.



로맨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낯간지러운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나는 청소년 시절만 해도 로맨스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순정 만화는 좋아했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고등학생이라면 으레 가지는 로망을 끌어안고 대학에 들어왔고, 다양한 인간상을 마주했다. 그러나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언제나 유쾌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관계에서도 학업에서도 여러모로 힘들 때 나를 지탱해 주던 건 관심도 없던 로맨스 소설이었다. 현실의 고단한 인간관계 때문에 도피처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온갖 로맨스 작품을 읽어댔고, 넷플릭스를 구독한 이후로는 로맨스 드라마, 영화까지 섭렵했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난 로맨스를 좋아해.’라고 말하지 못했다. 로맨스는 언제나 숨기고픈 무언가였다. 그랬던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즘은 로맨스 장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닌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의외’라고 말한다. 그 반응에 나는 문득 순정만화를 읽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로맨스의 ‘무엇’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몰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수치로 여겼었는지 궁금해했다.


로맨스… 로맨스? 로맨스!

확실히 로맨스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맨스는 그저 여성들이 낭만적인 꿈이나 꾸는 장르인 걸까? 심리학자 방희정 교수는 로맨스 드라마가 인기인 까닭을 “현실에 대한 결핍감을 채우고 대리만족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한다[1]. 여성들에게 로맨스란 가부장제의 현실을 탈피하는 보상적 판타지이며, 현실에서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을 대리해 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로맨스에는 여성들이 많이 보는 장르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감성적인’ 여성들이 작품 속에서 몽상적 욕망을 실현하고, ‘백마 탄 왕자님’ 등으로 표상되는 이상적 남성상에 기대어 계급 상승을 꿈꾸는 남성성 선망 혹은 자발적 종속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로맨스를 반페미니즘적이라 평가하며 장르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2]. 그러나 로맨스 장르가 그저 평면적일 뿐이라면 오랜 시간 동안 전 세계 감상자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맨스 장르는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등의 고전 낭만 소설과 고딕 소설 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히스토리컬 로맨스, 로맨틱 서스펜스 등 몇십 가지나 되는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3]. 로맨스의 구성요소는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4], 첫째,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소설 전개의 핵심이자 중심축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 연애소설에서는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나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이때 방해 요소는 인격적 요소, 비인격적 요소 모두를 포함한다. 셋째, 사랑의 목표나 지향점, 연애의 과정이 행동 발전의 중심축을 이루며 목표가 인간 간의 이해나 화합에 있어야 한다. 넷째, 사랑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 분명하고 진지하게 표명되어야 한다. 이 정리는 1998년도에 게재된 것으로 퀴어 로맨스의 유행 등 장르 내의 여러 지각변동에 따라 이미 낡은 정리가 되어버렸지만, 로맨스의 핵심을 관계의 합일로 읽어냈다는 점에서 여전히 견고한 장르의 성질을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 속 로맨스 장르를 향한 편견은 아직도 두텁다. 이 편견은 로맨스의 공급 및 수요가 주로 여성에 기인하며, 그에 따라 장르를 바라보는 시선에 여성 혐오가 덧씌워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최근 웹 소설 시장이 매우 성황인 가운데, 사랑 이야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 ‘로맨스 판타지’ 카테고리에 배치되어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성이 화자이고 주인공인 작품이 로맨스 장르에 해당하는가? 또는 ‘여류’ 작가가 글을 쓰면 자동으로 로맨스가 되는가? 이 장르는 여성들만의 집합소인가? 로맨스는 감성적이고 비이성적인 판타지라는 내용적 편견을 넘어 작가와 독자가 주로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로 이 장르는 여성의 것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로맨스를 정말 좋아한다. 사랑의 시옷도 말하지 않는 누아르 장르에서도 사람들은 대립하는 두 조폭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다. 로맨틱의 리을도 없긴 하지만 긴밀한 유대관계를 쌓는 두 등장인물을 보고선 “쟤네 사귀게 되면 저 좀 깨워주세요.” “너희가 친구면 난 친구 없다.” 등 주접 넘치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로맨스는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관계이며 여러 대중매체에서 보편적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렇게 로맨스 장르는 학술적인 정의와는 별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적으로 정의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 로맨스의 범위를 구분 짓는 선을 긋고 장르를 논하기보다는, 사랑이 중심인 관계를 그리는 작품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읽어내고자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는 편견으로 가득한 장르에 관한 옹호이기도 하며 장르를 넘어 로맨스를 그리는 작품을 향한 비판적 찬가이기도 하다.


로맨스, 역전의 장

로맨스는 태생부터 판타지였다[5]. 대중문화의 핵심은 결핍된 욕망을 채우는 것에 있고, 로맨스는 이 맥락을 충실히 따른다. 로맨스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역할 반전이다. 대체로 로맨스가 여성 중심 서사를 그리고 여성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에 여성 인물은 이야기 속 많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유리한 위치에 있다. 좁은 의미의 역할 반전은 기존 남성 중심 작품들의 연애 관계를 뒤집거나 여성 인물이 남성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 하렘은 반전된 하렘을 의미하며, 여러 명의 여성이 한 명의 남성을 사랑하는 하렘과 반대로 한 명의 여성을 여러 명의 남성이 사랑한다. 황제나 왕이 존재하는 군주제 기반 작품의 경우 여성이 높은 작위를 갖거나 군주의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로맨스는 적극적인 성적 욕망의 장이기도 하다. 리디북스같이 이용 연령대가 높은 플랫폼의 경우 상위권 로맨스 웹 소설은 대부분 성인물이다. 타락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성을 즐기는 여성상은 적극적이고 성숙한 여성상으로 변모한다. 섹슈얼리티의 부각을 통해 감상자는 작품을 매개로 욕망을 발산하고 해소하며, 그것이 남성만의 욕구가 아님을 인정받는다[6]. 이제는 소위 섹스 관계로 시작해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한다는 의미인 ‘몸정’이 ‘맘정’으로 변하는 스토리라인도 식상할 정도다. 쾌락도 사랑의 목표로 가는 지름길이며, 더는 부끄러운 욕망이 아닌 마땅한 추구가 된다.


역전된 역할과 성적 욕망에 이어 사회적인 욕망이 실현되는 공간으로서 로맨스는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여성을 그린다. 2020년 6월에서 8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역할 전도 로맨스의 대표작이며 여성 인물은 돈이 많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졌지만, 태생적으로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에 반해 남성은 현실의 무게 때문에 지쳐 있음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캔디’ 같은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다. 현대 로맨스 소설의 지형도 주로 뛰어난 커리어 우먼을 전면에 내세우며 스토리를 전개한다. 대표적으로 우지혜 작가는 『그저 여명일 뿐』, 『너와 사는 오늘』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커리어 우먼인 여성 주인공을 그린다. 주인공은 능력 있는 남자 주인공과 함께 대등한 실력을 인정받아 사내의 비리를 밝혀내거나 라이벌 기업을 제치고 성과를 내는 등 큰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런 역전의 장에서 사랑의 목표나 지향점은 더는 ‘행복한 결혼 또는 가정 이루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랑을 매개로 여성 주인공은 각자의 욕구를 성취하며, 이는 남편의 지위를 통한 계급 상승에서부터 터부시되어 왔던 여성 섹슈얼리티 충족,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커리어 성공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사회적 욕구에 따라 유구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사랑은 행동 발전, 혹은 성장을 위한 우아한 수단일 뿐일지도 모른다. 로맨스는 태생부터 판타지였지만 결코 불가능한 사설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늘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로맨스, 의존의 장

로맨스 소설 속 인물의 조형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해왔다. 신데렐라에서 성공한 커리어 우먼, 더 나아가 군주제의 정점까지. 현재의 트렌드는 능동적이고 사회적 성공을 좇는 여성 주인공을 선호한다. 수동적이며 정숙하고 순종적이기까지 한 여성 주인공에게는 ‘답답하다’, ‘온실 속 화초다’ 같은 수사가 붙는다. 이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중시하는 작금의 태도를 반영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라 평가되는 여성상은 부정적인가? 그렇다면 반대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은 비의존적이며 바람직한가? 남성 주인공들은 언제나 비의존적이며 독립적인가? 결정적으로, 의존과 독립은 상충할까?


역사적으로 처음부터 ‘의존’이 부정적 개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18세기에 들어 사용하게 된 비의존(독립) 개념은 “재산을 소유한 상태, 즉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재산이 있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 반대인 의존은 “타인을 위해 일함으로써 자기 생계를 유지한다”라는 뜻으로 농노, 노예 및 임금노동자 모두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따라서 의존과 비의존의 관계는 개인의 특성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의미했기에 경멸적인 뜻이 담기지 않았었다[7]. 하지만 상황은 격변한다. 18~19세기의 급진적 사회운동을 통해 의존 상태였던 백인 남성 노동자가 시민권과 선거권을 얻어내고 ‘비의존(독립)’의 기준을 새로 세운다. 이때 비로소 ‘비의존(독립)’은 경제적 독립으로서의 의미에 도달하고,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생계부양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들이 ‘의존적 존재’로 거듭난다[8].


그러나 주로 비장애인 남성으로 상정되는 ‘가장’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부양하는 신화도 끝난 시대다. 심각해진 부의 양극화와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함정 속에서 ‘의존적 존재’로서 호명되었던 이들도 임금노동을 하게 되고, ‘임금노동=독립=정상’이라는 도식 하에 ‘비의존적’인 개인이 되길 요청받는다. 다시 말해 ‘의존성’이란 곧 불완전하고 비이성적인 개인의 성질로서 우리가 배제해야 하는 태도로 환원된다. ‘경제적 의존’이 어느새 ‘심리적 의존’으로 확장되어 ‘의존적 존재’를 도덕적으로도 타락시킨 것이다. 여성의 ‘심리적 의존’은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비판은 ‘심리적 의존’을 여성이 가진 ‘독립에 대한 두려움’ 또는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으로 간주하였으며, 여성의 사회적 종속을 보여주는 기제로써 비난했다[9]. 이러한 영향으로 ‘의존’이 문화 전반에서 수치스러운 것이 된 역사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주체적인 인물들이 환호성을 받는 지금의 트렌드는 현실의 우리가 은연중에 가진 ‘의존하는 나’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행위에 대한 답을 구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여성은 단번에 답답한 성격의 의존적 인물로 추락한다. 우리는 현실의 불안으로 인해 여자 주인공들이 당당하고 독립적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직설적인 말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비의존적인가? 근현대에 통용된 의존은 주로 경제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의존’과 ‘비의존’을 구분한다. 그리고 ‘의존’의 프레임을 뒤집어쓴 존재들-노동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장애인, 가장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여성 등-을 병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는 의존의 단면만을 부각하며 부정적 어감을 삽입해왔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를 수립하는 순간 의존을 시작한다. 태어난 신생아는 양육자에게 의존한다. 건강한 청년기의 임금노동자는 부양자로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듯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는 상사에게, 친구에게, 다시 양육자에게 질문하고 의존하고 또 돌봄 받는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커 온 두 개인이 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어떤 복합적인 감정으로부터 상대의 면면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가끔 상대를 독점하고 싶다는 독선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상대가 나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나를 이해하며 나의 응석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의 피로가 작은 투덜거림으로 흘러나올 때, 그런 상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보듬어주는 행위를 할 때, 로맨틱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인식한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상호의존을 수행한다. 의존을 구조적으로 거부하는 사회 속에서 로맨스는 상호의존하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두 인물 각자가 얼마나 자립심이 강한가와는 전혀 관계없이 상호의존적인 로맨스 관계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모두 의존적이며, 이 상호의존 관계로부터 비로소 이야기가 고조되기 시작한다.


로맨스는 사랑을 매개로 나름의 완성된 관계를 지향해 간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해나 화합에 기반한 이 완성된 관계는 목적 달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난과 소통이 필요하다. 사랑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달달한 투정이 아닌 애증으로부터 상호의존이 전개될 때도 있다. 중요한 점은 비대칭적인 의존이 곧 관계의 파국으로 이어지기에, 로맨스의 핵심이 ‘사랑을 기반으로 개별적인 두 인물의 관계를 어떻게 동등하게 형성하는가’의 문제로 나아간다는 것에 있다.


로맨스, 갈등의 장

전미 로맨스 소설 작가 협회(RWA)는 로맨스 소설을 이렇게 소개한다. “로맨스에서 주된 플롯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고뇌하며 ‘관계’를 완성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소설의 갈등은 사랑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선 관계의 연장과 유지가 필요하다. 노력 없는 관계 유지는 없다. 각자 다른 배경에서 자라온 두 개인의 세계관은 충돌한다. 충돌은 갈등으로 이어지며 적절한 해소가 없다면 관계는 비대칭의 일로를 걷는다. 그 때문에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로맨스의 질을 결정한다.


로맨스도 광활한 장르이기에 굉장히 다양한 소재와 전개 스타일이 존재한다. 소위 ‘달달물’로 칭해지는 작품들에선 갈등이 아주 소소하게만 나타나거나, 만남부터 갈등 없이 문자 그대로 달달한 연애만 이어지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들도 있다. 나도 작품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나 ‘달달물’을 찾곤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었고 아주 달달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그렇게 추천받은 ‘달달물’ 읽기를 시작했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별다른 갈등 없이 흘러가는 단조로운 흐름이 매우 피로했더랬다. 두 주인공이 ‘꽁냥대는’ 모습이 귀엽기는 했으나 그다지 설레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음날 난 만족스러운 독서를 하지 못해 오히려 스트레스가 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폐물로 유명한 작품을 속는 셈 치고 잡은 것은 스트레스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한 도전이었다. 6권짜리 장편 피폐물에 고통스러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완독한 후 그 작품을 내 마음속 베스트 순위에 올리게 된 것은 이야기의 기묘한 결말이다. 피로했던 심신은 피폐물의 엔딩과 함께 치유된 채였다.


사실 내가 피폐물을 좋아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다. 나는 로맨스의 정수가 피폐물에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면서도 피폐물을 놓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피폐한 로맨스가 그야말로 로맨스 관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해결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어서 관계를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한 적나라한 시도와 과정이 낱낱이 드러난다는 데에 있다.


작품을 써 내리는 작가들을 위한 작법서인 『스토리텔링 바이블』은 ‘예상과 현실을 충돌시켜라’라는 명제 하에 네 가지 요건을 제시한다[10]. 첫째, 등장인물들이 예상하는 바를 수립한다. 둘째, 충돌은 그럴듯하면서도 충격적이어야 한다. 셋째, 충돌은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넷째, 충돌은 실체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 요건들은 어떤 장르에서든 통용되기 때문에 로맨스의 갈등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세 번째 요건은 관계의 합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다. 두 인물의 성격, 성장 배경, 이상 등 세계관이 충돌하고 이때 인물들은 서로의 ‘무엇’이 충돌하는지를 확인하며 소위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콩깍지에서 조금 비껴가 헐벗은 개인을 마주한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는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두 주인공의 내면을 대면하게 한다. 여성 인물은 남편을 오래도록 사랑했지만,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었다. 남자는 지독한 일 중독이었으며 그의 입장에서 결혼은 산술적인 이득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기에 아내와 감정적 교류보다는 그저 얌전한 안주인을 바랐고, 자신은 아내에게 물질적인 지원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 믿는 사람이었다. 어떤 통제력도 갖지 못한 채로 가문에 갇히다시피 했던 그녀는 이혼을 요구하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거부당한 뒤 갈등의 일차적 고조를 겪으며 끝내 자살을 택한다. 그리고 생을 마감한 순간 자신의 몸이 남편의 몸과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뀐 신체로 어색한 생활을 지속하며 여자는 물질로밖에 사람을 살 줄 모르는 그의 태도가 불우한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남자는 어떤 통제력도 갖지 못하는 여자의 생활을 경험한다. 일시적인 경험만으로 그들의 응어리가 단번에 해소되는 일은 없다. 그저 경험을 통해, 그로부터 시작된 소통을 통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개인을 인정한다.


나는 로맨스를 통해 개인적인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 과정의 중앙에는 ‘무엇’이 충돌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그런 충돌 지점을 가진 서로에 대한 인정, 궁극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려놓을 것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판별하는 배려가 있다. 소통과 배려, 그렇게 서로 함께하기 위해 상호의존하는 자신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 두 개별적 세계관은 부서지거나 통합되지 않고 양립 가능해진다. 결국 ‘완성된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두 개인의 세계관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갈등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섬세하고도 장기적인 윤리적 태도가 요청되는 것이다.


로맨스, 돌봄의 장

섬세하고도 장기적인 윤리적 태도는 두 개별적 세계관이 양립한 채 완성된 관계, 또는 합일에 이르도록 한다. 공존하지 못하고 부서지거나 통합된 세계관은 곧 한 개인의 타인에 대한 압제나 위력 행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동등하지 못한 의존관계를 일컫는다. 치우쳐진 의존관계는 평등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상호의존은 가려진 채 오로지 피압제자의 의존 상태만 부각한다. 우리는 앞서 이 ‘의존 상태’가 늘 사회적 약자에게 부여되었던 흐름을 지켜보았다. 로맨스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스라이팅과 같은 권력 행사에 매우 용이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성들이 사랑이 전부인 세계를 그려왔던 이유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11]. 그들은 이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로맨스 장르 속에서도 성별 위계의 문법을 전복하고자 갖은 시도를 해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학자 기든스는 연애 관계에서 여성들의 ‘능동적 행위성’과 ‘행위의 전복성’에 주목하며 이러한 특성이 관계 안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내용적 민주주의로 승화시키고, 곧 “두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의 협상”을 통한 친밀성 획득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12].


그렇기에 기든스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완성된 관계’를 뜻하는 사랑을 “신뢰에 기반한 정서적 친밀감”으로 정의하며, “해당 파트너가 상대를 위한 배려와 욕구를 얼마만큼 표현할 준비가 되었느냐에 따라,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고 본다[13]. 다시 말해 로맨스 관계의 완전한 성립을 위한 조건이 ‘동등한 상호의존’과 ‘배려’에 기반한 친밀감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신뢰, 필요에 대한 반응, 주의 깊음, 배려와 같은 태도는 ‘돌봄의 윤리’로 일컬어졌다[14]. 고등학교 때 윤리 과목을 들은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이 개념은 교과서에선 ‘여성의 윤리’로 소개되어왔다. 공정성, 평등, 이성 등에 초점을 맞추는 남성의 영역인 정의의 윤리에 반해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돌봄의 윤리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윤리적 영역이 다르고, 분리되어 있다는 젠더 이분법에 따른 논리는 돌봄과 의존의 성격이 보편적이라는 논의 하에 반박된다. 가령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양육자의 돌봄을 받고, 건강한 청년기에는 주변인을 돌보게 되다가도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다시 돌봄이 필요하게 되듯, 타인에 대한 의존이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 근본적이며 당연한 요소이기에 결코 유약하거나 비정상적이지 않고, 이 돌봄의 관계에 통용되는 윤리를 여성만의 윤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15].


약 210만 자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소설인 『나무를 담벼락에 끌고 들어가지 말라』는 상호의존을 향해 가는 대서사시다. 왕의 강간과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적국에 군사기밀을 빼돌린 왕비와 그런 왕비를 첩자라고 생각하는 적국 사령관의 만남은 결코 불쌍한 피해자 여성을 구원하는 완벽한 남성의 서사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느 로맨스가 그렇듯 사령관은 왕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가 군인으로서 묻혀온 피의 흔적과 근육질의 거대한 체구는 왕비가 끔찍한 가해자였던 무인 왕을 떠올리게 하는 트라우마일 뿐이다. 그런 요원한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 구원으로 가기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끊임없는 소통과 배려의 과정이 그렇게도 길다. 그런데도 이 글을 극찬하는 독자들은 긴 글에 기함하면서도 사람의 상처가 그리 한순간에 치유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의 반영을 환영한다. 또 그만큼 돌봄의 윤리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으며 실천하더라도 오랜 노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겨우내 숨죽이던 꽃이 어느 순간 피어나듯 만개하는 신뢰와 친밀감의 결실을 사랑하는 것이다.


장필화는 사랑을 “동시적인 주권의 행사와 서로에게로의 융화라는 이상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한다[16]. 많은 경우 우리는 젠더 위계나 사회적 배경과 같은 장애물에 의해 서로에게 융화하는 엔딩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과 로맨스 장르를 분리한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지독한 어떤 작품들은 ‘이게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고된 관계 정립의 기간을 갖는다. 로맨스는 인간의 권리로서의, 그리고 보편적인 필요로서의 돌봄을 상호존중하에 경험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낸다. 로맨스의 많은 문법이 여성의 종속을 낭만화하는 데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기도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돌보고 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합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위계를 넘어선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로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면서도 상호의존하길 긍정하는 이야기의 시도는 결국 돌봄의 윤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며, 그로부터 인간적 성장을 이뤄내는 인물들에 우리는 감화된다.


로맨스, 관계의 장

여러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내가 로맨스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접해보라 염불을 외는 까닭은 결국 로맨스가 관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피폐물을 좋아하는 은밀한 취향을 공개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나는 해피엔딩인 피폐물만을 고집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현실에서는 많은 경우에 불가능한, 아주 지난한 과정을 인내심 있게 달려가 도달하는 성숙한 인격체로서의 이상적 성장이 결실을 맺는 장면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로맨스 장르의 무엇이 판타지일까? 열렬히 사랑하는 두 사람? 잘난 스펙을 가진 인물들? 나는 돌봄의 윤리를 실천하며 성립된 이상적 관계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쓴맛을 아는 우리는 대부분의 관계가 동등하고도 윤리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나는 해피엔딩에 집착하면서도 서사가 차곡차곡 쌓인 새드엔딩 역시 곧 그것이 가장 현실에 근접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만다.


다양한 장르가 인간관계를 고민한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통해 인간 군상 속 연결을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여러 대중문화의 이야기 속에서 로맨스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긴밀한 합일에 초점을 맞추며, 관계 성립의 과정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로맨스는 바탕이 없는 황무지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여정이다. 그리고 관계의 정립이란 충동적인 감정으로부터 삽시간에 불태워지는 허술한 것이 아닌, 사랑을 매개로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하는 윤리적 태도와 개인의 정체성을 키워나가는 실용적인 과정으로서의 엔딩이다.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연애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돌봄 윤리를 실천하는 자신을 그려볼 수 있다. 어쩌면 로맨스가 의존을 말하기에 사람들의 경계심이 발동하고, 그에 따라 장르가 폄훼 당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존이 결국 우리 삶의 핵심이기에 나는 건강하고 동등한 상호의존을 추동하는 계기로써 로맨스 장르를 애정하고 그것을 권유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1] “불황기에 여자는 로맨스에 빠진다”, 여성신문, 2005.05.12.

[2] “[이주라의 문화톡톡] 로맨스와 페미니즘”, 르몽드, 2020.01.12.

[3] “로맨스 소설의 역사 – 로맨스 장르 총정리”, ROMANCIAN

[4] 김창식 (1998). 연애소설의 개념 -연애소설이란 무엇인가?-. 대중문학학회, 13-24쪽.

[5] “웹소설 로맨스 판타지 장르 속 여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가문을 일으키거나, 백작이나 공작 작위를 받거나, 자력으로 미래를 바꿔버리거나.”, 《Vogue》, 2018. 4.

[6] 한유희 (2019). 성인용 로맨스 웹소설의 여성적 섹슈얼리티: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는 플랫폼과 장르. 문화콘텐츠연구, (15), 133-159.

[7] 「전진하는 페미니즘」, 낸시 프레이저 (임옥희), 돌베개, 2017, 125-126쪽.

[8] 위의책, 129-130쪽.

[9] Colette Dowling, The Cinderella Complex: Women’s Hidden Fear of Independence, New York: Summit Books, 1981.

[10] 「스토리텔링 바이블」, 대니얼 조슈아 루빈 (이한이), 블랙피쉬, 2020, 118쪽.

[11] “로맨스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1)”, 텍스트릿, 2019.08.04., http://textreet.net/GybH00/2100

[12] Giddens, A. (2013).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John Wiley & Sons.

[13] 위의 책.

[14] Held, V. (2006). The ethics of care: Personal, political, and global. Oxford University Press on Demand. p.15.

[15] Tronto, J. C. (1993).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Psychology Press.

[16] 장필화. (1991). 성, 사랑, 결혼에서 주인되기. 통념과 규범의 비판. 또하나의 문화 (편).[새로 쓰는 성 이야기]. 서울: 또문, 42-57.


편집위원 유랑 <cyoon0402@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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