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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Apr 06. 2021

<127호> 평범한 사람

편집위원 재주




본 글에는 폭력적인 묘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하며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작가의 말>


내가 써 내려 갈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했다. 내게 글은 삶을 읽고 쓰는 아득한 성찰의 터전이자 해방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글에 기대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태롭고 서투른 성장 과정을 지나치면서도, 삶이 그려낸 먹먹한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에도, 내 곁에는 글이 있었다. 내게 새겨진 글의 의미를 더듬자 나 또한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뭉툭한 갈망이 맺혔다. 불완전한 우리가 모여 가진 무엇을 나누고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아린 공간을 고요하게 쓰고 싶었다. 


삶은 상실을 남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던 누군가를, 기억의 파편을, 펼쳐졌던 상상과 이상을, 어쩌면 자신의 형체마저도 잃는 순간을 마주한다. 상실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그것의 무게와 향을 드러내듯 흐드러진 자국이 피어오른다. 불화하는 상실이 서로를 이해하며 알싸한 울음을 내고, 나의 상실이 너의 상실을 흡수하며 스며드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결만큼 다채로운 상실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당신에게 세 명의 이야기를 보낸다. 이 글은 그들이 조심스레 건네는 상실의 기억이다. 혹은 사람과 마음이 만들어낸 어지러운 곡선에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이다. 당신의 삶 어딘가 뭉쳐있는 기억을 흐릿하게 건져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물결이 머금은 볕처럼 아른거리는 감각을 움켜쥐고 흘려보내며 잠시 얕은 숨을 고를 수 있으면 한다. 


당신 곁에 누운 윤, 은우와 지유 그리고 재희에게 오후의 인사를 전한다. 








하나.




“누군가를 증오해본 적 있어? 죽이고 싶을 만큼 말이야.”


바삐 움직이던 윤의 젓가락이 제 속도를 잃고 멈췄다. 팔팔 끓는 냄비를 감싸고 올라온 허연 증기가 계속해서 윤의 안경을 뿌옇게 덮었다. 흐릿하게 뭉개진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깍두기를 씹었다.


“갑자기, 왜?”

“그냥. 사람을 미워하는 건 고된 일이잖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일 자체도 드물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견디는 일도 힘들고.”


윤은 속에 입은 티셔츠를 늘어뜨려 안경알을 닦았다. 있는 힘껏 닦아낸 안경은 코 끝에 걸쳐지기 무섭게 곧바로 증기를 머금었다. 번져오는 시야에 재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는 마음 한 멍울이 떼 낀 유리창처럼 자욱해졌다. 윤이 그렇게 좋아하는 칼국수가 내뿜는 증기 탓인지, 돌연한 질문에 소란스러워진 마음탓인지 알 수 없었다. 


“있었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던 사람.”


윤은 다시 안경을 닦아냈다. 기민한 반응을 느끼자 재희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윤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낼 뿐이었다. 


잠시 휘청이던 대화는 중심을 되찾았다. 윤은 다시금 떠들어대는 재희를 뒤로하고 면발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뭉텅이진 생각이 흩뿌려지고, 그것이 지나가며 남긴 자국들이 어지러운 속도로 칼국수집 곳곳에 스몄다. 재희가 내는 소음이 점차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적막 속에 윤을 홀로 남겼다. 어떻게든 재희의 목소리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기억은 더북더북 우거지며 충실히 소환되고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칼국수가 그리웠던 늦겨울과 초봄 사이, 그 어딘가의 날이었다. 


동수. 그는 평범한 이름과 어울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위가 놀라지 않을 만큼의 적당히 미지근한 생수같이, 모난 구석이 없는 사람. 그는 윤이 친하게 지내던 과선배의 친구였다. 동수는 앳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쑥스럽게 발음하곤 했다. 윤은 그가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할 때를 좋아했다. 동수의 어수룩한 사투리 억양과 귓등에 툭툭 떨어지는 토속적인 어휘는 순박하고 맑은 풍경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윤은 그의 어조를 따라 하며 자주 웃었다. 흔한 대학 선후배의 술자리에 끼어든 낯선 이는 재빠르게 윤의 인간관계에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셋은 서로의 소주잔을 채워주며 밤을 지새우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선배가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처음으로 윤과 동수는 둘이 남아 술을 마셨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동수는 그날따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담배꽁초와 가래침이 가득한 대학로의 새벽 가운데에서 첫차를 기다리던 윤과 동수는 입을 맞췄다.  


윤은 가만히 누워 동수의 눈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했다. 세상은 때로 온정을 거두고 닿을 수 없는 숙제를 남겨 인간을 시험한다. 아마도 윤에게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재개발 공사로 철근만이 남아 숨죽이는 마을처럼 깊고 황폐한 공허가 삶 도처에 따라붙어 그를 허덕이게 했다. 윤은 으레 한국의 딸들이 그렇듯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사랑보다 분노를 먼저 습득했다. 집을 울리는 고함 소리를 먹고 자랐고, 부서지는 물건을 줍는 일과 타인의 우울을 받아내는 일에 익숙했다. 하나의 시절은 진득한 결핍을 낳았다. 그렇기에 윤은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 눈부신 빛으로 어둠이 가려지도록, 자신을 과시하며 자신을 지켜나갔다. 


동수의 눈에는 기이한 중력이 있었다. 윤을 무장해제시켜 묵직하게 끌어당기는 힘. 그 눈망울에 담긴 윤은 사랑스러웠고 평화로웠다. 동수와 나란히 누워 숨결을 교환했던 시간 속에서, 쏟아지는 충만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긴장을 풀고 순간의 아늑함에 젖어갔다. 윤은 동수에게 날 것이 되었다. 자신의 빛을 거두고 가장 가난한 모습을 내어줬다. 그 행위가 온전한 사랑이라 믿었다.


윤의 굳은 신망은 하얀 김처럼 그녀의 눈을 가렸다. 둘의 시간이 길어지자 동수는 성관계를 할 때 이따금 불을 끄자고 했다. 이유를 물으면 동수는 다른 여자를 상상하고 싶다 말하며 윤의 몸을 더듬었다. 갑작스레 몸을 손바닥으로 때리거나 머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윤은 원채 성관계가 즐겁지만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울렁임으로 행위를 거절하면 자신이 싫어진 것이냐며 동수는 눈꼬리를 내렸고, 그는 더 이상 단호해질 수 없었다. 윤은 동수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자신을 못살게 구는 온갖 미운 것들을 참을 수 있었다. 윤이 너는,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거야. 하루는 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동수에게 헤어짐을 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수가 사과를 한 후로 그 말을 다시는 생각의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되뇌면, 주술적 힘이 생겨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부족한 사람임이 까발려질 것이라는 공포가 윤을 서늘하게 지배했다. 윤은 동수와의 연애에서 거북하고 뒤틀린 점을 찾아냈고 애써 눈에 더 진한 김이 서리게 했다. 어디에도 온전한 안식을 느끼지 못했던 윤이 돌아갈 곳은 동수뿐이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도착한 마지막은 어느 여름밤이었다. 거듭해서 망가지던 관계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윤이었다. 윤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처절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놀랐다. 동수는 평화가 아닌 파괴를, 낭만보다 추락을 가져왔다. 날 선 짐승을 끌어안아내는 것 마냥, 동수를 껴안는 일은 그윽한 생채기를 남겼다. 그럼에도 윤은 그가 부재한 세계를 소화해낼 수 없었다. 이별과 동수를 동시에 갈망했다. 내리막길에 서있었던 윤은 밀쳐져 굴러떨어졌다. 생기를 잃고 늘어진 벌레의 시체처럼 윤의 몸은 동수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윤아, 너는 얼마나 너를 사랑하지 못하면 나 같은 사람을 붙잡니. 동수의 뒤꿈치가 점차 작아져갔다. 윤이 마지막으로 본 동수의 모습이었다. 


윤의 마음은 검고 잔주름이 많은 비닐봉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두려웠다. 마음이 찰흙 덩어리와 같은 형상이라면 윤의 것은 분명 문드러지고,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고, 상처가 짓눌린, 검붉고 흉한 모습일 것이었다. 윤은 시커먼 비닐봉지에 마음을 넣고 꼭꼭 묶었다. 비닐봉지가 바래지면 악취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더 강력하고 탄탄한 재질을 찾아 떠났다. 재질을 퉁-하고 튕겨보며 시험하고 마음에 들면 그 재질로 만들어진 비닐봉지를 들고 와 낡은 비닐봉지 위에 씌우고 묶었다. 윤은 무력하고 궁핍했다. 그리고 겹겹이 쌓인 봉지를 뚫어 질척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일이 어렸을 적 먹었던 동그란 해충제처럼 긴하지만 해롭다는 것을 알았다. 동수는 윤의 모든 이야기를 누구보다 투명하게 알았다. 그런 동수가 내어준 과분한 사랑은 윤의 비닐봉지를 찢고 헤쳤다. 겁먹은 윤의 입자가 와르르 사방으로 튀었다. 윤은 자신의 상실을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긴 시절이 지나서야 윤은 동수가 제게 했던 대부분의 언어와 행동이 ‘데이트 폭력’이라 불리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지나온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파충류가 된 시간이었다. 윤은 민첩하게 순간마다 온도와 색깔을 바꿨다. 어느 날은 아낌없이 아파해도 허기가 졌고 또 다른 날은 사뿐한 활기가 돌았다. 허물을 벗고 언어를 먹어치우며 하루를 보냈다. 운이 좋게도, 윤의 거칠고 텁텁한 탈피 과정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희도 그때 만난 친구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윤에게 언어를 공유하기도, 윤이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기도 했다. 분명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윤은 자신의 이야기가 특수하고 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자신이 홀로 남겨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부식된 기억 끝에는 떨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날의 오돌토돌했던 아스팔트 촉감, 번져왔던 가로등 불빛이나 희미했던 피 냄새는 윤이 되어있었다. 각인된 감각을 더듬으며 울렁임의 실체를 알아차려갔다. 느릿한 쾌감과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게 윤은 자신을 힐난하지 않고 미약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 움켜진 마음이 대륙에 가닿은 파도처럼 아름답고 비참하게 부서져내릴 것을 알았다.  


재희야,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사람 앞에선 내 손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들려있지 않아 얼마나 안도했는지 내가 네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나의 비겁한 양심이자 내숭이었음을 안다. 나의 영혼은 내 손에 온갖 무서운 무기가 들려있기를 간절히 바랐어. 아무런 상흔 없이 살아 숨 쉬는 그 애의 무결하고 찬란한 시간을 죽이고 싶었어. 살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그 애와 피로 물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거룩한 쾌락을 느꼈는지 넌 알 수 없을 거야. 아니 사실은 말이야, 재희야. 그 애 앞에 선 나를 흠뻑 적신 피가 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나는 그를 죽이면서 나를 죽였어. 나는 그가 아닌 나를 상실했다. 나는 결국 나를 사랑하지 못한, 나를 지켜내지 못한 나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뿌연 김이 윤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윤은 또다시 안경알을 닦아냈다. 








둘. 




내가 왜 옥상에 올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선명한 장면은 난간에 아슬하게 기댄 작은 몸이었다. 자그마한 형체는 반쯤 접힌 낡은 폴더폰처럼 난간에 상체를 걸치고 뭉개진 발음으로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대지 마시오.’ 빨간 고딕체로 큼직하게 적힌 글자가 뒤꿈치를 높게 든 다리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났다. 뒤를 돌아 나를 빤히 바라보는 콧등에 낮곁이 부서져 내려앉았다. 짧게 친 곱슬머리와 옅은 눈썹, 퍼런 핏줄이 드러날 것 같은 투명한 피부, 통통하게 오른 볼살이 드리운 음영, 몸집에 비해 헐렁한 교복 상의와 무릎 위를 조금 덮는 치마가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내가 도망친 그곳에는 은우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은우를 생각하면 달궈진 정수리의 뜨끈한 감각과 옥상 구석에 버려진 음료수가 썩어가며 내는 달큼한 냄새가 느껴지곤 했다. 


은우를 처음 만났던 무렵은 내가 충주로 전학 온 지 반 년이 넘어가는 시기였다. 부모님은 서울의 집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충주로 내려왔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부모 손에 이끌려 전학을 갔다. 아끼던 참나무 길과 동네 오락실이 드문드문 그리웠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낯선 시공간에 적응하려 애를 썼다. 열여섯이 열일곱이 된다는 의미는 기존에 것에 1만 더하면 되는 단순한 계산법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1이 가진 무게만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충주로 내려온 것이 비정상적인 사업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 밖을 나도는 아빠를 바라보며 홀로 나를 키웠던 엄마가 병이 생긴 것. 정신적 궁핍 속에서 엄마는 아들을 갖기 위해 자유 대신 또 한 번의 출산을 택했다는 것. 그럼에도 나는 자랑이 되어 그녀의 무너진 삶을 보증해야 한다는 것 따위의 진실이 어린 내 삶에 성글게 떨어졌다. 


옥상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곳은 은우에게 내가 알게 된 모든 진실을 말한 곳이었다. 은우의 꿈이 안무가인 것과 은우가 야자를 빼고 매일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고백한 곳이기도 했다. 은우에게 처음 담배를 배운 곳도, 은우가 알바를 하다가 고기 불판에 손 화상을 입어 서럽게 울었던 곳도, 그럼에도 방과 후 노동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말했던 곳도 모두 옥상이었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담쟁이덩굴처럼 얽히고 뻗어가며 옥상 구석마저도 뒤덮겠다는 듯이 매섭게 자라났다. 서울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나와 졸업 후 댄스 크루에 들어가겠다는 은우는 완연히 다른 일상을 살았다. 반장이자 선도부였던 나는 은우의 까만 별 피어싱에 벌점을 매겼고 은우는 실없이 웃으며 벌을 섰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엎드려 자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나는 때로 기묘함을 느꼈다. 은우가 나와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기어코 부정하고 싶은 매콤하고 스산한 감정. 종종 은우와 멀리하라는 충고를 듣곤 했지만 내게 그 아이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은우는 늘 내가 생각지 못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담임이 준 희망 학과 란을 끝내 채워 넣지 못하던 내 옆에서 은우는 쌓여있는 서류를 결재를 하는 부장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글자를 휘갈겼다. 은우는 삐뚠 글씨로 ‘정규직’ 세 글자를 쓰고는 킬킬댔다. 야, 내가 제일 두려운 게 뭔 줄 알아? 우리 엄마처럼 일만 하다 꼴까닥 죽는 거. 평생 비정규직으로. 난 비정규직이 되는 게 운석 충돌보다 무서워. 너 봤지? 나 화상 입어서 피부가 까뒤집어져도 사장 그 새끼가 눈 하나 깜빡 안 하잖아. 내가 어리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여자니까 우스워서. 그게 바로 약자의 슬픔이다 이거야. 나는 대형 소속사 공채에 합격해서 아티스트 안무 기획가가 될 거야. 더울 땐 에어컨 바람 쐬고 추울 땐 히터 바람 쐬고, 점심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땡기면서.  


은우는 잠에 가득 잠긴 목소리로 엄마 얘기를 하기도 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삶이 인간에게 주어진 빚이라는 생각. 태어나는 일이 너무 귀해서, 우리는 태어나는 것만으로 세상에 빚을 지는 거야. 돋보기 빛 반사에 서서히 타죽는 개미처럼 그 빚을 갚아내며 죽어가는 거지. 그런데 빚은 왜 항상 비대칭적일까? 그렇잖아. 사장 새끼는 빚도 없이 가진 점포가 몇인데.. 생각해 보면 빚도, 사랑도, 이해도, 세상 모든 일은 다 기이할 만큼 불균형하다. 너네 엄마가 너무 많은 이해를 내어줘서, 그렇게 빚을 갚다 병이 난 게 아닐까. 너 엄마 닮아서 똑똑하잖아. 그러니까 우리 결혼도 말고 둘이 같이 지내자. 지금처럼 담배도 태우고 출출하면 라면 먹고. 나? 나도 가끔 내 삶에 존나 과도한 빚이 책정된 건 아닐까 생각해. 어쩌겠어. 그래서 내가 너랑 같이 있어줄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은우가 내는 소리가 나를 간지럽혔다. 은우는 웃을 때 콧등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열일곱의 나는 은우가 하는 이야기가 고등학교 삼학년 모의고사 국어 지문보다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은우의 이야기는 뭉쳐 응어리진 내 몸을 아릿하고 녹진하게 만들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 은우의 주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전학을 온 뒤로 나는 기록에 집착했다. 기록은 욱신거리는 진실을 쏟아낼 수 있는 수단이었고 순간을 부여잡는 간절한 도구였다. 나는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을 병적으로 시시각각 적었다. 나의 글 대부분에는 은우가 자리했다. 그 시절 가장 길었던 기록은 생일날의 감상이었다. 은우는 내 생일날 알바를 뺐다. 야자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은우는 음악실로 향했다. 여기서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우리는 숨죽이며 학교에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교실문이 들락날락 열리고 친구들은 교문 문턱을 넘어 서서히 사라져갔다. 교무실의 전등마저 빛을 잃는 순간, 음악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우리는 입을 막고 웃음을 삼켰다. 사실 나는 그 순간에도 은우를 잃을까 두려웠다. 시커먼 학교의 아가리가 은우를 집어삼켜버릴까 은우의 팔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사춘기의 냄새를 짙게 내뿜던 학교는 모든 기력을 쏟아낸 듯 고요했다. 나는 은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달음질했다. 우리는 소리를 내지르고 질주했다. 이슬에 젖어 축축한 운동장 잔디 위에 은우와 나의 실루엣이 잔무늬를 만들며 어른어른 춤을 췄다. 생일 선물은 소주 두 병과 노트 한 권이었다. 옥상 입구에 달려있는 전등이 졸린 아이의 눈망울처럼 느리게 깜빡댔다. 처음 입에 댄 소주는 배꼽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얼얼했다. 내장이 꿈틀대고 식도가 무한 진동을 하며 요란을 피웠다. 이 찌릿한 액체가 두려웠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들이켜는 은우를 보니 서툴게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 옥상 하수구를 부여잡고 형 형색의 이물질을 토해냈다. 은우는 처음 본 그날처럼 난간에 대롱 매달려있었다. 은우 다리 옆에는 여전히 기대지 말라는 경고의 여섯 글자가 바람과, 담뱃재와, 누군가의 기댐으로 바래져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은우는 숨겨진 말들을 갈피 없이 뽑아 흩뿌리는 고장 난 스프링클러처럼 끝없이 종알댔다. 


‘기대지 마시오’란 말 웃기지 않아? 난간을 보면 기대고 싶어. 마치 기대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댐을 거부하면서도 누군가의 기댐을 애타게 바라는 거지. 그래서 난간을 보면 애틋해. 


은우의 옆모습이 조각난 채로 흔들렸다. 은우가 열 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지고 모아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지유야, 나는 네가 미웠다. 글을 쓰는 네 가는 손을 보면 묘한 신경질이 났어. 우는 너를 안으면서 네가 더 고통에 절기를 바라기도 했다. 바스러지고 아파했으면 했어. 나 참 나쁜 새끼지. 


은우의 목소리가 물에 젖은 빨래더미처럼 질척이며 늘어졌다. 흐릿한 알코올 향이 인중을 스쳤다. 


그만큼 나는 너를 탐냈어. 네가 그만하라고 발버둥 칠 때까지 너의 몸에 파고들어 발가락 주름의 기분까지도 알고 싶은 날이 있었어. 어떤 날은 변덕이 찾아와 왜 네게 마음을 주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지 몰라 발을 구르고 괴상한 소리를 내고, 널 원망하고 싫증 냈어. 너는 내가 다정하다 말했지만 나는 다정이 싫어. 다정이 내비치는 시선의 끝에는 외로움이 있거든. 지유야, 너와 나도 네가 쓰는 글처럼 어딘가에 결박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겠지. 우리는 글이 아니라 말이 되겠지.


은우가 돌아봤다. 깨질듯한 이명이 들렸다. 은우를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은우의 형체는 끝없이 분열하며 사라졌다. 


지유야, 나는 너의 진실이 될게. 


부르튼 입술에 개운한 공기가 닿았다. 비릿한 촉감이 얼굴 구석구석을 맴돌았다. 나는 무슨 오그라드는 소리냐며 은우를 타박했다. 그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둔하고 무뎠다. 은우는 코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병은 우리 가족을 쉽사리 갉아먹었다. 집안에 번지는 병의 기운이 나를 섬뜩하게 했다. 소록소록 코골이를 하는 어린 남동생의 그림자를 밟고 방을 들어오면 나는 한참을 잠에 들지 못했다. 나의 시간은 아주 얇은 종이처럼 잘게 찢겨 나갔다. 나는 엄마의 병보다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야 했다. 열아홉의 무게는 열일곱의 무게의 곱절은 되는 듯했다. 생경한 속도감에 홀려 종일 온갖 활자를 외우고 들여다봤다. 옥상과 담배와 글은 명품 브랜드보다 더한 사치였다. 은우와 나는 잦은 말다툼을 했다. 은우는 주말이면 김밥을 싸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죄책감이 거슬림으로 변이할 때 즈음, 은우는 내게 더 이상 자신의 일상을 문자로 남기지 않았다. 


대입 축하 현수막이 학교 사방에 걸렸다. 진한 궁서체로 쓰인 내 이름과 촌스러운 축하 문구들을 바라봤다. 현수막은 매서운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모양을 바꿨다. 수능이 끝난 학교는 무성하고 잡다한 소문으로 팽창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수시 입학과 재수 소식이 또 다른 누군가를 울고 웃게 했다. 진득하게 얽혀있는 소문 사이로 희미하게 은우가 있었다. 곁눈질로 아무리 찾아도 볼 수 없었던 은우는 나를 놀리듯이 말로써 자취를 드러냈다. 아 고은우, 걔 수능 한 달 전쯤에 임신해서 자퇴했는데.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혀에 신맛이 돌았다. 뾰족하고 거친 유충이 내장을 쑤시며 돌아다니는 느낌이 났다. 어느 시공간에서도 은우가 내게 남기고 간 지독하고 악랄한 감각을 묘사하는 언어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것도 글로 나타낼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글쓰기를 그만뒀다. 은우의 흔적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재가 되어 허공을 떠다녔다. 


은우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꼬박 세 달 동안 이름 모를 열병을 앓고 나니 나는 서울 새내기가 되어있었다. 스무 살이 자아낸 정취는 은우를 점차 옅어지게 했다. 짭짤한 새내기 시절이 지나가고 전공 서적 앞에 꾸벅 졸던 어느 한낮에, 내가 더 이상 담배를 긁던 은우의 볼록한 손톱을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됐었던 그때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은우였다. 


은우는 의외로 카페 주소를 보냈다. 전날 한숨을 못 자 멍한 머리가 카페 앞에 서니 쨍해졌다. 날개뼈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 흘러갔다. 나의 은우는 열여덟의 궤도에서 멈춰 있었다. 컴컴한 밤의 그늘 밑에서 몰아치는 파도처럼 보이지 않는 말들이 엄하게 머리를 휩쓸며 나를 지배했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카페 문을 밀었다. 카페는 오후의 빛과 섞여 나무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나른한 조명 안에서도 풍성한 곱슬머리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은우는 낯모르는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하다 인기척에 나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도, 개구진 웃음이 아닌 잔잔한 미소도, 짙어진 화장도 우리가 떨어져 살아낸 거리를 증명하듯 낯이 설었다. 삼 년이 넘는 시간이 세 시간의 대화로 압축됐다. 나는 가만히 앉아 복잡한 자퇴 과정과 임신 중단의 고단함을 들었다. 혼자서 산부인과에 앉아있는 기분과, 느껴 보지도 못한 아이가 매일 밤 목을 졸랐다는 꿈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가 높고 커졌다. 은우는 들뜬 빛깔로 흑석같이 짙은 액체가 허벅다리를 타고 쉼 없이 떨어진 시간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얼굴은 한참 동안 내 마음을 쏘다니며 구겨지게 했다. 은우는 대체로 평온했고 나는 에이드가 담긴 잔이 넘치도록 감정을 쏟았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네 살배기 아이처럼 뱉어냈다. 언어의 한계와 가벼움에 힘이 겨웠다. 은우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되니.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걸어가던 은우가 건조한 어투로 나를 돌아봤다. 무심코 난간에 기대 나를 잔잔하게 응시하던 은우가 아물아물 겹쳐 보였다. 은우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덜미에 닿아 흐트러졌다. 내 등을 끌어안는 손목에는 화상 자국과 칼자국이 종이에 스며든 수채 물감처럼 번져있었다. 은우의 냄새를 만나자 내 박동은 제자리를 찾아 먹먹하게 뛰기 시작했다. 은우는 여름 해에 데워진 자갈의 온도를 갖고 있었다. 숨과 숨이 만났다. 은우는 고이 내 몸에 글을 나눴다. 어떤 질책도 기만도 없이 내 글을 위로했다. 


은우의 숨이 걷히면 내 숨에서 은우의 숨을 뺀 딱 그만큼의 여린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다. 옷자락 소리가 나며 은우가 멀어졌다. 지금 이 포옹이 은우의 마지막 글이자 진실임을 나는 알았다. 








셋.




재희에게


넌 삶의 시작에서 나를 만났고, 나는 삶의 중반에서 너를 만났어. 행성과 별과 은하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듯이 우주가 정해준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지. 하지만 우주는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고독과 탄생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 때로는 우리를 속이고 역행하며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어주는 존재임을. 네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남아 그런 우주의 습성에 대한 생각을 해. 어쩌면 나는 우주를 거슬러, 삶의 시작에서 너를 만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네가 내게 줬던 충만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래 뱃속을 가득 채우는 무수한 플랑크톤 떼처럼 내게 들어찼던 너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연이은 폭설이 지나가고 눈은 자신을 밟아내는 사람의 좀먹은 마음을 빨아들이며 거뭇해져 갔어. 나는 눈을 연민했어. 사람들은 상처도 없이 쏟아지는 눈을 사랑하지만 눈이 기꺼이 거리의 구정물과 몸을 섞으면 기어코 그것을 미워하거든. 내가 하는 일이 눈과 같다고 생각했어. 나는 너를 만난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기 전까지 무지한 사람이었어. 그곳은 세상의 모든 폭력을 모조리 쓸어 담는 곳 마냥 모든 아픔을 드러냈어. 학대는 아이들의 생김새 보다 종류도 이유도 다양했고, 아이들은 기대를 잊어버린 듯했어. 그럼에도 모든 일은 간편하고 형식적으로 처리되었어. 이 세계를 부정하고 싶었던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단체를 만들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어. 얼마 안 가 아무리 몸을 뒹굴어봐도, 결국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렇게 나는 둔하고 무지근한 사람이 됐어. 


때가 탄 구름이 내는 갑갑한 숨이 내려앉고 여느 날처럼 신발 밑창에 눈이 만들어낸 구정물이 진득하게 묻어져 나오는 날, 나는 너를 만났어. 가진 것 하나 없이 베이비박스에 뉘여진 너는 고단한 하루를 마친 노인처럼 나지막한 숨을 내며 자고 있었지. 네 손에 들려있던 글씨를 빤히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는 ‘재희’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적혀있었고, 네 손가락 마디에는 잉크가 증발한 볼펜 자국이 묻어 있었어. 그때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아기의 맑은 침 냄새를 맡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 너는 마치 이 지저분한 세계를 초월한 생명 같았어. 살구색 포대에 기대 그토록 태연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너는 평온해 보였고, 그 얼굴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끌고 들어와 내 몸속을 순환했어. 그래, 나는 너를 만났고 너의 포동한 볼에 감도는 붉은 빛깔이 나를 계속해서 맴돌았던 거야.


위탁[1]을 신청하고 전입신고를 했어. 동사무소 직원은 위탁가정 전입신고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절차는 간단하면서도 어지러웠고 긴 사투의 과정을 지나는 듯했지. 나와 남편의 이름 아래 너의 이름이 붙어 나오자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어. 대체로 법을 미워하던 나는 처음으로 법이 주는 안정감에 안도했어. 세상이 너를 박재희라고 부르면 너는 뒤를 돌아 대답을 할 것이고, 네 칫솔이 나와 남편의 칫솔 사이에 나란히 붙어 화장실 거울에 또 다른 색을 채울 것이고, 네 옆에 누워 꾸벅이다 잠에 드는 저녁이 일상이 될 것이라는, 사회의 문법에 편입되는 순간 만끽할 수 있는 당당함 혹은 안락함. 우리는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안전한 끈으로 묶여있다는 포근한 감각. 상투적이게 벅찬 그 감각을 너도 느꼈는지 궁금해.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놀이는 숨바꼭질이었어. 너는 그 좁은 평수의 집을 분주하게 탐험하며 이리저리 잘도 숨었어. 낡은 다홍색 소파를 비집고 삐죽 나온 너의 엉덩이와 베란다 창에 비친 긴장을 잔뜩 머금은 웅크림이 선명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던 비장한 목소리가 거실을 울리고, 너의 조급한 발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점심으로 부른 배를 달랬지. 너는 절대로 술래를 하지 않으려 했어. 역할을 바꾸자고 하면 화를 내고 도망가곤 했지. 이유를 물어도 딴청을 피우고 볼을 잔뜩 부풀리며 고개를 휙 돌렸어. 한참이 지나 숨바꼭질은 철 지난 놀이가 되었고, 레고를 쌓아올리던 너는 무심코 말했어. 엄마가 숨어버리는 일이 무섭다고. 내가 항상 너를 찾아주었으면 했다고 말이야. 그 오후를 기억하니? 나는 너의 말을 곱씹고 곱씹고 싶었나 봐. 너의 말은 음미할수록 내 삶 전반을 걸쳐 배워보지 못했던 맛을 냈어. 내 몸의 절반도 안 됐던 너는 그렇게 나를 다그쳤고, 너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 줬어. 


너는 나와 달리 시끄럽고 활달한 사람이었어. 내가 창가에 앉아 조용히 교과서 구석 밑에 그림을 그리던 아이였다면, 너는 누구와도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깔깔대는 소리가 사랑스러운 학급에 한 명씩은 꼭 있는 그런 아이였지. 놀이터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학교에 가서도 타인의 애정을 즐기는 너를 보며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를 거야. 너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차근히 지나갔어. 성장이 주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며 심통을 부리기도 했고, 너를 둘러싼 세계를 정신없이 흡수하느라 몸을 꿈틀대곤 했지. 여느 관계와 다름없이 나는 그런 너와 부딪히고 이해하고, 너를 시기하고 미워하다가도 반나절이 지나면 다시 그리워했어. 보통의 말싸움이 번져 내 마음을 쥐어뜯다 방문으로 쿵 소리를 내며 꽁 숨어버리는 네가 얼마나 얄궂었는지. 그런데 말이야, 씩씩대며 커피를 내리다가도 나는 웃음이 미움을 비집고 툭 튀어나와 당황스러웠어. 싸우고 다투는 우리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한 세포 같아서, 우리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미움마저도 나를 기쁘게 했어. 


말을 배우고 걷고 뛰면서 너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어. 옥상에 빨래를 널고 돌아오자 네가 거실 바닥에 화장실 세정제를 마구 뿌려놓은 날이 있었어. 골이 흔들리는 화학약품 냄새에도 너는 나를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어. 또 다른 날은 네가 아끼던 색연필을 변기에 박아 넣고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며 엉엉 울었지. 네가 다섯 살 때 즈음이었나. 새벽에 세 시쯤에 어김없이 깨어나 자연이 인간을 벌하며 내는 굉음처럼 울분을 토하고 발작을 했어. 온갖 방법을 쓰며 달래도 네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날이면 가끔 전쟁 중 전투기 밑에 납작 엎드린 군인의 마음이 되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곤 했어. 네가 애타게 찾는 엄마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나를 뒤덮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되뇌는 일뿐이었다. 누군가가 너를 떠난 것은 너와 함께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이상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네가 원하는 이상 나는 네 엄마로 남겠다는 그 이기적인 약속을 뱉으며 네 동그란 정수리에 어리석은 눈물을 흘려보냈어. 지금 돌이키면 그때 네 행동은 미숙한 고백이었을지 몰라. 너는 화상을 입었던 거야. 만져도 만지지 않아도 화끈거리며 너를 헤집는 마음의 손상을 앓다 버티지 못하고 표출하는 불안. 몸을 던져 그 고통을 알아달라 외치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었을까.


고등학생이란 얼마나 의젓한 청소년인가를 설교하며 어깨 각이 잡힌 먹색 교복을 입고 으쓱대던 너를 배웅했던 나른한 봄이었을 거야. 요란스러운 너의 등교가 끝나고 전화가 왔어. 그리고 나는 싱크대를 잡고 서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 나쁜 마음을 먹은 악당이 내 시간의 테이프 줄을 길게 늘여뜨려 놓은 것 같았어. 잔인하게도 인간은 그런 순간을 지나쳐야 하나 봐. 그 후로 어떻게 그 표독한 일련의 과정을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네게 줬던 돌봄에 응답하듯이 네가 나를 보살폈던 시간들이 생각이 나. 욕조를 가득 채운 심해에 머리를 넣고, 물의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호흡할 때면 네게 몸을 맡기던 나날이 되살아나곤 해. 어린아이가 되어 무너지는 나를 돌보고 쓰다듬던 보드라운 네 손끝이 느껴져. 너와 나는 담당자 앞에 앉아 가정 복귀 신청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네 원부모의 사진과 간단한 정보,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주소를 받았어. 세상에, 그들은 너무나 먼 곳에 살고 있더구나. 백칠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가늠했고, 딱 그만큼의 세상을 간절한 몸짓으로 긁어내고 싶었어. 무기력하게 늙어 버린 나를 미워했지. 너는 세상의 단 것들이 그렇듯 살갑게 녹아 사라졌어. 짐을 싸고, 네 가구를 부치고, 네 신발이 사라져가는 정사각형의 현관 바닥을 응시하고, 그러는 사이 너는 잠시 풀 등에 살포시 앉았다 날아간 산새처럼 어디론가 가버린 거야. 


재희야, 그곳에서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성큼 커버린 너에 비해 나는 자라지 않았는지 전파가 전한 사진을 한없이 쓸어보다 잠이 들어. 우리가 우주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만들어 온 것처럼, 나는 머나먼 백칠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거슬러 너에게 말을 걸어. 너도 나처럼 나의 시간을 궁금해하니? 이렇게 편지를 쓸 때면 내 숨과 생이 오롯이 네 것이 된다는 느낌이 들곤 해. 너를 더듬고 만지고 아끼고 몹시 사랑하는 시간. 나는 여기서 너를 생각해.






편집위원 재주(rkdud4904@gmail.com)


[1] 부모가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아동을 양육할 수 없거나 양육하기에 적절하지 못할 때, 아동의 보호를 희망하는 건전한 가정을 선정하여 단기 또는 장기간 대리 양육하는 제도이다. 학대로 인해 분리보호의 필요성이 있거나 방치된 아동, 소년소녀가정도 위탁아동에 포함된다. 이 제도는 친부모가 친권을 포기해야 하는 입양제도와는 달리 친권자가 있는 아동을 돌보는 제도로, 위탁양육자는 친권자가 나타날 때까지 아이들의 양육권만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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