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차지
여자와 여자의 관계를 과장 없이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에선 남자의 관심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얄팍한 관계라고 모함하지 못해 안달이고, 다른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남자들의 경쟁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여자의 우정을 낭만화한다. 여자 사이의 우정이야말로 집착과 투정이 난무하는 이성 관계의 뙤약볕을 막아줄 서늘한 그늘이노라 자랑스레 선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여자들의 동성 관계가 마냥 생산적이기만 했다면 여성의 지위는 이미 오래전에 향상되었을 테다. 굳이 여성인권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성 간의 관계가 마냥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이 아님은 중고등학교를 나온 여자들이라면 모두 뼈저린 경험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중학교를 나온 사람 치고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없다고 나는 감히 자신한다. 알파의 기질을 타고난 동갑내기들에게 기세가 몇 번 눌리고,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뒤통수가 납작해질 때 즈음 사춘기 아이들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인간사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으며 심리학자 흉내를 내는 일은 분명 재미있지만 그에 수반되는 비약과 일반화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고로 글에 담은 일화와 그에 대한 감상으로부터 경기도 남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형성된 나의 개인적인 세계관 이상의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기대는 없다. 그러나 특수성으로 점철된 내 경험담 중에는 분명 여성이 처한 거시적인 상황에서 기인하는 보편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이 허핑턴포스트에서 많이 보셨을 법한 “여자가 알려주는 여자 심리”따위보다는 조금 신선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길 바란다.
여자들이 주를 이루는 6인 이상의 모임에 초대된다면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모임이 막 시작할 때에는 모두가 최선을 다해 구성원들이 전부 한마디씩 거들 수 있는 주제를 꺼내며 모두의 참여를 독려하겠지만, 얼마 안 돼 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어 명씩 짝을 짓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여러 쌍의 여자들은 둘만의 대화에 빠져든다.
중고등학교 시절 여학생들은 대개 서넛 이상의 무리를 지어 다녔지만, 그 그룹 안에서도 특별히 친한 쌍들은 늘 있었다. 동성 친구를 향한 독점욕은 요즈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친뺏[1]’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서로가 사랑스러워 몸 둘 바 모르는 단짝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평소엔 다른 사람들과 다니다가도 기회가 되면 무리에서 이탈해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그들만이 아는 얘기를 꺼내곤 했다. 한 학기 내내 교환 일기를 쓰거나 점심시간 빈 교실에서 속닥이는 등의 의뭉스러운 행동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질투를 느끼게 한다.
나는 점심을 함께 먹거나 교과서를 빌릴 친구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나를 이해해주는 한 명의 동성 친구와의 특별한 관계를 구축하기를 늘 바랐고, 그러한 배타적인 관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안타깝게도 난 교환일기나 커플 팔찌와 같은 낯 간지러운 활동들을 제안하기에는 쑥스러움이 많아서, 단짝 친구를 어렵사리 만들어도 문자나 자주 하거나 화장실에 같이 가는 정도였다. 많은 여자아이가 무리를 지어 화장실에 다녔기에 화장실 여정에 동반하는 일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같은 칸에 들어가서 번갈아 변기를 쓰자는 친구의 제안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긴 했다.
[그림] 웹툰 『여자친구』 38화 중. 꼭 둘이서만 친하려 든다.
(사진설명 시작. 학교 생활복을 입은 여학생 두명이 대화 중이다. 그 중 머리를 하나로 묶은 학생이 "발발하고 만 거야... 베프 쟁탈전이..."라고 말한 뒤 "그런 거 있잖아. 셋이서 모이면 꼭 둘이서 친할라고 하구~"라고 덧붙이고 머리를 푼 다른 여학생은 가만히 듣고 있다.)
관계의 무게추는 항상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인간이 둘 이상 모이는 순간 지배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생기며 이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사소한 다름으로 기어코 우열을 가르고야 마는 인간의 습성이 여성들 사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외모, 성격 심지어 성적까지 온갖 세속적인 요소들이 계급 형성에 관여한다. 객관적인 지위가 비슷하다 해도 더 지배적인 성격을 지녔거나 상대에게 애착이 덜한 쪽으로 권력은 기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신보다 뛰어난 타인과 친밀해지고 싶은 마음이 균형을 이룬다. 때문에 가장 매력 있는 여자 친구를 단짝으로 만들기 위한 신경전은 삼류 치정극을 방불케 한다.
누군가는 내가 여자의 우정을 너무 비관적으로 본다며 비록 완벽하진 못할지라도 상대의 지위 따위 따지지 않고 서로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여자들 사이의 불화가 단지 편협한 질투심이나 속물근성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되려 이 모든 문제는 서로에 관한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탓이다. 그저 등하교를 같이하거나 체육 시간에 함께 내려갈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상대의 스펙 따위를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여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항변하는 여자 아이돌의 팬들이나 부유하거나 성적이 좋은 여자를 친구로 삼으려고 애쓰는 수많은 사람은 기만적인 속물들이 아니다. 여자가 동성 친구를 찾는 과정은 롤모델을 찾는 일과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내 시선 역시 특출 난 여자들에게 향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 학교생활의 몇 안 되는 재미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는 듯이 구는 여자애들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잘하는 것이 있어도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비웃음을 사거나 해코지당할까 연막을 치는 버릇이 있는 나는 자신의 뛰어남에 대한 확신으로 부푼 사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쟤들은 눈치란 걸 안 보나 싶으면서도 그녀들의 매력의 8할이 그런 솔직한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음험함을 그녀들의 호방한 행동거지를 비교하며 감탄했다. 아쉽게도 난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타고나지 못해서 대개 동경 받기보다 동경하는 쪽이었지만, 나한테 관심을 둔 여자아이들이 드물게 있었다.
초등학생 주제에 학원 여섯 군데에 다니던 그녀는 공부와 피아노, 제2외국어까지 동년배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단지 사교육으로 만들어진 인재라 매도하기엔 나를 포함한 다른 초등학생들이 보기에도 그녀의 능력은 남달랐다. 그녀의 뛰어남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거리를 두며 수업 시간에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괬다. 학교 수업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며 선생님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나도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오만방자한 태도가 오히려 멋있게 느껴졌다.
그녀의 우수함에 감복한 여자아이들 두어 명이 그녀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녀의 집에 자주 놀러 가던 나 역시 그녀와 친한 축에 들었지만, 그녀를 속없이 칭찬하지 않을 정도의 자존심은 있었기에 그녀의 대단함에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그러던 나도 그녀와 정정당당하게 맞붙을 기회가 매주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꽤 열의가 넘치는 분이라, 당시 유행하던 사고력 수학 문제를 매주 가져오셨다. 인생의 모든 승부에 진지하게 임하는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문제를 풀었으나 이즈음에서 그 문제들은 내가 더 많이 풀었다고 자랑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던 중 그녀의 집에 놀러 간 어느 날, 어머님이 자신의 딸이 정석적인 수학 문제는 놔두고 요상한 사고력 문제만 푼다고 토로하셨다. 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막았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새침했던 그 애가 나로 말미암아 이를 악물고 공부한다는 사실이 짜릿해 견딜 수 없었다.
같은 반이지만 어울릴 일이 없었던 친구가 난데없이 집에 초대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나라면 펄쩍 뛰면서 좋다고 했을 테지만, 당시의 나는 꽤 재수 없는 꼬마였기 때문에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의 하루 계획이 예기치 못한 약속으로 어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나와 달리 너무 잘 놀았기에, 불순한 저의가 있지 않은 이상 나를 부를 리가 없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내게 말을 걸던 그녀는 내게 궁금한 것도 참 많고 묘하게 친절했다. 매사에 불만이 많고 비꼬기 좋아하는 내 태도에 모종의 매력을 느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그녀에게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던 거창한 말 대부분이 개똥철학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형상을 한 이들에게서 자극을 받는다. 나는 뛰어난 남자들을 많이 봤지만,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은 또래 여자였다. 말투를 절로 닮기도 하고 그녀들이 대화 주제를 돌리고 싶을 때 사용하는 방식을 따라 하기도 했다. 반대로 몇 여자아이들도 나와 한 학기를 보내다 보면 내가 쓰는 단어나 곤란할 때 짓는 표정 따위를 은근히 배우곤 하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다.
친한 친구와 겨울 등산을 간 적이 있다. 편도 4시간은 족히 걸리는 코스를 오르며 우리는 재잘거리다 지쳐 입을 다물고, 둘 다 심심해질 때 즈음 다시 재잘거리는 일을 반복했다. 피가 전부 근육과 다리에 쏠린 탓인지, 우리의 뇌는 자제력을 잃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얘기들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그 날 내 친구가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가 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없던 친구 C와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알고 지내는 모든 동성친구 들 중 나와 C가 결혼을 가장 멀리 할 성정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혼을 중대한 성취이자 매력의 증거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이런 말은 대개 칭찬이라기보다 악담이기에 나는 내 친구가 나를 에둘러 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별안간 고민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의중과는 별개로 결혼에 대한 그녀의 은은한 적개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애와 여자들의 우정은 음의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남자친구를 만나느라 동성 친구들에게 투자할 여유가 부족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많은 경우 연애를 할 때의 여자와 그렇지 않을 때의 여자는 전혀 다른 존재다. 인간의 가장 약하고 부정적인 면모를 분홍색 리본으로 묶어 여성성이라 명명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매력적인 태도는 많은 경우 인간으로서는 경멸 받을만할 특성이다. 전통적인 여성성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어르고 달래는 이들은 있지만,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조건이라 여겨지는 특성들은 제 한 몸 건사할만한 지혜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개인의 그 것과 거리가 멀다.
뛰어난 사회적 성취를 이룬 기혼 여성들이 자신이 일에 매진할 수 있게끔 배려해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죄책감을 표하는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의 성취와 결혼생활은 그 둘을 어렵사리 양립시키려는 노력 없이는 서로를 갉아먹곤 한다. 여자들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은 아주 오래전부터 불길한 그림자처럼 여자아이들의 주위에 아른거리며 여자아이들이 우리 결혼해 ‘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친구로 남자는 등의 약속을 하게끔 한다.
천체물리학자가 꿈인 내 친구는 자신은 과학과 결혼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 생활을 겪으며 자신의 딸에게는 그 불행한 운명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결심했고, 급기야 내 친구가 열살 즈음 되던 어느 주말 오후 그녀에게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과학과 결혼했음을 엄숙히 선언하게 시키고야 말았다. 과학과 결혼했다 함은 한평생 연구에 헌신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임과 동시에 사람과, 정확히 말해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다짐의 형태가 꼭 결혼이어야 하는 이유는 후자에 있다. 내 친구는 이미 과학과 결혼을 한 기혼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과학적 성취를 향해 달려가다 말고 남자의 꾐에 넘어가 부엌에 처박힐 일은 없을 것이라 어머니는 안심하셨다 한다.
밋밋한 연애의 당사자가 몇 번 된 적이 있던 사람이자 그보다 훨씬 길고 화려한 사랑을 나누는 친구들을 여럿 둔 입장에서 나는 연애가 여자의 지성과 우정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등한 지위의 두 남녀가 진솔한 대화와 성적 교감을 통해 서로의 정신을 고양하는 식의 연애는 매우 드물다. 세상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한국 20대 남녀의 사랑은 일종의 역할극이며, 여자는 대개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 쪽이기에 연애에 가담하는 여성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성을 마비시킨다. 긴팔옷의 소매로 손가락 몇 개만 빼꼼 나오게끔 손을 가린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자아가 강했던 친구가 응석쟁이가 되어 버렸을 때 느끼는 무력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불과 몇 주 전 급변하는 미중관계와 그에 맞춰 요동치는 주식시장을 논하던 친구가 흘러내리는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쉴새 없이 고쳐 올리며 최근 남자친구가 카톡 답장에 쏟는 정성이 예전 같지 않아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고민 따위를 나한테 털어 내는 모습이란! 그 친구가 몇 달 후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콧소리를 내지 않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안도감의 깊이 역시 남다르다. 남자친구와 헤어지자마자 겉옷을 벗겨내듯 버릴 수 있는 얄팍한 습관을 애초에 왜 가지게 되었는가 묻자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기행이 남자친구를 유혹해야겠다는 대단한 목적의식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며, 그녀는 연애를 하는 이상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콧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연인 상대에게 유아적인 바람을 직접 요구할 만큼 철면피를 두른 여자는 많지 않다. 따라서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이행해주길 바라는 비열한 태도를 체화하게 된다.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는 역할에 익숙해진 많은 여성은 성인과 성인 사이의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하며 그 바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상대에게 실망하곤 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어 “역시 여자들은 상대하기 어렵다”며 여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꺼리게 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그렇기에 우정을 각별히 여기는 많은 여자는 이성 남성과의 사랑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소중한 친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달가워할 사람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학계에서는 그녀가 실제로 레즈비언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포는 자신의 친구의 마음을 사로 잡은 남성에 대한 분노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후대에 “질투의 시”라 이름 붙여진 시에서 사포는 그녀의 친구를 유혹한 남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 설명] 사포의 “질투의 시” 전문 및 출처
(사진설명 시작. 그는 내게 신처럼 빛나 보여, 네 앞에 마주앉은 남자, 달콤한 너의 말에 귀 기울이며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내 가슴이 가늘게 떨리네. 너를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내 혀가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내 귀가 둥둥 울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몸이 떨리네. 나는 마른 풀처럼 창백해지고 죽을 것만 같아.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나를 노래한 사포”, 서울신문, 2016. 08. 11.)
바닥의 먼지를 쓸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벽 쪽에 차곡차곡 모이는 것처럼 새 학기를 맞은 여자아이들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균질적인 몇 개의 덩어리로 뭉친다. 나 역시 주로 나 같이 생긴 여자들과 어울려 왔다. 나 같이 생겼다 함은 치마를 줄이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와 내 친구들의 집단은 우리들이 공유한 뚜렷한 특성을 통해서 설명하기보다, 아이돌을 좋아하고 이성에 관심이 많은 가상의 주류 여학생 집단의 여집합으로 정의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통의 관심사가 아닌 공통의 “무관심사”를 중심으로 뭉친 셈이었다. 화장 여부는 우정의 요건이라기에 지나치게 허약해 보인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점을 시사한다. 먼저 당장 연애를 하고 있지 않으며, 둘째로 가까운 미래에 할 계획도 없다는 사실을 오로지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 유추해낼 수 있다. 우리가 대학에 간 직후 나와 내 친구들의 외적 공통분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몇은 화장을 시작했고 하나는 성형을 했다. 얼굴에 아무것도 찍어 바르지 않고 성형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다른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나 홀로 모리셔스 섬을 지키는 도도새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지만 화장 하나 한다고 그녀들의 본성이 개벽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가던 곳에 가서 늘 하던 얘기를 했다.
탈코르셋 논의에 슬슬 불이 붙던 몇 년 전 일이다. 둘이 나눠 먹느라 이미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린 조각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아쉬워하던 차였다. 대학에 가서도 한동안 화장을 하지 않다 그제야 막 꾸미기 시작한 내 친구는 내게 화장을 할 생각이 없느냐 물었다. 나는 취업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하지 않을 예정이라 답하자 그녀가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페미니즘의 페 자도 꺼내지 않았던 나는 역시 말을 안 해도 티가 나는가 보구나 등의 생각을 하며 긴장했지만 돌아온 건 다소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성의 없다면 성의 없는 내 짤막한 대답에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이 어떠한 측면에서 자기만족이고, 화장을 시작한 이후 자신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변했으며, 무엇보다 그녀는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예전의 삶으로 다신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가 나 몰래 한을 품고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나 역시 간혹 나풀대는 옷을 입었을 때 묘하게 달라지는 공기를 모르지 않았기에 그녀가 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지 잘 이해했다. 모범생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회적 자아를 만족시키며 살아가던 그녀는 대학에서는 예전의 전략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유능한 것만으론 충분하지 못하다. 예쁜 데 똑똑하기까지 하며, 혹은 똑똑한 데 예쁘기까지 한 여자들이 넘치는 환경에서 자신의 초라함에 한탄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꾸밈이 자기만족이라는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외출하기 한 시간 전부터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음영과 색조를 채워 넣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오로지 남자의 시선일 리 없다. 만약 누군가가 오로지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여자의 유일한 책무라 한다면 그녀들이 가장 먼저 화를 내며 반박할 테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그리고 나도 간혹 부러워하는 것은—여성성이라기보다 그것이 대변하는 화려한 청춘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에게 무척 호의적이다. 최고신 제우스마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간적 결점이 아테나에게는 없다. 아테네에 올리브 나무를 선물한 모든 영웅의 친구 아테나는 매사에 현명한 결정을 내리며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처녀신이다. 당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 중에서도 아테네는 특히 가부장적인 도시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10대 여자 아이를 나이 든 남자와 결혼 시키는 것을 미풍양속 취급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장 숭상해 마지않는 전쟁과 지혜를 여신의 것이라 여겼다니 말이다.
아테나는 탄생부터 남달랐다. 제우스가 지혜의 여신 메티스의 아들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는 신탁을 듣고 그녀를 삼켰을 때 메티스는 이미 아테나를 잉태한 상태였다. 따라서 아테나는 다른 신들처럼 평범하게 태어나는 대신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나오며 아버지의 팔자에 없었을 것이 분명한 산고를 겪게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여신으로 태어난 아테나는 아버지의 왕권을 위협하는 대신 그의 든든한 참모이자 가장 아낌 받는 딸이 되어 준다.
제아무리 대단한 영웅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다. 간혹 그렇지 않고 알이나 아버지의 머리에서 부화하는 소수의 인재는 인간됨, 혹은 여성됨을 극복한 초인이라 묘사된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맥더프만이 맥베스를 이길 수 있었고, 아테나 역시 아버지의 두개골을 쪼개고 나올 정도는 되었으니 그리스의 가장 유능한 여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뛰어난 여성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다른 인간과, 특히 다른 여자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호승심이 강한 여자라면 성장 과정에서 중대한 모순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세상이 유능함과 진취성, 공명심과 같이 사회적 성공과 관련된 개념들을 여성성과 연결 짓길 싫어하며, 그러한 속성들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여자가 출현한다 해도 그녀를 별종이나 준-남자 취급을 한다는 사실과 익숙해져야 한다. 올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조악한 논리에 분노하겠지만, 나는 그러기보다 나 자신을 보통 여자들과 다른 예외적인 존재라고 여기기를 택했다. 여성 집단 전체가 부당한 편견의 대상이라고 인정하는 것보다 이 모든 게 내가 특별한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머리가 덜 아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부터 여자들을 미워했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다고 교과서에선 거듭 강조되며 여성 과학기술인이 부족하다고 엄살떠는 세상이지만 순간 순간 새어 나오는 본심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매번 전교 1등을 하는 친구가 친척들에게 교대 진학을 권유받았다고 털어놓았을 때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여성의 공감 능력이나 모성애 타령을 들을 때마다 부들대기 시작한 건 훨씬 이전부터였을 테다. 9시 뉴스의 주인공들이 전부 아저씨들임을 알아챘을 때부터, 집어 든 위인전마다 수염 난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을 때부터 나는 여성성을 순종성과 동일시하는 세상만큼이나 여자의 열등한 서열을 제 몸으로 증명하는 듯한 여자들이 미웠다.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족을 온 힘을 다해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내 마음을 들키지 않게 애를 썼다.
세상에는 여자에 대한 미움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는 여자들도 많다는 사실을 나는 중학생이 돼서야 알게 됐다. 염색이 잘못되어 머리 끝부분이 보라색으로 물든 과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교육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편견을 가졌으며 그 편견을 굳이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보라빛 머리를 가진 그분에게 학생은 크게 네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공부를 잘하며 남자이기까지 한 학생, 남자이지만 공부는 못하는 학생, 공부를 잘하지만 아쉽게도 여자인 학생, 그리고 여자인데다 공부까지 못하는 학생. 공부를 잘하는 남학생은 산업역군이자 과학 꿈나무로 그녀의 세계관에서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계급을 점유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분이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창의성과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분의 지론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성적 분포는 그녀의 신념과 상충했는데,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한 재미난 이론을 종종 반 아이들에게 친절히 설명하시곤 했다. 그에 따르면 간악한 여학생들이 뱀의 혀를 놀려 수행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가져가며 지필고사의 선지를 더 꼼꼼히 읽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비해 높은 성과를 얻는 것이었다. 그녀의 교육방침에 불만을 가진 대다수의 여자아이들과 성적이 좋지 못한 일부 남자아이들은 똘똘한 남학생을 대할 때 그녀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친절함에 구역질을 했다.
나는 페미니즘 강연에 절대 가지 않는다. 교양수업보다 훨씬 못한 강연에 마라탕 몇 그릇 값을 헌금하여 책 장수들의 주머니를 불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로, 얼마 전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따라간 적이 전부다. 진부한 주제와 생각보다 비싼 강연비에 잔뜩 뾰루퉁해진 나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나 보자며 자리에 앉았다. 성공적인 작가라는 강연자의 경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강연자가 유튜브 브이로그만도 못한 유럽 생활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아도 그 모든 것이 주제와 궁극적으로 연결이 될 것이라 나 자신에게 설득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주제는 시작도 못 했네요”라며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을 때 나는 내면의 폭력성과 마주해야 했다. 여느 페미니즘 강의와 마찬가지로 그곳의 좌중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그녀가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저서의 주요 독자층 또한 여성이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무자비함을 강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어귀의 출처는 웹툰 『송곳』이라는데, 신조로 삼기엔 지나치게 단순하고 무신경하다. 그러나 허세 가득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여성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존중과 그에서 비롯된 적절한 거리감 없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밖에 없다. 마치 이성 연인이 생겨 연락이 뜸해졌다가 어쩌다 만나면 그이에 대한 고민이나 실컷 털어놓는 친구와 딸에게만 공감을 맡겨둔 듯이 구는 어머니들처럼, 남편이 육아를 부담하기보다 동료 여성 직원들이 사내 보육시설 설치에 찬성해주길 바라는 몇 기혼 여성들, 그리고 나는 다른 여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공상으로 자존심을 챙기던 예전의 나처럼 말이다. 여성들이 서로를 사랑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여성의 지성과 자존심을 두려워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소중히 할 수 있을 테다.
내 글씨체는 예나 지금이나 각지고 투박하다. 빈말로도 잘 썼다는 소리를 못 듣는 글씨체가 불만이었던 나는 필기체를 연습해서 알파벳을 잔뜩 구부려 쓰곤 했다. 그렇게 겉멋이 잔뜩 든 필체를 고수하던 중,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친구가 알파벳 y를 쓰는 방식이 세련됐다고 생각한 이래로 내가 y만은 구부러뜨리지 않고 써오고 있다는 사실을 엊그제 알아챘다. 지금은 연락조차 뜸해진 그녀의 흔적이 내 일상 곳곳에 묻어 있다 생각하니 예전 친구들의 연락처를 찾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아직도 친한 반절과 연락이 끊긴 나머지 반의 이름들을 살펴보며 감상에 잠겼다. 친구와 등하교를 함께할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비밀 아지트도, 수련회의 진실게임도 더는 없고 화장실 칸을 같이 쓰자는 제안도 다시는 받을 일이 없으리라! 그 시절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연인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
여자 친구들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만 되려 지나친 친밀감을 경계하던 나였다. 화장실도 마지못해 따라갔고, 이어폰을 나뉘어 끼는 것도 청력이 나빠진다고 싫어했으며, 시험이 끝나고 번화가에 놀러 가는 일도 내키지 않아 했다. 그 시절의 독점욕이 가미된 관계들이 이제 와서 그리운 것은 뒷북치기 좋아하는 내 성격 탓만은 아니다. 단지 고독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세상에서 다른 여자들과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수 세기 전의 위인도, 다른 대륙의 여걸도 롤모델로 삼기 모자람이 없지만, 또래 여자들과의 교류는 대체할 수 없다.
여자들은 서로에게 얼마간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오래된 관습에 굴복 하거나 자신과 여성 집단을 구분 지어 생각할 때 우리는 조금씩 다른 여자들에게 빚을 지우고 있다. 고로 사회에 완벽하게 길든 여자들을 볼 때 느끼는 무력감과 자신이 다른 유약한 여자들과 다르다고 외치는 여자들을 향한 반감 모두 각자의 면에서 합당하다. 여자를 미워하는 마음에조차 그 근본에는 온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이를 인정하고 나아갈 때 여자들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1] ‘친구 뺏기’의 줄임말
편집위원 차지 (avril11t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