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nope
“마음은 열어도 안보는 철저히”
이 표어는 북한 무장공비를 저지하고 순직한 경찰의 동상 옆에 적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휴전 중인 두 국가뿐 아니라 요즘의 일상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38선과 지뢰밭이 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서 안보를 철저히 하라는 말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그건 마음을 연 것일까? 우리는 왜 자꾸 마음을 열고 싶으면서도 망설일까. 있어도 고통스럽고 없어도 고통스러운 관계의 안팎을 사회 속의 사건, 혹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들여다보며, 이를 관계, 권력과 관련한 인문사회적 지식을 토대로 이해해 보려 한다. 그리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스무 살 남짓의 어느 여성이 취업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해서 학업을 더 이어갈 수는 없었다. 대학은 사치였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직장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말단에서 팀장도 달고, 부장도 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성실하게 출근했고, 상사가 아무리 폭언을 쏟아내도 버텼다. 몇 달 뒤, 그 여성은 회사 근처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쓰러질 만한 다른 사유는 없었다. 자살이었다.
실제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내가 직접 떠올린 사례는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후마니타스, 2019)라는 책의 ‘은주’라는 학생 노동자의 사망과, 중국의 전자제품 생산 기업 ‘폭스콘(Foxconn)’의 연쇄 자살 사건이다. ‘은주’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한국 대기업의 콜센터에서 근무하다가 자살한 열여덟의 실습생이다. 애플과 휴렛-패커드의 제품을 생산하는 ‘폭스콘’에서는 20대 초중반의 노동자 스물다섯 명이 몇 년에 걸쳐 공장에서 투신했다.
원인은 복잡하지만, 나는 여기서 ‘관계’에 집중하려 한다. ‘은주’가 일하던 곳에서는 힘든 일이 있어도, 노동 환경이 부당해도 이야기 나눌 사람도 시간도 없었다.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고, 직접 이야기하기에는 실습생이라는 위치가 문제였다. ‘폭스콘’의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온, 직급과 나잇대가 다른 룸메이트들과 지내야만 했다. 중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서로 다른 지방에서는 경험과 언어의 차이가 모두 크다. 심지어 일하는 시간대가 달라서 만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두 사례 모두 ‘관계’를 철저히 통제했다.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함으로써 개인을 고립시키고, 고립이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다.
관계의 부재는 장애인도 죽인다. 작년 11월,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지하 1층의 장애인권위원회실에서는 장애 포괄 재난대비 워크숍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가 진행되었다. 이를 주관한 단체 ‘리슨투더시티’에 따르면, 재난에서 생존할 확률은 인간관계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나 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일이 여전히 많다. 이것도 ‘고립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이 관계의 피로를 피해 고독을 즐기는 동안, 어떤 이들은 고립되어 죽는다. ‘고독사’가 아닌 ‘고립사’라는 용어가 통용되어야 하는 이유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서 고립사의 유형 중 하나인 ‘무연고 사망’의 문제를 깊이 다룬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문제들도 있다. 학창시절에 집단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단 한 번도 직접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관계의 부재와 파괴만이 폭력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 속에서 더욱 치밀하고 지독한 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은 타자가 하려는 행동에 맞서는 권력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솟아나 작용하는 권력이다.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18쪽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관계의 폭력성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할 때 발생하는데, 이는 특히 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성적인 관계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적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키스하는 일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곤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들을 막고자 동의가 필요함이 강조되기도 했지만, 이것의 한계도 지적되었다.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대표적인 문장 중 하나인 “어쨌든 네가 좋다고 한 것 아니냐”를 떠올려보자. ‘동의’라는 말보다 중요한 것은 동의가 선택일 수 있는 환경이며, 환경이 마련되더라도 ‘동의’만을 중시하면 사람들은 동의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는 한편으로 “왜 충분히 거절(저항)하지 않았냐”라는 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이미 존재하는 동의(자발성)와 거절(저항)의 이분법의 틀에서는 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다. 저런 말들의 힘을 없애려면 우리는 이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폭력을 알리는 전조를 잘 파악해야 한다. 폭력의 원인으로 (성적) 대상화가 자주 거론되곤 하지만, 대상화는 물을 따라 달라고 부탁하는 것부터, 상대를 오직 신체 일부로만 환원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리고 성적 대상화가 없다면 성폭력뿐 아니라 성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대상화 개념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폭력과 지배의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앤 카힐이라는 철학자는 ‘유도체화(derivatization)’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원래 화합물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구조를 조금씩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성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관계에 적용한다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오직 다른 한 명의 욕망만을 담아내는 그림자로 전락하게 하는 과정이다.
대상화 자체는 언제나 발생한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한쪽만이 계속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때 문제가 생긴다. 관계는 두 명의 인격체 사이에 맺어지기에, 차이가 파괴되어 한 명의 인격이 소거된다면 ‘관계’는 불가능해진다. 관계가 폭력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요컨대, 관계와 폭력의 차이는 방향성이다. 관계는 상호적이지만 폭력은 일방적이다. 유도체화라는 개념은 대상화와 방향성의 결합을 섬세하게 탐구한다. 유도체화가 성관계와 성폭력을 구분하기에 적합한 기준인 이유다. 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가스등 효과’와 연관 지어 보자.
“당신은 꿈을 꾼 거야.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당신의 그 이상한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 무엇이 그런 짓을 하게 하는지.”
‘가스등 효과’는 영화 <가스등>(1948)에서 ‘그레고리’라는 남성이 ‘폴라’라는 여성을 대하는 모습과 그로 인한 ‘폴라’의 변화에서 유래했다. ‘그레고리’는 일상의 작은 부분들에서 계속 ‘폴라’를 지적하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를 깎아내리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자신에게만 의존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모든 일을 ‘폴라’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을 유도하고, 자신은 원하는 대로 그를 이용한다. 그렇게 ‘폴라’라는 인간의 구조는 전체적으로는 원래와 다르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오직 ‘그레고리’가 원하는 성질로 변해 간다. 즉, 유도체가 된다.
영화 속에서 가스등은 ‘그레고리’가 집에 있을 때 멀쩡하게 켜져 있다가, 그가 집에서 멀어지면 사그라들고, 돌아오기 직전에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폴라’는 혼자 남아 있을 때 흔들흔들 꺼지는 가스등처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불안에 떨고, ‘그레고리’와 함께 있을 때는 밝게 빛나는 가스등처럼 확실한 구속에 갇혀 있다. 가스등은 일방적인 관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려주는 신호다. 상대방을 의심하고, 상대방의 친구들을 의심하고, 전화나 메시지 기록을 검사하고, 연락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어 인간관계를 통제하는 상황들은 모두 가스등에 불을 켠다. 가스등은 데이트폭력의 경보기다.
나의 욕망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상대방의 자아를 억누르면, 자아가 억눌린 사람은 명령도 받기 전에 상대가 원할 만한 일을 나서서 한다. 즉,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도 ‘동의’하게 되고, ‘자발성’을 띠게 된다. 유도체는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사건은 공적인 가해나 피해로 해석되지 않고,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다. 우에노 치즈코가 “프라이버시란 강자에게는 공권력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지배, 약자에게는 제3자의 개입 또는 보호가 인정되지 않는 공포와 복종의 장이 된다. 프라이버시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바로 강자이다.”라고 일갈한 이유다.
사실 사랑의 문제점은 많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반작용인지, 유독 우정의 낭만화가 심하다. 사랑은 잠깐이지만 우정은 영원하다든지, 사랑과 우정 중에서 우정을 선택해야 한다든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장소라든지 하는 헛소리들이 판을 친다. 정말 우정이 그런 관계일까? 나는 우정과 사랑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둘 다 시간도, 돈도, 체력도, 신경도, 마음도 많이 써야 한다. 그러지 않고 유지되는 우정은 드물다. 나는 오래된 어느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우정을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24쪽
연애할 때 너무 다른 사람끼리 만나면 오래 가지 못한다고들 한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사는 동네도 가깝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비슷한 운동을 좋아해서 친해졌다. 음악 취향도 잘 맞고 공부도 잘 가르쳐 주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내내, 그 이후까지도 나는 그와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수기에 해외여행을 잡아서 떠날 수 있는 그 친구는 여행 일정을 갑자기 잡아서 혼자 가게 생겼다며 나에게 같이 가자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달리 사진 찍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걸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거의 안 하게 되고,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각자 자신과 성격도 맞고, 가고자 하는 진로도 비슷하고, 계급도 비슷한 이들과 친해졌다. 연애와 다른 점은 딱 하나다. 마주쳤을 때 인사라도 하느냐, 못 본 척 서로를 피해 도망까지 가느냐. 그렇게 점점 나와 그는 멀어졌다. 당황스럽게도, 언젠가는 매일 밤 만나서 일상을 나누던 그 사람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자주 떠오른다. 그의 생일에 홀로 무안해지곤 한다. 사랑과 우정은 뭐 얼마나 다를까. 그렇다고 그게 사랑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정도 끈적하다. 사랑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10년의 우정도 생각보다 쉽게 깨지더라. 내가 페미니즘 관련 기사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대화 한번 없이 나를 떠난 몇 명을 기억한다. 그중에는 학창 시절을 전부 같은 학교에서 보낸 사람도 있었다. 분명 친했는데 별 의미가 없었다. 친구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 사이의 차이는 무시되곤 한다. 우정은 영원하고, 우정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결국 기댈 곳인 가족과 친구라는 이야기는 참 난감하다. 결국 서로의 유도체가 된 ‘인싸’들만이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환상 아닌지.
개인의 특질은 그가 동류인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그 특질도 집단의 대변자가 허용하는 특질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그가 자기 집단에 의지하게 되면 충성스럽고 전통성 있는 사람이 되지만, 집단을 외면하면 겁쟁이와 바보가 되는 것이다.
어빙 고프만, 『스티그마: 장애의 사회심리학』, 윤선길·정기현 옮김,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8, 174쪽
공동체의 폭력도 양상은 다르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우리끼리의 일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이비 의리다. 의리를 어기면 ‘우리’에서 ‘아웃’이다. 내부고발자의 문제가 대표적이며, 이는 연세대학교 안에서도 다수 있었던 ‘남톡방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의리를 보여주고 유지하는 행동은 보통 통과의례나 표식으로 작동한다. 음담패설에 동참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는 식의 남성 동성사회 구축 전략이라든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여자 얘기’를 나누며 서로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모습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런 폭력은 개인의 존중보다 공동체의 유지가 중시될 때 발생한다. 뒤풀이나 MT에서 성폭력 사건이 생기는 일이 여전히 많지만, 이때 인간관계망은 자주 피해자가 아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오래된 사람일수록 가해를 저지르기 쉽고 사건을 묻어 버리기도 쉽다. 성폭력 사건을 포함해서 공동체의 많은 사건에서는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물밑 작업’을 한다. 소문을 내고 프레임을 짜서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앞서 살펴본 유도체화나 가스등 효과가 데이트폭력의 경보기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비단 데이트폭력과 같은 2자적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주 많은 공동체에서, ‘우리’는 가스등을 켠다.
소수자들은 공동체에서 자주 소외되고, 고립되지 않고자 다른 관계를 찾는다. 그러다 보니 소수자들이 모이는 공동체는 유독 소중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 공동체는 낭만화되며,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정체성으로 뭉쳤기에 동질적인 공간으로 상상된다. 그런 공간에서는 출구 혹은 대안이 없기에 소외된 사람이 더욱 취약해지기도 하며, 가해자는 그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피해자만 추방되거나 계속 시달리게 된다. 약자들이 모인 집단이 오히려 폭력을 방조하고 강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정 폭력의 발생 조건과 매우 유사하다. 가정 폭력, 특히 아내 폭력에서 피해자 유발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폭력이 부당함을 인정할 경우 가해를 가능하게 한 게 한 명의 악마가 아닌 ‘건강한 가족’, ‘행복한 가족’이라는 프레임 자체라는 걸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라는 표현이 폭력적인 이유다.
한 아이를 기르려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듯, 한 명의 피해자를 만들 때도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 그래서 폭력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사건을 조사하고, 공론화하고, 가해자를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공동체를 정비하는 과정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으려 한다. 내 경험상으로는, 여럿이 모이는 공동체든, 아주 사적인 작은 관계든 문제는 어떤 사람을 잡아서 바꾸려고 애쓴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정말 타인이 지옥일까?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넷플릭스 시리즈 <굿 플레이스>의 시즌 1을 보고 이를 재고하게 됐다. 주인공은 천국인 줄 알았던 곳이 사실은 지옥이었음을 깨닫는다. 원래 지옥에서는 사람을 불로 지지고, 물에 처넣는 고문이 이루어졌지만, 여기서는 더욱 끔찍한 지옥을 만들기 위해 서로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의 네 사람을 모아서 서로를 고문하게 만든다. 죽은 세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방에 갇혀서 서로의 끔찍한 언행에 영원히 시달리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을 시리즈로 만들면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이 네 사람은 결국 출구를 찾는다. 서로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연대하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자를 찾아낸다. 즉, ‘나’ 혹은 ‘너’가 문제가 아니라, 사이가 문제임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지옥의 기획은 무너진다. 주인공들은 우당탕 떠들고 뭉치며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가볍게 기각해 버린다.
관계 안에는 일방적인 폭력들도 많지만, 한쪽만의 책임이 아닐 때도 많다. 앞서 언급한 관계 중 나와 멀어진 어느 친구의 사례를 생각한다면,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책임 지우기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비난은 나와 남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데서 시작하고, 상대방에 관한 판단을 전제한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잘 아는가? 따돌림받는 사람이 왜 따돌림받는지, 따돌림의 이유로 가해자들이 들먹이는 특징은 어쩌다 생겼는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알고 있나. 표면적인 판단은 무지를 열심히 외면하기에 가능하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가 “판단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한 방식일 수 있고, 따라서 자신에게 불투명하고, 부분적으로 무지하고, 구성적으로 제한된 존재인 인간 존재들의 상호적 인정에 걸맞은 어떤 토대도 제공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비난은 선고가 되고, 선고는 “비난당하는 자의 삶을 겨냥하면서 그의 윤리적 능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자, 상대를 믿어 보자는 순진한 소리가 아니다. 상황을 바꾸고 상황을 믿어 보자는 말이다. 내가 악의적 소문에 휘말렸을 때, 소문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나를 찾아온 친구는 내가 아닌 상황을 믿었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볼 때 적어도 그 소문이 전부 옳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추론했을 뿐이라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이 더 좋았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보다, 상대방과 나 사이, 그리고 상대방과 나를 둘러싼 관계의 망과 상황 속에서 오히려 사람끼리 연결되는 계기가 생겼다.
비효율적인 싸움을 벌일 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원치 않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헛수고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해리엇 러너, 『무엇이 여자를 분노하게 만드는가』, 이명선 옮김, 부키, 2018, 30~31쪽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해리엇 러너는 애초에 상대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바꿀 수 있는 상대였으면 진작에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니 아예 관계를 끊을 것이 아니라면 관계를 바꾸자고 말한다. 이때 관계 속에서 촉발되는 분노에 지배당하지 않고 관계를 개선하려면 관계의 패턴을 읽어야 한다. 물론 개선하고 싶은, 혹은 개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관계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관계의 패턴을 읽을 때는 관계 안에서 각자가 어떤 역할인지 관찰해야 한다. 책의 사례를 보면, 어떤 여성들은 지나치게 화를 참고 상대를 돌본다. 화내지 않는 여성이 좋은 여성이라고 배웠고, 여성이라면 상대를 돌봐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여성 개인을 유도체로 취급하는 것으로, 그의 인격을 침해할 뿐 아니라 관계도 파괴한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돌보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받는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책임지지 못할 일을 책임지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하려 들 때” 역할 수행의 비대칭이 발생한다.
패턴을 발견하는 첫 단추는 자신이나 상대방이 분노를 표출하거나 억누르는 방법, 각자 처한 개인적인 상황, 각자의 가족 안에서 위치와 가족관계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연락이 잘 안 되고, 친구나 가족이나 애인을 제대로 못 챙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혼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데에 에너지를 쏟아서 함께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성실해지고자 지나치게 노력하곤 한다. 상황마다, 관계마다 나의 역할이 다르다. 그렇기에 ‘나’가 아닌, 상황 속에서 내가 대처하는 방법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해악[유도체화]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타인의 타자성을 타자화하지 않는 것으로 가능하다. 나는 네가 아니다. 너는 내가 아니다. 타자의 욕망이 나와 같지 않고 같은 내용도 형식도 아닐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차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권김현영, 「페미니즘 실천은 웃어주지 않는 것에서부터」,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휴머니스트, 2019, 235~236쪽
“Hello, stranger!”라는 유명한 대사로 만남이 시작되는 <클로저>(2004)라는 영화에서는 끝에서도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퀴즈처럼 맞히며 나는 너를 알고, 나와 너는 비슷하며, ‘우리’는 서로의 비밀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심지어 상대의 진짜 이름도 몰랐다! 그러니 상대를 잘 안다는 얄팍한 착각을 버리고, 모든 이가 사실 시작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이방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착각은 상대를 자신의 유도체로 여기도록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낯선 존재임을 인정하면 상대를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을 수 있고, 왜 관계가 지옥이 되는지 고민하며 서로의 사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자기 자신도 더 잘 알게 된다. 잔인한 사이를 살아내는 것은 일차적으로 상대가 아닌 나를 배려하는 것이다. 상대가 얻는 편안함은 부차적일 뿐이다.
네 손 안에서 갇힌 밤이 계속돼 / 벗어나려 해 / 네 곁에서도 내가 숨 쉴 수 있게 […]네 곁에서만 살아 있는 나를 봐 / 벗어나려 해 / 네 곁에서도 내가 숨 쉴 수 있게
보수동쿨러, ‘목화’
처음 이 가사를 들었을 때는 그저 슬프고 아팠다. 지옥 같은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목적이 결국 다시 그 사람 곁에서 숨 쉬는 것이라니. 하지만 이 가사를 몇 달 동안 곱씹은 후 나의 해석은 조금 달라졌다. 화자는 상대방의 곁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는 지금을 변화시켜서 곁에서도 숨 쉴 수 있게 되고자 한다. 경계를 존중받지 못하고 상대의 일부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벗어난 후에야 생존하고,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때가 되어서야 상대가 지옥이었는지, 아니면 관계의 패턴이 지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군지, 어떤 경험을 떠올리고 있을지,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든 나는 당신이 어디서든 숨 쉴 수 있다고 믿는다. 해리엇 러너가 쓴 책의 원제는 ‘분노의 춤(The Dance of Anger)’이다. 관계의 패턴을 파악함으로써 관계 안에서 생기는 고통인 분노를 자신에게 이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한다면, 영원한 성장통을 견뎌낸 후에 남는 것은 관계의 고통을 오히려 자신을 위한 자유로운 춤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잔인한 사이들을 끈질기게 살아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남자. 관계의 고통이 춤이 될 때까지.
nope (writingnope@gmail.com)
참고자료
- Cahill, A.J. (2014), The Difference Sameness Makes: Objectification, Sex Work, and Queerness. Hypatia, 29: 840-856.
-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은행나무, 2012, 1판, 274쪽
-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교양인, 2016, 21~53쪽
- 장폴 사르트르, 「닫힌 방」,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지영래 옮김, 민음사, 2018, 82쪽
-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인간사랑, 2013, 83, 87쪽
- 해리엇 러너, 『무엇이 여자를 분노하게 만드는가』, 이명선 옮김, 부키, 2018,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