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유랑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은 강렬한 젠더 이슈의 소용돌이 안에 놓여있다. 매해 젠더 이슈는 새로운 사건과 함께 부각된다. 반복되는 외침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그리고 수법을 다양화한 각종 범죄는 오히려 피곤을 부추긴다. 지지부진한 성과는 소리치는 자를 질식시키기도 한다.
그렇기에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운동의 지속가능성이다. 처절하지만 살아남고 싶어 여성으로서 꿋꿋이 홀로 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본다. 느리지만 변해가는 사회를 보며 가끔은 성취감과 힘을 느낀다. 그러나 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도취되기도 전에 발목을 붙잡는 진득한 구조가 있다. 강간 문화, 가부장제, 남성 권력 등으로 불리는 그 구조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굳건히 서 나를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만든다.
페미니즘을 배우고 내가 겪은 차별을 말로 구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성차별적 구조라는 실체가 주는 좌절감이 크다고 해도 표현할 수 없는 수치에 떠밀리는 것보다 내 입으로 고발할 수 있는 기반이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조명은 은폐되었던 그들만의 인형놀이를 비춘다. 조종자가 까발려진다. 갑작스러운 무대 위의 혼란에 헛숨을 들이키는 순간이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무대가 주어진 이때에 더욱 소리쳐야 한다.
이렇게 든든한 한편 두렵기도 한 까닭은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온갖 공격 때문만은 아니다. 나름 내가 가담한 운동이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여성의 복잡다단함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이번 호의 「女女」가 묘사하듯 나 역시 여성을 동지로 여기면서도 내 의지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였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일을 들어, 주변 여성을 미워하곤 했다. 참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런 나의 이면적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수치의 역사와 여성으로부터 비롯된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이 공간에 정리해 본다.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일은 즐겁다. 나는 깨나 지식을 탐구하길 좋아하는 유형이었다. 페미니즘도 어쩌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라는 몹시 오만한 생각에서 파고들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처음엔 단순히 성평등을 주창하는 운동이라고만 알았을 뿐이다. 영어로 된 단어이므로 당연히 서구권에서 왔겠거니 생각했다.
페미니즘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찾아본 페미니즘의 역사는 서양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상적 페미니즘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기로부터 도래했다고 본다. 프랑스 혁명기는 평등사상을 퍼뜨렸지만 그 안에 여성은 없었다.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남성이 가진 권리를 여성도 가져야 함을 설파했다. 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이후 페미니즘의 전개는 물결(wave)로 이름 붙여진다. 여성의 참정권을 외친 1세대 페미니즘(First-wave feminism), 가부장제를 고발한 2세대 페미니즘(Second-wave feminism),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유한 3세대 페미니즘(Third-wave feminism)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중심이 된 역사의 흐름은 생소하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세계사를 떠올리면 대부분 전쟁과 영토 확장, 승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체계, 그리고 번영을 이끈 유명한 남성 인물을 그리는 내용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선덕여왕과 같은 인물은 예외적이며 능력이 아닌 혈통으로써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이다. 여성은 능동적 시민으로 그려졌던 적이 없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정리된 용어로 이름 붙여진 페미니즘의 물결들은 20세기의 산물이다. 나는 그 이전의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 같은 질문을 던졌던 인물이 있다. 울프는 자신의 서가를 둘러보며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에 유감스러워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여성의 삶에서 비롯된 역사의 단절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자, 자신에게 귀감이 될 여성 롤모델이 없다는 한탄이다.
훌륭한 문학을 창조해낸 남성 작가도 많다. 그런데 울프는 귀감이 될 여성 인물을 찾았다. 남성의 자아로 쓰인 글은 남성적 세계관을 피력한다. 여성은 그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다. 위대한 글에 공감할 수 없다는 선천적 한계에 부딪히며 불쾌감이 일렁인다. 문학에서도 현실에서도 여성은 하나의 온전한 자아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언어를 얻기 전 느꼈던 표현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그렇다. 이 불쾌감 속에서 우리는 공감할 대상을 찾는다.
울프에게 있어 상상이란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곳에선 간섭이 없고,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된다. 그 당연한 갈망을 여성은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은 늘 복작거리고 시끄러운 가족 공간 속에서 표상된다. 당시의 여성들이 고요한 자기만의 방과 가족을 나서서 이루는 경제적 독립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여성에게 공동이 점유한 공간이란 히스테리의 장이다. ‘여성과 픽션’을 강의하는 울프는 묻는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여성이 대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가. 여성은 사유의 공간을 빼앗겨 왔다. 눅눅한 서재에서 햇살 스며드는 창밖 초목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그것을 써 내려 갈 배경이 없다.
현대의 여성은 자기만의 방을 꿈꿀 수 있다. 경제 참여의 문은 넓어졌고, 적어도 자기만의 방은 상상 가능한 것의 범주에 들어왔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을 꿈꾼다. 일을 하며 돈을 저축하고 차근차근 내 집 마련을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 그렇다. 표면적인 자유는 부여되었다. 그렇다면 울프의 100년 전 꿈은 이미 실현되었나? 우리가 자기만의 방을 누리고 있다면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현대까지 울림을 줄 리는 없다. 잘 운행되고 있는 줄 알았던 세계는 시시각각 병폐를 드러낸다. 근 몇 년을 강타한 페미니즘과 더불어 소수자 의제는 관심을 촉구한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공간과 경제적 기반만을 의미할까? 왜 우리는 물리적 방을 가질 수 있게 된 지금에도 사유의 부족을 지적받는가? 울프의 바람은 유효하다.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고민의 굴레에 떨어진다. 현대의 자기만의 방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여성은 역사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역사는 객관적이고 바뀌지 않는 견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여성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때로는 왜곡되었다. 역사 속에 유명한 여성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한 줌 여성이 기록될 때에는 의도가 있다. 나이팅게일의 별명은 ‘백의의 천사’다. 그 이름을 들으면 등불을 들고 밤낮없이 다친 병사를 돌보는 선한 간호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혁신적인 치료를 위해선 위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통계로 증명한 인물이다. 동시에 여러 통계자료를 직접 기록, 분석해 야전병원을 개혁한 행정가였다. 나이팅게일은 기록되었으나 의도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를 표현하는 천사라는 단어로부터 우리는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아름다운 여성 보호자의 역할 모델을 강화한다.
여성은 성녀이거나 창녀이다. 여성은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운다. 그들은 미쳐 있거나, 순종적이다. 소설가 김훈은 “여성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툴지만 악의는 없다.”라고 말했다. 문자와 글쓰기를 향유한 계층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들은 여성을 그리고 썼고, 여성의 단편이 여성 전체를 대표하도록 기여했다.
여성과 남성은 예나 지금이나 사사건건 비교당한다. 같은 인간이지만 마치 동일한 집단에 포섭될 수 없는 것처럼 두 성별의 비견되는 성향이 우스갯소리 마냥 널리 퍼진다. 울프는 여성을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이라고 표현했다. 전쟁과 국가 건설, 그 중심의 남성. 그렇게 생성된 역사는 남성의 성취물이 되었다. 거울의 역할은 부여된 것이다. 만약 여성이 열등하다는 우생학적 믿음이 진실이라면 역할 부여 따위는 필요 없다. 비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남성은 찬란히 빛날 테니.
그렇기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왜 남성이 권력을 가지는 가부장제는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전제 중 하나가 되었나.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여성이 권력을 잡은 세계관은 없는 걸까? 왜 어느 곳에서나 기록하는 주체는 남성이었고, 여성은 누락되고 왜곡되었을까? 역사란 것이 기록하는 자의 주관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가부장제의 역사가 쓰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는 가부장제의 기원을 쫓는 역사학 학술서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이 권력을 휘어잡는 모권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가계 혈통을 중심으로 삼는 모계제는 가끔 보인다. 그러나 모계제에서 권력을 잡는 자가 어머니의 남자형제라는 점에서, 모계제 역시 남성 권력을 기초로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은 종종 본인도 모를 선사시대를 끌고 들어온다. 남성은 밖에서 사냥을 했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던 것이 먼 고대부터 이어진 자연의 섭리이니 시대가 바뀐 지금도 여성과 남성의 기질이 애초부터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여성은 언제나 보조자의 역할을 맡는다. 해석은 우열을 낳았다.
그러나 남성 사냥꾼이 집안의 주부양자이자 기둥인 듯한 가설은 사냥감보다 채집물이 초기 인류의 주된 식사였다는 사실에 의해 반박당한다. 스캐밴저 가설은 기술이 부족한 초기 인류는 직접 사냥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기보다, 다른 동물이 사냥하고 남은 것을 주워 먹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다분히 하찮게 보이게 하는 이 가설은 반발에 휘말렸으나 결국 인정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상상 속 고대는 성별 분업이 뚜렷하다.
러너는 가부장제가 시작된 조건을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서 찾는다. 여성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다. 그것은 신체적 사실이며 재생산이 곧 노동력과 생존 가능성 증대인 사회에서 성별 분업을 불러일으켰다. 지극히 기능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 기능적 분업이 어떻게 남성 지배 체제까지 이어질 수 있었냐는 것이다. 재생산 능력은 전쟁과 정복 과정에서 여성을 약탈품이자 선물로 만들었다. 승패와 정치의 문제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물화하고 성별의 우열을 갈랐다.
여성은 교환되는 존재로서, 쉽게 자신의 위치에서 교체 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 늘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은 재생산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또 집안에 이득을 가져다줄 교환체로서 남성에 의해 보호받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은 인간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가부장제는 어떤 악의에 가득 찬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취약한 대상으로 학습되어온 흐름 탓에 남성을 중심에 두는 사고가 인간을 좀먹었을 뿐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 박탈이 이루어졌고, 기능적 분업은 어느새 여성의 열등함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어 더욱 가부장제를 정당화해왔다.
가부장제의 정당화 과정은 남성과 여성의 기질적 우열 탓에 가부장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순다. 여성 고고학자가 밝힌 사냥감보다는 채집물이 초기 인류의 주된 식사였다는 가설과 스캐밴저 가설이 고된 반대를 뚫고 입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강인한 남성 사냥꾼의 비호 아래 육식을 주로 하는 인간상을 중심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학문의 주도권을 잡았던 남성들은 역사적 근거마저 입맛에 맞게 굳히고자 고집을 부려왔다. 가부장제가 기본 전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사의 조각과 해석이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 결과, 다시 울프의 시대로 돌아온다. 20세기, 여성들은 경제적, 공간적 독립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가정생활 이외의 선택지는 부정당했다. 21세기,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출생률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정부는 출생률을 높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임신한 여성의 경력단절이 통계적으로 증명되는 나라에서 출산과 그 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여성들은 재생산 때문에 선택권이 줄어드는 사회를 비난해왔다. 아이를 낳으면 낳는 대로 희롱의 대상이 되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이기적인 요즘 것들이 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여성이 주변화 되어온 역사가, 그리고 가부장제가 학습되어온 흐름이 말한다. 여성은 “여성들의 독립과 자율성을 재확인해 줄 수 있는 전통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도 없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설 기반이 없다. 그것이 우리가 위태로운 이유이다. 흩어진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자리를 잃었다. 이 은밀하고도 우연적인 과정이 여성으로부터 사유할 근간을 빼앗았다. 하지만 홀로서기 위해 지난한 과거를 직시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기만의 방을 꿈꾸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여성은 주변의 여성과 그들의 계보를 통해 서로를 마주하고 연대로 나아간다. 역사는 선택적 구성의 산물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선 역사에 속아왔다. 내가 가진 역사적 지식과 저변이 좁기에 나는 기록되지 않은 주변부를 찾을 때마다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왜 머릿속에 떠올릴 과거의 여성이 없을까 고민하던 울프는 같은 고민의 굴레 속에서 유영하는 100년 전의 동료이자 선배이다. 비록 먼 과거의 인물이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어째서인지 사람을 든든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푸코는 역사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모든 사물과 개념의 우연적 발생과 유래를 추적하는 계보학을 제안한다. 즉 계보학은 지워진, 혹은 묻힌 역사를 복원한다. 이와 같은 계보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책이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다. 저자인 이민경도 나와 비슷한 질문을 거쳤다. 나는 왜 여성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가. 페미니스트는 언제나 계보에 오르지 못하는 존재라는, 그러나 우리가 성취해온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그런 고민에서 나온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사람을 벅차게 한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그것은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한 외침이다.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인권선언문인 이 선언은 여성의 교육권과 사회 참여권을 주장한다. 『제국신문』은 이 주장을 두고 “진실로 희한한 일”이라 평가했다. 3.1운동, 5.18 민주화 항쟁 등 굵직한 운동사에 여성 운동가의 참여 또한 두드려졌으나 어떤 이들은 유공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뿌리없는 나무없고 조상없는 자손없다”라는 유림의 반대 목소리를 뚫고 호주제는 폐지되었다. 가부장제가 창조해온 뿌리가 유일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호주제가 폐지되었다고 천지가 개벽하지 않았듯, 그렇게 우리는 유유히 흐르는 삶 속에서 우리를 단단히 할 뿐이다.
이렇게 계보는 우리의 꿋꿋한 흔적을 기록한다. 비록 우리가 중심에 놓였던 적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내리 이어져왔음을, 그렇게 지금의 위치에 도달했음을 이어준다. 하지만 그 흔적만큼 중요한 것이 지금의 우리다. 여성은 주류 역사만으로는 그들이 성녀이거나 창녀이거나, 사랑에 울부짖는 존재이거나, 미쳐있거나 순종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고 증명할 구석이 없었다. 여성은 자신을 증명하기도 전에 평면적 삶을 학습해왔다.
입체적인 여성의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창구는 많지 않다. 여성의, 그리고 페미니즘의 계보가 마치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엔 계보가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지거나 왜곡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과거의 기록이 증폭될 여지가 많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한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근거지를 옮긴 영영페미는 새로운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담론은 증폭되고 재생산되고 불특정 다수에 전달된다. 스피커를 갖는 것은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파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또 현실의 공간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여성의 삶을 보며 ‘같은’ 여성이지만 ‘다른’ 존재임을 이해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Her story다. 일찍이 남성 중심적인 주류 역사를 뒤집는 시도로 허스토리(herstory) 개념이 제안됐다. 영어 his를 her로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허스토리는 중심에 놓인 적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우리의 다층성과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 인식할 수 없던 존재를 내 상상력에 끌어들이는 과정이 허스토리를 뿌리내리는 과정이다.
인식의 범주가 넓어지고 연대의 단초가 생긴다. ‘연대’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추상적이다. 연대를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란 무엇이며, 좋은 연대란 무엇인가. 연대하자,라는 구어 뒤에는 구체성이 부재했다. 그 탓에 구체적인 대책 없이 감동적인 마무리를 지을 때 연대를 쉽게 써먹는다고 비난 당하기도 한다. 알맹이 없는 단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연대의 전제는 존재한다. 타인의 삶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부정하지 않는다.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지거나 삭제되던 소수자의 삶이 생동감을 얻는다. 그녀(her)의 이야기가 드디어 서사를 갖춘다. 만연한 연대 주창이 지리하다면, 정말 한 번도 타인의 삶을 부정한 적이 없다 자부하는지 물어야 한다.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삶이 팽배한 세상에서, 나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끊임없이 연대가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내 생각과 행동의 초석을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시야를 넓히는 것만으로도 더 큰 운동의 가능성이 보이기 마련이다.
연대는 우리 모두의 서사를 동일한 선상에 배치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는 개인의 과업이다. 선에는 위아래가 존재했던 적이 없다. 그렇다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없던 우열을 두고 마치 그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제 발판을 빼앗길까 분노하는 이들은 실체 없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이 나르시시즘과 자기혐오는 한 끗 차이다. 타인의 존재만으로 위태로워지는 기반이라면, 그 얼마나 불안정한가. 서로의 거울이었던 남성과 여성은 비슷한 자기혐오자다. 남성이 여성을 짓뭉개고 그 위에 자신을 세웠다면, 여성은 애초부터 자신을 제대로 세워본 적이 없다. 그 한계가 여성이 극복해야 할 일이다. 나의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혐오를 위한 주시는 남성이 답습해온 주시다. 우리는 배우기 위한 주시를 한다. 그렇기에 서로 방향이 다르더라도 협력할 수 있다. 그것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통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러너는 여성이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선 적이 없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선 여성을 중심에 놓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급진적인 결론이다. 반대로 울프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며, 인간 속 동시에 내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협력을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극적인 주장 같지만 두 사람의 논변은 이어져 있다. 여성을 중심에 두면 잊힌 서사가 회복된다. 그리고 또 다른 잊힌 서사를 발견하는 시선이 생긴다. 젠더를 초월해 더욱 넓은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그것이 중심에 놓인 여성으로부터 뻗어 나간 여성성과 남성성 합치의 결과물이며, 내가 발견한 거다 러너와 버지니아 울프의 연속성이다.
우리는 그녀들을 통해 미래를 상상한다. 과거의 인물과 작품 속 여성들은 간접적으로 다양한 삶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같은 이유에서일까? 최근 문화계에서 여성사를 주목하는 작품이 다수 소개되고 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여성과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힘써온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다. 그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 한 번, 실화 기반 픽션으로 한 번 영화화되었다. 「서프러제트」는 서프러제트 운동을, 「미스 비헤이비어」는 미스 월드 폐지 운동을, 「콜레트」와 「주디」는 각각 제목의 여성의 삶을 다룬다. 국내 역시 “위안부”관련 영화인 「허스토리」, 「아이 캔 스피크」, 「귀향」 등이 개봉했다.
아는 이야기가 살을 붙여 나오는 경우도 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가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허스토리가 소재인 영화가 마냥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다.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사 영화를 두고 페미 코인을 탔다는 오명을 붙이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득세(?)한 시기에 여성 영화로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심보가 괘씸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추세는 잊힌 여성의 역사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롤모델이 부재하고 상상의 여지가 적었던 여성에게 픽션의 여성들이란 또 다른 호기심의 창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그리는 여성상. 어쩌면 창작자 본인이나 주변인이 모티브가 되었을 여성들은 작품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 「벌새」, 「우리들」, 「미성년」, 「윤희에게」 등 여성 감독의, 또는 여성을 중심에 둔 이야기가 최근 몇 년을 강타했다. 김초엽, 정세랑 등 신진 여성 작가의 소설은 불티나게 팔린다. 새로운 유형의 붐이 부는데 이를 단순한 경제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작품 속 여성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들은 더 이상 평면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선량하지만 때로는 이기적이다. 복잡한 마음에 갈팡질팡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극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픽션의 인물이지만 살아있다. 픽션이니 조금 과장된 면모는 있어도 작품 속 인물이 내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여성을 보며 안온함을 느낀다. 사실 여성 개개인은 서로 너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사회가 구성한 여성이라는 틀 안에 함께 갇혀 있다. 그 공통점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동질감은 안타깝기도, 따뜻하기도 하다. 여성이 납득할 수 없는 가부장제가 우리 삶에 긴 역사를 넘어 자리 잡은 것처럼, 여성의 이미지는 학습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삶을 꿈꾸기란 어렵다. 정형화된 삶이 옳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나라는 사람을 새하얀 도화지에 처음부터 그려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계보를 찾고 역사와 작품 속, 그리고 주변 여성의 입체성을 마주하는 과정은 꿈꿔보지 못한 나를 상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을 보며 내 안의 의외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공백이 계보로 채워진다. 우리의 역사를 갖는다. 이어진 흔적과 함께 현재의 우리 역시 형상을 갖고 발자취를 남긴다. ‘내’가 온전히 그려진다. 미래로 이어지는 청사진이다. 그렇게 우리는 여성을 통해 자신을 바로 세운다. 나아가기 위한 자립은 그렇게 시작된다.
울프가 말하는 여성이 가져야 하는 ‘자기만의 방’은 경제적, 공간적 독립을 의미한다.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 이는 당연히 추구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울프 시대의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은 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울프는 가정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라 촉구했다. 가정할 수 없으되 외계인처럼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주류적 인간이 가져온 권리를 여성도 누릴 수 있다는 당연한 인식 계몽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이 독립적인 자신을 상상하는 기반이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역사와 사유의 공간을 빼앗겨온 흐름을 살펴보았다. 여성은 경제적, 공간적 독립뿐만 아니라 자신을 상상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여지가 없었다. 러너는 여성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변화를 위한 선결조건이라 결론 내린다. 여성의 투쟁은 그동안 구축되어온 뿌리 깊은 습관에 대한 투쟁이다. 이를 위해 무엇이 우리를 길들여왔는지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입체적이다. 여성은 고유하며 그러한 서로를 이해할 사유의 공간이 가미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방의 물질적 의미를 넘어선 상상력이 알을 깨고 나오는 추상의 공간, 그것이 현대의 내가 읽어 내린 『자기만의 방』이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선행해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억압적 지배 구조가 구축되어온 과정을 이해한다. 둘째, 잊힌 계보를 인식함과 동시에 동료와 연대한다. 셋째, 픽션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한다.
페미니즘을 알고 근 몇 년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피로했다. 고해하길, 정말 네가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느냐 묻느냐면 그렇지 않다. 어떤 순간의 나는 비겁하게 회피했다. 열렬했던 한때 나는 ‘키보드 워리어’로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칼날이 같은 여성을 향하는 순간 내 의문은 시작되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냥 감싸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내가 천천히 페미니즘을 배워나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변화는 두렵다. 롤모델은 부재했다. 나는 지금도 배우는 중이다. 누군가를 겨냥해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나는 단 한 번도 이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이 없다. 피곤하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내 방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을 구축할 수 있다. 그 방은 우리의 원동력이다. 만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향유하자. 우리가 다른 삶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도록, 연대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자산을 부풀릴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강요된 폭력을 거부하는 미래로 당당히 향한다.
지금 우리에겐 허스토리가 뿌리내린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강세영 옮김, 당대, 2004.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16.
이민경,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봄알람, 2016.
수습편집위원 유랑 <cyoon0402@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