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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5호> [취미열전] 낭만취객

수습편집위원 지긍

by 연세편집위원회

이 글은 125호 『연세』의 기획입니다.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이 각자의 취미를 네 글자의 키워드와 엮어 짧은 글을 지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많아진 요즘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더 잘 설명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각자의 열정을 풀어내는 편이 아무래도 더 즐겁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열전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0.


미소가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사랑이라 하네
만화책도 영화도 아닌 음악 감상도 아닌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취미가 같으면 좋겠대


가을방학 – 취미는 사랑


온갖 취미를 이야기하고 싶어 머리를 쥐어짜다 가을방학 노래가 떠올랐다. 그래! 취미가 꼭 행위일 필요는 없지. 그렇게 정한 내 새로운 취미는 ‘낭만’이다. 이곳저곳 퍼져있는 내 취미를 낭만과 엮어 글을 써보자는 게 내 목표다. 낭만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지냈으나 낭만이 무슨 한자로 쓰였는지 몰랐다. 찾아보니 낭만은 물결 랑과 흩어질 만 자를 쓰고 있다. ‘물결이 흩어지다’ 라니 한자마저 낭만적이다. 자세히 찾아보니 ‘낭만'은 일본에서 수입해온 말로, 나쓰메 소세키가 로맨티시즘(romanticism)을 ‘로오망'이라고 번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유래를 보고나니 ‘물결이 흩어지다’ 라는 해석에 의미를 부여할 것도 아니지만 하필이면 이런 한자가 쓰였다는 게 마음에 든다. 덕분에 어디 가서 조잘거릴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그렇게 낭만에 대한 낭만적인 서론이 완성된 참이다.


1.


꽃 한 송이 주고 싶어

들녘 해바라기를


변진섭 –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내 여름 낭만을 책임지는 노래다. 자신의 마음을 다 태워 줄 수 있는 건 사랑뿐이라는 후렴구보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꽃이 다른 그 어떤 꽃도 아닌 ‘들녘 해바라기’인 이 노래가 좋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낭만의 뜻은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다. 여기서 말하는 감상과 이상은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어도, 현실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어렴풋이 알겠다. 분명히 현실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지만 잠깐 현실을 벗어나는 그 순간 낭만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다짜고짜 들녘 해바라기를 꺾어다 나에게 전해주지 않더라도 그 가사만으로 잠시 어딘지 모를 들녘으로 가는 찰나에 낭만이 있다.


2.


인사동 푸른별 주막 한 벽면에 붙어있는 예술계 블랙리스트다. 블랙리스트 위에는 '우리에게도 낭만과 푸르름이 있었단다.'라는 글이 매직으로 쓰여져 있다.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내려 종로 경찰서 옆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별 주막이 있다. 한번 마음에 들면 몇 번이고 다시 가는 성정에 자꾸만 발길이 향한다. 온갖 포스터와 사람들의 낙서 사이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벽에 붙은 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찾았다. 그 위에 있는 한 마디. ‘우리에게도 낭만과 푸르름이 있었단다.’ 좁은 골목을 지나온 탓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듯한 마음이 차오른다. 언젠가 나 또한 과거에 있던 낭만을 세어 볼 미래를 스치듯 보게 된다. 마주 앉은 친구에게, 우리가 언젠가 이날을 떠올릴 날이 올지 묻는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미래 같은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잠깐 웃고 막걸리를 들이켠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 우리끼리 통하는 유머, 약간의 취기에서 오는 기분 좋은 늘어짐. 이런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둥실 떠오르며 마음속에 들어앉는다. 이런 것도 낭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속 한 장면이다. 구름 낀 짙푸른 밤 하늘 위에 푸른 달이 떠있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스틸컷 ⓒ (주) 디오시네마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속 두 주인공은 함께 푸른 달을 올려다 본다. “달이 원래 저렇게 푸르렀던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푸른 달을 함께 올려다본다.

영화를 보다가도, 노래를 듣다가도,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가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 조용히 걷다가도, 그 어느 순간에도 같은 낭만을 바라볼 사람이 필요하다. 낭만의 공유가 필요한 까닭은 도대체가 낭만을 혼자서 소중히 갖고 있질 못하는 조바심에 있다. 낭만에 대한 나의 거창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와 함께 잠시 현실에서 벗어난다면 좋겠다. 얼마 전 혼자 소설을 읽다 한 구절을 베껴 써 지갑 안에 넣어 두었다. 이 구절을 건네 줄 순간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지갑 한 켠에서 기다리는 나의 낭만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수습편집위원 지긍 (ourindep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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