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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5호> [취미열전] 흥망성쇠

편집위원 차지

by 연세편집위원회

이 글은 125호 『연세』의 기획입니다.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이 각자의 취미를 네 글자의 키워드와 엮어 짧은 글을 지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많아진 요즘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더 잘 설명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각자의 열정을 풀어내는 편이 아무래도 더 즐겁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열전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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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폐인인 내가 코로나 시대엔 모범 시민?

난 우리 모두에게 강제되는 이 금욕의 시기를 무탈히 넘기고 있다.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내 성향 덕도 크지만,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게임이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굳이 밤이어야 하는 것은 부모님의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다. 여름 오후에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지옥불에 구워지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낮잠과 할일 두어가지를 하며 기나긴 낮을 견디면 환락의 밤이 찾아온다. 거실의 대화 소리가 잠잠해질 때 즈음 나는 샤워를 하고 밤새 마실 음료를 가져와 긴 밤을 준비한다. 밤새 산유국을 침공하고 적국의 도시에 포탄을 퍼붓다 지쳐 내가 게임을 하는지 게임이 나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 되면 아침 햇살을 피해 책상 아래로 들어가 컴퓨터 본체의 열기를 난로 삼아 잠 드는 일이 내 방학 일과다.


게임 스트리머들이 유튜브를 장악한 시대에 나 자신을 게임 마니아라고 소개하기엔 부담스럽다. 현란한 컨트롤 실력도,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시도해볼 호기심도 부족한 내가 하는 게임은 특정한 주제와 형식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몇 년 내가 한 게임은 모바일게임을 제외하면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와 전략시뮬레이션 전문 게임 업체인 패러독스인터랙티브[1]사의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2]들뿐이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19세기 유럽의 군주국 중 하나를 골라 누구보다 빨리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를 확장하거나 2차 대전의 참전국의 입장이 되어 주변국들을 황폐화시켜야 하는 등 영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시리즈들이다.


100년의 고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게임을 시작했지만, 화려한 그래픽에 혹해 시작한 온라인 RPG 게임들은 전부 얼마 안 가 관뒀다. 둔한 컨트롤 실력보다도 친목과 협업이 중시되는 온라인 게임에 내 내향 본성이 두드러기를 일으킨 탓이 크다.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길드원들한테 채팅으로나마 인사를 하는 일은 인간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혼자 즐기는 취미를 택한 내게 너무 버거웠다.

조금 더 걷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지하철 끝 칸에만 타고, 수업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출퇴근 시간을 피해 다닌다. 팀플이 있는 수업은 최대한 피하며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유튜브 댓글창은 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와도 소통할 필요 없는 게임을 하며 안락함을 느낀다.


빅픽쳐

뭐 하나 내 의도대로 흘러 가는 것이 없는 인생에서 전략 게임은 내 통제광적 본성을 다독였다. 수십 턴 앞을 내다 보며 미리 비옥한 토지에 알을 박으면 부동산 재벌이라도 된 기분이며, 광대한 제국의 국방비를 편성하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기획재정부의 엘리트다. “방구석 여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은 아니지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함께하는 밤에는 나도 방구석 칭기즈칸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하는 게임이 대단한 지략과 인내를 요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대를 게이머로 고른다면 정말로 머리를 굴려야 이길 수 있지만, 상대를 AI로 한다면 난이도는 폭락한다. 사람보다 똑똑한 AI를 개발할 능력이 되는 인재들이 고작 게임회사에 틀어 박혀 아둔한 게이머들을 이겨 먹겠다고 머리를 싸맬 리 없다. 따라서 게임의 난이도를 아무리 높여 봤자 상대 AI에게 배당되는 초기 조건이 우월해질 뿐 그의 지능이 높아지진 않기에, 이런 류의 게임에서 연전연승을 거둔다고 우쭐해봤자 초등학생을 상대로 부루마블을 이긴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름 없다.


물론 내가 즐기는 게임이 전부 이 모양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순발력을 요구하는 게임을 피한다 해서 그 대안이 전부 제국주의적 확장을 요하는 것들일 필요는 없다. 어드벤쳐 게임도 많고, 정 키보드를 두드리기 귀찮으면 비주얼 노벨이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다소 급진적인 대안도 있다. 이것 저것 다 귀찮다면 모바일로 농장이나 운영하면 그만이다.

굳이 역사적 장엄함을 빌려와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물론 나는 서양사를 좋아하고 근현대 유럽이라 하면 실없는 웃음부터 나오는 중증의 역덕후이기도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체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내가 스포츠를 좋아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자전거 타기 밖에 없는 내게, 내면의 공격성과 지배욕을 분출할 수 있는 수단은 가상의 왕국을 다스리는 일 외엔 없었다. 프로이트 식으로 따지자면 난 내면의 연약함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찾고 있던 셈이다.


고로 내게 게임은 징그러운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다. 되짚어 보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게임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아무 의미도 없는 승부에 투자하는 일을 누군가는 어리석다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방에서 허상의 월계관을 쓰고 자족하다 보면, 다시 현실의 전략을 짤 기운이 도는 것이다. 삶의 엔트로피를 감당하기 어렵다면 당신도 떠나라! 질서정연한 문명의 세계로!




편집위원 차지 (avril11th@naver.com)


[1] Paradox Interactive ®. 역사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로 제작하는 스웨덴의 게임 유통 회사.

[2] 전략 시뮬레이션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원과 병력을 운용하는 게임들을 총칭하는 장르명이다. 그 중에서도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적과 내가 순서대로 돌아가며 명령을 내리는 방식의 게임을 말하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와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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