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M U S I C / 수습편집위원 재주
이 글은 125호 『연세』의 기획입니다.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이 각자의 취미를 네 글자의 키워드와 엮어 짧은 글을 지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많아진 요즘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더 잘 설명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각자의 열정을 풀어내는 편이 아무래도 더 즐겁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열전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좁은 창 너머 분주한 이들과 흘끔 눈을 맞춘다. 묵직한 문을 힘차게 연다. 반지하의 방음이 답답했다는 듯이 뒤엉킨 소리 뭉치가 공기를 타고 와르르 쏟아진다. 우리에게 별다른 인사는 필요 없다. “연습 좀 했냐?” 짓궂게 웃는 줄잡이에게 알 수 없는 의성어를 날리며 나의 때깔 좋은 친구를 향해 성큼 걸어간다. 쿵- 오늘도 너의 울림은 그 어느 소리보다 또렷하다.
카랑한 기타 리프가 시작을 알린다. 이어 베이스 리듬이 느긋하게 소리의 빈틈을 채운다. 리듬을 탄다. 괜히 느껴지는 나뭇결을 쓸어본다. 매끈한 표면에 스틱을 내리꽂는다. 땀방울이 코의 능선을 타고 떨어진다. 손끝을 타고 넘어온 진동과 심박이 어우러져 박자를 만든다. 고막을 얼얼하게 짓누르는 쨍한 소음, 흥분 섞인 호흡, 열기와 전율. 몸이 붕 떠오른다. 독립적으로 직행하던 음과 리듬이 방향을 틀어 서로를 흡수하는 그 순간.
그래, 이거지. 이 맛에 음악 한다니까.
엄마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온 동네 애들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나를 보내는 일은 엄마 교육 인생의 버킷리스트였다. 피아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마침내 학원 피아노 건반을 통째로 뽑아버리는 사고를 치고 만다. 그렇게 나의 음악 인생은 끝날 수도 있었건만, 나는 곧 내 삶의 운명을 마주한다.
친구를 따라간 교회에서 드럼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작살나는 우아함에 압도당했다. 인터넷에 괴담처럼 떠돌던 첫 키스의 이상 반응이 이런 것일까. 꽃잎이 날리고 종이 울렸다. 세상에는 오직 나와 드럼만이 존재했다. 나뒹구는 나무 막대기를 주워들어 생소한 악기를 두드리자 거친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털이 쭈뼛 서고 세포가 깨어났다. 곱상한 소리를 내는 여느 악기와는 달랐다. ‘Rock Spirit’을 각성한 12살 꼬마는 다짐했다. 세계 최강 드러머가 되겠노라.
보통 밴드 음악을 좋아해 악기를 시작하지만, 나의 경우는 반대였다. 드럼에 매료된 후 나의 영웅은 아인슈타인에서 Radiohead[1]로 바뀌었고 노래방에서 ‘She’s gone’[2]을 열창했다. 털이 수북한 아저씨들이 헐벗고 뛰어다니며 소리를 내지르는 괴상한 음악 장르를 좋아하게 됐다.[3] 전 세계 밴드 음악[4]이 나의 낡은 mp3를 채웠다.
약 10년을 드럼과 함께 했다. 사실 나는 재즈, 영화음악,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긴다.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음악 잡식성이다. 그러나 밴드와 락/메탈은 나의 신성한 영적 파트너이자 각별한 취미다. 합주는 무조건 강렬한 비트의 락 밴드 곡을 고집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메탈을 틀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AC/DC[5]의 기막힌 리프를 들으며 삶의 이유를 되찾기도 한다.
술과 마약에 찌든 탕아들의 음악을 왜 취미로 삼게 되었는지 복기해보면 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내심 여자가 드럼을 치고 락을 즐긴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남성의 전유물로 비춰지는 락의 세계를 부시고 진입하는 쾌감이 있었다. 언제나 여자아이가 지켜 내야만 하는 프레임에 질려 있었기에, 마초적이고 비뚤어진 밴드 문화를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단 밴드는 멋있지 않은가! 중학교 시절 밴드부를 하며 발렌타인데이에 남자아이들 보다 더 많은 초콜릿을 받는 기쁨이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내게 드럼과 합주는 최적의 취미다. 드럼은 밴드의 심장이다. 드럼의 둔탁함은 다른 악기와 어울릴 때 중심을 잡으며 빛을 발한다. 합주는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이들과의 교감이다. 말없이 서로를 느끼며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일이 좋다. 수많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엉켜있겠지만, 어찌됐든 나는 밴드 음악 특유의 광기를 가장 사랑한다.
음악은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합주를 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피에 활기가 돈다. 공연은 한바탕 미친 듯이 놀 수 있는 극한의 자유를 선사하는 시공간이다. 큰 공연을 마친 후 뒤풀이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콧김을 내뿜는 물소처럼 날뛰며 들이킨 소주가 달아, 정신을 차리면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 있었기 때문이다. 열기에 젖은 술과 음악. 세상에 엿을 날리는 반항과 묻혀있던 자아를 끄집어내는 샤우팅. 엠프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사운드. 몸을 관통하는 호탕한 질주. 그 광기 어린 힘으로 하나가 되는 다수. 밴드 음악은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백발노인이 되어도 무대에서 드럼을 치고, 광기에 취할 수 있기를. 나의 이토록 사랑스러운 취미를 위하여. Rock'n roll baby!
수습편집위원 재주 (rkdud4904@gmail.com)
[1] 영국에서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 밴드
[2] 미국 밴드 Steelheart의 대표곡
[3] 물론 모든 락/메탈 밴드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필자의 음악 취향은 넓고, 스레쉬 메탈처럼 극단적이지 않아도 밴드 음악이라면 거의 좋아하는 편이다.
[4] 드럼을 치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RHCP, The smiths, Oasis, Green day, Ellegarden, Toto, Pink Floyd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5] 호주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하드 록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