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안즈
이 글은 125호 『연세』의 기획입니다.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이 각자의 취미를 네 글자의 키워드와 엮어 짧은 글을 지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많아진 요즘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더 잘 설명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각자의 열정을 풀어내는 편이 아무래도 더 즐겁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열전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언제나 편식이 심한 편이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에 걸려있는 수많은 영화들 중 마음에 드는 몇몇만 주구장창 보는 스타일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2016년에 개봉한 ‘캐롤’이다. 캐롤의 주인공인 캐롤과 테레즈를 이어주는 매개 중에 필름 카메라가 있다. 1952년 미국 뉴욕, 테레즈는 그 당시 잘나가던 Argus사의 C3 너머로 캐롤을 담아낸다. 아, 사고싶다. 저 카메라를 사면 캐롤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물론 카메라를 산다고 캐롤이 짜잔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의 애장품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국 사이트를 뒤져 인생 첫 직구를 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너무 무거웠다. 별명이 벽돌이니 그럴만 했다. 그래서 가벼운 카메라인 Olympus사의 PEN EE3을 하나 장만했다. 어느새 필름 카메라가 두 대가 되었다. RF방식인 Argus C3보다 반수동 방식인 새 카메라가 다루기 편했다. Argus C3는 내 방 인테리어 수준을 높여주는 좋은 장식품이 되었다.
나의 필름 카메라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몰입 오타쿠의 기질이 다분한 나는 2019년 말 새로운 영화에 빠지게 된다. 바로 ‘윤희에게’다.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으며 돌아다닌다. 이 영화에 흠뻑 젖어 친구와 영화의 배경지인 일본 오타루에 다녀왔다. 그리고 일본 내수용으로 나와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윤희 카메라’를 중고장터에서 찾고 찾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나의 세번째 카메라인 Ricoh사의 FF-300D를 손에 넣었다.
이 즈음 대학 입학 이후 계속 하던 활동이 하루 아침에 끝났다. 인턴도 하고 여행도 갔지만 무소속감이 주는 통증이 있었다. 소속되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우연히 친구가 필름 카메라를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와 함께 필름 카메라 동아리를 만들어 현재 15명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다 동아리에 들어온 다른 친구 한 명과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가진 카메라가 너무 탐나서 나도 하나 샀다. 네번째 카메라인 Minolta사의 X-700이다. 카메라마다 하나씩 추억이 쌓여간다. 현상한 필름도 어느덧 20롤이 넘었다.
나는 끈기가 없다. 인내심도 없고 빠져드는 속도만큼 싫증을 내는 속도도 빠르다. 필름 카메라는 이런 내가 ‘기다림’을 체화하게 해주는 무언가이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 기억을 더 밀도 있게 기록할 수 있어서 좋다. 렌즈 너머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들도 좋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정이 담뿍 담겨버리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 당신의 흔적을 잡아 나의 곁에 오래오래 두고 싶기 때문이다. 소중한 순간을 잡고 싶은 모두에게 필름 카메라를 추천한다.
수습편집위원 안즈 (chicchick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