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달백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데미안 中에서)
매미 종류도 참 다양하지. 밤까지 생의 남은 미련을 털어버리듯이 울어 대는 매미의 소리로 가득한 여름이다. 이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홀로 방안에 누워있는 일은 꽤 답답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들숨에 섞여 폐부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이렇게 답답했지? 하긴, 맵시 나는 옷을 입고, 신경 쓴 머리를 하고 나가는 것보다는 속옷으로 간신히 가린 나신으로 선풍기에 의지하는 지금이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최소한 나를 꾸밀 필요는 없으니까. 보여야 될 필요가 없으니까.
방 한구석에 써지지 않는 자기소개서를 붙들고 있는 내가 있다. 술만 진탕 마신 기억 외에 그다지 대학생활 때 이뤄 놓은 것이 없는 나였다. 그래도 억지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를 채워 넣어 본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든다. 전공기초를 듣던 시절, 교수님의 요구로 며칠을 고민해서 썼던 자기소개서와 다를 바 없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 하. 이십 대 초반과 달라지지 않은 지금의 모습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울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손은 담뱃갑으로 향한다. 스스로 위로와 체벌을 준다. 이러다 담배를 못 끊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감정은 극에 달한다. 거기까지. 더 이상 깊게 생각에 잠기지는 않는다.
사실 술 마신 기억이 내 대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분명 끔찍이 싫어할 거다. 바뀐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그 시절의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긁어 부스럼이다. 예민하다. 이런 용어를 입에 달고 살던 내가 지금은 예민한 사람이 됐다. 실은 예민한 게 아닌 당연한 것이다. 이런 당연한 것들을 외면했던 나를 바꾸게 한 기억들이 있는데 술 마신 기억이 전부일 리 없다. 다만 그 사항을 자기소개서에 쓸 수 없을 뿐이다.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온 뉴스가 떠들썩하던 시절, 아주머니의 선한 인상과 맛있는 된장찌개 때문에 자주 갔던 분식집이었다. 여느 때처럼 된장찌개를 먹다가 불현듯 앵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때 아주머니는 내게 언론 탄압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하셨다. 처음 느껴보는 불편함이었다. 그 밖에도 맞벌이지만 아침은 본인 몫이셨던 엄마가 차린 수저가 눈에 들어오던 순간을 기억한다. 애인과 처음 본 페미니즘 영화의 티켓도 잊지 못한다. 동성친구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처음 얘기했던 새벽은 떨리던 감정선까지 여전히 남아있다.
그와 동시에, 촌극(새내기에게 짧은 연극을 시키는 악습)을 지시했던 새터에서의 나, 외모평가를 일삼던 나를 외면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감히 페미니스트라 지칭하기 힘든 죄책감이 있다. 지난 연세지에 본인을 빨간약을 먹고 괴로워하는 네오에 비교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글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빨간약을 먹기 이전의 친구들도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 모임에 나간다. 아무렇지 않게 혐오표현이 나온다. 나는 버틴다. 실은 버티는 게 아니라 빠져 있다. 이렇게 흔들리는 자아가 내 대학생활의 전부이니 자기소개서에 채울 문항이 없다. 그런데 더 이상은 쓰지 않고 버티기 힘들다.
성장과정에 대해 쓰시오. (1000자 이내)
누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드문드문하겠지만, 나는 특별히 더 그런 편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필름이 붙어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그 필름을 재생해보면 꽤 어릴 적에도 이미지를 신경 쓰는 나를 볼 수 있다. 심지어 인형놀이를 할 나이에도 말이다. 인형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있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끔 잘 대해줘야겠다. 너 이리 와. 나랑 같이 자자. 아까는 멋대로 날려버려서 미안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베개로 인형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나는 의도 없이 잘해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어린이였다.
한 여성 탐험가의 오지 탐험기가 히트할 시기였다. 넓은 세계를 처음 접한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직 전쟁 중인 나라도 있구나. 아빠는 여기 가본적 있어? 그즈음부터 아빠의 말수도 줄기 시작했다. 엄마와 상의도 없이 대기업을 때려치울 때부터인가? 아니다. 회사를 나오고 난 뒤 엄마와 편의점을 운영할 때에도 아빠는 비록 일이 힘들더라도 행복했다. 그러면 본사의 갑질을 참지 못하고 편의점을 그만둘 때 즈음인가 보다. 아빠는 때때로 아들에게 폭언을 하기도 했다. 그 탐험가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씩씩하게 이겨내고 의지할 사람을 찾았지만, 아빠는 집에서도 기댈 곳이 없어 위태로워 보였다. 아... 한 가지 있었다. 아빠의 학생운동 시절. 그것은 그에게 트로피와도 같았다. 학생운동은 그의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일종의 숭배 대상이었다. 혹은 생명줄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당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업을 몇 말아먹고) 우리 식구가 연탄을 피우고 한 방에 모여 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는 온도에 놓였을 때, 그의 트로피는 더 거대해졌다. 어느 순간 본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 딸과 상처를 받은 아들이 자신의 곁에 있으려 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본인을 지탱하던 줄이 간절하게 느껴졌겠지. 자본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 살자고 약자들의 권리를 짓밟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얼마나 되뇌었을까. 그것마저 양보해버린다면 그가 의지할 곳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엄마의 권리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맞벌이였지만 아침은 무조건 엄마의 담당이었던 우리 집은 여느 평범한 가정이었다. 나 또한 예전부터 그런 환경에 문제점을 느끼기는 했다. 다만 어린 나의 판단 기준은 경제력이었다. 만약 아빠가 돈을 더 잘 벌었다면 엄마의 가사노동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엄마가 아빠보다 조금 더 잘 벌었기에,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아침 준비가 다 되면 식탁에 앉아 수저까지 차려 주기를 바라는 아빠의 모습이 고깝게 보였다. 참 사람이 염치도 없지. 나는 이런 식으로 자랐다.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지금의 내가 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엄마가 깜짝 놀라고는 한다. 전혀 그러지 않던 애가 갑자기 여성의 인권이니, 아빠가 변해야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PD가 꿈이었던 누나는 서울에 가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교대에 가게 돼 처음에 대학생활 적응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부모님은 서울로 가고자 하는 아들의 의지는 꺾지 않으셨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를 재수까지 시켜가며 애지중지하셨다. 생각해보면 그전부터 누나는 쟤만 챙긴다, 자기는 자식도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때마다 나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아빠가 나에게 관심을 보인 일이 없지는 않았다. 백수였던 아빠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시간을 때워야 했기에 만화책을 많이 빌렸다. 아빠는 보고 남은 책을 잠든 내 머리맡에 두는 식으로 나와 관계를 이어가려 했다. 당시 집에 TV가 없었기에 나는 만화책 보기를 좋아했다. 만화 속에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들 중 대사가 유독 없고, 갑자기 주인공 뒷모습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장면이 자주 노출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레 ‘분명히 나쁜 놈일 거야’라고 짐작하곤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사람. 당연하게도 주인공은 그 사람이 악한 인물이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다 뒤통수 맞을 텐데... 속으로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이는 꽤 흔한 클리셰로 짐작에 맞게 그 인물은 악인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클리셰에 흠뻑 취한 독자였다. 나는 말이 없고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의뭉스러운 자를 악인이라 못 박았다. 그들은 십중팔구 아픈 과거가 있어 악인으로 변한 인물이었다. 나에게 악인은 악인일 뿐 그들의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생활 초반까지 발화권력을 독점했던 나였다. 촉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기 또한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만화 속 그 등장인물이 된 느낌이다.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기 힘들다. 어릴 적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변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할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1000자 이내)
올해 여름, 예전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장마철이었으나 유독 우리가 떠난 그날은 맑았다. 맑은 하늘이 빨갛게 물드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며 감성에 젖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술을 꽤 먹어 얼굴이 적당히 물들었기 때문이겠다. 내가 물었다.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 신기했어. 친구가 답했다. 다른 편에서는 형을 존중한다는 둥,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둥의 얘기가 들려왔다.
근데 형도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기 중 한 명이 형에 대한 첫 기억이 어떤 사람에 대해 외모 평가를 하던 모습이라며 말을 꺼냈다. 본인들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우리와 다를 바 없었던 형이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웃기지 않으냐고 묻는 듯했다.
“00아, 너 금은동 누구야?” 대학에 왔을 때 나는 내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다. 다 같이 기숙사에 사는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부모님 눈치 보지 않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며 놀 수 있었다. 만나는 선배마다 왜 그렇게 재밌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학생활을 즐겼다. 특히 남고를 나온 나는 이성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새터에서 여장과 촌극을 시켰을 때만 해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동기 중 연애 대상으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외모를 3등부터 뽑는 것을 마치 올림픽 메달이라도 수여하듯이 ‘금은동’이라 이름 붙이며 놀았다. 술자리에서 병X샷을 크게 외치는 사람이 잘 노는 사람이었고, 술은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야 선배들에게 인정받았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선배들이 물어보는 다양한 버전의 금은동을 정말 생각하는 대로 뽑았다. 새내기 시절 1년을 지나오니 우리 과에서 술 마시는 소모임의 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인싸의 상징이자 멋있는 선배로 보였던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금은동’을 후배에게 묻는 선배이자, 새터에서 ‘촌극’을 아무런 문제 없이 지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과는 신촌 술집 중 ‘가막새’를 그렇게 좋아했다. 토속 음식점 특유의 분위기와 맛있는 안주만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물론 학생들은 30분을 기다리면 나오는 닭볶음탕도 좋아했지만, 큰 대접에 나오는 동동주가 가막새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의리주를 먹고 먹이던 그 술집에 앉아 새터 당시 우리 방의 일원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후배와 술자리를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과거 새터의 촌극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순간이 잊히지 않으며 부끄러운 기억이라며 말이다.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그 기억을, 죄의식을 덜기 위해 털어놓았다. 나에 대한 원망을 들을 거라 잔뜩 긴장했지만, 후배에게 나온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시킨 촌극의 피해자였지만, 후배는 본인도 그게 부끄럽고 잘못된 짓인지 몰랐던 자신을 자책하며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차라리 왜 그런 일을 시켰냐고, 너 때문이라고 비난해 주기를 바랐다. 무책임하게.
새터의 기억은 아직까지 또렷하다. 나는 우리 과가 강권이 없음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선배의 번호를 받으려면 종이컵에 가득 채운 소주를 마셔야 했다. 후배들은 분위기에 떠밀려 술을 받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꽤 인기 있는 선배였는데, 종이컵의 반만 따라주거나 몰래 번호만 주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도 취해 보이는 후배에게는 번호도 술도 주지 않았던, 나름대로의 인자함을 보이는 선배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번호를 주면 정말 비싼 밥을 사주고 또 후배가 먹은 술만큼 나도 먹었기에 문제가 없었다고 자기 위안을 했다.
새터 이틀째, 숙취에 깬 나는 우리 방 후배들이 빙 둘러앉아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과에서는 번호를 주기 전까지는 서로 존대를 하지만 번호를 받으면 반말을 할 수 있었기에, 친한척하며 그 자리에 가 뭘 하는지 물어보았다. 우리 방 촌극 주제는 19금이라며 본인들이 짜 놓은 내용을 방장인 나보고 평가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금 야한 이야기가 가미된 일반적인 연극이라 재미가 없었다. 좀 더 재미있고 자극적이게 짜야 1등을 할 수 있다고 충고하며 열심히 논의를 했다. 내가 낸 아이디어도 후배들이 낸 아이디어도 방 안에서만 돌다 보니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고,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 딱 한 명 있었다. 당시 모든 이슈에 예민하게 군다며(소위 운동권처럼 군다며) 우리 과에서 미움받던 형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수업을 몇 개 같이 들으며 형과 친해졌고, 그걸 안 회장단은 내 방에 그 형을 배정했다. 형은 나와 후배들이 짠 촌극 내용을 듣자 눈살을 찌푸리며 문제가 있다고 했다. 당시 나에게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무슨 분위기만 흐리냐며 형 말을 무시했다. 불행히도 그날의 촌극 중 우리 촌극이 가장 반응이 좋았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후 내 생각을 가장 먼저 털어놓은 친구가 있다. 동기 중 한 명으로 여느 우리 과 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마음속 얘기를 꺼낼 수 있었던 건 단지 많이 친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꺼낸 이유는 더 이상 일상 대화 속에도 드러나는 혐오발언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나랑 너무 닮아서였나? 너무나 많은 주변인들이 혐오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모두가 거울이고 내 모습이었다. 너도 우리랑 같이 그런 얘기 했잖아. 너도 좋아하잖아 그치? 무언의 압박이었다. 친구들도 알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고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끼리 있으니 하는 얘기인데... 나는 아직 ‘우리’였다.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왜 너네랑 같은데?
“자기랑 뭐가 다른데?” 남자들의 잘못된 성 인식과 성문화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자 여자친구가 반문한 말이다. 배신감이 밀려왔다. 몇 년간, 내가 변한(변했다 생각했던) 모습을 가장 옆에서 지켜봤던 여자친구가 말한 것이다. 평소 자주 맥주를 마시며 사회 현안에 대해 의견 나누기를 좋아한 우리였다. 몇 년을 만나며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일까?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나? 회의감과 불만, 짜증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채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여전히 없어지지 않은 맨스플레인, 아직 즐겨찾기 되어있는 스포츠 커뮤니티 사이트를 모르지 않았지만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저 남자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그러니 인정해달라고.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많이 억울했다.
지원한 동기를 쓰시오. (1000자 이내)
아직 대학에 들어오기 전,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는 내 인생에 실패는 없다며 삭발을 하고 들어간 학원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스무 살 청춘을 모아두면 아닌척하고도 마음이 요동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스무 살의 나도 그런 유형이었기에 돌아가는 눈길을 다잡고 공부하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남자애들 사이에서 도는 우리 층의 ‘여신’에 관한 소문에는 흔들렸다. 소문의 여신이 우리 반이었고, 하필이면 내 뒷자리였던 것이다. 예쁘긴 한데 좀 차가운 성격이네. 어떻게 친해지지? 친해지는 방법은 크게 문제 될 거 없었다. 비록 머리는 삭발했지만 인싸력이 삭발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잠깐의 호기심에서 끝난 인연인 줄 알았다. 각자 대학교를 가고, 1년에 한두 번 재수 반 친구들과 함께 보는 그 정도의 친구로 생각했다.
집안 좋고 잘생긴 카레이서와 연예인 지망생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담긴 프로그램이 인기 있을 무렵이었다. 저렇게 잘난 사람들도 좋아하는 사람이 본인을 좋아하게 만드는 건 어렵구나. 그런데 재수 시절의 ‘그’애가 내 여자친구가 될 줄이야.
그것만으로도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않으려던 태도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애인의 호감을 사야 했으니까. 계산을 해보니 외모로 승부를 볼 수 없었고, 그나마 학벌 정도가 날 만날 유인이었다. 그렇다면 가치관이라도 맞아야 한다. 그때부터 가면을 썼다. 속은 일반적인 한남이었지만 겉은 개념남으로 보여야 했다. 그것이 페미니즘으로의 첫 계기였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을 때의 배신감이 컸다. 그놈의 인정이 뭐라고.
동기의 불순함은 있지만, 그 덕분에 주변을 살펴보니 내가 쓰던 용어, 여성 혐오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집단에서 이탈하기 보다 주변을 한 명씩 내 기준에 맞는 친구로 바꾸려 했다. 여자친구에게 발동되는 맨스플레인은 친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냥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외부적으로 페미니스트라고 표명하며 무리로부터 이탈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친구들 사이에 속해서 무감각하게 있지도 못했다. 그래서 한 명씩 주변인을 포섭할 때 처음 꺼내는 말은 ‘나 사실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이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얘기는 꺼내기 힘들다. 나는 진보적이라고 말만 꺼내도 흠칫 놀라는 집단에 속해 있었으니까.
나를 이중적이라며 지적했던 동기에게도 그렇게 접근했다. 그러다 벗겨졌다 생각했던 가면이 벗겨지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들켰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를 구분하고 있다. 이전의 나를 한없이 구기면서 지금의 나를 선해 보이게, 무결해 보이게 말이다.
‘나’는 주변인에게 괜찮은 놈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다 여자친구 덕분이야, 넌 여자친구랑 무슨 문제 없어? 페미니즘에 대해 너희들이 오해하는 게 많아. 오만한 나의 가면은 얼굴에 뿌리내린 채 체세포의 일부분인 양 행동한다. 가치관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실패한 내 대학생활을 보상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변한 가치관은 내 유일한 트로피였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느낀 학보사에도 들어가 활동했다. 나도 그 일원으로 소속됐다고 생각하며 대학생활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지니며 살았다. 난 완전히 거듭난 거야.
그런데 우리 과 후배가 들어왔다. 가슴이 서늘했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게 분명한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울이 하나 늘었다. 후배는 말없이 내 과거를 비추고 있었다. 너 과거에 어땠는지 알잖아. 근데 네가 여기 있어? 후배와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그 사람도 과 분위기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후배도 그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었다. 어떤 때에는 적응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결국 후배는 과에서 이탈했다.
적응하고자 몸부림친 후배의 모습이 더 나를 찔렀다.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다 하면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내 탓 같았다. 어디로 가든 과거를 완전히 벗어낼 수 없었다. 끈적하고 냄새나는 이 죄책감을 속으로만 가지고 있기에는 이제 힘에 부친다. 그래서 이 글을 써야만 했다.
앞으로의 포부를 쓰시오. (1000자 이내)
소위 말하는 인싸 대학생활을 보낼 시절부터 맺은 사람과의 만남은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하며 차마 인식하지 못했던 죄들을 불러온다. 그 사람이 현재 내 변화를 알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며 지낼 수 있었을까. 사람들과 나의 모든 상호 작용을 호의로 받아들였던 그 시절이 속 마음을 털어낼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지금에 와서는 신기하게 느껴진다. 현재의 관계도 가치관도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나로서는 내 생각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미움 받을까 쉽게 말을 터놓기 어렵다. 당시 생각 없이, 어쩌면 그렇기에 꽤 행복하게 보냈던 대학생활 초반은 현재 나에게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교회 가기를 좋아했다. 특히 부활한 나사로 같은 구원 서사를 좋아했다. 애인을 만난 이후, 난 정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사회 곳곳에 벌어졌고, 난 막 눈을 뜬 상태였다. 신기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까 기대가 되고 설레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던 과거가 아팠고 애처로웠다. 눈을 뜨고 마주한 현실은 거대했다. 거대해서 겁이 났다. 미래가 두려워졌다. 그래, 구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고난과 역경이 있으니까.
어린 시절 한 주간 친구와 싸우거나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난 구원을 받았으니까. 다가오는 다음 주를 막 살아도 괜찮았다. 행동이 바뀔 필요는 없지. 믿는 마음이 중요한 거야. 페미니즘은 구원이었기에 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페미니즘 자체가 아닌 페미니즘을 생각하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그러다 조금씩 타협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아직 몰라서 그러니 지적하지 말자. 얘네를 안 볼 수는 없잖아? 그러다 결국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녀의 말의 근거가 애인인 나인지, 그녀가 상종하지 않는 그녀의 오빠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성추행 의혹으로 자살한 정치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괴물로 바꾼 것일까? 원래 그런 사람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나를 찔렀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변하지 못했다. 과거의 나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다. 아니 믿었다는 말이 더 알맞겠다. 그러니 바뀌지 않았다. 이 죄책감은 어디까지 나를 끌어내릴까.
실은 이 빌어먹을 죄책감이 면죄부를 쥐여준 놈이다. 외모를 평가하는 환경에 젖어도,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공간에 있어도, 심지어 내가 주체가 되어도 난 죄책감을 가지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죄책감이 아닌 내가 저지른 죄 그 자체를 마주할 차례다. 몸이 떨려온다. 수많은 거울이 있어도 끝내 마주치지 못한 나였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의 클리셰에서처럼 내 정체가 악인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클리셰 비틀기가 더 먹힌다.
P.S. 이 글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집단에 속해 있는 필자의 이야기입니다. 남성 집단에서 이탈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015B의 <남페미가 어쨌다구?> 글을 추천합니다. 또한 남성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논의하는 글도 아닙니다. 필자는 그 정도의 지식과 페미니스트 운동에 직접 뛰어든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연세지 120호의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까?>를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118호<한남이 한남에게>의 표현을 빌려) 빨간약을 먹어 진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네오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과거에(혹은 현재까지) 가지고 있던 이성애, 남성 중심적 사고가 여과 없이 쓰여 있습니다. 삶에 편재해 있는 한남들의 이야기에 이미 질린 분들이라면 여성의 목소리와 기록이 담긴 <女女>, <허스토리가 뿌리내린 자기만의 방에 대하여> 글을 추천합니다.
수습편집위원 달백 (dkro135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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