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R
R은 날마다 종생(終生)한다. R은 하루를 평생으로 길게 느낀 만큼 삶에 지쳐 있으며, 수더분한 머리 속 간간이 보이는 흰 머리카락의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그럴 듯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만을 매일 생각하고 있다. 여상한 매일을 걷는다. R은 날때부터 느긋한 인물이었다. 제법 걸출한 길을 걸어왔지만 R은 자신을 단 한 번도 우수한 인재라 생각해본 적 없다. 필시 그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 느긋함이지 사실 그는 무력한 인간이었다. 덜컹거리는 지상 전철 위에서 몇 번이고 한강물을 바라보며 극단적인 감상에 젖었는지 모른다.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뇌까렸다. 저를 드러내길 갈망하는 치는 아니었으나 정상(定常)의 세계에서 낙오된 모순이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 기인했을 뿐이다. 경계선 상의 종자인 탓에 R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것처럼 활개치는 작자들을 천성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이 싫다기 보다 물이 기름과 층을 이루듯 자연스러운 거부반응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 사람의 엽서가 온다. 당신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으니, 만나자는 편지다. 한때의 거부감을 태평히 복기하고 있을 뿐인 늘어진 인생에 셋 중 P의 편지는 복잡 미묘하다. 그에게 느낀 무의식적인 거리감, 이제는 사라졌을지라도 그 흔적은 남아있다.
이질적인 여상함으로 P를 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요즘의 삶을 묻는 R에게 자신을 낮에는 보통 하고 싶긴 하지만 하기 싫을 때도 해야 하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페미니스트라 지칭한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에 식상하지 않은 답을 기대했던 R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루의 구간이 딱 떨어지게 나뉘는 것은 무엇인지, 네가 아수라 백작이냐 농이라도 던질 세다. 하긴 그는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것 같긴 했다. 어쩜 그렇게 끊임없이 말을 뽑아내는지 고장 난 라디오가 패배감에 통곡을 할 인물이다.
말을 하는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잡아 끈다. R 역시 그 거창한 말본새에 껌뻑 넘어갔던 터다. 으레 그런 사람을 두고 외향적이니 사회성이 높니 좋은 수식어를 잔뜩 붙여 놓지만, 단지 그런 자였다면 인싸에 소름이 돋는 R이 다가갔을 리 만무하다. P는 고민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시선을 즐기고 만족하는 본능적인 관심 종자가 아니라, 발화 권력을 가져가는 자신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많았다. 냅다 말을 지르고 보던 그는 이제 시꺼먼 잉크로 공백을 채운다. P의 글쓰기 모임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성황을 이뤘다. 주변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이 모여 그의 자부심이 된 글쓰기 모임은 사회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말은 즉시 휘발된다. 만연하는 소음을 뚫고 청자의 뇌리에 기록된다면 그건 화자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이제 P는 사회인이다. 어렸던 그날처럼 허구한 날 지인을 붙잡고 말을 쏟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글쓰기는 그에게 다른 유형의 말하기를 알려주었다. P는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을 사랑했다. 충분히 고민하고 적어 내리는, 유영하는 시간을 사랑했다.
자몽 에이드를 빨아들인다. 톡 쏘는 맛에 더위가 가신다. 달되 쓰다. R은 P와 함께한 과거를 반추했다. 조급했으나 찬란했던 P가 학교를 제 집마냥 뒤집고 다닌다. 소위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말하는 때에 우리네 대학생은 마치 백지와도 같았다. 이전의 여성주의 계보가 어떤 음모론적 권력 탓에 제 자리를 잃었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P는 야망이 컸다. 그는 자신이 담론의 첫 시작이길 꿈꿨다. P는 감투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나 그 시작이 되기 위해 자리를 얻었다. 학생회장은 그것이 가능한 위치였다. 그는 오리엔테이션과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꾸리며 우리가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음을 설파했다.
R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타인에게 있어 변화의 계기가 되기 위해 지난날을 바쳤다. 참 듣기만 해도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태생이 움직이길 거부하고 묵직한 솜털 이불에 묻혀 있길 갈망하는 R조차 옷자락이라도 부여잡길 바랐던 선구자가 있었다. 사람은 사람을 보고 변한다. 너도 수많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겠지. 떠올려 보라. 갓 수능을 치고 대학의 문턱을 넘은, 만개한 해바라기는 중심의 빛나는 자를 쫓는다.
다시 아,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했나 보다. 근원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이들끼리라 생각했던 선입견을 물리치고도 그의 손을 잡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 보다. R이 P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눈앞에 당장 바꿀 것이 보이는 위치에서 그는 고군분투했다. 뒷말을 듣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R이 보기에 P는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인간이었으나 그 역시 낙담하는 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페미니즘을 좋아서 한 건 아니죠. 그걸 안 하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았으면 조금 더 …….”
R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언제나 생각하던 바였다. 기준을 세우는 일은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P는 질병을 많이 얻어 가는 활동이라 덧붙였다. 그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낙천이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지탱하기 위한 힘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문득 R은 당황한다. 마냥 긍정적인 대답만 바라진 않았지만 짐짓 비관적이다. P는 안심하라는 듯 피식 웃으며 개인의 해방을 말했다. 불온은 정상을 가장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렀다. 그는 언어를 얻어 그것을 거부하는 자가 되었다. 싫었던 아버지를 두고 이제는 그것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자신을 옥죄던 청테이프를 한 꺼풀 벗어낸 듯하다.
어쩌면 혹자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부정적이라 비난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던 인연은 엿가락 마냥 끊어진 지 오래다. 듣지 않아도 됐던 말을 듣고 발걸음이 향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 변화조차 지금 페미니스트인 제가 보기에는 당연한 변화예요. 부정적일 수가 없는 거죠.”
“당연한 인과라는 거지요?”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의 저는 제 변화를 싫어할 수도 있었겠네요.”
“지금의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요.”
당연한 소리를. 혼몽한 정신을 붙잡고 위선을 간파하는 일이란 그런 법이다. 타인의 위선은 곧 나의 위선이었다. P의 계기 역시 위선이다. 나름의 위치에서 누구보다 남성의 권력을 잘 인지하고 있던 자가 그였다. 자신의 입으로 시혜적이었다 평하는 과거가 그저 잔상만은 아니다. 위치에서 비롯된 죄책감은 지금도 그를 부여잡는다.
“연극을 보러 갔었는데 게이 희화화 코드가 있었어요. 들으면서 되게 정색하고 그냥 나갈까? 했는데 다들 엄청 크게 웃더라고요. 커밍아웃하지 않고 숨기려 하는 게이가 왔다면 그들은 나처럼 안 웃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별 의미 없는 시간이 유독 뇌리에 싹을 틔우는 때가 있다. P는 자신이 비당사자로서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걸 인지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말할 수 있는 범주가 타인보다 더 넓다는 것 역시 그의 깨달음 중 하나였다.
“전략적으로 가져가기 좋은 게 많았던 거죠.”
R은 다시금 생각하건대 그가 참 이기적이라 결론 내린다. 똑똑하다. 그는 소리쳐도 방파제에 부딪히지 않는 제 목소리를 욕심껏 이용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난리를 쳤다. R은 이 대목에서 수긍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난리를 쳐 두면 뒤에서 조금 난리 친 사람보단 제가 더 눈총을 받으니까요.”
“방패막이였던 거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는 경험이 좋았다. 끊어진 인연에 슬퍼할 새도 없이 그는 새 인연을 많이 얻었다. 전혀 몰랐지만 고맙다고 동의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급했던 때를 돌아보며 이제 그는 조금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가 지탱한다 여겼던 시혜적인 태도가 타인의 지탱으로 인해 역전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P는 자유로워졌다. 그가 100을 말하면 뒷사람이 1을 말하기 쉬워질 거라 믿던 자의식과잉의 과거에서, 지금은 그와 동일한 선상에서 깊은 공감을 나누는 지인들과 함께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을 부정하진 않는다. 눈앞의 의무에 급급할 수 있었던 대학생 시절을 거쳐, 장기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 P는 갖은 고민을 해야 했다. 지도 교수와 자연스럽게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학계 특성상 그는 지도 교수 선택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교수님이랑 싸운 적도 있다는 그를 두고 R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보냈다. 자신과 충돌하지 않을 교수님을 고르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조금 오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사회의 예절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P의 절충안은 들어맞았다. 딱딱하고 융통성 없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뒤로하고 그가 마주한 교수님은 적어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P의 분야에선 학문 이야기를 하며 혐오 발언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문제는 어쩌다 그런 발화를 할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퀴어 페스티벌에서 인터뷰했던 얘기를 교수님께 해드렸어요. 근데 퀴어가 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아하. R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였다. 아슬아슬한 길목이다. 대체로 파국으로 치닫는.
“그래서 성소수자라는 뜻이랑 이상한,이라는 어원에서 왔다는 것까지 알려드렸죠. 그런데 교수님이 그럼 내가 그분들을 퀴어라고 불러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오. 유래 때문에 걱정하셨나 보네요.”
약간의 감탄. R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안심.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의 삶이 그만큼 단조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그는 제 학문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활개를 쳤던 대학생 때보다 다채롭지 못한 삶의 구성을 파훼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밤에는 변신하는 거지.”
키득거리는 R을 보며 P가 으스댄다. 부쩍 는 그의 글 실력은 R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아가 비대한 그를 치켜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만나지 못했던 지난날 동안 성장한 그가 기특해 칭찬이라도 한마디 던져주려는 찰나 그가 벌떡 일어선다. 대화하는 내내 스마트폰을 기웃거리던 차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니 급히 랩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전언이었다. 즐거웠어요, 담백한 한마디를 끝으로 그가 헐레벌떡 자리를 나선다. 꼬랑지에 불이 붙은 듯 도망치는 그를 보는 R의 시선이 아연해진다.
더 물고 늘어질 대화는 없었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굳건히 스스로를 지켜내고 있는 그를 굳이 내가 챙겨줄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이내 고개를 젓는다. 덩그러니 남겨진 R이 턱을 괴었다. 이 되지도 않는 만남의 여정은 P를 시작으로 순항 중이었다. R은 작은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대학의 문을 넘어 사회에 착지한 당신의 삶이 어떠한지. 당신은 여전히 피가 끓었던 그때처럼 외치는 페미니스트인가. 혹은 현실에 무뎌져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있을까.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를 기다려주던 이들에게서 엽서가 도착했다. 흔쾌한 답장에 손이 떨렸더랬다. 빳빳한 종이를 문지르며 오랜만에 만나는 그들에게 물을 질문을 얼마나 고민했던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꽂힌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직 학교에 적을 둔 사람으로서 R은 앞서간 선배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무감해진 눈으로 에브리타임을 훑어 내리다가 페미니즘이고 뭐고 운동하는 애들은 스펙도 못 쌓고 학창 시절을 하릴없이 보내다가 취직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 빌빌댄다는 글을 보고 눈이 회까닥 뒤집혔던 것은 사소한 비밀이었다. 단순히 돌아버려 그런 글을 쓰는 네 인생이나 돌아보라고 일침을 놓기엔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매년이 경제 침체기라 대체 호황이라는 단어가 언제 쓰일는지 의뭉스럽긴 하지만, 지속되는 어려움 속에 청년 일자리 사정도 궁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R조차 앞날이 두려웠다. 그 감정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한때 R은 취직 준비에 고생하는 H를 보며 제 일이 아니라 태평히 생각했던 전적이 있었다. 제가 그의 모습이 되어 전전긍긍할 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보는 H의 모습이 생소하다. 모니터 넘어 버벅거리는 그의 형체에 조바심이 난다. 교차성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회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중고등학교 친구처럼 내내 붙어 다닌 지인은 아니었지만, 이유 모를 끈끈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R은 문득 함께 보낸 시간만이 상대와의 인연을 단정 짓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우울할 뿐인 월요일 저녁, 화면 속 H가 부유한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이제는 직장인이 된 H를 아무 때나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사정과, 코로나와, 뭐 이것저것 사유를 붙여가며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자의식이 저 끝까지 솟아 있는 어느 남정네를 보고 왔더니 당신이 떠오르더라,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초면부터 그랬다. H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궁금했지요. R은 H의 눈앞에 실을 매단 동전을 떨어뜨린다. 최면술사처럼- 과거로 돌아가 볼까요?
가족 모임을 나가면 어른들은 항상 H를 두고 살이 빠졌네 쪘네를 먼저 말했다. 기실 가족의 따뜻한 관심이라기엔 겉모습에만 초점이 놓인 포문이었다. 누가 내 편인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그는 줄곧 자신의 편일 사람들을 바랐고, 만났다.
얌전했을 거란 선입견이 무색하게 그는 격렬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학회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시위에 참여하거나 후원을 하기도 했다. 분노는 그의 원동력이었다. 잘못된 관습을 마주했다면, 바꾸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같은 동지가 생겨 좋았다 넌지시 던지는 고백이 참 솔직하다.
느긋하던 진자운동이 멈춘다. 속도를 늦추는 동전을 향해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끌어올려진 무의식이 그를 어떤 불편한 순간으로 침잠하게 한다.
“15년도엔 되게 좋게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다툼이 많아졌던 것 같아요. 졸업할 때 즈음에는 엄청 힘들었죠. 터프(트랜스젠더 배제주의)가 주류가 됐을 정도였어요.”
“함께했던 친구들 중에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많았나 보지요?”
“……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 친구라면 이런 말 안 할 것 같았는데 하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배신감? 아니, 절망감이 컸죠.”
어느 공동체이든 고여 있으면 흐르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는 딱히 그와 의견이 다른 자들을 비난하진 않았다. 다만 어떤 기점으로부터 학교 밖의 만남을 더 갈구했을 뿐이다. 그 느낌을 안다. 내부의 충돌과 산개. 저항하는 일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다. 진창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 순간순간을 느끼며 H는 제가 밟은 땅을 단단히 하고 싶었다. 지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R은 슬며시 노트북의 볼륨을 높인다. 불합리를 바꾸고 싶고, 목소리 내고 싶다는 욕구. 취업의 길목에서 H는 기자를 꿈꿨다.
“저는 학교 안에서 기자 공부를 했어요. 여자들끼리. 부조리한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의견을 나누고, 그러면서 위안을 많이 얻었어요.”
여대에서 취업을 준비한 그는 생각보다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다 말한다.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H를 바라보자 그가 머쓱하게 웃는다.
“생각해보니 저 정말 편히 살았나 봐요. 남들이 보는 못 볼 꼴을 몇 배는 덜 겪었던 것 같고.”
“그건 좋은 일이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아, 그래도 이런 어려움은 자주 있었어요. 자기소개서 쓸 때에도 소문 같은 게 있거든요.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일했다 이런 거 쓰면 안 된다. 경력에서도 괜히 여성 학회인데 사회과학학회라고 쓰고. 면접에서도 사근사근 잘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했어요.”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현타가 왔어요. 매일매일. 대학 때는 화장을 안 하고 편하게 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취준할 땐 화장 안 하면 그쪽인가? 이런 느낌으로. 알게 모르게 압박감이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페미니스트들과 함께한 공간이 참 좋았다는 걸 느꼈다. 어떻게 보면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취준생활을 해내며 잘 적응했고, 참아야 할 때는 참았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생각보다 더 지독하게 얽히길 열망하는 치라,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끊임없이 남을 재단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움은 확실히 존재했다. 어떤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하는 것. 정상이라는 틀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안정된 직업을 바라며 숨차게 달려가는 순간이란.
코로나의 여파로 공채가 밀리거나 뜨지 않게 되면서 H의 취준 생활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국회에서 인턴을 하며 보내던 시간 동안 그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비록 처음 의도했던 길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당무를 보는 당직자가 되었다. 아쉽진 않았냐 묻는 R에게 H는 어깨를 으쓱인다. 분명 기자라는 직업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정의롭고 화려하다. 그러나 그 핵심은 정당에서 하는 일과도 유사하다.
“이곳에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R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보이는 찬란함이 있다. R은 늘 그 빛을 좇았다.
그는 취준이라는 커다란 고비를 넘겼으나 그것이 최종이 아님을 알았다. R이 H를 선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듯 H 역시 새로 자리 잡은 터에서 배워 나간다. 천운인지 무엇인지, 그가 속한 부서는 대체로 여성 직원이 많았다. 조금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H가 자신의 여자 선배들을 읊조린다. 그분들은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높은 위치로 올라갈수록 남성이 많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마초 문화를 뚫고 가야 한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노력하더라도 그 목소리가 반영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 취준생활을 거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총알처럼 우리 곁을 지나갔나. H는 그 시간들을 헤집으며 스스로를 공부하는 자라 평했다. 언제 지나온 지도 모를 시간을 뛰어넘어 그는 쫓고, 보고, 듣고, 배웠다. 침착해진 H가 R의 앞에 있다. 그는 더 이상 성급하게 굴지 않는다. 그리고 단정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가 기억나요. 저는 딱히 서울이랑 멀리 떨어진 지역 사람도 아니었는데, 서울의 휘황찬란함에 놀랐었거든요.”
“많이 달랐나요?”
“사소한 것들부터 큰 것까지요. 사람들이 되게 세련됐다고 느꼈어요. 가본 곳도 많고, 해외여행 다닌 사람도 많고. 저는 한 번도 해외로 나간 적이 없었거든요.”
배시시 웃는 얼굴에 R이 덩달아 미소 짓는다. 곧이어 내리 까는 시선이 그의 깊은 고민을 알리는 듯하다.
“저는 서울권 대학에서 공부할 여력이 있고, 여러 논의에 발을 담근 사람이 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고등학교를 같이 나왔는데 지역 대학교로 내려간 친구와 제 경로가 많이 달라졌어요. 오랜만에 이야기를 했는데 확실히 의제 빠르기에서 차이를 많이 느끼겠더라고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R이 가증스럽게 고개를 갸웃한다. 그도 결국 머릿속에 칸막이를 잔뜩 세워 놓고는 움찔거리는 가련한 자였다. 한 가지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이미 제 한계를 알고 있다는 점일까.
“페미니즘 강의라도 가면 대부분 2, 30대 여자들이잖아요. 서울, 경기권 사람들이고, 최소한 중산층 이상인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 풀을 보고 잘못하면 우물 안에 갇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중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외친다. 현실적 변화를 위해선 더 많은 동조가 필요한데, 그렇기에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교차성 페미니즘을 공부한 거잖아요, 하고 넌지시 건네는 말에 R이 열렬히 끄덕인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라는 관대함이 아니다. 마주하는 반경을 넓힌다. 무한한 검은 우주, 너의 긴 밤이 개벽하길 꿈꾸는.
“아무래도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일하는 곳이 일하는 곳인지라 그렇게 생각하는 거려나?”
정치판이란 개소리나 짖어 대며 인형놀이하는 곳이 아닌가, 생각하던 R이 가만하다. 입법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결과다. 이상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극적인 창구다. 결국 배제되지 않는 삶을 그리는 희망적 전언이다. 누군가는 부당하게도 저 앞을 달려가는데, 힘겹게 내달리며 치졸하게 뒤에 대고 돌을 던져 댈 수는 없다는 다짐이다.
“어떻게든 조금 더 밖에서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정치를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 목소리가 정치에 압박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H는 그렇게 당장의 의지를 말했다. 더욱 단단해진 그가 있다. R은 그가 끊임없이 변화를 향해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잘 살고, 싸우지 말고, 만약 그때 돈이 많다면 시민단체에 후원도 많이 해요. 앞으로의 당신에게, 그리고 또 R 자신에게. 너무나 그들다운 미래로의 전언이다. 두 사람이 큰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세상에 돈이 필요한 곳은 너무나 많은데, 그 귀한 부는 대체로 생뚱맞은 곳으로 흘러간다. 의외로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론 추상적 한 폭을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대게 그들은 가난하다. V는 정상의 바깥에 있는, 그 그늘을 너무나 잘 알았다. R이 보기에 V야말로 고민을 멈추지 않는 자였다. 사람들은 취업을 했으니 고민이 끝났을 거라 지레짐작한다. 이제 막 신입사원이 된 V은 왜 사람들이 이직을 생각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부스스 웃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R이 보기에 이직이든 무엇이든, V는 참으로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왔기에 별 생판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게 이직만은 아니지 않겠나. 묻기도 전에 V가 한숨을 내쉬고선 연애가 하고 싶다 읊조린다. 하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단다. 친구들이랑 공동체로 살 방법을 생각 중이라는 그를 보며 R이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R은 V가 막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에 그를 만났다.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그의 학생 시절을 이제야 처음 질문한다. 거침없이 털어놓는 과거에 R은 그가 과거를 짓씹고 또 짓씹어 뱉어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음을 짐작한다. 꽂히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 인간. 길었던 대학생활을 되짚어보길, 그 시작점엔 영화에 미쳐있던 V가 있다. 그는 본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정체성을 지난하게 고민할 적에 그는 디나이얼이 심했다.
친구와 영화, 정체성 고민, 그 모든 것들이 뒤엉킬 적에 들은 여성학 수업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일이다. V는 자기소개를 써보라는 교수의 요청에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커밍아웃했다. 인터넷이라는 대나무숲이 아닌 현실에 폭로하는 자신은 쾌감 그 자체였다.
“퀴어 퍼레이드에 처음 갔을 때…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만 조금 커밍아웃을 하긴 했지만 항상 외로웠거든요. 퀴퍼에 가니까 아닌 걸 알면서도 그곳의 모두가 나처럼 느껴졌어요. 동지의식이오.”
그날만큼은 소수자가 주류였다. 갖은 환멸을 뒤로하고 프라이드를 장착한다. 그는 절대 무릎 꿇지 않았다.
작은 오피스텔 방 안, 참으로 오랜만에 고삐 풀린 듯 놀아보자 모인 그들이 있었다. 물기 가득한 캔 표면을 붙잡은 손이 단단하다. 딱히 고상하고 황홀한 분위기는 아니어도, 순간의 쌉쌀함이 식도를 타고 내릴 때는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굳은 다짐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면, R이 대화를 시작할 계기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던 V는 한때 감독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으나, 프리랜서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직종이었다. 이후 그의 꿈은 소수자 의제를 다루는 PD가 되었다.
PD 준비를 하며 만난 스터디에서 그는 허구한 날 예민한 주제를 다룬다는 핀잔을 들었다. 내가 교육에 관심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예민하다고 하진 않았을 텐데, 분한 듯 내뱉는 말에 R이 시선을 내리 깐다. 부딪히는 캔이 무겁다.
잦은 비난은 그로 하여금 자기검열에 집착하게 했지만, 때때로 검열이 그의 창의성을 앗아갔을지라도 한편으로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기도 했다. 기획안 ‘나 혼자 안 산다.’ 4인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을 찾아보는 다큐멘터리가 그 집약체다. 정상성을 차근차근 해체해 나가는 시도.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도발적이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것과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의 절충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고 싶다는 갈망. 한 새벽에 타자를 치면서 얼마나 고민했던가. V는 우회라는 기술을 배웠다.
“R은 하늘색 좋아하죠? 여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종이컵에 하늘색이 덧입혀 있었다. 바닥 끄트머리에 ‘아름다운 우리말, 새벽 하늘색’ 따위의 말이 적혀 있다. R은 색에 관한 집착이 엄청 나서, 하찮은 종이 쪼가리를 부여잡고도 무절제한 충족감을 느꼈다. 아까우니 버리지 말아야지. 흐물거리는 종이컵에 지조 없이 부어지는 와인 줄기를 본다.
“이 종이컵은 너무 예뻐서 버리기 아깝겠어요.”
“그걸 노린 걸지도요. 환경 보호, 뭐 그런?”
그가 돌돌 말린 컵 입구를 손톱으로 뭉갠다.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할 것인가. 같은 문제인가? 실없는 생각을 해대니 필시 취기가 돌고 있는 것이렷다. 결국 종이컵이 이지러진다. 그와 동시에 V의 말이 툭, 떨어진다.
“아시죠? 저 좀 관종인 거. 관심을 받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중매체를 가야겠다.”
그의 잔이 연거푸 비워진다.
“그런데 대중매체를 말하려면 대중매체의 문법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거죠.”
약간 돌아가더라도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전략이었다.
그는 문화예술 지원 사업기관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취직 소식을 들었을 때 R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준비하던 직종이 아니라 놀랐다기보다는 V가 하는 일이 정말 그 다웠기 때문이다. 문화행정기획을 담당하는 그는 비록 창작자는 아닐지언정 뼛속까지 예술의 피가 흘렀다. 읽고, 듣고, 보고, 향유하는 모든 것을 즐긴다. 그는 흐려지는 하늘 아래 재잘거리는 순간마저도 동화처럼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이주민의 도시 서울. 그런 곳에서 V역시 이주민이다. 서울은 기회의 땅이지 고향이 아니었다. 김영하를 꿈꾸며 왔는데 외롭고, 취약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이다. 자신이 흘러온 땅이 아니라.
그가 쌓아온 고민의 궤적이 빛을 발한다.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몸도 마음도 붕 뜬 채 영글어가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우회’를 해야 하는 순간이다. 소수자만을 타깃으로 하는 사업은 수행 대상이 너무 적다. 기획은 넓게, 들어올 수 있는 아티스트의 폭을 넓힌다. 분명 그중 소수자도, 소수자 의제를 다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기회를 기획하는 것이 V의 역할이다.
안전만을 꾀하는 수많은 피드백 때문에 자기검열에 매몰되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V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전제로 움직인다. 누군가가 좌절하지 않길 바라며. 말없이 앉아 방황했던 길에서 마주했던 밤도, 전부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은 거라고. ‘나’란 벽을 넘어선 그가 있다. 고생 끝에 얻은 안정된 자리에도 V는 벽 너머를 본다. 내면적 갈증은 커지기만 한다. R은 조용히 수긍했다.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우리는, 결국 스스로의 변화도 꿈꾼다. 낙담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예전엔 이슈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저 개인의 페미니스트로서,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잃지 않고 오래 긍정적으로 유지하며 살아갈지 더 신경 쓰고 있어요.”
“내실을 다지는 시점이려나요.”
파스스 부서지는 웃음 사이 와인이 동났다. 입안에 남은 감칠맛이 꼭 그와 닮았다. 다디단 맛을 기억한다. 기억하기에 두렵지 않다.
술 때문인지 한층 언성이 높아진 그가 소리친다.
“생각해봐요! 그래도 정말 희망이 있긴 해요. 제가 언론사 준비를 했잖아요. 누군가는 정신승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주류 미디어에서 소수자 의제를 많이 다루고 있어요.”
“예전엔 다루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말이에요.”
“네. 그래도 언론이니까. 언론 고시를 준비하던 초반 1년과 후반 1년이 너무 달라요. 초반에는 미투 운동을 다룰 때도 선정성 위주의 기사가 많았다면, 이제는 다들 그게 2차가해라는 걸 알아요. 사소하더라도 변화가 많이 느껴지죠.”
파하하! 우적우적 씹어대는 과자가 고소하다. 우스운 일이다. 대학시절 벌어진 성추행 사건을 두고 2차 가해를 지적하는 대자보를 썼다가 어떤 수모를 당했나. 가해자에 대한 2차가해나 하지 말라고, 무고일 줄 누가 아느냐는 소리를 무더기로 들었던 V였다. 언론이 변하듯이, 새로움을 찾아가야 한다. 예민해야 한다. 빠르게 수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유연함을 잊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장기적으로 가능하다.
“예전에는 사건이 터지면 너무 화가 나고 좌절했어요.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무너질 것 같았죠. 그런데 지금은 일이 터져도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아요. 그럼에도 나는 내일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런 마인드예요”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과 함께 우리의 과실의 여문다. 한껏 영근 열매, 언젠가는 누군가의 입속에서 참 단맛이 될 그것.
매트리스에 누워 대화를 더듬는다. 있죠. 오랜만에 당신과 얘기할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허공에 바스러진 고백을 듣지 못한 건지, 실내는 고요하기만 하다. 서로의 바쁨을 이유로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에도 V는 R에게 가까운 자였다. 늘 그를, 길을 지나가다가도, 지하철을 타고 멍하니 풍경을 보다가도, 생각한다. 당신의 좌절과, 노력과, 웃음과, 우울.
우리의 순간이 겹친다. 각자의 경험이 각개의 색채로 덧 그려진다. 공통의 오버랩- R은 그렇게 V를 제 안에 그렸다. 여상한 매일을 걷는다. 고통은 현저한데 세계는 늘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듯하다. 사회가 은폐하는 구렁텅이를 들여다본다. 눈 가리고 아웅하던 개인이 손을 얼굴로부터 떨어뜨리며 보게 되는 시야가 있다. 그는 넓은 시야로 무엇을 받아들일지, 무엇을 해체할지, 자신의 형상은 어떠한지, 바라본다.
R은 무기력하던 제 삶을 회상한다.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지 시간은 덧없이 흐르는데 R은 혼자서 고꾸라진다. 삶의 진리란 것이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R은 자신의 불안이 형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R은 날마다 종생한다. R은 하루를 평생으로 길게 느낀 만큼 삶에 지쳐 있으며, 수더분한 머릿속 간간이 보이는 흰 머리카락이 자기주장에 뚜렷하다. 그럴듯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만을 매일 생각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세 사람의 엽서가 온다. 당신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으니, 만나자는 편지다.
에브리타임의 우스운 글을 보고 머리가 지끈해질 적엔 무형의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만약 내 동료가 나를 버리고 그저 편안한 삶을 좇는다면, 혹은 지금은 그렇게 윤리적인 듯 뻗대는 내가 그 신념을 져버린다면. 선택의 근거와 미래의 향방은 어디로 가는가.
3인의 페미니스트. 그들의 졸업, 그리고 전진. 그 개괄을 들여다보며 R은 새삼스럽게 이미 아는 이야기를 재확인할 뿐이다. 그는 속은 것이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나아갈 뿐이다. R은 그들을 보며 우스꽝스레 쫓는다. 또 나만 뒤처지지. 그렇게 실없는 투정을 부린다.
“페미니즘을 뺀 나에게도 뭔가 남긴 할 테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P는 그렇게 말했다. 이미 동질화한 삶- 일상이 된 페미니즘.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그는 썼다 하면 페미니즘 의제로 귀결되는 자신의 글감을 발견한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나. 그러나 이제 그는 조금 더 자유로운 글을 쓴다. 다만 그 안에 페미니즘이 그에게 선사한 통찰 영원히 녹아들어 있을 뿐이다.
“너무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을 잘 찾아서 하면 돼요.”
그렇게 저 자신에게도 말해주고 싶네요,라고 H가 넌지시 말한다. 그 말은 R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돼요.’라고 들렸다. 앞서간 자의 확언, 인정, 그리고 위로였다.
“타협은 굴복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R이 내심 걱정했던 것과 달리 V가 단호하게 말한 타협은 세상에 안주하는 길도, 갑자기 혐오의 급류에 몸을 맡기는 길도 아니었다. 조금 돌아갈 뿐이다. 장기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정신적 안정을 지키며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갈 뿐이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진다.
바로 그때, 툭 하니 골이 울린다. 고약한 냄새에 코를 쥐어 비틀고 종종걸음을 걸을 참이었나. 기어코 제 존재를 각인시키겠다 마음먹은 은행알이 R의 정수리를 강타한 것이다. 후각은 마비되었다. 저를 괴롭힌 열매 한 알을 쫓아 내리 까는 시선이 이글거린다. 이 분노가 뉴턴의 깨달음인가. 바랐던 사과는 어디 가고 고약한 심보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나도 뉴턴이다. R이 오늘의 유언을 남긴다. 분노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게으른 R은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또 축 늘어진다. 그래도 살아야지. 냄새나는 은행알 따위에 질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세상의 모순과 마주하고, 내 안의 모순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페미니즘 뭐 별 거 있나. 이 모든 과정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단단히 나아간다. 그가 중얼거린다.
그의 종생은 끝났으나, 종생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상의 종생기를 일부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