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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6호> 세상의 슬픈 딸들에게

편집위원 지긍

by 연세편집위원회


들어가기 전에,



해가 짧은 핀란드에서 이방인으로 4개월을 보냈다. 내 몸은 상당히 정직한 편이어서 부족한 일조량에 빠르게 반응했다. 낯선 언어, 회색빛의 날씨,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학업이 나를 둘러쌌다. 이미 해가 지고 캄캄하지만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해야 할 일들을 헤아리다가 내일이 오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지나 온 하루하루가 어떤 날은 기뻤으나 주로 무미건조하고 종종 우울하듯 앞으로 다가올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음’이었다. 애초에 삶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반복되는 굴레도 겪지 않아도 되지 않나.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에 빠진 우울이 매분 매초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순간 스쳐 지나갈 생각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찾아온 이상, 나는 다시 비슷한 감정에 허우적대거나 유사한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삶의 의미라니! 너무 거창한 말이라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답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왜 태어났니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주인공 메러디스가 아이를 구하려다 물에 빠진 후 혼수상태에 빠진다. 현실에서 동료들이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동안 메러디스는 마치 사후세계로 보이는 공간에서 깨어난다. 이미 죽은 이들과, 그녀가 키우던 개가 있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원래 있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한 인물의 끈질긴 설득 끝에 그녀는 자신이 물에 빠졌을 때 스스로 살기를 포기했음을 인정한다.


“I was swimming. I was fighting. And then I thought, just for a second… I thought “What’s the point” And I let go. I stopped fighting.” (“난 헤엄치고 있었어. 발버둥 치고 있었다고. 그러다 아주 잠깐 생각한 거야. ‘무슨 의미가 있지.”하고. 그래서 난 내버려 뒀어. 발버둥 치길 멈춘 거야.”)


사랑의 작대기가 얽히고설킨 것으로 유명한 <그레이 아나토미>의 시즌 3 에피소드 17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랑의 막대기보다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서사에 쉴 새 없이 이입을 하며 드라마를 보던 참이었다. 메러디스는 물속에 빠져 헤엄치며 ‘발버둥 쳤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삶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는 말을 한다. 그 말에 나는 내 삶 또한 발버둥 치는 일과 같다는 묘한 자기 연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자기 연민은 모순적이어서 나의 우울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고 느끼면서도 우울에 허덕이는 게 나 혼자가 아니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삶이 나에게만 버거운게 아니라는 뒤틀린 위로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이를 부정한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대신 설명해 줄 무언가를 찾는 일이 중요했다. 삶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한둘이겠냐마는, 그 마음을 철저하게 파고든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은 우울한 신자유주의 시대 속 현대인의 읊조림 같으나 그 역사는 꽤 길다.[1]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에밀 시오랑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 . 모든 것의 끝은 사라짐이고 세상 이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끝없이 번민하는 불행한 사람이 겪고 있는 괴로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나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삶이라는 흑점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략) (내 스물두 번째 생일인 1933년 4월 8일에 썼다. 그 나이에 죽음 문제 전문가라니 이상하다.)”


개인의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운동과 사조도 존재한다.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VHEMT·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은 지구를 위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에 동참하기를 촉구한다. 마블 영화에서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겨 인류 절반을 없애려는 시도와는 다르다. 새로운 탄생을 거부할 뿐이다. 내가 태어난 이상 자연을 파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로하면 추가적인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간단한 논리다.


한편에서는 삶의 의미를 부정하고 출생을 반대하는 입장을 ‘반출생주의’로 구체화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반출생주의와 관련된 기사에서 항상 등장하는 데이비드 베너타가 그렇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그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는 것보다 낫다는 명제를 논증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X축과 Y축을 그어 끊임없이 설명하려고 하는 내용은 이렇다. 먼저 ‘쾌락은 좋고 고통은 나쁘다.’라는 가정을 내린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있었던 쾌락과 고통이 없어진다. 처음 가정에 따르면 쾌락이 사라지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것을 없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부정한다. 누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쾌락을 박탈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쾌락을 가진 적이 없다면 태어나지 않아서 쾌락이 사라진 것은 나쁘지 않다. 이는 ‘좋지 않음’ 또는 ‘나쁘지 않음’에 가깝다. 반대로 고통은 다르다.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고통을 막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저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명제가 보편적 진리임을 규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형태나 질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든지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태어나지 않음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적 증명을 세세하게 논박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것이 내 목표도 아니다. 굳이 논거를 잔뜩 가져오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음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함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세세한 삶의 굴곡과 선택의 동기는 다르더라도 자신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삶이 태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하는가 싶으면서도 어느 순간 한 발짝 떨어져 고민을 하나 더 얹었다.



엄마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저는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삶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제 삶도 괜찮아요. 하지만 여기에 있고 싶진 않다는 거죠. 저기에 괜찮은 방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냥 그 방에 있고 싶진 않다는 것 같은 거예요." – BBC 인터뷰에서[2]


인도 뭄바이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라파엘 새뮤얼은 자신의 부모를 고소했다.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자신을 낳았다는 이유였다. 그는 페이스북 페이지도 만들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으며, 아이를 낳아서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이라는 가정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부모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진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근원은 어디인가. 나는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생 첫 기억은 다섯 살 무렵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거리가 있는 유치원을 다녔던 나는 아침마다 유치원 등원 차를 타야 했다. 아파트 단지 안쪽에 위치한 집에서 차가 오는 단지 입구까지 다섯 살의 보폭으로는 오 분 정도 걸렸다. 나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나의 씩씩함에 으쓱댔다. 엄마가 나를 아기 취급하지 않아서 기뻤다. 나는 혼자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혼자 밥을 할 수 있을 즈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계란과 스팸에 케찹을 살짝 뿌려 먹던 밥이 맛있었고 냉동실에 있는 용가리 튀김이 좋았다. 나는 항상 또래 중 키가 큰 편에 속했다.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은 엄마에게 어떻게 키웠냐는 정답이 있을까 싶은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은 몽쉘 먹고 컸다고 대답하면서 자식을 챙기지 않았던 날을 농담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스스로 돌봄을 저버렸다고 말했고 그에 대한 질문과 질책을 감당해야 했다.


다섯 살에도 씩씩하게 등원하던 나는 자꾸만 쌓여가는 타인의 말속에서 엄마가 나와 동생을 방임했다는 생각 한 줌을 품게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내가 선택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엄마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계속해서 커졌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인생 계획을 이야기할 때, 나는 일찍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낳으면서 하고 있던 일을 그만뒀다. 그 뒤로 공부도 하고 일도 했지만 엄마의 가장 큰 정체성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가 이룩한 안정적인 가정은 갖고 싶은 동시에 일도 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하나 둘 짚어 나가던 어느 날 나는 감을 깎다가 별별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감을 좋아하지만 스스로 깎을 수 없었기에 감자칼로 감을 깎으며 친구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감 잘 깎는 사람이 이상형이야.” 많은 생각을 거치고 나온 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 말이 복잡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인 차가 있다해도 과일은 깎을수록 숙련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연습해서 내 몫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과일은 집에 있는 사람이 내오는 일이었다. 열에 아홉도 아닌 열에 열 번은 엄마가 과일을 깎았다. 나는 깎인 감을 받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감을 깎아 내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어느 쪽도 유쾌한 마음은 되지 못한다.


엄마를 향한 마음은 평생을 들여다보아도 정리할 수 없을 테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상반된 태도 사이를 오가게 된다. 어느 날은 아직까지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엄마는 주기적으로 출근하는 직장에 다니진 않지만 분명 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사노동은 대부분 엄마 몫이다. 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을 기숙사에서 보내다 돌아온 내 입에서 ‘돕는다’라는 말을 지우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축축한 빨래를 하나 둘 널면서 종종 다짐한다. 나는 딱 내 몫의 가사만 챙기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다 번뜩 깨닫고야 만다. 나는 반대로 내 몫의 가사를 엄마에게 자꾸 넘겨왔다는 걸.



나는 엄마가 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영화 <블랙 스완> 속 주인공 니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야 주연을 맡게 된다. 딸이 주연을 맡기까지 엄마는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은근한 압력을 준다. 극 준비가 진행될수록 니나는 점점 정신적 공포에 사로잡히며 엄마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환시를 보기도 한다. 급기야 자신의 등에서 자라나는 검은 날개를 보고 기절한다. 공연 직전 깨어난 니나에게 엄마는 너는 극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며 주연을 포기라고 말한다. 그러자 니나는 “난 백조 여왕이야! 엄마는 평생 군무만 췄고!”라고 외치고 방을 뛰쳐나간다.


엄마의 꿈을 이어받아 꾸면서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모순을 푸는 일은 많은 이들의 숙제다. 니나는 백조 여왕이 되지 못한 엄마의 꿈을 받아 자신이 이어서 꾸고 있다. 엄마는 니나의 꿈이 이루어지는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니나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야 했다. 엄마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원하던 것을 원하지만, 엄마처럼 될 수 없다는 마음은 계속해서 충돌한다. 이건 비단 직업의 측면에만 머무는 이야기는 아닐 테다. 각자의 구체적인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맥락도 있다. 엄마가 가진 공통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 중에서 내가 이어서 꾸고 있는 건 무엇일까.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동생이 네 살배기가 되었을 때 엄마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애당초 경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없었다. 당시에 경력단절 없이 일을 하는 건 전문직과 공무원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아이 둘을 어느 정도 키워내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렇게 내가 멈춰지나’하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자의든 타의든 일터에서 한번 나오면 원래 궤도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엄마는 당시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책 대여 사업을 시작했다. 책과 가까이하면서 찾아온 학업의 기회는 새로운 삶의 궤도로 진입할 시작점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모두에게 오지는 않는다.


90년대 초반까지 30퍼센트를 웃돌던 대학 진학률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70퍼센트까지 솟았다. IMF 경제 위기와 함께 찾아온 신자유주의 물결이 여성을 사회로 진입시켰다는 분석은 쉽게 찾을 수 있다.[3] 엄마 세대가 보낸 사회와는 사뭇 다른 환경 속에서 나는 내 직업을 갖고 싶어졌다. 내가 대학을 가고 일을 하는 것은 어느 순간 당연해졌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여성 취업과 경력단절 문제를 마주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가시적인 성차별은 없었다고 믿어왔으나 내가 들어갈 사회를 바라보니 말문이 막혔다. 나는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인생 계획에서 결혼과 출산은 퇴장이었다. ‘나는 멈춰질 수 없었다.’


숫자로 축소된 현실이 가득한 통계자료 속에서 나는 엄마를 보았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결혼을 안 했으면, 애를 안 낳았으면’이라는 후회 섞인 말을 꺼냈다. 엄마는 결혼과 출산을 하면 집에 매여버릴 뿐이라는 외할머니의 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멈출 뻔했던 자신의 삶을 계속했다.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이 그 뒤를 따르더라도 말이다. 엄마는 나한테 결혼을 하라는 소리도 하지 말란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대학에서 여성주의 담론을 만났다. 그렇게 ‘만약’이 붙은 가정은 나에게도 이어졌다. 엄마가 결혼을 안 했으면, 혹은 나를 안 낳았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의 경력이 단절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마음 한 편에는 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의 시작점이라는 뼈아픈 죄책감이 뒤따랐다. 내 우울의 한 모습은 이 죄책감에서 시작해 나의 삶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었나 돌아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손 없는 처녀




서양의 신데렐라와 동양의 콩쥐 팥쥐를 비교하듯이 전 세계에는 비슷한 옛이야기가 많이 발견된다. 그중 하나인 ‘손 없는 처녀’에 대한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번 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아버지가 악마와 한 거래로 두 손이 잘린 처녀는 집을 나선다. 정원에서 만난 왕은 결혼을 담보로 은으로 된 손을 붙여준다. 왕이 전쟁에 나간 사이 여인은 악마의 계략에 의해 아이와 함께 내쫓긴다. 숲으로 들어간 여인은 7년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손을 되찾고 결국 왕과 재회한다.


이 옛이야기를 분석하는 주된 주제는 여성의 잃어버린 손, 잃어버린 주체성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존재에 의해 주체성을 잃고 (또는 빼앗기고) 집을 나선 여성이 다시 도착하는 곳은 새로운 가정이다. ‘왕’과 결혼해서 은으로 된 손을 얻었으니 주체성을 회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에서 왕이자 남편에게로 의존의 대상이 넘어갔을 뿐 여전히 여성은 스스로 손을 되찾지는 못한다. 여성은 숲에서 보낸 7년의 시간 끝에 손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딸의 손이 잘리는 동안 방관한 어머니도, 남편이 달아준 은으로 된 손에 안주하는 아내로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치환하면 된다. 이렇게 정리하면 가부장제에 반대하고 비혼과 비출산을 다짐하는 요즘의 이야기와 닮아 보인다. 다만 이 세상은 간단한 방법으로 이해하기엔 슬픔이 가득하다. 연일 청년 취업 문제와 20대 여성 우울증에 대한 기사가 올라오는 마당에 무거운 교훈을 얹을 수는 없다.


이 이야기가 나를 붙잡은 순간은 다름 아닌 손 없는 처녀가 낳은 아이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다. 전 세계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은 다른데도 아이의 이름은 비슷하다. 그 이름이 바로 ‘슬픔’이다. 이 짤막한 부분에 마음이 붙들린 건 아마 내가 엄마의 ‘슬픔’이지 않았나 하는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다. 여성이 손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다. 그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아이가 자신이 어머니의 ‘슬픔’이었음을 깨닫기는 더욱 쉬워졌다. 자유가 많이 허락될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슬픔에서 멈출 수는 없다. 이야기는 슬픔을 낳고 끝나지 않는다. 여성은 결국 자신의 손을 자력으로 되찾는다. 이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애초에 손이 잘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과, 그리고 손이 잘렸더라도 그 손을 되찾으러 나갈 두 다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그레이 아나토미>로 돌아온다. 메러디스는 주인공이니 당연히 살아난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레이 아나토미>가 의학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돌아오는 장면을 상당히 비과학적인 연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가라는 말에도 머뭇거리던 메러디스 앞에 메러디스의 엄마, 앨리스가 나타난다. 그러고는 메러디스를 껴안는다. 그 후에야 메러디스는 현실에서 눈을 뜬다. 메러디스는 엄마를 마주하고 나서야 다시 한번 삶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메러디스도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에 매몰되어 자신의 삶을 깎아내리기도 했을 테다. 그런 메러디스가 발버둥 치지 않기로 결심했던 마음을 꺾고 삶으로 돌아가는 계기는 엄마와 마주하는 일이었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 대번에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내 슬픔이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님을 안다. 같은 슬픔, 죄책감, 우울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다. 나와 결이 비슷한 슬픔을 공유하는 딸들에게 말을 전하고 싶다. 이 뿌리 깊은 슬픔을 자세히 들여다보자고 말이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서 나에게 전해지는 슬픔은 어쩌면 탄생의 근본적인 원죄 같기도 하다.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 출산과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는 육아는 슬픔의 흔적을 딸에게 남긴다. 그 흔적은 같은 여성이기에 더 깊다. 동시에 모든 슬픔이 딸의 몫이 되어 자신의 삶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혹은 반대로 그 슬픔을 외면하고자 엄마의 삶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누군가의 삶을 부정하는 일 그 이상이었으면 한다. 그러니 조금은 덜 슬픈 세상을 위해, 무엇보다 발버둥 치고 있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삶을 계속해 보자는 서글픈 낙관을 담아 보낸다.





[1]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쓴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2] “인도: 동의 없이 자신을 출산했다고 부모를 고소한 남자와 부모의 반응”, BBC, 2019.2.8.

[3] 김보명. (2018).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 경제와사회, 99-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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