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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27호> 나의 뮤지컬 일대기

편집위원 안즈

by 연세편집위원회


Prologue


나는 뮤지컬이 좋다. 뮤지컬은 종합예술의 총체다. 배우들의 풍부한 연기와 감미로운 노랫소리,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오케스트라의 향연, 수많은 스태프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무대와 의상까지 뮤지컬은 다양한 요소로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눈앞에서 공연이 직접 펼쳐진다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고, 노래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연극과 다르다. 나는 뮤지컬의 극적인 특성과 노래라는 매개체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감명 깊게 본 뮤지컬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며 여러분에게 뮤지컬의 진가를 알리고자 이 글을 쓴다.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겨울이었던가,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사람들이 말 대신 노래를 하지? 이런 걸 뮤지컬이라고 부르는구나. 신선하고 짜릿했다. 집에 가자마자 검색 창에 ‘레미제라블’, ‘뮤지컬’ 등을 한가득 검색했다. 뮤지컬에 빠져 여러 영상을 찾아보다가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영상을 보기에 이르렀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오페라의 유령’이 서울에서 내한공연 중이었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사촌 오빠의 도움을 받아 인생 첫 뮤지컬 관람을 했다.


뮤지컬을 보러 공연장에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서울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중소도시에 살던 고등학생에게 서울 나들이는 마냥 즐거웠다. 지하철을 타는 것마저 재미있었다. 그렇게 공연장에 도착해서 뮤지컬을 관람했다. 2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즐거웠다. 휙휙 바뀌는 무대 장치는 마치 내가 크리스틴이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하우스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고, 무대 가득 차오르는 희뿌연 연기는 공연장을 단숨에 팬텀이 사는 지하 호수로 만들었다. 노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완벽했다. 내가 노래를 잘했다면 뮤지컬 배우를 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공연이 끝났지만,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뮤지컬 덕후’가 되었다.



#1 뮤지컬의 고전, 세계 4대 뮤지컬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한다. 무명 무용수였던 크리스틴은 우연히 새로운 공연의 주인공으로 발탁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모두를 매료시키며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급부상한다. 이후 분장실에 홀로 있던 크리스틴은 흰 마스크로 얼굴을 숨긴 채 나타난 유령에게 이끌려 지하세계로 사라진다. 크리스틴의 실종으로 혼란에 빠진 오페라 하우스에는 유령의 경고장이 한 장 도착한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틴, 하지만 지하세계에서 유령의 정체를 알게 된 크리스틴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녀를 사랑하는 귀족 청년 라울은 사랑을 맹세하며 크리스틴을 유령에게서 구해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오페라의 유령’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뮤지컬에 빠지기 시작할 당시 나는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기에, 용돈을 모아 뮤지컬을 1년에 한 번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자율학습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넘버들을 들으며 소소하게 덕질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보면서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나를 뮤지컬의 세계로 이끈 ‘레미제라블’과 ‘오페라의 유령’은 세계 4대 뮤지컬에 포함된다. 나머지 두 작품은 ‘캣츠’와 ‘미스 사이공’으로, 모두 캐머런 매킨토시의 작품이다. 재밌는 사실은 ‘오페라의 유령’과 ‘캣츠’의 넘버들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고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은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가 작곡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 4대 뮤지컬을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뮤지컬의 세계 또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으므로 힘 있고 유명한 제작자와 작곡가가 협업하여 만든 작품이 소위 대작이라고 칭해지기 쉽다.


뮤지컬은 대체로 유명한 영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레미제라블’과 ‘오페라의 유령’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캣츠’는 시를, ‘미스 사이공’은 오페라 ‘나비부인’을 원작으로 한다. 뮤지컬은 서양에서 시작한 예술 장르이기에 세계 4대 뮤지컬은 모두 다분히 서양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동양이 배경인 ‘미스 사이공’의 경우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크리스와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현지 여성 킴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후에 크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다른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킴은 아이와 함께 남겨진다. 나는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공연 실황 영상을 통해 해당 작품을 접했다. 분명 뛰어난 노래와 다채로운 무대로 채워진 공연이었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우선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이를 뮤지컬에 사용한 방식이 걸렸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났던 역사적 맥락과 이를 대상화한 서구의 시각은 작품과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성매매를 중심으로 형성된 크리스와 킴의 관계를 단순히 ‘사랑’으로 미화하는 것 또한 문제였다. 제작자들 스스로 이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 없이 공연만 이어간다면, 작품 안팎에 존재하는 다양한 위계를 공고히 할 뿐이다.


다른 작품을 보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도 처음 볼 때는 좋았지만 보면 볼수록 40대인 팬텀이 18살 크리스틴을 사랑하고 그에게 집착하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레미제라블’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 혼자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영국에서 ‘레미제라블’을 봤다. 공연 내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추앙받고 유명한 소설로 쓰이며 세계적인 작품으로 공연되는 이유는 이것이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프랑스는 역설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고 침략하며 약소국의 자립을 막는 비민주적 행태를 보였다. ‘레미제라블’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이미지는 프랑스가 그들의 일면은 생각하지 않고 시민혁명에만 취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페라의 유령’처럼 나이 든 남성과 젊은 여성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나 ‘레미제라블’처럼 서구의 선진국이 자신의 역사를 신성시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회상과 위계 관계를 드러낸다. 대중은 이런 서사가 익숙하므로 의문을 가지거나 제기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 산업을 통한 자본의 축적이 목표인 제작자 또한 자연스럽게 공연을 재생산한다. ‘팔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예술 작품이고 예술은 사회적 맥락과 떨어질 수 없다. 뮤지컬을 보면서 현실 사회와 연결 지어 작품을 이해하고 비평하는 건 관객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관객 없이 공연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뮤지컬의 수용자인 관객이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충분히 작품 생태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은 비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는 제작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제작자들 또한 작품의 생산자로서 비판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실제로 시대적 흐름에 맞춰 뮤지컬 제작자들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관객들과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요즘은 기존의 백인 캐릭터 역할에 다양한 국가 출신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등 백인 중심적인 모습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있다. 유럽 여행 중 ‘레미제라블’을 관람했을 때 배우 중 동양인과 흑인이 등장하는 게 인상 깊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배역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불과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이는 뮤지컬의 소재가 되는 고전 작품들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좋은 예시이다. 이처럼 뮤지컬은 원작에 한계가 있더라도 작품을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충분히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최근 인기 있는 뮤지컬은 캐스팅뿐만 아니라 작품의 서사에서부터 ‘틀’을 깨는 작품들이 많다. 지금부터 그러한 작품들을 나의 뮤지컬 관람기와 함께 살펴보겠다.



#2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뮤지컬


뮤지컬 ‘레베카’는 레베카의 부재와 함께 시작한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 레베카를 떠나보내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막심 드 윈터, 그는 몬테카를로 여행 중 우연히 ‘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막심의 저택인 맨덜리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맨덜리는 아름다웠지만 음산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기도 했다. 마치 죽은 레베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맨덜리의 모든 것들은 여전히 레베카에게 깊게 물들어 있고 집사 댄버스 부인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며 ‘나’에게 경계심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막심과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나’는 점점 위축되어 가고 오해가 쌓여 막심과의 관계도 위태로워진다. ‘나’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할 때, 레베카의 보트와 시신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보고 싶은 뮤지컬을 마음껏 보는 게 목표였으나 아쉽게도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했다. 집을 떠나 고시원에 혼자 살며 재수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학원 개강 후 첫 주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결국, 주말에 자습하다가 뛰쳐나와 무작정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그때 본 뮤지컬이 바로 ‘레베카’다. ‘레베카’는 죽은 레베카의 존재가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와 댄버스 부인 등 여성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듯 뮤지컬 작품들도 그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세계 4대 뮤지컬을 포함한 기존의 뮤지컬과 비교했을 때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는 ‘레베카’를 본 후 고전이 아니어도 작품이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 하면 대표적으로 꼽히는 뮤지컬 작품이 있다. 바로 ‘오즈의 마법사’ 소설의 내용 이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위키드’이다. 주연이 여성 캐릭터로만 이루어진 작품을 본 건 ‘위키드’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여성은 조연이거나, 주연이어도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위키드’는 달랐다. 두 명의 여성 캐릭터가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고 극을 오롯이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며 잔잔한 희열을 느꼈다. 얼마나 생경했길래 그런 감정을 느끼나 싶었다. ‘위키드’ 속 엘파바와 글린다는 남성 캐릭터에게 의존하거나 부차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는,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최근 ‘제이미’, ‘킹키부츠’, ‘헤드윅’ 등 기존의 여성성, 남성성, 이성애 중심주의를 탈피한 작품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제이미’는 드랙퀸을, 킹키부츠는 하이힐을 신는 남성을, ‘헤드윅’은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퀴어 서사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주변부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뮤지컬은 예술작품으로서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사회에서 사회적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뮤지컬 또한 개개인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기 마련이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나 역시 끊임없는 정체화 과정을 거쳐왔고, 거치는 중이며,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각각의 인물에게서 나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곤 한다. 누군가 소외되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하다. 관객은 작품 속 인물에 본인을 대입하여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뮤지컬 시장 규모는 4,000억 원 규모로 추정되며 10년 전 140억 원 규모였던 것에 비해 무려 20배 이상 상승한 수치이다. 뮤지컬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본인이 배제되는 작품을 좋아할 대중은 없다. 당위적인 이유를 세세하게 늘어놓지 않더라도,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변화하지 못하는 작품은 경쟁 시장에서 점차 밀려나고 말 것이다.



#3 한국 뮤지컬 산업이 발전하려면


뮤지컬 ‘빨래’는 고향인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 온 27살 나영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영은 작가가 꿈이지만 퍽퍽한 서울살이에 잠시 꿈을 접고 반지하로 이사 왔다. 작가는 못 돼도 책은 좀 볼 것 같아 제일서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책 진열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빨래를 널러 올라간 옥상에서 우연히 이웃집 몽골 청년 솔롱고를 만나게 된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나라, 한국에 꿈을 찾아온 솔롱고는 나영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어색한 첫인사를 나눈다. 그 후, 두 사람은 바람에 날려 넘어간 빨래로 인해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어느 날 나영은 동료 언니를 부당하게 해고하려는 서점 사장 ‘빵’의 횡포에 맞서다 자신 역시 불이익을 당한다. 상심에 빠져 술에 취한 나영은 집으로 가는 길에 솔롱고를 만나게 되고 둘은 취객의 시비에 휘말린다. 그 일을 계기로 나영과 솔롱고는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


나는 ‘빨래’를 보며 나영에게 자신을 많이 비추어 보았다. 재수 기간의 고시원 생활부터 송도 기숙사 그리고 자취까지, 집을 떠나 혼자 살아가는 건 여러 면에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뮤지컬이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오픈런으로 진행되고 있는 뮤지컬 ‘빨래’였다. ‘빨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힘겨운 서울살이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연을 보면서 나와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서울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많이 공감되었다. 또한, 소극장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배우와 관객이 더욱 친밀하게 소통하는 느낌이 들어 몰입감이 높기도 했다.


한국의 뮤지컬 시장 규모는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더불어 세계 3대 장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크다. 뮤지컬의 본고장도 아닌 우리나라가 세계 3대 뮤지컬 시장에 속할 만큼 규모가 크다니! 그러나 라이선스 뮤지컬, 그중에서도 외국에서 수입된 대극장 뮤지컬들이 흥행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도 존재하기는 하나 외국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뮤지컬 ‘마타 하리’와 ‘웃는 남자’는 한국에서 만든 창작 뮤지컬이지만 ‘마타 하리’는 독일과 영국의 이중간첩이었던 마타 하리의 이야기를,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조선 시대 말과 일제강점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영웅’과 ‘명성황후’도 있다. 이들은 한국 역사를 바탕으로 한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 역시 구한말을 낭만화하거나 민족주의를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서구 중심적이라는 사실과 비교적 가격대가 높은 대극장 뮤지컬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뮤지컬의 한국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뮤지컬은 가격이 비싼 편이다.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뮤지컬을 생각할 때 가격이 비싸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뮤지컬이 원래부터 비쌌던 것은 아니다. 뮤지컬은 원래 오페라를 대체할 서민 문화로 출발하였으며, 실제로 2001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5만 원 정도면 VIP석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듬해 한 제작사가 ‘오페라의 유령’ VIP석 가격을 15만 원으로 올리면서 뮤지컬 제작사 간의 스타 배우 캐스팅을 위한 경쟁과 가격 상승이 가속했다. 물론 가격이 높은 뮤지컬은 대부분 대극장 뮤지컬이다. 소극장 뮤지컬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소극장 뮤지컬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별개로 대극장 뮤지컬의 가격이 관객에게 부담스럽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뮤지컬의 가격이 인하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영국의 웨스트엔드나 미국의 브로드웨이는 한국보다 공연 티켓의 최저가가 낮은 동시에 최고가 또한 높다. 관객들도 세계 각지에서 뮤지컬을 보러 온다. 한국의 뮤지컬 티켓 가격은 공연 선진국보다 절대 싸지 않지만 5,000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내수 시장의 특성상 한계가 있다. 2010년에 진행한 뮤지컬 실태 조사에서 제작비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6%였으나 최근 대극장 뮤지컬 중 인건비 비중이 50%에 이르는 작품들이 생길 정도로 제작비가 전체적으로 증가하였다. 수용할 수 있는 관객 수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제작비의 증가는 수익률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로 인해 거리 두기 좌석제를 시행함으로써 수익이 매우 감소하였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는 약 72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으나 수익 감소로 인해 손실 예상액이 최대 40억 원으로 예상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제작비가 정당하게 투입되고 있다면 그나마 문제가 덜하겠으나 단순히 인기몰이하기 위해 스타 캐스팅에 혈안이 되어있는 건 아닌지, 주연 배우가 아닌 앙상블 배우의 몫이 적절하게 측정되어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뮤지컬 장르 자체에 통계 자료가 부재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뮤지컬 시장의 비대한 규모에 비해 투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뮤지컬을 만드는 제작사와 무대에 서는 배우,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모두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면 정확한 통계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철저히 되짚어보고 차근차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4 뮤지컬도 결국 예술이기에


뮤지컬 ‘드라큘라’는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갈 무렵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트란실바니아의 영주 드라큘라는 이주를 위해 영국의 토지를 매입하고자 하고, 이 일을 위임받은 젊은 변호사 조나단과 그의 약혼녀 미나는 드라큘라의 초청으로 그의 불가사의한 성에 도착한다. 미나를 마주한 드라큘라는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미나는 드라큘라에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이끌림을 느낀다. 한편, 미나의 절친한 친구인 루시는 드라큘라를 만난 뒤로부터 알 수 없는 병으로 앓게 되고 저명한 학자인 반 헬싱 교수는 루시를 보자마자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해 온 뱀파이어의 존재를 직감하고 드라큘라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2020년 4월, 나는 공황장애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을 한 발짝만 나서도 호흡이 가빠 와서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랬던 내 삶에 한 줄기 빛같이 찾아온 게 바로 뮤지컬 ‘드라큘라’다. 이 작품은 나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2014년 초연 당시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2020년 삼연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들이 초연 이후 다시 한번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장장 6년을 기다렸기 때문에 아무리 몸 상태가 안 좋아도 꼭 보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갖추고 매주 잠실에 있는 샤롯데씨어터로 향했다.


나는 하나에 꽂히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닳고 닳을 때까지 그것을 반복하곤 한다. 뮤지컬에서도 마찬가지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총 8번을 보았다. 8주 동안 매주 한 번씩 봤는데 처음 공연을 보러 갈 때는 지하철 타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어했던 내가 8번의 공연을 본 후에는 사람과의 약속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호전되었다. 볼 때마다 새로웠고 작품 속 노랫말처럼 ‘드라큘라’는 그 자체로 내 삶의 이유였다. 가는 길, 보는 동안, 그리고 돌아오는 길 그 몇 시간 동안 많이 생각하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또한, 나를 붙잡고 있던 여러 마음을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드라큘라’의 서사가 여타 작품들과 비교하면 엄청 특별하지는 않다. 그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앞선 두 작품처럼 틀을 깨는 작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자칫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플롯이 무대, 의상, 노래 등 화려한 연출과 만나 매력적인 작품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뮤지컬을 보러 갈 때마다 집 밖에 나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작은 성취감이 느껴져 좋았다. 힘든 삶 속에서 누군가는 음악을, 누군가는 영화를, 누군가는 그림을, 또 누군가는 나처럼 뮤지컬을 통해 삶에 대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서사와 매력이 본인의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짜릿함을 맛보기 때문이리라. 뮤지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예술과 관계를 맺는 느낌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꼭 평점이 높지 않더라도 나에게 잘 맞는 작품을 찾아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연결되는 것, 개인적으로 그것이 예술의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Epilogue


내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유는 내 삶의 굴곡과 뮤지컬 관람이 언제나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관람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노래를 듣는 순간조차 일상을 한층 다채롭게 했다. 뮤지컬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글을 다 쓰고 돌이켜보니 뮤지컬의 문제점을 한껏 지적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뮤지컬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작품과 장르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비평에 충실했음을 밝힌다.


뮤지컬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 꼭 뮤지컬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예술을 마주하는 우리 자신이다. 나는 뮤지컬에 빠져 지낸 지난 몇 년 동안 좋아하는 ‘작품’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뮤지컬 산업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에 있는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를 만나길 바란다. 나에게 뮤지컬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참고문헌


“시스템 개선·거품 빼기…뮤지컬계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제2도약”, 한겨레, 2021.02.22.

“서민문화로 출발한 뮤지컬의 현주소는?”, 파이낸셜뉴스, 2020.10.08.

“뮤지컬 티켓 가격의 변화”, 더뮤지컬, 2019.11.28.

“뮤지컬 제작사들, 도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이데일리, 2021.01.04.

“뮤지컬시장 투명성 ‘0’… 생태계 재정비 팔 걷었죠”, 이데일리, 2018.09.11.





편집위원 안즈

chicchick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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