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김윤진
#나의_비거니즘_일기
어제 마트에 새로 들어온 식물성 요거트를 먹었다. 코코넛 향이 감도는 복숭아 맛 요거트였는데 정말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요거트를 먹은 후엔 비건 단백질 파우더에 두유를 섞어서 마셨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고 계획한 일을 마무리한 뒤 저녁으로는 알리오 올리오와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설거지 비누를 천연 수세미에 묻혀서 접시를 닦고 부엌을 정리한다. 오늘도 잘 먹고 잘살았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지금 비건 지향으로 살고 있다. 엄격한 채식을 하진 않기에 아직 나를 비건이라고 소개하기는 이르지만, 삶 전반에 걸쳐 ‘비거니즘’을 중요하게 여긴다. 비거니즘(veganism)은 동물을 생명이 아닌 공공재로 여기는 것을 반대하는 가치관[1]이자 모든 생활 영역에서 동물 착취를 거부하는 운동[2]이다. 따라서 채식 식단만을 실천하는 채식주의와 비거니즘은 구분된다. 예전에 나는 오히려 육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명절 때 모두가 둘러앉아 먹는 갈비찜도 좋아했고 불판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삼겹살도 좋아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친구와 맥주에 치킨을 먹었다. 하지만 옛날을 뒤로하고 난 이제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
지금은 일 년에 손에 꼽힐 정도로 고기를 먹는 횟수가 적지만 고등학생 때는 육식 위주의 급식을 삼시 세끼 먹었고 대학교 1학년 때도 비슷했다. 비거니즘에 대해 모르던 시절 나는 건강상의 이유 혹은 동물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이유로 채식을 실천한다고 생각했다. 대학 입학 후에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친구들을 처음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나에게 비거니즘에 대해 강력히 설파하지 않았고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비건 음식이 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비건 지향을 하는 사람 앞에서 육식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같이 비건 음식을 먹는 경험도 많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학년 때 나는 수업에서 『동물해방』을 읽고 나서 비거니즘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책 한 권 읽은 것 가지고 내가 동물권에 대해 통달할 리가 없었겠지만, 당시 나는 자신이 직접 쓴 『동물해방』에 기반하여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피터 싱어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동물해방』은 단순히 인간과 다른 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며 종차별주의는 인종차별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한다[3]. 책에는 단순히 동물을 불쌍히 여기고 연민하는 감정을 넘어서 인간이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착취하는 상황에 대한 침착한 폭로가 담겨있었다.
나는 비거니즘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비건으로 살아 보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양한 비건 옵션 식당이 존재하는 신촌캠퍼스에 비해 국제캠퍼스의 인프라는 비건에게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편의점에서 먹을 만한 비건 음식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심지어 채식 메뉴라고 소개된 학식마저 어묵국이 나왔다. 어묵에는 ‘생선’이 들어가기 때문에 비건 음식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매 끼니를 셀프 키친에서 직접 만들어 먹자니 엄두가 안 났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자리에서 혼자 밥을 굶거나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결국 나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비거니즘을 포기하고 말았다.
동물해방
어느 날 나는 정육점 앞을 지나면서 갈고리에 걸린 소의 모습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졌다. 죽어서도 인간에게 척추뼈가 훤히 드러난 채 전시되는 삶이라니. 길을 걷다가 치킨 전문점의 간판에 닭이 그려져 있는 것이 이상했다. 간판에 그려진 닭은 살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뜨거운 기름에 들어간 허여멀건 한 살덩이였다.
『동물해방』 책을 같이 읽었던 대학 교양 수업에서는 다음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당시 수업에서는 나치의 ‘언어규칙’을 통해 현실-말-사유[4]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언어규칙’을 만들어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 ‘언어규칙’이란 학살을 ‘최종 해결책’으로, 유대인 이송작업을 ‘재정착’으로 표현해 사용한 것을 말한다[5]. 나치는 이러한 ‘언어규칙’을 통해 암호화된 언어로 사람들의 현실 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행위 자체이며 인간과 현실을 연결해 준다[6]. 나치가 유대인에게 그랬듯 인간은 동물을 죄의식 없이 섭취하기 위해 ‘소의 시체’라는 말보다 ‘쇠고기’라는 단어를 쓴다. ‘언어규칙’의 상투어와 마찬가지로 ‘고기’라는 단어는 동물을 타자화하는 기제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유대인/동물에 대한 하향의 타자화는 타자를 최하위 계층으로 상정하여 무시, 배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7]. 닭은 자연수명이 20~30년이지만 대부분 닭은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우리 안에서 1년을 미처 살지 못하고 도축 당한다[8].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강요’ 당하는 닭이 과연 치킨집 간판에서 웃을 수 있을까? 인간은 언어를 통해 ‘닭의 삶’과 ‘닭고기의 제조과정’을 분리하며 닭을 타자화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 지금의 익숙한 삶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비거니즘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조금씩 비거니즘에 대해 알수록 내가 세상을 보는 인식이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나는 점점 좋아하는 음식을 쳐다보는 것이 괴로워졌다. 음식을 보고 군침을 흘리기보다는 음식이 실제로 살아있는 동물이었을 때가 어땠을지 더 상상이 갔다.
결국 나는 수포가 되었던 비거니즘 실천을 1년 만에 다시 도전했다. 동물권과 기후위기[9]에 관련해서 내가 비거니즘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나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빨대, 컵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동물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접했고 자연스럽게 비거니즘 실천의 일환으로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만족할 만큼 실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시작한 후 생겨난 문제점을 조금씩 헤쳐나가며 살고 있다. 이제부터 비거니즘과 제로웨이스트[10]를 이야기하며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조금씩 풀어보려 한다.
비건에 스며들기
성인이 되어 다시 가족과 함께 살기 시작하고 비거니즘 때문에 정말 많이 싸웠다. 대개 엄마와 싸웠던 문제는 비거니즘에서 비롯된 마찰이었다. 내가 먹지 않는 ‘고기’와 같은 식자재를 구매하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나와 맥시멀리스트 엄마의 삶은 상극이었다. 주된 싸움의 발단은 과다하게 장을 봐서 냉장고에서 상하는 식재료, 홈쇼핑이나 입소문으로 산 식품 분말이나 의료기기, 나의 철저한 분리수거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고 집안 분위기는 싸해지기 일쑤였다. 대개 내가 다툼을 피하고자 ‘고기’를 먹는 시늉을 하면 이후로도 자연스럽게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가족들 앞에서는 웬만하면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우리 집에서는 점점 채식 위주로 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도 싸울 때가 많지만 말을 전혀 섞지 않고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서로 불만을 즉각적으로 표출한다. 가족들도 오랫동안 굳어진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고 애쓰는 중이고, 나도 내 가치관을 전적으로 이해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그래도 노력의 결실이 조금씩 보이는 중이다. 가령 엄마가 그릇을 미리 가져가서 어묵이 들어가지 않는 떡볶이를 포장해오고 친척들이 더는 명절에 한우가 아니라 버섯, 김부각 같은 선물을 주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물론 자취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아직도 가족에게 불편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친척들은 내 가치관이 동물권과 환경 문제로 인한 나의 온전한 선택이 아니라,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를 위해 딸이 희생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물론 엄마의 건강을 위해 육식을 지양하는 것도 맞지만 친척들과 비거니즘을 이야기할 때마다 애매하게 요점이 어긋나기도 한다. 또한 아직 한국에서는 ‘고기가 보양식’이라는 문화가 팽배하기 때문에 친척에게 채식을 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래도 이만하면 양반이다. 집을 나설 때 타인이 가족만큼 가치관을 존중해 주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그나마 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서 당당히 ‘저는 비건 지향입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자주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지각색의 핑계로 조금이나마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예전에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는 아버지뻘인 분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백반집을 자주 갔는데 한 번은 ‘왜 제육볶음을 먹지 않니?’라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요.’라고 말씀드렸다. 이외에도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다.’, ‘한약을 먹는다.’, ‘속이 안 좋다.’ 등 다양한 변명으로 사회생활을 했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내가 비건 지향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지만, 친구 관계에서는 터놓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척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도 왕왕 있었으나 대부분의 친구는 내 의사를 존중해 줬다. 한 번은 친구가 ‘비건 지향인 앞에서 육식을 말하거나 먹는 상황’에 대해 먼저 운을 뗀 적이 있었다. 사실 비거니즘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비거니즘을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기 때문에 육식을 보고 들어야 하는 내 심정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 또한 불편하더라도 감정의 이유를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피로했기에 그냥 넘겨버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 별말 않던 친구가 먼저 내 불편함을 물어줬을 때 오랜만에 솔직할 수 있어서 후련했다.
나도 예민한 주제를 말해서 상대방에게 불편한 감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고 말한 후의 상황이 두렵다. 지금도 친구에게 먼저 비거니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고 내가 먼저 회피해버릴 때도 많다. 나는 SNS에서 친구들의 게시물을 몰래 차단할 때가 있다. 너무 적나라하게 육식을 ‘전시’한다는 생각이 드는 게시물은 ‘숨김’ 처리를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낙지를 산 채로 먹는 사진보다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논비건 음식 사진 있음’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비건을 위해 육식 사진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상황에서 쓰이는데 나는 그런 ‘선전포고’에서 오히려 시혜적인 폭력성을 느낀다.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은 육식을 전시하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만연한 육식주의[11]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것과 비건 친구가 사진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비건을 ‘배려’하기 위해 쓴 말은 자신들이 육식 사진을 전시하고픈 욕망을 합리화하는 도구밖에 안 된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비슷한 욕망에 시달릴 때가 있고 육식을 하거나 전시한 경험도 많았기에 그들 개개인을 탓하고 싶진 않다. 그저 ‘알아서 피하라’는 식의 무심한 배려가 어떤 사람에겐 전혀 진정성 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국에서 비거니즘을 하면 주눅들 때가 너무도 많다. 특히나 남들에게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진상 같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오늘은 치킨이 닭.’같이 남들이 무심히 던지는 말 한마디가 마음에 꽂힌다. 이따금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이 자주 덮쳐오지만 곧이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뒤이어 나오는 글도 지금을 살아가기 위한 나의 또 다른 생존 이야기이다.
껍데기는 가라
상상해보면 채소만으로 밥을 차려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간단히 평소 먹던 음식에서 고기만 제외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김치찌개에 돼지’고기’를 넣지 않고 토마토 파스타에는 새우를 안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김치에는 젓갈이, 파스타 소스에는 우유와 같은 동물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가공식품에 찔끔 들어가는 동물성 식품 때문에 비건은 마트에서 고를 수 있는 품목이 별로 없다. 나도 우유 대신 마셨던 두유에 동물 유래 비타민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비건 지향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즘에는 인터넷 쇼핑이 발달했으니 굳이 이런 접근성을 개의치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일 한 끼도 못 먹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먹을 만한 비건 음식이 극히 적다는 사실은 여전히 한국에서 채식 선택권이 고려되지 못한다는 점을 방증한다.
집 밖에서 비건을 실천하기가 이리도 힘드니, 이쯤 되면 주변 채식주의자 친구들이 요리를 잘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인 듯하다. 나도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이렇게 외식이나 배달 없이 집에서 음식을 만드니 일회용품을 쓰는 빈도가 낮았다. 또한 텀블러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쓰레기 배출량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대두된 재활용품 수거업체들의 쓰레기 수거 거부 사건, 선진국의 쓰레기 수출 문제[12],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급증한 일회용품 사용[13] 등을 접하며 문제의식을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를 해야 하는 날이 올 때면 쌓여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인간 한 명이 사는 데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나온다고? 대부분의 쓰레기는 종이,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포장재였다. 애호박이나 파프리카 등 채소를 조금씩 포장한 비닐 껍질과 과일, 두부를 담았던 플라스틱 상자, 고구마나 귤이 담겨있던 종이 상자였다. 나름 친환경적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심을 품었지만 결과물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습이었다.
집 근처에 초록마을이라는 유기농 상품을 주로 파는 가게가 있었으나 유기농 제품은 가격이 비싼 편이었기에 가기가 망설여졌다. 다행히 집 근처에 전통시장이 있어 포장되지 않은 손두부를 예상하고 부푼 마음으로 찾아갔지만, 두부는 이미 예쁘게 포장된 채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있었다. 빨간 고무 바구니에 담긴 채소는 장바구니를 들고 가서 비닐 없이 살 수 있었으나 과일은 색색깔의 스티로폼과 플라스틱에 쌓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현지 농산물과 유기농 식자재를 사는 것 중 어떤 것이 탄소 배출량이 더 적을지 고민이 들었다. 비닐 포장 없이 산다고 시장에서 과다한 양의 채소를 사서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비닐 매립 비용과 음식물 쓰레기 매립 비용을 비교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자료를 찾기 쉽지 않았다. 어디서 정보를 얻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정보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영어로 검색해서까지 정보를 얻고자 하는 투지가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제로웨이스트와 관련해 얻을 수 있는 정보 대부분이 아직 플라스틱 줄이기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다.
더불어 식재료가 아닌 생필품을 제로웨이스트로 구매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일단 나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제로웨이스트 가게를 자주 방문할 수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면 제로웨이스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택배를 시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면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쓰레기(택배 상자와 스티로폼)를 만드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나 같은 경우는 샴푸, 린스, 세제 등은 제로웨이스트 가게에서 액체류만 담아서 사용하고 튜브형 화장품은 종이로 된 상품을 구매하려 한다. 하지만 화장품 종류는 ‘플라스틱프리’ 제품이 워낙 적다 보니 피부에 맞지 않아도 대체할 제품이 없어서 불편하다.
여기서 또 의외의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월경 용품이다. 물론 월경컵이나 천 월경대를 사용하면 되지만 나는 월경컵을 사용하지 않고 천 제품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또한 나는 활동성과 통기성 때문에 월경대보다는 탐폰을 선호하지만, 어플리케이터 없이는 사용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종이 어플리케이터로 된 ‘나트라케어’ 탐폰을 쓴다. 그러나 종이 어플리케이터가 날카로워 삽입이 불편하고 미끄러운 손잡이로 인해 새 탐폰을 몇 개씩 버려야 했다. 유기농 친환경 제품이라 믿으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용하던 중 ‘나트라케어’에서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14].
나는 다시 월경 용품 표류기[15]를 떠났고 사탕수수로 만든 바이오플라스틱 탐폰을 발견했다. 하지만 바이오플라스틱이 종이보다 낫다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바이오플라스틱은 사탕수수, 옥수수와 같은 식물 자원을 원료로 한 바이오매스 성분이 플라스틱에 포함된 것일 뿐 생분해가 되지 않는다[16]. 기존 석유계 플라스틱 공정보다 이산화탄소를 절감시킬 수는 있지만 완전히 제로웨이스트라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나는 또다시 새로운 월경컵을 구매했다가 실패하고 어플리케이터 없는 디지털 탐폰을 쓰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환경부에서 인증한 친환경 플라스틱 제품 또한 말만 번지르르한 경우가 훨씬 많다. 친환경 인증 표지가 붙어있는 제품이더라도 허위광고나 플라스틱이 섞여 재활용이 더 어려운 소재인 경우가 허다하다[17]. 땅에 매립되면 미생물에 의해 100% 분해되는 생분해성 플라스틱 지퍼백이라도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분리수거 대상이 아니기에 제 본분대로 생분해되지 못하고 일반 쓰레기로 분류되어 소각되는 실정이다[18]. 소비자들은 친환경적인 제품을 선택하지만, 환경부의 친환경 인증 제도도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이는 기업들의 그린워싱[19]인 경우가 많다.
더불어 플라스틱의 대체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플라스틱 비닐은 종이봉투를 대신하여 산림파괴를 막기 위해 발명되었다. 물론 플라스틱 칫솔보다는 대나무 칫솔을 사용하는 등 분해가 용이하거나 탄소배출이 적은 소재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소재의 대체보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임으로써 배출되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는 행동이 필요하다[20].
결국 내 제로(0)웨이스트 생활은 0.9웨이스트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 나는 포장되지 않는 두부를 사기 위해 새벽녘에 시장을 가거나 발품을 팔아 포장 쓰레기 없는 친환경 장터를 방문하는 노력까지 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길 가다가 포장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비닐봉지 두 겹에 떡볶이를 사 올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채소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살림 방법을 배우고, 물건을 새로 살 일이 있으면 최대한 플라스틱이 적은 친환경 제품을 사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는 요원하나 조금씩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
아무튼, 비건
인간과 동물, 환경은 결코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동물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선택한 비거니즘은 기후위기의 악화를 막고자하는 나의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로 동물이 삶의 터전을 잃는다면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에 제로웨이스트도 시작했다. 현재의 편안함이 달콤하지만 미래의 존립이 불가하다는 두려움이 더 강했다. 이렇듯 비거니즘은 나에게 이타성이 아닌 윤리적인 이기성이다. 비거니즘이 너무 어려운 일 같아 감히 실천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실천하려는 태도에서 비거니즘은 시작된다.
혹자는 ‘비건 지향’이라는 표현이 남용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물론 비거니즘에 걸맞지 않은 행태에 대해 합리화하기 위해 ‘비건 지향’을 사용하면 안 된다. 비거니즘은 이론으로 국한된 영역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완성되는 가치관이다. ‘비건 지향’이란 논비건이 주류인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비건을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다. 따라서 ‘비건 지향’이라는 단어로 무장한 채 육식을 ‘어쩔 수 없이’ 섭취하는 상황에 대한 사유를 그만둔다면 이는 비건 지향이라고 할 수 없다.
먹고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태도를 ‘먹고사니즘[21]’이라고 한다. 이 신조어는 경제적 문제에 매몰되어 사회 담론 등을 외면하는 상황을 비판하는 말로 종종 쓰인다. 하지만 사실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정치적이다.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무엇보다 보편적이고 변화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비거니즘이 매일의 도전이며 삶에 스며든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먹고사니즘은 이토록 치열하고 동시에 불완전하다. 비거니즘은 한 인간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바라는 가치관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편한 마음을 갖고 비거니즘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한 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다수의 불완전한 비건이 낫다.’는 말처럼 미비한 실천이더라도 많은 사람의 움직임이 변화를 이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 끼는 비건 요리를 먹어보는 것이 어떨까?
[1] 정지운(2020). 「비거니즘 의생활에 대한 태도와 실천」. 국내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15쪽.
[3] 피터 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연암서가, 2012.
[4]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출처: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한길사, 1976, 22쪽.
[5] 김한민, 앞의 책, 149쪽.
[6] 한나 아렌트, 앞의 책, 20~21쪽.
[7] 김한민, 앞의 책, 10쪽.
[8] “공장에 사는 닭과 돼지, '그사세'는?”, 프레시안, 2017.02.11.
[9] 현재 기후위기는 재난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이러한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량의 15%는 가축을 기르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가축이 내뿜는 메탄가스뿐만 아니라 가축의 분뇨, 가축을 기르기 위한 산림 벌채 등을 포괄적으로 합하면 축산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50%에 육박한다는 보고가 존재한다. 출처: “기후변화를 막을 최선의 실천은 ’채식’”. 한겨레, 2019.11.28.
[10] ‘제로웨이스트’는 순수 우리말인 ‘쓰레기 없애기’로 대체해 표현할 수 있지만, ‘제로웨이스트’가 환경 운동의 일환으로서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대체하지 않았다.
[11] 육식주의(carnism)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출처: 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노순옥, 모멘토, 2011, 36쪽.
[12] “코리아는 쓰레기 수출 대국?”, 프레시안, 2019.06.25.
[13] ‘코로나19로 인해 음식배달 서비스 이용이 늘면서 2020년 상반기 플라스틱 폐기물은 2019년 대비 15.6%가 증가했다.’ 출처: “우리는 ‘재활용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시사IN, 2021.01.07.
[14] ‘나트라케어’의 수입판매자는 월경대가 자연 성분인 것처럼 광고하며, 소비자가 더 높은 금액에 구매하도록 유도하고 11년 동안 허위광고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 “유기농이라던 ‘나트라케어’, 11년간 화학접착제 썼다”, 한겨레, 2020.05.07.
[15] 월경용품에 대한 정보와 솔직한 경험담이 알고 싶다면 《연세지》 123호의 「나의 월경용품 표류기」를 추천한다.
[16] “지구를 보호하는 '바이오플라스틱'”, YTN사이언스, 2019.09.02.
[17] “친환경 제품 9개 검증했더니 진짜는 2개뿐”, 오마이뉴스, 2021.02.15.
[18] 위의 뉴스기사.
[19] 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인 것처럼 홍보하는 것. 출처: 그린워싱(21.03.03). 시사상식사전, 21.03.09.
[20] "비닐 대신 종이 포장? 그래도 친환경이 아닙니다", 오마이뉴스, 21.02.15.
[21] 먹고사니즘, 우리말샘, 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