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지긍 (ourindepen@gmail.com)
하루는 쌓아둔 일기장을 다시 읽어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빼곡히 쓴 일기에는 화가 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화가 많던 어린이는 여러 해가 지나 성인이 되고도 성을 내는 날이 잦았다. 한국의 수험 생활에서 벗어나 마주한 세상에는 화보다는 분노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약자에게 더 가혹한 규칙과 법 그리고 구조는 쉬이 변하지 않았다. 여성을 향한 갖은 폭력은 일상에서도 세상에서도 계속되었다. 분노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을 붙들고 지난한 설전을 벌였다. 어떤 날은 기사 댓글을 훑으며 비공감 버튼을 마구 누르기도 했다. 나는 내 활동 반경 안에서 무언가 바꾸어 보려 노력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분노하면서 쏟는 에너지에 비해 바뀌는 것은 없고 오히려 내 힘만 빠진다고 느꼈다. 그렇게 점점 줄어드는 분노의 자리는 냉소가 차지했다. 연예인이 저지른 학교 폭력으로 시끄러울 때가 그랬다. 기사가 쏟아지고 주변에서 이 소식 들었냐며 운을 띄우기도 했다. 그다지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아 잘 모른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속으로는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의 경력이 끝나서 본때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학교 폭력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지 않냐는 질문을 삼켰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냉소를 넘어 무기력한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화를 내어야 마땅한 일을 마주하고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 멀리 거리를 두고 있었다.
분노를 대체할 감정으로 냉소와 무력감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분노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했다. 분노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내 감정을 오롯하게 꺼낼 수 있으리란 심산이었다. 그 끝에 ‘제대로’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작은 소망도 함께 끼운 채 고민의 길로 접어들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고민을 시작할 때 먼저 고민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마사 C.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에서 논의를 빌려왔다.[1] 누스바움은 다양한 감정을 법과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온 철학자이다. 그녀는 분노의 감정을 살피기 위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분노의 정의를 살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감정을 꽤나 길게 설명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이 부당하게 무시당했다고 상상한다. 2. 이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상상한다. 3. 상상에서 비롯된 고통과 욕망이 찾아온다. 이때 고통을 수반한 욕망을 분노로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분노가 발생하는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가까움’은 각자가 판단하는 영역이다. 가까운 사람은 가족, 친구만 의미하지 않는다. 각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마존 밀림도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제 자신의 관심 범위 안에 들어온 대상에게 ‘부당한’ 일이 벌어진다. 다음 키워드는 복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당한 일에 대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을 분노의 정의에 포함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부당한 행위에 대해 분노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게 복수를 행하겠다고 소망한다. 분노는 곧 부당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걸맞은 대가를 주겠다는 열망을 의미한다. 이 열망을 정당한 것으로 그리기 위해 두 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첫 번째는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 이 잘못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부당한 행위로 낮아진 지위를 복구할 수 없다면 가해자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부당한 행위로 인해 가해자와 자신 사이에 지위의 격차가 생겼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두 가지 해결 방안은 누스바움이 분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누스바움은 이미 벌어진 피해 상황은 완벽히 복구될 수 없기에 인과응보의 논리는 ‘마법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애당초 가해자가 합당한 벌을 받는다고 해서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진 못한다. 만약 과거에 발생한 피해가 아니라 상대적인 지위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가해자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피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자신의 지위를 먼저 생각하며 상대적 지위를 가늠하는 것이 자기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 결과 부당행위나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지위를 낮추는 데만 집중하게 되고,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지위를 위협하는 규범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비판을 정리하면, 분노는 비합리적인 복수를 꿈꾸거나(마법적 사고) 자신을 중심으로 복수를 소망하게 될(자기애적 태도) 위험이 있다. 지난해 12월 조두순이 출소하고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서 분노의 부정적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조두순이 출소하는 날 교도소 앞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며 한 유튜버는 조두순이 탄 차량 위에서 발을 굴렀다. 한동안 조두순 자택 근처에는 일반인부터 기자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행동은 조두순의 출소를 그저 이슈 거리로 소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2] 그럼에도 조두순을 향한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두순이 출소 후 처음 외출을 하거나, 기초생활 보장수급자 선정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과한 관심과 비난은 조두순에 대한 ‘국민적 분노’라는 수사로 정당화되었다. 국민적 분노는 조두순이 적절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복수의 열망과 닿아 있다. 누스바움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두순은 벌을 받아 마땅해. 외출도 못 하고 지내면서 고통을 좀 겪어 봐야지.”라는 반응을 상상할 수 있다. 인과응보 논리에 따라 조두순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혹은 “뻔뻔하기도 하지. 어떻게 복지 수당을 받을 생각을 해? 이건 기만이야. 조두순이 돈을 타가게 하면 안 돼.”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자신을 가해자와 구별 지으며 자신을 ‘선’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큰 거리낌 없이 조두순을 비난할 수 있다. 단순히 조두순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온갖 강력 범죄 앞에서 비슷한 양상을 목도한다. 가해자를 향한 분노는 마치 힘이 센 것처럼 보인다.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그들을 모욕하며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며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을 거둘 수 없다. 여전히 세상에는 성범죄가 만연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야 하는 상황은 그대로다. 분노가 ‘부당한 일’에 대한 감정이라고 한다면, 부당한 일을 해결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요원해 보인다. 여전히 세상은 그가 몇 번을 외출했으며, 그를 감시하기 위해 2억 원을 투입했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3]
이쯤에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되짚어 본다. 나는 또다시 분노를 그저 냉소적인 마음으로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스바움 선생님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분노를 철저하게 비판한 뒤 무엇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가. 누스바움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4] 바로 이행-분노(Transition-Anger)다. 이행-분노는 벌어진 사건이나 가해자를 향한 복수보다 부당행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누스바움은 분노와 다르게 이행분노는 합리적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으로 인정한다.
칠레 전직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이행-분노의 행보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1973년 칠레 군사 쿠데타 이후 모진 고문과 협박에 시달린다. 아버지가 사망하고도 비밀경찰은 그녀의 가족에게 손을 뻗쳐왔다. 자신과 어머니에게도 고문을 서슴지 않는 군사정권 앞에서 그녀의 가족은 독일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칠레로 돌아와 군부 독재 정권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나아가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이 되었고, 국가폭력 진상규명과 배상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부당한 상황에 대한 분노를 변화를 위한 원동력으로 삼았다. [5]
부당한 상황에 복수로 이를 갈기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 이제 나도 이행-분노를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유일한 문제는 이행-분노를 실천하는 일이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킬 힘이 없는 사람에겐 이행-분노의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닌지 심술궂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부당한 일을 견디고 있는 사람이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상황도 모순처럼 보인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 밀드레드는 딸을 강간치사로 잃었다. 끝없는 분노에 휩싸인 그녀와 달리 경찰의 태도는 미적지근하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밀드레드는 도시 외곽에 있는 전광판에 경찰서장을 모욕하는 문구를 실어 해결되지 않는 사건에 분노를 표출한다. 경찰서장은 밀드레드를 찾아가 사과를 하기도 하고 과거 사건을 다시 되짚어 보기도 하지만, 사건은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경찰서장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밀드레드와 척을 지고 있던 경위 딕슨은 경찰 서장이 사망하기 전 남긴 편지를 읽고 재수사를 결심한다. 그는 술집에서 해당 사건과 비슷한 내용으로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남성을 발견하고 일부러 싸움을 걸어 DNA를 채취한다. 하지만 그 남성은 밀드레드가 찾던 범인은 아니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신임 경찰서장은 그 남자가 다른 강간치사 범죄의 가해자임을 넌지시 알리고 딕슨은 이 소식을 밀드레드에게 전한다. 그 후 둘은 함께 총을 챙겨 집을 나선다.
<쓰리 빌보드>를 추동하는 중심 감정은 분노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해결되지 않는 사건에 대한 분노이며 가해자에게 응당한 벌을 주겠다는 분노이기도 하다. 이행-분노보다는 복수의 열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는 다른 가해자를 죽이면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딕슨은 그를 죽일 것이냐고 묻지만 밀드레드는 생각해본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마지막 장면에 이행-분노의 씨앗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분노에 휩싸여 이미 총을 챙겨 움직이고 있지만,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순간 단순한 복수에서 머무르지 않으리란 기대를 할 수 있다.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는 건 자신의 분노를 잠시 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딸을 납치한 이들을 찾아서 죽이겠다고 말하는 <테이큰> 속 아버지의 태도와 결이 다르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보면서 이 모든 격동의 시작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단순히 딸을 잃은 슬픔만은 아니다. 그녀의 분노는 딸에게 부당한 일이 벌어졌으며, 부당한 일을 저지른 가해자가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은 현실에서 시작한다. 만약 밀드레드가 과거에 끝까지 매달린다면 범인을 찾는 데만 몰두하거나 처벌을 받지 않은 이들을 대신 처벌할 수도 있다. 사적 복수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복수가 완벽한 결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조심스레 예측할 수 있다. 밀드레드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딸에게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그녀 자신과 남은 사람들만이 고통받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으며 끝맺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은 스스로 분노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도록 심호흡을 고르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분노의 시작은 딸의 부당한 죽음이었으며, 어떻게 해서도 딸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자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했을 때 밀드레드에겐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 똑같이 범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더라도 단순한 복수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새로운 의미는 복수보다는 미래의 변화에 방점이 찍힌다. 같은 일을 실천하더라도 그 목적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미래의 변화가 된다. 나태한 경찰을 꾸짖고, 법망을 빠져나가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단순히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당한 범죄를 막기 위한 일이 된다. 그렇게 딸의 죽음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범인을 잡지 못해 억울한 사람이 사라지도록 말이다.
누스바움의 말대로 이행-분노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반응이며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행-분노를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이상이자 분노의 완벽한 대안으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생각의 시작은 분노하는 본인인 밀드레드에게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범인이 죽어 마땅하다는 분노가 옳지 못하다고 옆에서 훈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내 손에는 누스바움의 두 가지 개념이 있었다. 하나는 복수의 열망을 담은 분노다. 다른 하나는 이상적 결말을 꿈꾸는 이행-분노다. 이제는 둘 다 내려놓을 차례다.
누스바움의 저작을 통해 분노의 개념을 분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스바움이 분노에 내리는 비판적 평가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분명 그녀의 비판대로 복수만을 외치는 분노는 세상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를 동일 선상에서 비판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부당하다는 판단에 대한 문제다. 분노는 무언가 부당하다는 판단을 기반으로 발생한다고 정의 내린 바 있다. 이때 ‘부당하다’는 판단조차 인정되지 않는 사회라면 개인의 분노는 쉬이 부정된다. 사회의 통념으로는 부당하지 않기에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당하다는 평가는 계속해서 변한다. 누군가는 이것 또한 부당한 일이라며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 누군가가 부당한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 논리를 펼친다고 생각해 보자. 부당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적절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그 행위의 부당함을 인정받는 일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그가 원하는 복수는 과거에만 머문다고 하기 어렵다. 과거 피해 사실을 복구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부당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분노가 ‘비합리적’ 복수를 요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합리성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힘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지금도 합리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소수의 권력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분노에 합리성을 요구하기 이전에 무엇이 부당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있음은 쉽게 지워진다.
지위에 초점을 맞추어 분노하는 일을 자기애적 태도로 환원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어떤 분노는 부당한 행위가 피해자에게 발생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낮아졌다고 보고, 보복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누스바움은 부당한 행위와 자신의 지위를 연결하는 일을 지나친 자기애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부당 행위와 자신을 연결하는 일을 피할 수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단지 집단적 특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벌어지는 혐오 범죄가 그렇다.
본다.
자신이 혐오 범죄 피해자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혐오 범죄가 발생했을 때 본인의 지위 또한 손상되었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애초에 혐오 범죄는 집단 전체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기도 하다. 누스바움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가해자의 지위를 낮추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인간 존엄성이 평등하게 존중되는 것’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6] 그러나 분노의 목소리를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수사로 봐야 하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오히려 혐오 범죄는 한 사람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리는 외마디 비명에 가깝지 않을까.
<혐오사회>는 분노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독일에서 벌어진 난민을 향한 혐오 범죄와 미국 경찰이 흑인을 과잉 진압한 사건을 돌아보며 혐오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과잉 진압이 벌어지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보며 한 문장에 집중한다. 과잉 진압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피해자는 “이건 오늘부로 끝나야 해”라고 외친다. 그의 말은 이행-분노와 흡사해 보인다. 자신이 부당한 행위를 당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이내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미래 지향적인 언어로 전환한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하다. 그는 끝내 사망했으며 미국에서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고 있다.
엠케는 이 말에서 다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파르헤지아(Parrhesia)’라는 개념을 가지고 온다. 본래 파르헤지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기의 자유를 의미했다. 푸코는 이를 힘을 지닌 자들의 의견이나 입장을 비판하는 진실을 말하는 행위로 변용한다. [7] 이때,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힘을 지닌 자만을 향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8] 엠케가 볼 때 피해자가 남긴 “이건 오늘부로 끝내야 해”라는 말은 권력을 향해 하는 말이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며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말이다. 이 일은 끝나야만 하는 잘못된 일이라는 진실을 외친다.
지난 3월 16일, 애틀랜타 마사지 숍에서 여섯 명의 아시아 여성을 포함해 여덟 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은 범인이 ‘성 중독(sex addiction)’[9]에 시달려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한다. 발표를 향한 비판은 거셌다. 해당 발언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을뿐 아니라 아시아 여성을 특정 지어 발생한 혐오 범죄의 양상을 부인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캐나다인 산드라 오는 스피커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분노했다.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외쳤고 여태까지 사람들이 아시아인의 목소리를 듣질 않았다고 말했다. [10] 그녀의 분노에서 파르헤지아를 발견한다. 아시아인을 향한 뿌리 깊은 혐오와 폭력이 그저 ‘성중독’으로 가려지지 않도록 진실을 꺼내온다. 우발적인 총격 사건 중 하나로 끝나거나, 가해자 개인을 문제 삼고 비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도록 인종과 성별을 경계로 존재하는 권력의 차이를 짚어낸다. 그리하여 애틀랜타 총격 사건은 혐오 범죄이며 미국에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가 도사리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녀의 분노 끝에는 아시아인이라서 자랑스럽다(“I am proud to be Asian”)는 구호가 이어진다. 여전히 혐오가 도사리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더욱 필요한 한 마디다. 자리에 모여 혐오 범죄에 분노를 쏟아내던 이들은 함께 구호를 외친다. 아시아인에게 드리워진 혐오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부당한 폭력을 당해야 할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여야 함을 말한다. 산드라 오의 외침은 오랜 기간 묵살된 분노의 목소리이자 스스로와 함께 하는 이들과 진실을 나누는 일이었다.
산드라 오는 한 인터뷰에서 “Change is slow”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북태평양에 거주하는 아시아인 예술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산드라 오가 변화가 느리다고 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커리어를 시작한 그녀에게 분노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리라. 그녀는 과거와 비교한다면 바뀐 것도 많지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 역시 많다고 말한다. 처음 이 인터뷰를 보았을 때 내가 이 한 마디에서 읽은 것은 초연함이었다. 오랜 기간 보아왔기에 더는 분노하지 않고도 잘못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가 바란 것도 그런 태도였다. 분노하지 않고 우아하게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산드라 오는 분노하지 않아서 초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계속해서 부당한 일에 분노하면서 끊임없이 성패를 겪고 있었다. 단발적인 분노로 바뀔 세상이 아니라는 깨달음 앞에 그녀는 항상 분노의 목소리를 높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한순간에 무얼 바꾸지도 못할지라도 분노의 목소리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당함의 범주를 고쳐나가는 일이기도, 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거부하는 일이기도, 그리고 스스로에게 무엇이 진실인지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발 나아가 어떤 변화를 목표로 애써 움직일 수도 있다. 어떤 방향으로 분노를 하는가에 관계없이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분노의 시작은 부당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부당한가, 부당함을 해소할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감정 이후에 따라올 작업이다. 단발적인 분노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분노 대신에 선택한 무력감과 냉소는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부당한 소식을 피하기 위한 우산이었다. 우산을 던지고 뛰어들어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단박에 되다면 글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이 글은 함께 분노하자고 외치는 힘있는 목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침대 구석에 몸을 뉘여 한숨을 푹 내쉬며 화를 삭히는 동시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다독이는 중얼거림에 가깝다. 더는 지나친 의심 혹은 끝없는 합리화로 기어이 냉소와 무기력에 접어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작은 다짐에서 시작했으나 언젠가 분노를 통해 세상과 스스로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나는 모든 의심을 거두고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말을 남길 수 있겠다.
[1] 마사 C.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뿌리와 이파리, 2018년, 47-89쪽.
[2] “자장면 시키고 후드티도 만들었다…분노로만 소비한 조두순”, <중앙일보>, 2020년 12월 14일.
“ 조두순 출소날 BJ 몰려든 안산… 애꿎은 주민들 ‘홍역’”, <세계일보>, 2020년 12월 14일.
[3] “"조두순 출소 후 6개월간 2번 외출했다"”, <매일경제>, 2021년 5월 25일.
“출소 후 안산 자택서 살겠다던 조두순…감시 투입된 혈세만 '2억원'”, <아시아경제>, 2021년 5월 20일.
[4] 마사 C.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뿌리와 이파리, 2018년, 90-100쪽.
[5]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 민음사, 2021, 73-82쪽.
[6] 마사 C.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뿌리와 이파리, 2018년, 76-77쪽.
[7]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다산지식하우스, 2017년, 238쪽.
[8] 위의 책, 245-6쪽.
[9] “Atlanta Spa Shootings Were Hate Crimes, Prosecutor Says”, <The New York Times>, 2021년 3월 24일.
[10] “Sandra Oh gives passionate speech at Stop Asian Hate rally”, <BBC>, 2021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