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찌부찌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양의 텍스트를 접하나요?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 같이 떠올려봅시다. ‘텍스트’라는 말에서 우리는 흔히 책(단행본)이나 뉴스, 논문, 보고서 등을 생각하곤 하는데요. 사전에서 정의를 찾아보면 텍스트는 “일관되게 엮어진 기호의 복합체”이며, 그 의미를 좁히더라도 ‘언어라는 기호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1] 따라서 앞에 제시된 것들과 더불어 수시로 확인하는 메시지, SNS 피드에 오른 게시물들 또한 텍스트에 속합니다. 이를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살면서 상당히 많은 텍스트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우리의 생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모두 어떠한 맥락이나 목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긴 줄글이 아닌 문자나 메신저에 적는 ‘알겠어’, ‘ㅇ’ 따위의 짧은 말조차도 ‘누군가에게 긍정의 뜻을 표한다’는 의도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의 답을 끌어낼 질문이나 진술을 했다’는 맥락이 포함되어 있듯이 말이죠.
한편, 우리가 흔히 접하고 사용하는 표현 중에는 ‘중립적인 글쓰기’라는 말이 존재합니다. 말 그대로 글을 쓸 때에 중립을 지키는 일을 뜻하는 이 개념은 글이 중립적일 수 있다는 우리의 확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중립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한 대상이 중립적이라고 쉽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중립은 주로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떤 말이나 글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진술이 그 글의 전문성이나 신뢰도를 의심하게끔 하는 현상 또한, 이 단순한 믿음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글을 쓸 때에 ‘중립을 지키는’ 태도를 많이 요구하곤 합니다. 특히 책이나 뉴스 기사, 교과서나 사전과 같이 공적인 글은 중립성 여부를 근거로 제재 받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곧 많은 사람들이 접할 가능성이 높은 글 또는 글쓴이의 치우쳐진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기인하는데요.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교사가 수업 중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일도 그 맥을 나란히 합니다.[2]
“많은 사람들에게 공익의 목적으로 제공되는 글이 어느 한 집단의 의견에 치우쳐져 있으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익을 취하기 위해, 기존의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글을 대중에 퍼뜨렸다면 그 일은 윤리적으로 비판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런 글을 두고 ‘중립적이지 않은’ 텍스트라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중립적이지 못한 텍스트가 존재함으로써 자연히 ‘그 어느 쪽의 의사도 개입되지 않은, 무조건 객관적인 텍스트’의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되고, 이를 곧 ‘중립적인 글’이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글에서 이 ‘중립적인 글’이 일종의 지향점이 되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글을 쓸 때에 약간의 치우침마저도 경계하게 됩니다.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글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나아가 윤리적으로 비판받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중립적이다’ 불리는 글만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에 사로잡혀서 말이죠.
이쯤 되면 사람들은 언제 제기될지 모를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추는 글&을 쓴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만 같습니다. 글은 말보다 한 번 세상에 나왔을 때에 유효기간이 길고 또 확실한 기록입니다. SNS에 올린 짤막한 글마저도 어떠한 의도를 덧씌워 글쓴이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마당에,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활동이 결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들이 한참 전에 쓴 칼럼과 같은 글이 뒤늦게 발견되어 그 사람의 자질을 규정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어딘가 ‘정치색을 띤다’고 여겨지는 활동이 당장 취업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선뜻 펜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언젠가 직업을 구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에게는 글로써, 기록으로써 남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지요. 위와 같이 정확히 무엇이 될지 모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가 꼭 아니더라도, 중립적인 텍스트를 고수해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해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글쓰기를 막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글을 쓸 때에 정말 흔히 말하는 ‘중립’을 지키는 것만이 옳은 일일까요? 중립성을 근거로 글쓰기 활동 자체를 꺼리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또는 나 자신이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에게 바라는 &중립적인 글&이란 대체 무얼까요. 누군가의 의도가 완전히 담기지 않은 글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어쩐지 글에서의 중립이라는 것이 꼭 있을 것만 같지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글의 ‘완전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어느 분야에서든 중립이란 명확한 한 지점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볼게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물의 온도를 ‘적당하게’ 맞추거나 높은 곳에서 ‘적당히’ 균형을 잡을 때 우리는 정확히 어떤 지점이 적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어떤 상태가 적당하다 말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기울어진 경사면에서 균형을 맞추어 선 모습이, 평지에서는 한 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완전한 ‘중립’은 사실상 인간인 우리가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대상이 있고 그에 따른 각자의 의견은 당연히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의견은 늘 맞는 지점과 틀린 지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요. 이로 인해 누군가 하나의 의견을 내어놓는다면, 즉 하나의 스탠스를 취한다면 그로 인한 불이익이 불가피하게 따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어떤 행동이 정치성을 띠는 것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지곤 합니다. 나아가 (누군가의 이익을 어떻게든 대변하고 있을) 어떤 의견에 잠시나마 동조하는 일마저도 꺼리게 되지요. 따라서 구태여 하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반대하여 약점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치성은 지녀서 전혀 득이 되지 않는 무언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위해 마련된 말이 바로 중립성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텍스트의 중립 가능성을 긍정하면서, 뉴스나 교과서, 특히 자연 과학을 다루는 학술지 논문 등 중립을 지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자료들을 그 근거로 가져옵니다. 통용되는 ‘사실’을 기반으로 서술한 것이니 한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할 일 또한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정말 텍스트의 중립 가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흔히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교과서나 뉴스에는 집필한 사람들의 의도, 그 뉴스나 교육이 주관되는 큰 차원의 체계의 의도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래의 예시들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중립적인 뉴스, 2019 서울 퀴어문화축제를 조명하다
뉴스, 보도, 신문이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만큼 사람들이 중립성을 요구하는 글도 드물 것입니다. 신문, 그리고 신문에 실린 텍스트가 의견 피력보다는 사실 전달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데요. 하지만 신문의 정의가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해설을 널리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3] 간행물인 만큼 뉴스도 보도하는 사람에 따라, 보도되는 플랫폼(신문사, 방송사 등)의 기조에 따라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제부터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세 신문사의 각기 다른 견해를 보기 쉽게 비교해보겠습니다. 무슨 주제를 가져올까 고민하다가, 지난 호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는 ‘2019 서울퀴어문화축제’를 화두에 올려보았습니다. 신문사의 이름은 편하게 A, B, C라 칭하겠습니다. 아래는 각 신문사에 ‘퀴어문화’라는 검색어를 입력했을 때 나온 결과입니다.[4]
차이가 보이시나요? 세 신문사는 모두 같은 사건을 보도하고 있지만, 제목부터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많은 기사들 중 일부만을 가져온 B, C와는 달리 A 신문사에 올라온 2019 서울퀴어문화축제 관련 기사는 저 세 개가 전부입니다. 기사의 수는 해당 신문사가 생각하는 사회적 사건의 중요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기사의 내용을 대변하는 제목은 더더욱 기사를 쓴 장본인이나 신문사가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기사 제목만을 훑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아래는 세 신문사에서 해당 사건을 가장 개괄적으로 다룬 기사를 정리해둔 것입니다. 행사에 대한 설명과 행사를 반대하는 집단의 입장이 모두 드러날 수 있도록, 실제 기사에 길이에 따라 본문 전체, 또는 일부를 실었습니다. 뉴스라는 텍스트가 중립적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요.
지난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퀴어(queer)는 성소수자를 뜻한다. 이번 축제에는 주최 측 추산 8만명(경찰 추산 2만명)이 참가해 역대 최다 인원이 몰렸다. 같은 날 서울광장 맞은 편 대한문 앞에서는 '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열려 주최 측 추산 5만명이 참가했다. 왼쪽 사진은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세종대로를 행진하는 모습. '퀴어축제 반대' 참가자들도 팻말을 들고 반대 반향으로 행진했다. 이날 양측 간 충돌은 없었다. (A)[5]
올해로 20번째 생일을 맞는 서울퀴어문화축제가 1일 오후 서울광장 일대를 무지개빛으로 물들이며 막을 올렸다.
이날 서울광장 무대에는 ‘스무번째 도약 평등을 향한 도전’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었다.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장식을 하고 축제를 즐겼다.
2000년 50여명의 젊은이들이 시작했던 작은 문화제가 20년 만에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메카가 되면서 지난해에는 6만여명(주최 측 추산)이, 올해엔 7만여명이 참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강명진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성소수자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축제에 반발심을 갖는 분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함께 사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략)
한편 축제 현장 맞은편 대한문 광장에서는 퀴어축제를 반대하는 ‘동성애 퀴어축제 반대 국민대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성평등 NO, 양성평등 YES’, ‘남녀는 선천적 동성애는 후천적 성적 지향’ 등이 적힌 팻말과 플래카드를 들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 구호를 외쳤다. (B)[6]
성 소수자들의 명절로 불리는 이 축제가 어느덧 20회를 맞았다. 올해의 주제는 ‘스무 번째 도약, 평등을 향한 도전’이다. 강명진 축제 조직위원장은 “다양성이 존중되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데 정부와 정치권이 좀 더 의지를 갖고 움직여달라는 바람을 주제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강 위원장은 “지난 20년 동안 많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평등한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정책 결정권을 가진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은 아직 미온적”이라고 지적했다. 2007년 첫 발의 이후 진전이 없는 차별금지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강 위원장은 “이제까지 성 소수자를 가시화하는 노력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성 소수자들이 어떻게 안전하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더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략)
우려했던 큰 충돌은 없었다. 퍼레이드 초입에 한 남성이 도로로 뛰어들었다가 경찰에게 끌려나가는 등 작은 소동들이 있기도 했지만 행진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퍼레이드가 명동을 지날 때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인도에서 손을 흔들며 크게 반겼다. 퍼레이드가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대한애국당 농성 천막 인근을 지날 땐 태극기를 든 중년 남성들이 행렬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다가 경찰에 제지당했다. (C)[7]
세 편의 글에서 우리는 몇 가지 단어, 설명의 길이만 놓고 보아도 사실상 많은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사 참여 인원을 기술하는 데에 경찰 측 추산과 주최 측 추산을 같이 넣는 일, 퀴어문화축제 반대 세력의 행사 난입을 ‘우려’했다는 표현, 그 외에도 축제를 수식하는 언어들을 토대로 해당 신문사가 축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확연히 보이는 듯합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을 보면 더더욱 그 시각은 선명히 드러납니다. 편향되지 않은, 중립적인 사실만을 전달한다고 흔히 생각하게 되는 뉴스. 그렇다면 이 기사들을 쓴 각기 다른 기자들은 모두 다른 사건을 보고 온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이 기사들이 다른 기사들에 비해 ‘충분히 중립적이지 못한’ 것일까요? 사실 신문을 기호에 따라 골라 구독하는 현상에서부터 이미 우리는 뉴스의 중립성을 논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똑같은 이슈를 바라본 관점의 수가 세 개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실을 다루는 텍스트일지라도 누구의 눈을 거쳤는지에 따라 사뭇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 이를 중립적이다, 라고 선뜻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중립적인 교과서, 다양한 출판사가 공존하는 까닭은.
중·고등학교 시험 기간에 대형 서점 학습 코너에 가면 있는, 각 학교 별로 다른 문제집으로 꾸려진 시험 대비 문제지 세트를 아시나요?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면 너도나도 같은 패키지의 문제집을 풀고는 했었는데요. 이렇게 문제지의 구성이 다른 이유는 학교가 선택하는 교과서의 출판사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과목명을 달고 있는 다른 출판사들의 교과서는 큰 주제는 똑같지만 그 안에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 대상을 설명하는 방식 등에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많은 종류의 교과서가 있어야 할까요? 가장 중립적인 서술을 담은 교과서 한 권이면 되지 않을까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용도이니만큼, 또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교과서에게서는 중립을 기대해도 될 것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과서조차도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한바탕 많은 말이 오고간 적이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국정역사교과서’ 파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논박은 2015년을 시작으로 약 3년간 진행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추진된 국정역사교과서 사업은 사실상 기존의 통용되던 당시 정부의 실권을 쥐고 있던 측의 입맛에 맞추는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여러 논란과 반대를 감수하면서까지 교과서 편찬을 강행하여 당시의 정부가 얻고자 했던 건 친일에 대한 서술을 축소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부각하는 등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실의 왜곡이었습니다. 국정교과서의 집필을 맡은 뉴라이트계 역사학자들이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이라 칭하고, 박정희 정권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유신독재’대신 ‘유신체제’라는 더욱 순화된 언어를 사용한 것은 결코 단순한 서술적 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얼핏 보면 작은 단어들의 변동일지 몰라도 이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현재 대한민국과의 관계, 또 박정희 정권 당시에 있었던 한일 협정, 베트남 파병 등의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견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여러 역사 연구 단체에서 이러한 교과서 편찬에 극도로 반대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내용을 절대적인 사실로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8]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실제 일어난 사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게 바로 그 사건을 정리하고 해석한 인물과 그 시각입니다. 동일한 시대에 대한 역사서가 여러 시대에 거쳐 다양하게 존재해온 이유도 결국 한 명의 해석이 그 시대를 완전히 표현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실을 기록한 듯 보이는 여러 글들을 우리는 무턱대고 객관적이다, 내지는 중립적이다 평할 수 없습니다.[9]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흔히 통용되는 말 또한 어렴풋이 이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국정교과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불변의 사실로 통용될 수 있었던, 한 집단의 입장에 치우쳐진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 우리는 학문이라는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내용 또한 사실의 문제가 아닌 해석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히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글의 필요성과 연결되며, 사실상 어떤 텍스트의 객관성이라는 성질은 그 텍스트가 쓰이고 읽힐 당시의 정서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비단 역사와 같은 인문 분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 전, 천문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과학 연구가 천동설에 기반을 둔 채 이루어졌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학문에 교회가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제 아무리 직접 관찰해서 얻어낸 사실일지라도, 교회와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맞지 않으면 그 객관성을 의심받곤 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왔던 사람들에게, 그 생각에 완전히 반하는 지동설은 결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맞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입맛에 맞는 편향적 주장에 가까웠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도리어 지동설이 사람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하늘의 움직임을 믿어왔던 것도, 땅의 움직임을 발견한 것도 모두 어느 누군가의 해석과 기록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 사실로서 더욱 우세하게 받아들여지던 내용이 달랐을 뿐입니다. 이처럼 현상을 보고 텍스트로 옮기는 작업에서 이미 인간의 활동이 개입되는 만큼, 우리는 우리가 참고하고 공부하는 모든 글이 우선 누군가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음을 염두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글의 중립적이지 않음은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서점의 학습 코너에 꽂힌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들은 그 자체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중립성은 그 말 자체로는 가장 안전한 느낌을 줍니다. 어느 쪽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으니 한 쪽을 선택했을 때 입을 수 있는 손해에 대해서 전연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가 더욱 강력하게 무언가를 선택했다는 의미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권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기권표, 즉 백지 투표나 투표자의 불참으로 집결되지 않은 투표는 그 자체로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기권표 한 장이 나왔다고 해봅시다. 투표함에 넣은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 될 여지를 남깁니다.
1. 나는 이번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나는 대선 전까지의 기존 체재가 좋다.
3. 나는 이런 식의 선거 시스템에 불만이 많다.
4.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싫다.
이 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나는 백지가 좋다’, ‘나는 선거 관리 위원들을 골탕먹이는 것이 좋다’ 등의, 다소 정치적이라 여겨지지 않는 해석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해석들이 어떻게 보아도 ‘어떤 것에 대한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2번의 경우와 같이 기존의 체제를 긍정하는 입장을 내비칠 수도 있습니다(이런 것을 두고 치우쳐졌다고 말하지요.). 기권표를 두고 ‘의견 없음’은 결코 의견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동일한 원리로, ‘중립적인 글’은 중립적인 게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 텍스트는 그 정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넓은 의미의 정치를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로써 규정하는 한, 텍스트를 비롯한 일단 모든 인간 행동은 의도와 맥락이 있는 한 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다”라고 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사람들이 누군가의 발언이나 행동을 보고 ‘저것은 PC한 행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인간의 활동을 정치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텍스트 또한 예외는 없습니다. 정치성을 지닌다는 말은 또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모든 인간 행동은 그 의도와 맥락에 의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글 또한 인간 행동의 산물이니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립적인 글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성을 취득하는 일은 행동하는 개인이 그 취득 과정을 인식하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중립적인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나요? 넘쳐나다 못해 쏟아지는 텍스트 속에서 어디에도 동조하지 않는 ‘중립’을 지키고자 하지는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여러분이 생각하는 ‘중립’이 사실은 중립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 또는 이것이 옳다 생각하여 잡은 선택지가 동시에 어떤 집단의 이익 내지는 정치적 색, 성향을 따르고 있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습니다. 일종의 모순이지요. 따라서 어떤 글을 읽거나 스스로 텍스트를 생산해낼 때, 중립이라는 도피처를 찾는 대신 자신만의 어떠한 입장을 계속해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닷가에서 서핑을 할 때, 또는 겨울에 스키를 탈 때 그 자리에서의 균형만을 잡으려 하다가는 다가오는 파도며 경사에 더 쉽게 무너지곤 합니다. 눈앞의 파도의 높이에 따라, 당장 앞에 놓인 활로에 맞추어 거침없이 기울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움직임은 활력을 띠게 됩니다. 이처럼 글을 쓸 때에도 우리 모두가 ‘감추는 글’은 잠시만 접어두고, 인간이기에 쓸 수밖에 없는 ‘내보이는 글’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 중립적인 글은 없고, 그 근거는 바로 사실을 받아들이고 해석해내는 여러분의 기울기 그 자체니까요.
[1] 「텍스트」,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 사전』, 신원 문화사, 2006
[2] 염철현, 「교사의 정치적 발언, 어디까지 허용될까」, 『행복한 교육(교육부 웹진)』,
(https://happyedu.moe.go.kr/happy/bbs/selectHappy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203&nttId=47, 2019.07.29.)
[3] 「신문」,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1999
[4] 신문사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이상 작성 일자 및 기자의 이름은 지우지 않았습니다. 혹여 기사를 직접 찾아 읽고 싶으신 분들은 이 정보를 토대로 찾아보시길 바라요!
[5] 박상훈, 「한쪽선 퀴어퍼레이드, 한쪽선 “동성애 반대”」, 『조선일보』, 2019.06.0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3/2019060300192.html, 2019.09.01.)
[6] 박홍두 외, 「“우리도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20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 개막, 7만 인파 운집」, 『경향신문』, 2019.06.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011538001&code=940202, 2019.09.01.)
[7] 이유진, 「“우리 여기 있다” 외친 지 20년…올해도 무지개 ‘활짝’」, 『한겨레』, 2019.06.0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6254.html, 2019.09.01.)
[8] 김미향, 「국정교과서 공식 폐지…교육과정 개편도 시급」, 『한겨레』, 2017.05.31.,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97066.html, 2019.09.01.)
[9] 정출헌, 『김부식과 일연은 왜』, 한겨레 출판, 2012, 6페이지